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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의 바른 동기 The Right Motive in Sanctification
갈라디아서 4장 19절 Grace Community Church John MacArthur 목사님 12/7/2017 주일설교
갈라기아서
4장을 다시 펴십시다. 19절에 바울의 권면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는 바울의 심연 깊은 번민입니다. (갈라디아인 들이) 믿게 되고, 참신자가 되고, 성화되어
가고, 즉 죄를 멀리하게 되고 의로움이 자라나게 되는 것; 이것이
바울 마음에 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다루었으나 너무나 중요한 구절이고 중요한 개념이므로 오늘과 다음 주일에도 다루도록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설교 시리즈에 “성화: 당신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라는 타이틀을 붙입니다. 칭의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화 즉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 갈 때, 우리는
실제로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화는 계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죄와 “구별되다”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한 순간에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 생애 동안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이며 우리를 대신해 성령님께서 이루시는 놀랍고 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는 필연적이며, 참
크리스천에게 당연히, 확실히 일어나는 일이며, 거룩함이 자라남으로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19절에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 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나니”을 보듯이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이미 와 계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신자에게 그분께서는 이미 와 계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신자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명백히
들어내는 삶으로 대신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가
무엇이냐고요? 보다 거룩해지는 것이며, 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보다 의로워지는 것이며, 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깊고 놀라운 실체임을 상기시켜 주는 <성화>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 시에 마태복음 1장 그리고 누가복음 1장의 진리를 봉독했습니다. 처녀 잉태의 신성의 기적을,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형태로
마리아의 태에 있었습니다. 아홉 달 동안 하나님이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마리아의 태에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몸에 창조주이며 생명의 주권자이시며,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영원한 하늘의 아들을 태아로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생애에 유사한 놀라운 대비가 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아들을 소유함으로 믿는 자가 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태아가 아닙니다. 아홉 달 동안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분의 충만함으로 우리 안에 영원토록, 영원토록 계시는 것입니다. 귀하가 예수를 믿는다면 귀하는 귀하 안에 영원토록 거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분의 현존이 성화를 이루는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를 우리 마음에 아주 분명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갈 1:15-16 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간증합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그는 “His Son is in me” 라 말합니다. 구원의
시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믿는 자 안에 거주하는 것입니다.
(갈 2:20)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 안에 계신다고 명백히 밝히는 말씀입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아들의 영인 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삼위일체의 경이가 우리 마음에, 우리 영혼에, 우리 생명에 영원토록 내주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 1장 27절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더 확실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하셨고, (롬 8:10-11)에서는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고 그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하셨고, (고전
3:17)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 이라 하셨고, (고후 6:16) 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셨고, (엡 2:22)에서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3:17)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또 (요일 4:4)에서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믿는 자들의 삶 속에 있는 놀랍고 은혜로운 실체입니다. 아들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모든 믿는 자의 영혼 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귀하의 생명입니다. 귀하의 삶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시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영원한 삶이며 그분은 생명입니다. 참 신자이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 영혼에, 개인 인격에 온전히 내주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5절 말씀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함축한 뜻을 보십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바로 전에 본 (갈 2:20) 말씀처럼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니 내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니라” 입니다.
바울은
질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라고.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으니”. 이어서 (고전 6:17)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하였습니다.
당신이
주와 한 영인데 창기와 합한다면 당신은 주와 창기를 합하는 것이 됩니다 -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음행을 피하십시오. 피하십시오! 왜냐고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당신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4장으로 갑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 안에 계십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영원히 거하십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취하하므로 당신은 주님과 구별이 없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많이 닮았습니다 . 나는 아주 강하고 분명하게 성화에 관해 정의를 내립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답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 받으며, 그리스도의 태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취하고, 그리스도의 행동을 취하여야 합니다. 성화는,
성령님이 하나님 말씀을 사용하여 신자들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당신의 일생을 통하여 진행하여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란 죄를 버리고 그 자리에 성결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채우는 평생의 작업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성화의 길은 우리 일생의 일이며, 영화(Glorification)될
때까지 완결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강조)합니다. 성화는 현재, 지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위해, 칭의(Justification)시점과
영화의 때까지의 성령님께서 하시는 지속적인 작업입니다; 이 성화의 작업은 신도들 가운데에서 성령님이
교회에서 하시는 우선적인 일이십니다. 현대 크리스천 세계에서 이 성화에 대해 비판적인 현실을 어떻게
최소화 시킬 수 있을까요?
지난 주에
말씀 드렸듯이, 현대 교회가 성화의 교리에 대해 무관심한 데 대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나는 많은 예정론을, 많은 칭의 교리를, 그리고 영화에 관한 교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현 세대에서 성화, 성화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를 못합니다.
귀하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굳이 내가 할 일이 있겠나요?”라고. 네 할 일이 있습니다. “더
많은 자기 훈련이 필요합니까?” “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註: 고전
9:27)
“이를 위해 나의 책임이 있습니까” 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한 사람이 다른 이를 연단시킬 수 있습니다”. “의무에 헌신해야 합니까? 시간 낭비를 멈추어야 합니까? 나 자신의 탐닉을 멈추고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네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동기 부여가 없으면 당신의 삶의 모습을 바꿀 수 없습니다. 강력한 동기의 부여. 그렇다면 그 근면함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과 15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순종, 자기훈련, 책임감, 의무감, 근면
등은 무엇인가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성화에의 올바른 동기는, 그리고 오직 올바른 동기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화, 신성, 순결, 선행, 의로움 등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에 (註: 성화의 올바르지 못한 이해) 관해 심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실한 목자, 신실한 목회자라면 가져야 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갈 4:19)에서 “해산하는
수고”을 한다 합니다. (갈 4:27)에 해산하는 여인의 산고를 언급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교회에
사람들이 와서 앉았고 목사님 설교에 감사했다고 하여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들에게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어서 그리스도와 점 점 닮아가는 것이 목회자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바울의 염원은, 길고도 반복되는 고난을
감수할 지라도 사랑하는 그의 영적 자녀들이 구세주 주님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적인 성장과 성화의 길은 아주 느리게 나아 갔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에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에게 현혹되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이는 복음을 바로 영접하는데 방해 받았을 뿐 아니라
성화를 이해하는데 해를 끼쳤습니다.
이 열정(註: 성화를 이루려는 목회자의)은 요즈음 매우 찾아 보기 힘듭니다. 사람들에게 찬사와 칭찬 받기에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만족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데 있었습니다. 귀하가 목회자이고 소원이 그 이하라면 귀하는 부족합니다.
바울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입시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 11장입니다. (고후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 풍자적입니다 –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이것이 성화의 언어입니다.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이화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헌신이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고후 11:23)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겪은 고초를 기록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25)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였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무엇보다 28절에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어떤 행정적인
것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성화에 관하여, 성도가
그리스도 인답게 자라는지에 관하여 매일 그리고 내면에서 계속되는 염려와 압박입니다. 29절에서 바울은
정리합니다. “바울 사도여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나의, 진정한 목사님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한 자녀가 죄에 빠져 있을 때
강한 관심을 보이는 참 목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이런 목소리는 목회자들 사이에서 들려오지 않습니다. 거룩함, 경건, 겸손, 죄와의 구별, 세상과의
분리는 이제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큰 관심 밖인 듯 합니다. 성화의 실체는 무관심의 대상이며, 거룩함의 부름, 육체의 부인, 세상과의
구별 등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이기적이고 죄 많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으며, 죄스런 욕망이 합법화되고 있는 이 세상은 (註: 죄스러움이) 교회에 가서 거기에 있는 자기들의 집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욕구와 악에 맞서는 대신에,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는 곳으로 교회의 모습을 바꾸어 갔습니다.
근래에 죄의 용인, 만연한 이기주의, 세속주의가 부쩍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죄인들의 욕망의 성취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듣지 못하는 것은 죄에 대한, 자기 선전에 대한, 세속주의에 대한 경고음입니다. 당신은 복음의 근간인, 하나님의 심판인,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복음의 기조에 있습니다. 이것이 왜 복음이 복음이 되는가의 이유입니다. 복음은 당신의 성취의 결핍에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시작입니다.
나는 지난 어느 날, R. C. Spoul (註: 칼빈주의 신학자, 라디오방송 셜교가. 2/13/1939-12/14/2017)과 대담순서에서 질의 응답 시간이었습니다. 내 친구 그는 나를 “Johnny Mac”으로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Johnny Mac, 나는 교회를 가는데 거기에 <하나님은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습니다>라는 큰 간판이 서 있는데 나는 늘 그 간판을 지난다오. <God is not mad at
you>, <God is not mad at you> 라고. 그것은 교회가 얼마나 멀리 갔는지 인데 Johnny
Mac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글세, 나는 이 성구를 인용하겠소: <하나님은 사특한 자에게 매일 화를 내신다> 그래서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영광스럽고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분노를 버리고 그분이 당신의 자녀를 데리고 천국으로 데려다 줄 수 있게 하십시오>” 라고.
죄에 관하여 설교가 없는 복음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귀하가 불신자에게 죄에 관하여 설교하지 않는다면, 그를 신자로 만들기가 아주 힘들 것입니다. 그 교회는 문화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문화는 하나님이 그들 편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개인적 성취, 만족, 자기 승진만을 원합니다.
당신은 현대 대형교회에서 방송 언론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나 록앤롤 가수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또 당신은 그런 교회의 목사들이 죄에 가득한 사람들의 멘토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의 생애에 검은 석탄 같은 죄로 물들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거룩한 부름에 대한 그 정 반대 편은 어디 입니까? 요즈음 교회는 인간의 욕망을 수용하기에 급급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케팅 영리함으로 이룰 줄로 여깁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의견을 그대로 접습니다.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무언가를. 불신자들을 죄인이라 부르고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과 그들의 길은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은 건설적인 참 교회를 세우는 노력과 그들이 원하는 교회 짓는 일은 너무 대조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도 그들에게 성화를 이야기하면 그곳의 자리는 비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의도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성화, 거룩함, 순결, 신성, 세상과의 구별과 같은 참 관심이 없습니다; 성결된 삶에 관해 설교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확실히 죄에 빠져 있으며 멋대로 생활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의 현실입니다; 성결에 관한 강력한 설교가 없습니다.
저는
지난
주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또 한 가지 견해를 말합니다. 현대의 사역에서 받아 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죄 많은 교회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견해가 있는데, "Antinomianism 도덕폐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큰 이름입니다. 거대한 신학적 단어입니다.
Nomos는 그리스어로 “법” 이며 Anti는 “anti-law” 입니다. Antinomianism은 “against
the law 도덕폐기론” 입니다. 그것은 오래된 이단이지만 오늘날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거기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많은 무리들은 아니었습니다. 이 도덕폐기론을 설파하는 사람은 돌로 쳐 죽거나 화형에 처해 졌는데, 이 오래된 이단인 Antinomianism은 당신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법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자유로워 졌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도덕폐기론 자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로워 졌다” 라고. 어떻게?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율법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값을 치렀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서, 우리를 위해 율법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았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리스도의 도덕률을 지킬 아무런 의무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율법을 완성 했기 때문이다” 라고. 이는 칭의의 견해에서 본 성결과 순종과 미덕과 의가 필요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성화는 칭의의 피할 수 없는 결과는 아닙니다.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당신을 위해 율법을 완성하셨고, 당신은 어떤 속박 아래에 있을 염려가 없습니다. 도덕폐기론은 율법주의의 폐단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여깁니다. 도덕폐기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를 비난하는데 많은 시간을 씁니다. 나는 어느 교회의 목사가 아예 기도모임을 없애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유인즉 기도 모임 스케줄 등을 잡는 일이 일종의 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종의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율법주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동부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남자를 이곳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아내와 함께 앉아 눈물 흘리며 나에게 어떻게 교회가 파괴되었는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 모든 의무와 책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상 아래서 영적 의무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리니 교회는 망가졌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책임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죄를 고르십시오. 최소한의 저항의 죄를 잡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가슴 아픈 교회의 해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
도덕폐기론자는 자신이 율법주의자가 아니니 율법을 완전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덕폐기론은 율법과 상반됩니다. 율법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율법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율법에서 자유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Sinclair Ferguson은 그의 훌륭한 저서 <Whole Christ> 에서 “율법을 도매로 팔아 치우듯 없애 버리면 도덕폐기론자들을 위해 피난처를 제공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변화가 없는 마음입니다” 라고.
이제 저와 함께 이것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도덕폐기론자는 율법에 무관심하면 자기가 율법에서 자유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그는 아직도 율법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의 죄성이란 질병은 가면을 썼을 뿐 순수하지 않습니다. 들으십시요, 당신이 스스로 크리스천이라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나를 위해 성취시켜 주셨기 때문에 나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라고 하면 당신은 당신의 죄를 따라 가는 것이며, 당신은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이 사람들은 부서지고 타 버릴 것입니다. 몇 년 전,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한다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이 사상의 옹호자는 이 교회에서 자라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그가 옹호하는 사상에 의하여 행동한 모든 젊은이의 행위를 모두 따라 행했습니다. 그는 광포하고 광범위한 죄와 부도덕에 노출되어 갔고 자기의 판단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자유 분망함의 지나침은 악의 외투입니다. 이것은 음탕과 호색함을 감춥니다. 그들이 항상 그렇듯이 당신도 당신의 경험을 영적으로 해석해 율법에서 자유한 것으로 정의한다면 – 전형적으로 그들은 모두 율법을 비난합니다: “당신은 수 많은 율법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렇게 하기 때문에 당신은 이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롭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란 인용구로 묶는 것으로 정의하는 방법이라면, 당신은 여전히 율법주의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율법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 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요” 라고 말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반응은 율법주의와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의 다른 한 면입니다. 이렇게 규정 짓는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생활을 법적 조치를 하는 것 정도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나는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방탕자나 도덕률폐기론자는 “나는 율법을 거절하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이 둘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둘 모두 율법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면 모두 이단의 모습입니다: 율법을 더하거나 율법을 빼는 것으로. 다시 말합니다, 율법이 정의를 가르는 실체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나 도덕폐기론자 모두 구원의 정의가 율법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당신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율법과 도덕률폐기론 자들의 유대를 깨뜨립니다.
율법주의는 믿는 자가 믿음 위에 행위를 더해야만 의로워 질 수 있다는 주장을 펴 복음을 훼손시킵니다. 도덕폐기론자는 “당신은 (믿음 위에) 행위를 더할 필요가 없으며 복종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죄에 자유로이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 왜냐하면 당신의 죄의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는 당신을 보장하는 공인 계좌이며 당신은 은혜 아래에 있다” 라고 말합니다. 도덕폐기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효율성과 충분함을 복음에서 빼는 것으로 복음을 왜곡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전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강조하여 이야기 하나요? 왜냐하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귀하가 거듭난 신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뿐 아니라 그의 말씀과 그의 법도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귀하의 삶은 당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법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한 그리스도의 뜻이 그 법과 일치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것과 그분이 당신의 모범인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자의 특징은 그의 영적인 생활의 관계가 율법과의 관계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덕률폐기주의: 당신을 불쾌하게 했다는 듯 하나님을 관심 없이 대하듯 하나님의 의를 존중하지 않고 살자는 주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함에 아무 관심을 두시지 않았던 것인 양 거룩함과 거리를 두고 살아 간다는 주의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어떻게 말했는지 보겠습니다. 바울은 한번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당신들은 자유인입니다.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십시요” 라고. 바울은 하느님이 법에서 원하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해 그것을 정의합니다. 그는 “너희 속에 율법의 형상이 이루기 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말하는 대신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 함은 현대교회가 도덕률폐기론의 배양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이라 말하면서 부도덕하며, 아무 것도 아니며, 세속적이며, 또한 믿을 만도 합니다. LGBTQ(레즈비안, 게이, 양성애자 등) 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이를
수용할
수
있어
기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대가 오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기 실현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으므로 성화, 분리, 거룩, 미덕, 순결, 순종의 사랑, 예배, 복종, 죄에 대한 증오 이런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위대한
성화의
진리를
재
편성
할까요?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있는 곳, 갈라디아서 4장
18절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 “그리스도의 형상이 너희 안에”, “그리스도 형상이 너희 안에” 이것이 바울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너희
안에”
4장 11절로 돌아 갑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수고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을까 염려 하노라”
그리고
19절로 갑니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나의 자녀들아, 나의 자녀들아” 애정이 넘칩니다. 그들이 참 신자입니다. “수고를 다시 한다, 해산하는 어머니같이”
바울이
갈라디아
이교도들에게
한
첫
복음의
설교는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죄와 의와 심판 앞에서, 그들이 새로 태어나 새 생명을 얻기까지, 어두움의 권세에서 벗어나 그들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그가 고통을 계속 받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때까지.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도덕폐기론 주의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리스도 같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했으며, 섬겼으며, 순종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어느 계명 중 하나라도 범했다고 밝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거룩하고 해롭지 않으며 더럽혀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델입니다” 목회자는 어떤 죄나 어떤 은혜의 착취에 결코 관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바울을 당황하게 한 것입니다.
4장 20절 입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바울은 지금 매우 실망한 가운데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당황스럽고, 확실치 않군요, 슬프기 까지 하며, 어쩔 줄을 모르겠고, 당신들에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註: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전도한 갈라디아 인들이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구원의 처음은 아주 잘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방해 했습니까? 이것이 성화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를 닳아 가는 것. 그래서 당신은 이를 갈며 말하기 보다 "나는 율법을 지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법을 줄 세우고 힘써서 법 지키기 운동을 벌립시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법을 지켰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더 가깝게 할수록 더 똑같이 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 필수적인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바울의 헌신을 살펴 봅시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미리 아신 자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만드는 것이 구속 안에 있는 하나님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래로 그 목적입니다.
로마서 13장 14정에 주목합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것이 전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달리 이야기 해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너희 안에 이루라;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에 초점을 맞추십시요.
에베소서 4장은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12절 말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것이 왜 교회에 목사가 있는지를,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성숙한 성도로 자랄 때까지 우리를 교육하는 이유입니다.
빌립보서 3장 13-14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바울이 하는 한 가지의 일, 푯대를 향하여 밀고 나가는 일입니다.
그 푯대가 무엇이냐고요? 그 목표는 위에서 부르시는 상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이것이 상이며 영화입니다. “나는 한
가지 일을 합니다: 나는 밀어 부치고 나아 갑니다. 이 생명의
목표를 좇아 갑니다. 내가 영화롭게 될 때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입니다; 나는 성화를 이루어 나아 갑니다”
골로새서 2장 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3장 10절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귀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재창조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구원은 한 사람을 그리스도와 연합을 가져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에 함께 거하십니다 - 우리는 이것에 대해 점점 더 많이 간증할 것이며, 우리는 점점 더 그를 닮아 갈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나요? 고린도후서 3장 18절입니다. 일년 동안 다루었던 내용인데, 확실한 내용입니다.
(고후 3:18)을 보겠습니다. 먼저 17절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도덕폐기를 주장하는 이가 인용하기를 좋아할 구절입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다: 거기에 자유 함이 있다” 라고.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 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고후 3장에는 구약의 굴레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잉크로 쓰여 졌습니다, 성령이 아닙니다; 돌 판에 새겨졌습니다, 마음 판이 아닙니다. 죽이는 언약입니다. 생명을 주는 언약이 아닙니다. 사라지는 언약이며,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굴레의 언약이며 자유 함이 없습니다. 숨겨진 언약이며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말합니다,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 수건, 구약에서 진리를 감추었던 베일입니다. 바울은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예를 듭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본 주의 영광의 광채가 반영되어 자기의 얼굴이 빛이 났지만 희미해 진 것처럼, 백성들로 하여금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쓴” 수건은 없어질 율법을 상징합니다. (고후 3:13)
이제 주님을 주목합시다. 베일은 벗겨 졌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워 졌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굴레에서 벗어 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나요? 18절입니다. 여기에 키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이니라” “우리 모두” 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거울은 철재로 만들어 졌으며, 평평히 펴졌고 광나게 만들었습니다; 귀하의 얼굴에 거울을 가져 오십시요, 그리고 밝게 빛나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얼굴에서 베일이 벗겨졌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자세히 그리고 가까이 볼 수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주님의 영광입니다. 어디에 있나요? 어디에 “주님의 영광”이라는 심오한 묵시가 있나요? 신약 성경입니다.
우리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성경을 봅니다; 애매모호 하지 않으며 방해 받지 않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여기서 분명히 봅니다. 여기에 성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의 계시를, 성경의 말씀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한 단계에서 영광의 다른 단계로, 또 다시 영광의 단계로 변화 시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놀라운 성경의 한 장면입니다. 점진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또 영광으로 바꾸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사역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응시했을 때, 그의 얼굴에 잠시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고후 3:13).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모세의 경우엔 빛이 바랬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밝아집니다. 이는 영이신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사역이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성령이 오시면 너희에게 나를 말하겠고 나를 들어 내리라” 성령께서 하십니다. 허공에서 울리거나 상상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성경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수동적이 아닙니다; 적극적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합니까?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사로 잡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당신이 당신의 구원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장 12-13)
왜 그것이 믿는 자의 책임이라고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의 영광 가운데서 길을 잃었다 거나; 그래도 성령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거나; 그래서 당신이 율법주의자던지 도덕폐기주의자든지 상관이 없다면, 당신은 모두 모두 잘못 된 것입니다. 당신은 바뀌지 않은 것이며 변화 받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삶을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설정한다면 당신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두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을 사랑하십니다. 당신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죄가 없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당신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주의와 도덕률폐기론은 정 반대가 아닙니다. 모두 은혜에 반하는 것입니다; 모두 사랑에 반하는 것입니다. 도덕률폐기론자 가장 나쁜 율법주의자 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반항적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혁명적 율법주의자 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과 은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연합에 관해 더 많은 것이 있는데, 다음 주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매우 풍성해 졌습니다. 주님, 주님의 고귀한 진리를 노래하며 기도하며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서로가 교제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귀중한 말씀을 분명하게 우리의 마음에, 진실로 주님을 존중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마음에 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하나님의 영광을 응시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때에, 율법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율법을 버려서 구원 받았다고 여기는 도덕폐기론자들도 구원이 필요하심을 아십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한 구원의 계시가 우리 마음과 가슴에 펼쳐진 것처럼 성령님께서 저희들을 변화시키시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끊임없는 사역이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에 의존하게 하시옵소서. 모세가 출애굽기 33장에서 희미하게 밖에 보지 못한 것처럼 저희를 내버려 두지 마옵시고 신약 성경의 전 장에서 펼쳐진 그리스도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영광을 응시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기도입니다. 아멘”
번역: 김 석원 장로 stevekim@pacbell.net 주후 2018년 1월 23일
The-Right-Motive-in-Sanctification-Jan-12-20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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