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분산성盆山城은 낙동강 하류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김해 분산(盆城山) 정상부 둘레를 약 923m에 걸쳐 머리띠처럼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첫 축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분산성 복원 당시 다수 출토된 가야‧신라의 토기 파편과 삼국 시대의 산성 특징인 테뫼형(山頂式·산봉을 중심으로 산정 외곽부를 돌로 쌓음)을 고려할 때 삼국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만큼 김해 가야의 중심 근거지를 형성했던 산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 현재의 산성은 고려 우왕 때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관련 내용을 담은 비석이 현재 충의각에 남아 있다.
분산성 북문 안쪽에는 해은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 절은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황옥이 자신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풍랑을 막아 준 용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산성 남쪽 정상에는 신호를 전달하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조선 고종 9년(1872)에 그려진 ‘분산산성고지도’에는 5개의 봉으로 그려져 있으나 1998년에 과거의 모습을 추정하여 지금의 자리에 1개의 봉만 설치했다. 1999년 복원된 봉수대 뒤쪽 큰 바위에는 ‘만장대萬丈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뜻으로 김해 분산성에서 선두로 왜적을 막았던 공로를 칭찬하고자 흥선대원군이 친히 휘호를 써서 내렸다고 한다. 분산성을 둘러싼 곳이 만장대로 불리는 이유다.
분성산은 낙남정맥의 종착점이다. 낙남정맥은 우리나라 백두대간에서 분기하는 9개의 정맥 중 하나로 경상남도 산청군 소재의 지리산에서 하동 옥산玉山, 창원 불모산佛母山을 거쳐 경남 김해 분성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분산성은 김해는 물론이고 낙동강 하구와 남해안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해안 방어의 중요한 국방 시설로, 평지에서 방어가 어려우면 이곳에 들어와 성문을 굳게 닫고 장기전을 펼치며 성을 지키기도 했다. 동쪽 성벽을 발굴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축성築城 일부가 확인됐고 서쪽 성벽 안쪽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집수지, 진아鎭衙(군사상 중요한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인 진의 관아), 무기고, 창고 터가 발굴돼 ‘분산산성고지도’의 내용이 확인됐다.
또 <김해읍지>에는 분산성에 별장別將(조선 시대 지방의 산성‧나루 등의 수비를 맡은 종9품의 무관직)을 장수로 두고 승군을 편성해 지휘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이야기가 해은사에도 전해지고 있다. 지속적인 복원 사업으로 성벽 둘레 929m 중 서북 30m 구간은 무너진 대로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 복원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사적 제66호.
충의각 이야기
분산성에는 분산성의 수축 내력 등을 기록한 4개의 비석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한 충의각忠義閣이 있다. 우선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蹟碑’는 고려 말 분산성을 보수해 쌓은 박위 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김해부사 정현석이 고종 8년(1871)에 세웠다.
또 ‘흥선대원군만세불망비興宣大院君萬世不忘碑’ 2기는 김해부사 정현석이 분산성을 보수해 쌓은 후 이를 허가해 준 흥선대원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석에는 고려 말 정몽주가 쓴 분산성 관련 글도 새겨져 있다.
‘부사통정대부정현석영세불망비府使通政大夫鄭顯奭永世不忘碑’는 분산성을 보수해 쌓은 정현석 부사의 공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고종 11년(1874) 건립한 것이다. 이처럼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공들의 충정을 받들기 위해 매년 양력 10월 28일 충의각에서 제례를 지내고 있다.
해은사
분산성 정상에 위치한 해은사海恩寺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許黃玉(32~189년)과 오빠 장유화상長游和尙이 세웠다. 고대 가야로 건너와 금관가야(가락국) 수로왕과 결혼한 허 왕후와 장유화상이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도록 풍랑을 막아준 용왕님께 감사하는 뜻에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2000여 년 전 가락국이 건국되고 그 7년 후에 허 왕후와 장유화상이 돌배에 불경과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도착했다.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면서 숱한 풍랑과 역경을 겪었으나 무사히 도착하게 해 준 바다 용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남쪽 황금 바다를 굽어보는 분성산 정상에 절을 세우고 해은사라 한 것이다.
현재 해은사는 범어사의 말사로 조계종에 속해 있으며 국가 지정 전통문화 보존 사찰이다. 해은사는 몇 차례 없어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큰 법당은 다소 특이한 이름의 영산전靈山展인데 이곳을 둘러싼 산을 신령스러운 것으로 본 모양이다. 지금의 영산전은 50여 년 전 다시 지어졌다. 해은사에는 다른 사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왕전大王展라는 전각도 있다. 대왕이라 함은 바로 수로왕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각 내부에 수로왕과 김해허씨 시조 허 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는 가장 오래된 조선 시대의 영정으로 손꼽힌다. 이 해은사 영정을 바탕으로 표준 영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정 앞에는 허 왕후가 인도의 망산도望山島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 있는데, 소원을 이뤄 준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영험한 돌은 지역민의 오랜 토속신앙으로서 남자에게는 재복財福을, 여자에게는 생남生男을 주는 등 절에 치성 드리는 사람들의 숱한 영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또 인근에 산왕대신을 모신 산신각의 입구 괴석은 남근을 상징하면서 자손번창은 물론 많은 불자들의 소원 성취를 이룬 곳으로 유명하다.
영산전 바로 뒤편 타고봉打鼓峰에는 허 왕후와 장유화상이 인도에서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그 안에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모셨다. 이처럼 해은사는 인도에서 한반도로 직접 불교가 들어온 최초의 전법 도량이다. 아울러 사적 66호인 분산성과 함께 고대 가락국의 마지막 보루로서 승병을 양성하던 절의 기능까지 갖추었기에 역사적 가치가 높다. 사찰의 규모는 작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불상과 영정, 직접적으로 전해진 석가세존의 진신사리, 국내 최초로 복원된 파사석탑이 있어 남방 근본 불교의 전통을 잇는 절이라 할 수 있다.
파사석탑 적멸보궁 연혁
가락국 7년(서기 48년)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가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도래해 허 왕후가 되고 나서 중궁전 동편에 호계사虎溪寺를 건립한 다음 인도에서 모시고 온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안치하니 한국 최초의 절과 탑이 됐다고 한다.
오늘에 이르러 해은사 파사석탑 인연의 연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함께 전해져 불사리탑을 조성했는데, 그중 불사리탑에 봉안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송나라 때 꺼내어 친견법회를 열었다. 한 비구승이 그 중 수십과를 얻어 많은 사찰에 사리탑을 조성해 뭇 중생들의 복전 짓기를 발원하다가 인연이 성사되지 못하고 송나라 방자명 거사에게 인도됐다. 방자명 거사는 다시 친구 소철蘇鐵 거사에게, 소철 거사는 불심 깊은 친형 소동파로 알려진 소식蘇軾 거사에게 전수했다.
소동파 거사는 당시 법태선사의 사리탑 불사에 일부는 봉헌하고 남은 39과는 임종 시에 따르던 법제자들에게 부촉付囑했다. 그 후 청조淸朝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보존돼 오다 당대의 금석문학金石文學 대가인 옹방강翁方綱 선생에게까지 전수됐다. 이때 옹 선생은 조선의 사신으로 온 젊은 추사 김정희에게 “조선의 불교가 다시금 꽃피었으면 좋겠소”라며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경전과 진신사리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추사는 곧바로 해남 대흥사 연파혜장蓮坡惠藏 선사에게 증정했고, 연파선사는 당시 다성茶聖으로 잘 알려진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전수했다.
이후 초의선사 법손들에게 전해지면서도 사리탑의 인연이 닿지 못해 인연의 도래만을 기다리던 중 김해 신도회장 배석현 거사가 한일주식회사의 후원으로 김해 연화사(옛 허 왕후 중궁전 터)에 칠층 사리탑과 해은사에 옛 파사석탑을 재현하고 불사리를 구하던 중이었다. 그때 범어사 대강백 백운 스님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해남 백화사에 주석하는 초의선사 법손인 응송應松 스님을 함께 찾아뵈니 쾌히 승낙함으로써 3과는 연화사 칠층석탑에 모시고 3과는 분성 만장대의 해은사 타고봉에 모시게 된 것이다.
왕후의 노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은 꿈속의 계시를 받고 자신의 낭군이 될 수로왕을 만나기 위해 머나먼 바닷길에 올랐다. 거대한 바다, 거친 파도 속에서 그녀에게 위안이 된 것은 저녁노을이었다. 노을은 오늘의 안녕과 내일의 만남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허황옥은 마침내 운명의 짝을 만나 수로왕비가 된다. 허 왕후는 그 노을을 잊을 수 없어 처음 이 땅에 발을 내디딘 길이 훤히 보이는 분산성에 올라 노을을 보며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고 인도 아유타국에 대한 그리움도 달랬다. 분산성 노을은 이렇게 허황옥의 도전과 사랑을 품게 돼 ‘왕후의 노을’로 불린다. 이 노을은 너무 아름다워 김해 금릉팔경金陵八景 중 하나로 꼽히며, 김해 낙동강 레일파크의 ‘왕의 노을’과 마주해 그 의미가 더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