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9 일 토요일 오대산 두로봉, 상왕봉, 비로봉

[양산박]

2020년 2월 29 일 토요일 오대산 두로봉, 상왕봉, 비로봉

사니조은과 둘이서

산행코스 : 오대산 상원사 – 두로령 – 두로봉 (왕복) – 상왕봉 – 비로봉 – 적멸보궁 - 사자암 – 상원사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928292

• 거리 20 km
• 소요 시간 9h 43m 4s
• 이동 시간 8h 26m 53s
• 휴식 시간 1h 16m 11s
• 평균 속도 2.4 km/h
• 최고점 1,573 m
• 총 획득고도 827 m
• 난이도 보통

초유의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사태로 말미암아 금요무박으로 예정되어 있던 낙동정맥 산행이 취소되었고 다른 산악회에서도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다. 겨울이 다 가기전에 모처럼 눈산행을 계획하고 사니조은 하대감에게 연락하니 좋다고 한다.

아침 7시 잠실역에서 만나 중부고속도로를 탔다. 금요일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는데 강원 산간지역에는 비 대신 눈이 내린다는 소식에 오대산이 흰 눈으로 덮여 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가는 내내 아침 안개가 자욱한데다 기온도 높아 어쩌면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났다.

“눈 없으면 어때요.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재미나게 산행하면 되지요” 하대감은 해탈한 큰 스님처럼 얘기한다.

전날 읽은 ‘효빈’의 블로그 글에 실려 있는 오대산의 눈과 수정처럼 빛나는 상고대 그리고 사슴뿔처럼 부드러운 눈을 덮어쓴 나뭇가지 사진들이 눈에 삼삼하다. 산행을 할 때마다 최고의 풍광을 기대하지만 늘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비가 내리고 어떤 날은 지독한 안개 때문에 조망 제로 그야말로 산을 걷기만 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산행을 마치고 나면 기분이 좋은 것은 산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이다.

횡성 휴게소에 들러 안흥찐빵과 횡성덕우 소시지에 커피를 곁들여 아침을 대신한다. 나는 집에서 나오기 전에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찐빵과 핫도그가 술술 넘어간다. 진부 나들목으로 나가 편의점에 들러 하대감은 맑은 소주 한 병을 챙긴다. 오늘은 한적한 길 가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참이다. 라면을 먹으려면 꼭 반주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하대감이다.

 횡성 휴게소 화장실은 천재화가 이중섭의 그림을 소개하는 갤러리다.

오대산 월정사 안내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니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2016년 여름에 한 번 다녀간 곳이다. 전나무가 가로수로 자란 선재길을 따라 달린다. 길에 쌓인 눈은 길 양 옆으로 다 치워져 있고 길은 얼었다 녹은 탓에 군데군데 구멍이 파여져 있다. 눈 녹은 물이 길 위로 흐른다. 산에 쌓인 눈도 다 녹아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기대감을 짓누른다.

상원사가 가까워질 무렵 국립공원 직원들이 차를 세운다. 상원사 주차장이 가득 찼기 때문에 길 가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라 한다. 생각보다 오대산을 찾아온 사람들이 많다. 산악회 버스가 다 취소되었으니 모두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택한 모양이다.

상원사 입구 길 가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10시 30분 간단하게 채비를 점검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도로는 눈이 덜 녹아 미끄럽다. 올 겨울은 워낙 눈이 가물어 이렇게 눈을 살짝 밟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지난 번 설악산에서 그리고 낙동정맥을 타면서 검마산에서 눈을 밟아본 이후 이렇게 눈길을 걷는 것이 오랜만이다. 적멸보궁과 비로봉으로 갈라지는 길에서 우리는 오른쪽 북대사, 두로령 방향을 택했다. 두로령에서 두로봉까지 올라 백두대간 마루금을 밟고 오기로 정했다.

상원사 입구에서 오른쪽 임도로 오른다.

완만한 임도를 따라 걷는다. 2016년 여름에 왔을 때 걸어 내려왔던 길이다. 길 양 옆으로 갖가지 야생화가 피어 있던 곳에는 분명 어른 키 높이는 됨직한 눈이 쌓여 있다. 길 위에도 눈이 제법 쌓였는데 자동차가 지나간 자국을 밟고 가니 걷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른쪽 길 가에 등칡이 나무를 휘감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올해는 등칡 꽃이 필 때 한 번 와 봐야겠다.

길 가에 오래된 등칡 덩굴이 보인다.

길 가에는 사스레나무가 많이 보인다. 하대감은 거제수나무 아니냐고 묻는데 내 생각에는 사스레나무가 맞는 것 같다. 거제수나무 껍질은 지저분하게 벗겨진다고 하는데 이 나무 껍질은 진한 갈색으로 얇게 벗겨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또 언제 산에서 이 나무를 만나면 또 다시 헷갈려 할지 모른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흐른다.

사스레나무와 거제수나무는 모두 자작나무과에 속한다. 왼쪽 흰색은 사스레나무 오른쪽 갈색은 거제수나무 같다.

이 길로 내려오는 사람은 제법 보이는데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오르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비로봉으로 올라 상왕봉을 거쳐 내려가는 코스를 택한다. 내려오는 산님에게 상고대를 보았느냐고 물으니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도중에 상고대를 보았다고 한다. 이 한 마디에 기분이 들뜬다. 정말 운이 좋은가 보다.

날이 너무 포근하여 상고대가 일직 져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가 또 다른 이에게 물었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람이다.

“상고대가 다 졌어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날이 따뜻하니 정오가 되면서 다 떨어진 모양이다. 이 날씨라면 반팔을 입어도 그리 춥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임도를 올라오면서 윗도리 두 개를 벗어 배낭에 걸어 두고 모자도 채양이 있는 것으로 갈아 썼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닦에 쌓인 눈은 점점 많아지고 완전히 겨울왕국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오른쪽으로 백두대간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동대산에서 차돌배기 그리고 신선목이를 거쳐 우리가 오늘 오르려고 하는 두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작년 여름 비를 맞으면서 무박으로 진행한 코스다. 깜깜한 밤중에 동자꽃과 노루오줌 등 여름 야생화를 보면서 지나간 곳이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일인데 벌써 옛날 일처럼 추억으로 남았다.

임도 끄트머리에 멋드러진 한옥이 여러 채 보인다. 오대산 북대(北臺)인 미륵암이다. 오대산(五臺山)은 온통 불교의 성지처럼 산 전체가 불교의 경전과 같다. 오대(五臺)라는 뜻이 댜섯 개의 누대라는 뜻으로 중앙에 사자암을 중심으로 동대(관음암) 서대(수정암) 남대(지장암) 그리고 저 앞에 있는 북대 미륵암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주봉인 비로봉(毘盧峯 1,563m)을 중심으로 호령봉(虎嶺峰) 상왕봉(象王峰) 두로봉(頭老峰) 동대산(東臺山) 등 다섯 개의 높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북대사 미륵암은 원래 영산전의 작은 누각이었던 듯한데 최근 거대한 석축을 쌓고 현대식으로 큰 건물을 몇 채 증축한 듯하다. 산에서 라면 끓일 물이 부족하다면서 하대감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문이 닫혀 있어 빈손으로 되돌아온다. 신축 건물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구조라서 유리로 된 문을 잠가 놓으면 일반인들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모퉁이를 돌자 멀리 미륵암이 보인다. 미륵암은 북대사에 해당된다.

미륵암을 지나자 임도의 눈이 더욱 많아졌다. 자동차가 지나지 않은데다 일반 산꾼들도 미륵암 가기 전에 있는 날머리를 통해 이동하기 때문이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무릎높이만큼 깊이 파였다. 그만큼 걷는데 힘이 더 든다. 이 길은 두로령으로 향하는 길이라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우리 앞에 중년 부부가 힘겹게 길을 오른다. 여자분은 다리가 짧으니 더 힘이 부치는지 스틱으로 눈을 흐트리면서 걷는다. 남자가 눈 위에 푹 빠져 넘어지는 시늉을 하자 여자가 손을 잡아 일으켜준다. “어이쿠 아주머니가 생명의 은인이시네요.”하고 내가 한 마디 하니 남자는 해쭉 웃으면서 “생명의 은인뿐이겠습니까. 만사 다 보살펴주는 보살님이십니다” 하고 너스레를 떤다.

북대사 미륵암은 새로 축대를 높이 쌓고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오후 1시가 다 된 시간에 두로령(頭老嶺)에 도착했다. ‘백두대간 루로령’이라 쓴 커다란 비석이 서 있고 산꾼 두 명이 주변에 서서 점심으로 컵라면을 먹고 있다. 상왕봉에서부터 이 곳까지 러셀하며 오는 바람에 평소 1시간 걸리는 거리를 2시간 걸렸다고 한다. 상왕봉까지 1.9 km다.

두로령은 백두대간 두로봉에서 시작하여 계방산, 용문산, 유명산 그리고 양평 청계산을 지나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끝나는 한강기맥이 지나는 고개다. 한강기맥은 남한강과 북한강을 가르는 산줄기이다. 어쩌면 오늘 이 구간을 지나는 것이 다음에 한강기맥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두로령은 한강기맥의 시발점 위에 서 있는 고개다. 홍천군 내면과 진부면 동산리를 연결한다.

두로령에서 두로봉까지 1.6 km를 왕복해야 한다. 최근에 다녀간 사람이 없어 무릎까지 올라오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중간에 배낭을 나무에 걸어 놓고 걷는데도 평상시 산행에 비해 힘이 든다. 그래도 재작년 명지산에서 보았던 눈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때는 허리까지 올라오는 눈길을 뚫고 명지3봉으로 오르다가 중간에 되돌아와야 했었다. 파란 하늘아래 아직 남아 있는 상고대가 수정처럼 빛난다. 나무 아래 눈 위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얼음조각이 흩어져 있다.

두로령에서 두로봉까지 1.6 km 를 왕복한다.

“우리 두로봉에 갔다가 그냥 내려가서 월정사에서 재워 달라 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상왕봉과 비로봉에 올라갈까?” 이미 져버린 상고대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크다.

“일단 가보는 데까지 가 보자구요.” 하대감은 절에서 하룻밤 묵는 것에 대해 시큰둥하다. 절은 기도하는 곳이지 잠자는 곳이 아니라는 뜻일게다. 나는 아직 절에서 자본 적이 없어 언젠가 한 번쯤 그리 해보고 싶다.

겨우내 녹지 않은 눈이 무릎 위까지 올라온다.

두루봉에 가까워지면서 흰 눈을 덮어쓴 주목(朱木) 군락이 나타난다. 나무 빛깔이 붉은 색이라서 주목이라 부르며 목질이 단단하며 오래 사는데다 죽은 이후에도 쉽게 썩지 않아 ‘살아서 천천 죽어서 또 천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옛날 왕이나 고관대작의 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두로봉 직전에 있는 주목 군락지. 주목은 살아서 천 년 또 죽어서 천 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오후 2시 20분 마침내 두로봉에 도착했다. 1.6 km를 걷는데 1시간 30분 걸렸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쵤영하면서 여유있게 걸으니 시간이 두 배나 더 걸린다. 갈림길에서 조금 더 신배령쪽으로 진행하면 넓은 헬기장이 있다. 이곳이 두로령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처녀눈에 발자국을 내면서 정상석으로 다가간다. 지난 여름 가는 빗속에 서둘러 인증사진만 찍고 지나갔던 곳이다. 강릉쪽은 바다에서 발생한 해무(海霧)가 올라와 조망을 가렸지만 비로봉 방향은 한낮을 넘긴 햇빛이 비쳐 하얀 눈이 덮인 겨울풍경을 보여준다.

두로봉 - 정상은 여기서 신배령쪽으로 50 미터쯤 더 가야 나온다.

두로령 정상 헬기장은 솜이불처럼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수리취 씨앗이 꽃처럼 아름답다.

두로봉 정상석이 반쯤 눈에 묻혀있다.

내려오는 길에는 사진을 찍지 않고 이미 밟은 길을 걸으니 50분 정도 걸린다. 다시 두로령에 내려서자 한 사람이 백두대간 비석 뒤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쉬고 있다. 홍천군 내면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왔다가 다시 원점회귀하려 한다는 그는 발에 설피를 신고 있다. 그렇쟎아도 두로령에 오르면서 하대감이 설피 얘기를 했기에 관심이 쏠린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노간주나무나 물푸레나무 또는 다래덩굴로 설피를 만들어 신고 겨울산을 다녔다 한다. 그 설피를 응용하여 알루미늄으로 테두리를 만들고 플라스틱 종류의 끈으로 가운데를 메운 다음 아이젠처럼 쇠로 된 스파이크를 달아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제품을 만들었다. 가격은 5~6만원에서 비싼 것은 30만원 정도 한다고 한다.

하대감이 내려오길 기다려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물과 사과를 먹어서 그런지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다. 오후 3시가 넘었으니 점심때도 훨씬 지났다. 우리는 비로봉까지 가보고 거기서 라면을 끓여 먹자고 계획을 수정한다.

두로령에서 두로봉 왕복하는데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상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려 발자국이 나 있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눈도 다시 얼어가는 것 같다. 하대감은 스패츠를 신었는데도 눈이 신발속에 들어가 녹아서 물이 흥건하다고 한다. 두로령에서 약 1 km 정도 지나니 북대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부터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 덕에 길에 눈이 단단해서 걸음이 편안하다.

상왕봉 오르는 길에 1.2 미터짜리 스틱을 눈 속에 꽂아본다.

두로령에서 첫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니 상왕봉의 전위봉이 가까이 보인다. 상왕봉은 저 봉우리 너머에 있다.

길 가에 오래된 돌배나무가 자주 눈에 띈다. 나무 표피를 보면 야광나무와 혼동이 되지만 잔가지가 가시모양으로 날카로운 돌기가 있는 것이 분명 돌배나무다. 그런 돌배나무가 굉장히 많다. 두로봉 너머에 있는 ‘신배령’의 이름도 신 맛이 나는 돌배가 많은 데서 유래했다 하니 그 산줄기에 있는 이 오대산에 배나무가 많은 것은 어쩌면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오대산 늙은 돌배나무는 전설을 담고 긴 세월 풍상 속에 살아왔다. 그리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오대산 돌배나무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옛날 진부면 동산리에 구두쇠로 이름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남에게 밥 한 끼 대접할 줄 모르고 수중에 들어온 재산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으는 데에만 열중하여 제법 잘 살게 되었는데 가족에게 쓰는 식량도 아끼는 바람에 가족들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둘째 아들이 심하게 폣병을 앓아 드러눕게 되었는데 구두쇠 영감은 아들에게 약도 아끼는 통에 아들은 곧 죽을 것처럼 병이 악화되었다. 이에 아들은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으로 부처님께 절이라도 올리겠다며 아버지에게 허락을 청했다. 구두쇠 영감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차라리 집에서 나가는 것이 좋겠다며 시종 하나 붙이지 않고 홀몸으로 내보냈다.

둘째 아들은 허한 몸을 이끌고 식은 땀을 흘리면서 산 속 절을 찾아 갔으나 작은 암자에 주지스님은 보이지 않아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데 자신이 살아온 짧은 생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회한의 눈물이 쏟아졌다. 착한 아들은 그러나 누구를 탓할 마음도 없이 그저 눈물만 흘리다 그만 기운이 다하였던지 법당에 엎드린 채 쓰러져 혼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를 엎드려 있었던가. 날이 어둑하여 깨어나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법당에서 나왔으나 이마 밖은 깜깜하여 집을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지스님은 멀리 출타한 것인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배는 출출한데 툇마루에 있는 소쿠리가 눈에 띄었다. 소쿠리에는 스님이 주워모은 돌배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돌배 하나를 씹어 먹었다. 신물이 입안 가득 솟아나고 서너 개를 집어먹으니 배가 불쑥 올라왔다. 너무 늦어 집에 돌아갈 생각을 접고 그는 다시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는 기분이 상쾌하고 몸이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지스님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그는 툇마루에 앉아 돌배를 먹으면서 자신의 기분이 상쾌해진 것이 이 돌배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적한 절간에서 그는 며칠째 돌배만 먹으면서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일로 소일하다가 자신의 폣병이 씻은 듯이 나아 더 이상 기침도 하지 않고 식은땀도 흘리지 않았다.

그가 뛸 듯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니 온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신기해 하며 모두 부처님의 은덕이라며 축하해주었다. 평생 구두쇠로 살아온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 건강을 되찾은 것이 다 부처님의 은공이라 여기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성하고 그 후부터는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 암자의 스님이 주워간 돌배 나무인지 상왕봉으로 오르는 길과 이어져 비로봉까지 돌배나무가 정말 많다.

길을 가면서 둘러보면 큰 돌배나무가 상당히 많다.

상왕봉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에는 장닌끼 있는 산꾼들이 엉덩이 썰매를 타고 다닌 탓에 길이 미끄럽다. 스틱에 의지하면서 덜 미끄러운 곳을 조심해서 딛는다. 아이젠을 신으면 편할텐데 무슨 객기를 부려보려는 건지 아이젠 없이 힘들게 오르다 아무래도 안전이 제일이라는 생각에 귀챦니즘을 누르고 아이젠을 꺼냈다. 얼지 않은 눈길에 아이젠이 푹푹 박혀 걸음이 편안하다.

오후 5시 마침내 상왕봉(象王峰)에 도착했다. 아직 햇살이 남아 있어 주변이 환하다. 헬기장에는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이 호쾌한 조망이 펼쳐진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이다. 동해에서 생성된 구름이 백두대간을 넘어오려 넘실대는 모습이 마치 전쟁을 치루는 형상이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아주 거대한 성벽이다. 그 하얀 안개구름이 그 성벽을 넘으려 인해전술을 쓰지만 난공불락의 요새는 좀처럼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왕봉에서 가야할 방향 - 멀리 비로봉이 보인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만월봉 응복산을 거쳐 약수봉에서 구룡령으로 떨어지고 다시 갈전곡봉으로 올랐다가 이름없는 산줄기를 타고 조침령에서 고갯마루에 내려선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양양을 바라보며 북으로 달려 박달령을 지나 점봉산을 찍고 망대암산을 지나 한계령에 닿는다.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 뒷쪽으로 하얀 눈을 뒤집어쓴 설악산 귀때기청봉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끝에 대청봉까지 거대한 산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갤러리다. 상왕봉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 동해에서 만들어진 안개구름이 백두대간을 타고 넘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멀리 설악산 귀때기청봉에서 대청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이 어렴풋이 보인다.

남쪽 멀리 보이는 스키장 슬로프는 용평 스키장인 듯하고 그 왼쪽으로 군부대가 있는 황병산이 가까이 보인다. 진고개에서 노인봉을 거쳐 지나갈 때 깜깜한 밤중에 불야성처럼 밝게 빛나던 황병산이다.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려는 모양새다.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 비로봉을 향해 발걸음을 바삐 움직인다. 비로봉 정상에서 오늘 해넘이를 보게 될 것이다.

방금 지나온 능선길 너머로 백두대간 (동대산~신배령) 등줄기가 훤히 보인다. 오른쪽 멀리 보이는 스키장은 용평인 듯 하다.

비로봉으로 가는 길목에서 늙은 돌배나무를 만난다. 지난 2016년 여름에 보았을 때와 똑 같은 모습이다. 나무줄기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것은 세월의 응어리이고 비록 몸은 썩어가지만 그 위로 가지가 돋아나는 것은 생명의 끈질김이다. 늙음의 미덕, 모든 욕심을 다 털어버린 듯 속은 비어 있어도 주변 어린 나무들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위엄이 엿보인다. 언제까지 저 모습으로 살아갈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우리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산꾼들이 여기에 와 본다면 그 때도 저 모습 그대로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돌배나무

2016년 여름 잎이 무성하게 자란 모습

배나무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또 하나의 귀한 나무를 만난다. 아래에서부터 굵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벋어 올라간 뽕잎피나무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로 지친 산꾼들을 품어주는 나무다. 나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반경 10여미터는 됨직한 넉넉한 품을 가진 나무인지라 이곳을 지나는 산꾼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는다.

뽕잎피나무는 무더운 여름날 산꾼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한다.

2016년 여름에 만난 이 나무

그리고 주목군락이 나타난다. 여러 가지 활엽수 나무 틈에서 힘들게 살아남은 주목이 한 겨울 독야청청 푸른 빛이 돋보인다. 두로봉에서 보았던 주목보다 수령이 많아 보이는 주목 군락은 보호수종이라는 팻말이 붙은 로프로 둘러쳐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는 정선군 두위봉에서 자라는 천연기념물 433호로 지정된 주목이라고 소개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전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던 서기 660년경에 싹이 터 자라난 것이라 한다.  평양의 낙랑시대 고분에서 발견된 관(棺)은 2,000 년이 넘었고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나무베게(木枕)도 1,500 년 이상 지났음에도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살아서 천년 또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오대산에는 다양한 나무가 자란다. 그중에서도 단연 붉은 줄기를 뽐내는 주목(朱木)이 주목(注目)을 받는다.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오대산의 정상 비로봉에서 맞이하기 위해 부단히 걸은 덕분에 6시 10분 마침내 비로봉에 도착했다. 해는 서쪽 멀리 산줄기 끝에 얹혀 있다. 저녁인데도 바람이 그다지 차지 않다. 저녁 해지는 모습을 한참 서서 바라보았다. 대부분 산행을 할 때 차 시간에 쫒겨 제대로 풍광도 볼 새 없이 서둘러 하산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차를 가지고 왔으니 마음도 몸도 느긋하다. 날씨가 맑으니 저녁 햇빛이 저물어가는데도 주위 사방에 포진하고 있는 산군(山群)들이 위용을 뽐내면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가 서쪽 지평선 위로 넘어가기 전에 비로봉에 도착했다.

비로봉에서 만난 해넘이 풍경

오늘 지나온 길

왼쪽 노인봉 너머 황병산 그리고 오른쪽 용평 스키장이 보인다. 황병산과 용평 스키장 사이 선자령은 안개에 덮여 있고 그 너머로 능경봉이 희미하게 보일듯 말듯

6시 20분 해가 완전히 땅거미에 밀려 붉은 빛은 잃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우리는 비로봉을 떠났다. 바람이 불어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불편해 보인다. 상원사 탐방소까지 3.5 km의 짧은 거리이니 차라리 서둘러 내려가서 식당을 찾아 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6시 20분 밀려오는 땅거미를 뒤에 두고 비로봉을 떠난다.

내리막길은 나무계단이다. 계단 위에 쌓인 눈이 대부분 녹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도 꽤 많아 극도로 조심하면서 내려갔다. 아이젠을 착용했으니 눈 위로 스파이크가 깊숙이 박혀 미끄러움을 막아준다. 비상용으로 준비해둔 랜턴이 유용하게 쓰인다. 랜턴을 비쳐가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가 첫번째 안부에 내려앉았다. 길 가 한적한 곳에 벤치가 있어 쉬어 가기에 적당해 보인다.

마음만으로 배불리 먹은 라면

“여기가 좋겠네요. 라면 끓이기에“ 하 대감이 벤치 위에 걸터앉아 버너를 꺼내고 코펠에 물을 부어 끓인다. 벌써 10년도 넘게 사용하고 있다는 취사도구가 아직도 쌩쌩하다며 자랑한다. 약하게 부는 바람을 비닐로 막아 화력을 돋구어 보지만 물이 쉽게 끓을 기미가 안보인다. 하대감의 낯빛에 갈등이 엿보인다. “그냥 내려가서 밥을 사 먹을까?” 마침내 하대감이 라면 끓이는 것을 포기하고 코펠에 조금 데워진 물을 버린다.

이제 주변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희미한 랜턴 빛에 의지해 가며 조심스럽게 산을 내려간다. 탐방안내 초소를 지나 조금 내려가니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거기부터는 대리석이 깔린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눈은 길 옆으로 말끔하게 치워져 있고 길 가에는 석등(石燈)이 일정한 간격으로 밝혀져 있다.

적멸보궁 갈림길에서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계단 -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절간이며 우리나라에는 5개의 적멸보궁이 있다고 한다.

사자암으로 내려가면서 되돌아본 돌계단 - 석등이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거 좀 보세요.” 하대감이 석등을 가리킨다.

“이 문양이 뭔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부처님의 형상을 표현한 게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대리석을 정교하게 깍아서 만든 석등의 모양이 특이하다.

“혹시 산스크리트 문자가 아닐까요?” 나는 혹시라는 말에 힘을 주어가며 맞장구를 쳤다. 그 말 뒤에는 설마라는 의문이 더 강하게 깔려 있다. 그냥 횃불 모양을 도형으로 그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실제로 이 문양은 다라니도를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용안수 - 용의 눈물이라는 뜻이겠다.

용안수 옆에 아기 눈사람

사자암으로 내려가는 길에 서 있는 석등 - 저 무늬는 다라니도(陀羅尼圖)를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사자암을 지나며 하늘을 본다. 갓 그믐을 지난 초승달이 깜깜한 밤하늘에 작은 돛단배처럼 떠 있다. 이제 산행이 끝나간다. 아침 10시 반부터 시작한 오대산 탐방이 끝나간다. 피부병을 앓던 세조의 등을 문수동자가 물로 씻어주어 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상원사를 지나 아침에 갈라졌던 주차장 입구 도로를 만났다. 밤 8시다. 9시간 반 동안 20 km 눈길을 걸었다. 점점 눈이 귀한 겨울이 이어지는 요즘 올 겨울이 끝나기 전에 이렇게 눈을 실컷 밟아볼 수 있어서 참 기분이 상쾌하다. 이 시간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도로 갓길에 길게 늘어섰던 차들도 다 떠나가고 어둠속에 내 차만 덩그라니 혼자 서 있었다.

중대 사자암(師子庵)은 산비탈을 이용하여 탑모양으로 지어져 있다.

2016년 여름에 찍은 사진

사자암은 오대암 중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중대(中臺)이다.

오대산 상원사에는 세조와 문수동자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차를 타고 월정사 아래쪽 상가를 지나가다 아직 영업한다는 식당 간판을 보고 들어가 순대국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서울에 도착하니 12시다. 하대감은 잠실에서 2호선 전철이 있을거라며 하차했는데 이튿날 알고 보니 이리저리 교통편을 찾아다니다 결국 택시로 귀가했다고 한다.

[사니조은]

재미있는 산행이었어요.옴마니반메훔

[양산박]

어머니 밭매요. 역시 하대감이 불교용어를 많이 아는 것 같소이다. 함산해서 보람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