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아야 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카렐 차페크의 「확증」,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정찬형 역, 모비딕)
박창열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것은 진실일까?
커피 핸드 드립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한 적이 있다. 관심이 생겨 몇몇 커피 유튜브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 아니고, 기호에 관한 것이라 그런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선생들이 많았다. 선생들은 자기가 하는 방식이, 혹은 아는 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며 자기가 아는 방식에서 조금도 어긋나서는 안된다고 했다. 다른 방식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기도 했다. 커피 하나 내리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이 조선 후기 성리학 논쟁 못지않았다. 저 선생들 앞에서는 유명한 바리스타도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커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고, 조금 더 많이 내리게 된 후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래나 저래나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 원두가 좋고, 기본만 지킨다면 방식의 차이가 있더라도 괜찮은 커피를 맛볼 수 있다. 물론 그래도 아니라고 한다면 당신이 옳다.
내가 아는 것이 진실이라는 생각, 내가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은 ‘낭만적’이다. 「확증」에는 ‘낭만적’인 판사, 마테스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분별할 수 있는 존재라 확신했을 것이다. 판사는 그러해야 하니까. 그는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고 반대신문을 통해 진실을 파악하려 한다. 반대신문은 증인을 신청한 측이 아닌 반대 측이 하는 신문으로 증인의 증거력을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소설의 맥락으로 보면 반대신문에 사용되는 기술은 증인이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우연히 하는 말을 이끌어 내는 것인 듯하다. 판사는 우연히 뱉어진 말만이 진실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그러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뭘까? 우연히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부지불식간에 혹은 충동적으로 나오는 단어나 행동들이지.”
아내의 진실은 판사의 반대신문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히 판사는 아내의 실수로 ‘잘못 보내진’ 편지를 받는다. 판사는 그 편지가 ‘우연히’ 잘못 보내졌기에 편지의 내용을 신뢰한다. 수신자가 남편이 아닌데도 남편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히 적어 놓은 의심스러운 편지였지만 “그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굴러들어온 것”이었기에 그 ‘우연’ 때문에 판사는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그 편지는 우연히 보내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보낸 것이었다. 속아 넘어간 판사는 아내에 대한 의심을 푼다.
판사는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우연’과 ‘의도’를 구분하지 못한다. 자신은 진실을 파악하는 것을 늘상 하는 사람이고,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판사의 자기 확신은 스스로를 어리석게 만들었다. 카렐 차페크는 짓궂다.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속임으로써 조롱한다. 진실을 안다, 알 수 있다 라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조롱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확신 속에 살아간다. 그 확신이 타인에 의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지만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것은 진실일까?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만 할까?
소설은 판사의 아내 마르타와 정부 아르투르의 대화로 끝이 난다. 마르타는 남편을 너무 심한 방법으로 속인 것이 아닌지 자책한다. 아르투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마르타가 남편을 속인 것은 정말 심한 일이었을까?
남편의 사망 이후 남겨진 휴대전화의 메시지를 통해 외도를 알아낸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진실을 안 것이 아내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그냥 충실한 남편으로 마지막을 기억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내에게도 행복한 일이 아니었을까?
판사 마테스는 아내에게 속아 평화를 찾는다. 그는 아내를 의심하며 졌던 마음의 짐을 벗어버린다. 행복해졌다. 그게 진실을 아는 것보다 더 나은 결말 아닐까? 어쩌면 판사가 알고자 했던 것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내가 외도를 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희망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던 진실을 얻었기에 그는 행복해진 것이다. 판사에게 진짜 진실이 필요했을까? 진실을 아는 것이 더 나았을까? 그가 바라던 대로 일이 해결되었으니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만 사실 내가 바라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그렇더라도 진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왜일까?
어쩌면 내가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이 내 욕망의 투영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는 진실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진실의 잣대는 여러개로 보입니다. 누구의 진실이 엃고 그른지에 대해, 커피의 진실처럼, 내가 본 것이 진실이면 진실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