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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71. [역경의 열매] 이수민 (1-11) 인생 최고의 전성기에 시력을 잃었다
1982년, 당시 37세이던 내 삶은 최고 전성기였다. 고려대에서 화학전공으로 이학박사(Ph.D) 학위를 받은 후 한남대 조교수로 승진하며 학과장이 됐다. 또 내 논문이 미국 고분자분야 학술지인 ‘마크로몰레클스’에 게재돼 세계적인 화학자가 되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가정적으로는 교사인 아내(김군자)와 두 아들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고 2년 전 35세라는 나이로 대전 태평성결교회에서 최연소 장로 장립을 받았다. 교회 봉사와 선교에 열심이었던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 여기고 감사하며 새벽제단을 쌓고 있었다.
1981년 정부는 박사학위를 소지한 젊은 과학도 10명을 선발, 1년간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대학에 파견하여 연구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여기에 내가 최종 선발됐다. 아내와 아이 둘까지 미국비자를 신청하며 우리 가족은 멋진 미국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미국행을 준비하던 82년 5월 23일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흐르고 안구가 뻣뻣해지는 증상이 느껴졌다. 무리를 한 탓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증세는 더 심해졌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시력이 갑자기 나빠져 안경을 착용해오던 나였다. 심한 근시였지만 그동안 수많은 화학실험을 하는 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대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안과병원을 아내와 함께 찾았다. 정밀검사를 하는데 의사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이어졌지만 애써 태연하려 노력했다.
“녹내장 말기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그냥 계셨죠?”
“선생님, 녹내장은 수술로 쉽게 고치는 병이죠. 나을 수 있는 것이죠?”
나의 되물음에 의사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의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말기 증상이라 수술을 해도 의학적으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내와 나는 너무 놀라 동시에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라구요. 실명할 수 있다구요?”
나는 너무나 충격이 커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간신히 추슬렀다. 아내와 나는 극한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이제 나는 대학교수로 강단에 서지 못하고 미국행도 좌절될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코 나를 그대로 두지 않으실 것이란 희망을 가졌다. 유명하다는 한의사를 찾았다. 그는 녹내장에 좋다는 진서각(코뿔소의 뿔)을 처방해 주었고 2달간 열심히 달여 먹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안과로 유명하다는 서울의 모 대학병원을 다시 찾았지만 그곳의 진단도 나를 절망시켰다.
“이 박사님. 안압이 너무 높아요. 21이나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눈을 방치하셨나요?”
의사의 목소리는 질책에 가까웠다. 국내 의료기술로는 수술해도 치료가 힘들다고 대전의 의사와 같은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미국에 가면 고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미국이야 의술이 최고로 발달한 나라이니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 미국으로 가서 고쳐보자.”
아내와 나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정말 간절하고 뜨겁게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실명하지 않을 것으로 확실히 믿었다. 지금 이 시간은 주님이 우리를 위한 연단의 과정일 뿐이라고 여겼다.
8월에 미국 비자가 나와 우리 가족은 예정대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직은 눈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니 국비연구생 일정을 그대로 소화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신나서 야단이었지만 우리 부부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수민 (1) 인생 최고의 전성기에 시력을 잃었다
* [역경의 열매] 이수민 (2) 미국 최고 명의 수술도 실패 시력상실
* [역경의 열매] 이수민 (3) “너를 굳세게 하리라” 음성 듣고 새 삶
* [역경의 열매] 이수민 (4) ‘교수직 접고 목회자의 길 갈까’ 고민
* [역경의 열매] 이수민 (5) 고교시절 독서·봉사 통해 신앙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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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45년 충남 예산 출생, 한남대 및 고려대 대학원(이학박사) 졸업, 한남대 이과대학장 및 생명나노과학대 학장 역임, 영국 케임브리지 IBC에 탁월한 과학자로 등재, 황조근정훈장 수상, 현재 태평성결교회 장로, 한남장학회 이사장
***[역경의 열매] 이수민 (2) 미국 최고 명의 수술도 실패 시력상실
미국 LA에 도착하자 친구인 홍성진이 마중을 나와 우리 가족을 반겼다. 미리 연락을 해 두었기에 나는 바로 LA 안과전문의 이영재 박사를 만났다. 그분도 진찰을 해 보더니 같은 진단을 내렸다. 그 분은 내가 보스턴으로 간다고 하니 그곳에 있는 조셉 킴 박사를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우리 부부는 보스턴 행 비행기를 타며 끊임없이 기도했다.
“주님, 미국에 우리를 보내셨으니 수술을 받게 해 주시고 치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앞으로 주님께 더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런데 조셉 킴 박사도 자신이 없다며 미국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안과의 허친슨 박사를 찾아가 보라며 소개장을 써 주었다. 그러나 허친슨 박사의 검진 결과도 그동안 만난 의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실명을 기다리느니 수술을 받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허친슨 박사는 원하면 수술을 하겠노라고 했다.
“박사님, 수술 후 시력을 찾을 가능성은 몇 %나 될까요?”
“닥터 리, 실망하지 마세요. 회복될 가능성은 0.1%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0.1%를 기대하며 하는 수술이었지만 허친슨 박사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 모습이 내겐 매우 인상적이었다. 6시간의 대수술이 끝나고 며칠간 안정을 한 뒤 드디어 붕대를 풀었다.
허친슨 박사도 매우 궁금한지 내 눈에 붙어 있던 마지막 거즈를 직접 떼어내며 자신의 얼굴이 보이느냐고 계속 물었다.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온통 검은색뿐이었다. 나는 신음하듯 소리를 냈다.
“다크니스 아… 다크니스.”
“닥터 리. 안타깝습니다. 저로선 최선을 다했습니다. 미국엔 훌륭한 맹인 교수나 박사가 많이 있습니다. 절망하지 마세요.”
허친슨 박사가 방을 나가자 아내가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시력을 점점 잃어가긴 했어도 물체를 식별하고 빛의 움직임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수술 후 이것마저 잃고 말았다. 나는 절망하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이 가운데 수술비 1만5000달러를 마련하지 못해 매달 나누어 갚겠다는 사인을 하고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우리 가족에 매달 학비 및 생활비로 1500달러를 주었다.
나는 일주일을 방에 박혀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면서 지냈다. 신기한 것은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수도 장로도 이젠 모두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내게 가장 소중한 빛을 빼앗아 가신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당장 화장실을 가려면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나는 미국 땅에서 우울증 초기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살을 마음속에 그렸다. 평생 아내와 가족에게 짐이 되느니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보스턴 인근 노셈튼 한인장로교회 성도들이 캐나다 국경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가는데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거절을 했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폭포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승낙을 하고 자살여행을 떠나기 전 날이 되었다. 아내에게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늘이 사랑하는 아내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 수 있었다. 잠이 올 리 만무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삶을 정리하는 바로 그때였다. 어둠만이 전부인 내게 청각은 살아 있었다. 아니 더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휘익”하는 소리가 내 귓전을 울리더니 한줄기 빛이 나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광석화란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3) “너를 굳세게 하리라” 음성 듣고 새 삶
실명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으려던 내게 주님은 소리와 빛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직접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것은 마치 이어폰을 귀에 꽂고 큰 소리로 듣는 것 같은 긴 울림의 음성이었다. 내가 자주 읽던, 친숙한 이사야 41장10절의 말씀이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음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던 나의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고요하고 나직한 음성은 절망의 나락을 헤매던 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너무나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잠시나마 주님을 원망하고 존재를 부인하려 했던 것을 회개했다.
“내가 너를 도와준다고 하지 않느냐. 수민아, 여기서 넘어져선 안 된다. 나를 의지하고 힘차게 일어나 보려무나.”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널브러져 있던 내게 주님은 손을 내밀어 주셨다. 내가 그 손을 잡자 희망과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의지가 비누거품처럼 피어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배가 고파져 아내를 불렀다.
“여보, 나 먹을 것을 좀 줘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한 나를 보며 고통스러워하던 아내가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나는 음성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간증하며 감격스러워 했지만 아내는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아내가 차려 온 죽을 먹고 긴 잠에 빠진 나는 다음날 예정대로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떠났다. 사실 자살을 하기 위해 승낙한 여행이었기에 이젠 갈 필요가 없었지만 또 번복하기 힘들어 아내를 따라 나선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게 되었다. 멋진 물줄기의 장관은 안 보여도 물 떨어지는 웅장한 소리와 물 파편, 자연의 상큼한 냄새를 통해 분위기를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놀라운 세계를 눈을 잃고서야 더 확실히 느낍니다. 주님과 더 가까이 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보스턴에 자리 잡은 우리 가정은 내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아이들과 아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뭐든지 혼자 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온통 넘어지고 깨뜨리고 부딪히기 일쑤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맥이 빠졌다.
얼마 후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도 우리를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이상히 여기며 문을 열었더니 낯선 미국인 2명이 서 있었다.
“닥터 리. 저희는 미국장애인후원협회 보스턴지부 직원입니다. 허친슨 박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도움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들은 내 안부와 건강을 물으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아내가 커피를 준비하느라 주방으로 가자 내 곁에 와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중도실명자의 충격은 아주 큽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내가 이혼요구를 하는 사례가 많아 더 충격을 받습니다. 미국의 경우 아내가 이혼소송을 제기하면 법원이 쉽게 승낙하기에 닥터 리는 이 부분도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아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장담할 수 없으니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노라며 먼저 가스레인지를 켜고 끄는 법부터 친절하게 교육했다. 아내가 이 모습을 보고 남편은 자신이 돌볼 것이니 이런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했다.
“저는 이 박사와 결혼할 때 약속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한 것을 분명히 지킬 것입니다. 저는 남편을 하나님 다음으로 믿고 존경하기에 제가 남편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직원들은 아내의 말에 무척 감동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교육을 중단하고 조용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4) ‘교수직 접고 목회자의 길 갈까’ 고민
내가 연구교수로 1년간 머무를 대학은 ‘고분자 화학’이 세계 최고 수준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이었다. 실명 후 한 달간 몸을 추스르긴 했지만 그런 몸으로 전공을 연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스스로 위축되어 있었다.
매사추세츠대 화학과 교수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로버트 렌츠 박사를 비롯, 국제학회를 통해 많이 알려진 스타인, 포터 박사와 학과장인 맥 나이트 박사 등이었다. 이들과 학문적 대화를 나눌 때 전공분야 지식이 쑥쑥 쌓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대화 메모가 안 되니 반드시 녹음을 해야 했다. 이 때마다 아내가 곁에서 도움을 주었다. 아내도 대학에서 나와 같이 화학을 전공했으니 전문용어를 잘 알았다.
어느 날 로버트 박사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눈을 잃게 된 과정과 현재 상태를 물어보며 안타까워하더니 그럼에도 닥터 리 표정이 밝은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주님이 빛과 음성으로 저를 찾아오셨지요.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주셔서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화학 학자로 더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닥터 리는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한 일을 사실로 믿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라고 확신합니까?”
답답하고 의아하다는 투의 로버트 박사의 말에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크리스천이었고 교회 장로입니다. 저는 과학자인 아이슈타인의 ‘우연이란 하나님이 남몰래 일하는 방식’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신은 인간에게 우연을 베풀지만 기독교에서 보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저 역시 주님이 베푸신 기적 때문에 절망을 극복하고 이 과정에 들어와 연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저와 함께 계시며 저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저는 외롭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것입니다.”
“오, 원더풀! 닥터 리, 정말 멋집니다. 하나님이 계속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한국에서 학생을 가르치다 세계 석학들을 만나니 배울 것이 많았다. 남보다 두 배는 노력해야 했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어려움이 다가왔다. 당시 한국 정부에서 주는 1500달러와 학교에서 지급하는 연구비 500달러를 합해 2000달러로 생활해야 하는데 난 병원수술비로 매달 1000달러를 갚아야 했다. 4명의 식구가 1000달러로 살기가 벅찼다. 하나님께 이중고를 주시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가 출석하던 노셈튼 한인감리교회 유근원 목사님이 우리 사정을 알고 뛰어다니시더니 저소득층 확인서를 만들어 병원에 제출, 더 이상 수술비를 갚지 않아도 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로소 우리 가정형편이 펴지게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며 감사를 드렸다.
정부와 계약된 1년의 연구교수 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실명한 상태에서 다시 모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 목사님이 교수로 돌아가기 힘들다면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이 문제를 놓고 며칠간 기도하고 난 뒤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 얼리 빈 학장을 만났다.
빈 학장은 미국에 시각장애를 가진 목사와 교수가 매우 많으며 모두 목회와 강의를 잘 하고 있다고 나를 격려했다. 그리고 무조건 신학교 입학을 허락한다고 했다. 내가 교회 장로인 것에 가장 큰 점수를 준 것 같았다. 보스턴신학대학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졸업한 학교이며 한국의 김동길 교수도 이곳 출신이다.
나는 일단 한국에 들어가 서류를 정리한 뒤 다시 미국에 들어오기로 하고 비행기를 탔다. 1년 전 김포공항을 떠날 때는 공항이 희미하게나마 보였지만 이젠 형체조차 인식할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5) 고교시절 독서·봉사 통해 신앙 키워
한국에 온 후 제일 먼저 내가 근무하던 한남대를 찾았다. 한남대는 대전대학에서 숭전대학로 이름이 바뀐 후 1982년 다시 바뀐 교명이었다. 이 대학은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윌리엄 린튼 선교사가 한국의 기독인재 양성을 위해 1956년 설립한 미션스쿨이다.
교정을 들어서는데 남다른 감회가 밀려왔다. 곳곳마다 내 젊음과 추억이 담겨 있는 학교였다. 아내를 만난 곳이기도 했다. 교정의 바람소리와 풀냄새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나는 이제 이것들을 볼 수 없다니 새삼스레 코끝이 찡했다.
실명되는 과정을 적느라 내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건너뛰고 안 한 것 같다. 그러나 짧게는 소개를 해야 할 것 같다. 왜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부르시고 쓰시고 계시는지를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둥이 1945년생인 나는 충남 예산 신흥동이 고향이다. 우리 집안은 꽤 부농이었으나 일제 조선총독부에 토지를 몰수당한 뒤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그나마 부친(이봉순)이 예산군청 공무원을 하면서 극한 가난은 면할 수 있었다.
예산초등학교와 예산중학교를 다니며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는 고교 입학원서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서울 명문고 중 하나인 경복고는 최소한 갈 수 있는 실력이었는데 문제는 내가 서울에서 유학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내가 유학을 가면 내 여동생(이수란)은 중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2명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께 예산농고 장학생으로 들어갈 테니 내게 들어갈 학비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농고에 수석으로 입학한 나는 토목과에 적을 두었지만 대학입시공부를 주로 했다. 고교는 양보했지만 대학만은 서울대에 가리라 결심한 것이다.
그 무렵 예산성결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키웠다. 당시 담임은 정연권 목사님이셨는데 목소리가 워낙 우렁차 설교 시간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내 신앙은 목사님 서재에서 신앙서적을 빌려다 탐독하면서 부쩍 자랐고 고등학생으로 주일학교 부장까지 맡아 열심을 냈다.
내 신앙이 진짜 자란 것은 고교 2년 겨울방학 때 열린 부흥회에서였다. 현성초 목사님이 강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개의 눈물과 함께 방언이 터지며 주님의 자녀로 영생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당시 고교생으로 용돈도 부족한 터에 교회에 헌금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오가는데 중간에 형제고개가 있었다. 이곳에 도랑이 하나 있는데 가재가 잘 잡혔다. 시장에서는 이 가재가 약재로 쓴다며 매입을 했고 나는 가재를 잡아다 열심히 시장에 팔았다.
몇 개월 가재를 잡아 번 돈으로 당시 우리 교회에 없었던 강대상용 종을 내 돈으로 사다 헌물했다. 여기에 감격한 정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나를 불러 축복기도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교회에 워낙 인재가 없었던지 목사님이 출타를 하거나 안 계시면 내게 설교를 하라고 부탁을 하시곤 했다.
1964년 서울대 화공과에 응시했다. 그런데 화공과가 다른 과와 달리 10대 1이나 됐다. 나름 시험은 잘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낙방을 하고 말았다. 전국에서 모여 든 수재들의 벽은 높았다.
낙심했지만 1년 더 공부하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2차에도 좋은 대학이 많다고 했지만 시험을 보지 않았다. 학비가 싼 것도 이유지만 서울대만큼은 꼭 내 힘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내 고집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것이 아닌데 자신의 길을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단번에 진로를 바꾸는 사건을 만드셨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6) 신앙과 학문 함께 할 대학에 입학
재수를 하던 중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 강사가 대전대흥장로교회 고원용 목사였는데 마침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해 만나게 되었다.
“정 목사께 자네 이야기 들었네. 알아주는 수재라면서. 그런데 꼭 서울대를 가야만 할까? 나는 학문과 성경을 함께 가르치는 미션스쿨이 더 좋은데 말이야. 미국의 유명한 대학은 모두가 다 미션스쿨이란 것 자네 알고 있나? 이곳 대전에도 대전대(한남대 전신)가 미션스쿨이라네.”
그러면서 나 정도 실력이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도 보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전국 우수 장학생 20명을 뽑는 선발대회가 있는데 응시해 볼 것을 권유하는 정보도 주셨다.
결국 이 시험에 응시한 나는 100여명 중 4등을 해서 4년간 전액 장학생이 되었다. 입학하는 데 갈등이 있었지만 목사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입학 후에는 입주 가정교사를 통해 숙식이 해결됐기에 부모님의 시름을 덜어 드렸다. 내가 화학과를 택한 것은 물질과 물질이 결합해 새 성분을 만들어 내는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고교 때 화학반 활동을 하며 비누도 만들고 화장품도 만든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학교에 입학해 만난 화학과 교수 중에 로버트 괴테 선교사가 있었다. 한국이름은 ‘계의돈’이었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세계 최초로 나일론 섬유를 개발한 듀퐁사의 책임연구원으로 부와 명예를 마음껏 누렸다고 한다. 고급 주택에 자가용 비행기까지 갖고 인생을 즐기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난하고 척박한 이 한국땅에 온 것이다.
나는 선교사가 복음만 전하는 줄 알았는데 교수로 봉직하며 한국의 인재를 키우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더구나 그는 스스로 학교 발전을 위해 많은 후원금을 모금하고 미국에 있는 갖가지 고분자 소재 표본을 한국으로 가지고 와서 고분자 화학을 강의했다. 나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아 고분자 화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성경 동아리에서 영어성경과 전도훈련을 지도했다. 수시로 ‘성경과 과학’이란 주제로 창조론을 가르쳤다. 그는 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헌신된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삶은 내게 많은 도전을 주고 신앙의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내게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세세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던 계 선교사는 항상 볼펜을 2개 가지고 다녔다. 하나는 학교에서 지급한 것이고 하나는 개인이 산 것인데, 출석을 부를 때는 학교 것을, 개인용무를 볼 때는 다른 것을 썼다. 나는 이것이 학생들에게 공과 사를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교육적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남대에서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에 가입해 리더로 활동하는 등 신앙과 학문을 함께 만족시킨 4년이 흘렀다. 대학 졸업 후 충남대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을 이어가면서 예산고교 수학교사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일주일 중 4일은 수학교사로, 2일은 대학원생으로 지냈다.
1971년 공학석사 학위를 받은 나는 제일 먼저 은사인 계의돈 선교사를 찾았다. 모교를 위해 일하라며 조교 자리를 받았고 4년 후에 전임강사가 되었다. 남보다 빠른 승진이었다.
화학과 1년 후배 중에 김군자 양이 있었다.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충남중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한 교수님이 내게 중매를 해 주었다. 알고 보니 대학시절 그녀와 내가 쓴 글이 대전대 학보에 나란히 실린 적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끌린 우리는 1973년 예산감리교회에서 화촉을 밝혔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7) 출석부·강의내용 통째로 외워 첫 수업
결혼식 이후 내 삶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막힘없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과 같았다. 34세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35세에 한남대 학과장이 됐고, 36세에 교회 장로가 됐다. 그리고 37세에 미국에 연구원 자격으로 국비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직전에 눈의 이상이 왔고 결국 미국에서 수술 후 실명을 하고 만 것이다. 미국에서 어려웠지만 1년간의 연구생활을 잘 마쳤다. 그리고 교수로 있던 한남대에 사표를 쓴 뒤 미국으로 다시 신학공부를 하러 가려던 계획을 세웠던 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대학에 먼저 사표를 쓰고 학생을 가르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남대 오해진 학장은 이런 나를 말렸다.
“사표보다는 휴직원을 쓰고 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동안 학교에 많은 기여를 하셨는데 실명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두만두신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우리 학교는 신학을 한 분도 교수로 필요하니 일단 휴직하시고 공부를 마치고 다시 오시지요.”
참 고마웠다. 예전에도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신 분이었다. 그 뜻대로 휴직원을 내고 미국행을 위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았다. 나는 미국 보스턴신학대학교 입학허가서를 바탕으로 학생비자 서류를 만들어 미 대사관에 제출한 뒤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시각장애인이니 가족과 동행하는 조건이었다. 나는 교수도 지냈고 내 경력을 보았을 때 비자가 거부된다는 생각은 1%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거부’였다. 원인을 살펴보니 너무 완벽한 서류가 문제였다. 나는 입학허가서와 함께 내가 가족과 생활하고 공부할 수입원이 어디서 나올 것이냐는 질문에 대비해 미국교회 담임목사님이 내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연봉 1만 달러로 한인교회에서 설교목사를 하기로 했다는 서류를 첨부한 것이다. 그러니 대사관은 이를 학생비자가 아닌 취업비자라 판단하고 거부한 것이다.
나도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비자를 받기 위한 편법이 오히려 비자를 거부 당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비자 인터뷰 후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내내 기도했다.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 줄 알았는데 이 길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 때 주신 말씀이 로마서 8장 28절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순간 조바심이 나고 걱정스러웠던 부분들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는 것을 체험했다. 이 길이 아니라면 새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학교에 휴직원을 냈으니 마음 편하게 1년간 쉬다 복직해서 다시 강의를 하기로 했다.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석학들과 주고 받았던 생생한 화학관련 지식들을 제자들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교수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면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안 할 것 같았다.
1984년 복직한 나는 새학기 강의를 앞두고 학생들이 내가 시력이 아주 안 좋은 것으로만 알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강의할 내용을 통째로 암기했다. 그리고 학생들 출석을 불러야 하니 학생들 이름도 통째로 외워 버렸다. 다행히 아내가 화학과 출신이기에 관련 강의자료를 읽고 강의안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해 강의안을 외우니 마치 머리 속에 인쇄가 되듯 내용들이 입력됐다.
이윽고 첫 강의 시간이 되었다. 익숙하게 강단에 선 나는 학생들 이름을 출석부도 보지 않고 하나 하나 외우니 ‘우’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암기한 강의를 자연스럽게 풀어가기 시작했다. 미국에 다녀 온 내가 출석표도 안 보고 강의안도 안 보고 강의하자 금방 내 이야기가 학교 안에서 화제가 되었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8) 실명 숨기고 강의 6년 만에 장애 고백
외워서 하는 강의가 계속됐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내가 완전히 실명한 것을 몰랐다. 오히려 강의 수준이 높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 말이 믿기지 않았던지 강의 준비를 함께하던 아내가 처제를 내 강의실로 보내 직접 들어보게 했다. 아내는 여동생이 들려주는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언니, 형부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 몰랐어요. 강의도 얼마나 재미있게 하는지 박수가 다 나오더라니까요. 강의 내용을 미리 암기한 부분에다 생각나는 것을 추가해 강의했어요. 언니, 정말 형부 대단하세요.”
하나님께서는 내게 눈을 잃게 하셨지만 대신 비상한 암기력을 주셨다. 예전에도 암기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 능력이 3배 정도 증가한 것 같았다. 웬만한 것은 두 번 정도 읽으면 그대로 입력이 됐다. 자살하려던 내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고 하셨던 것에 이 부분도 들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대학에서의 강의가 인기를 얻자 대학원 강의도 맡게 되었다. 화학과 대학원 과정은 강의보다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것이 더 많다. 직접 실험을 통해 과정을 확인하며 이론을 정립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강의만 하는 대학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어 시력이 없는 내겐 강의를 맡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강좌에 학생이 끊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내게 배운 학생들이 지도교수로 나를 택하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고 한다.
내가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한 이유도 컸지만 연구비를 잘 받는다고 소문이 났던 것이다. 화학과 대학원생은 실험 실습비 때문에 일반 문과보다 학비가 훨씬 많이 든다. 그런데 이 연구내용을 과학재단이나 학술진흥재단에 보내 공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상당한 연구비가 나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도한 석사 학위자는 56명, 박사 학위자는 10명이다. 적지 않은 인원이라고 하지만 나로선 더 많이 지도하지 못한 것 같아 그저 아쉬울 뿐이다.
1990년 어느 봄날이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묵상을 하던 중에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말씀이 들어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고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이 한 이 말씀에 갑자기 깊은 찔림이 왔다. 그것은 내가 실명한 것을 크게 부끄럽게 여겨 나의 약한 것(실명)을 가능한 사람들에게 숨기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니 바울처럼 약한 것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 능력이 온전해진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실명 6년이 지나서야 나는 약한 것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먼저 학부 학생과 대학원생들에게 내가 실명한 것을 밝혔는데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 관청에 장애인 등록을 했다. 당연히 1급 판정이 나왔다.
나는 장애인 혜택을 안내 받으며 한국도 복지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철도와 비행기의 할인은 물론 자동차세 면세와 각종 공과금 할인에다 장애인용 특수컴퓨터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외부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오면 이를 소리로 자동으로 전환시켜주어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나마 점자 공부에 몰입했고 그동안 듣기만 했던 말씀을 점자성경으로 읽을 수 있게 됐다. 내가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인정하니 성경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1세기는 생명공학과 정보통신공학이 공학기술의 양대 산맥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신소재공학과’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를 한남대에 설립, 초대 학과장을 맡았다. 4년간 학과장으로 지냈는데 갑자기 교수들이 내게 이과대학 학장으로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9) 생명나노과학대학 발전 기틀 마련
시각장애를 가진 내가 이과대학장으로 출마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교수들이 이과대학장이 되어야 내가 평소 주장해 왔던 생명나노대학을 독립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해 마음이 바뀌었다.
단과대학장은 교수들이 추천하고 직접 뽑는다. 이과대학장에 3명의 교수가 출마했는데 결과를 보니 내가 15표이고 A교수가 14표, B교수가 11표, 무효 1표가 나왔다. 무효는 내 표였다. 내가 나를 찍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기권한 것이다. 재투표에 들어가는데 동료교수가 이 사실을 알고 기권하지 말고 나를 찍으라고 했지만 이번에도 기권을 했다.
“하나님 제가 명예욕으로 이 자리를 맡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생명나노공학을 발전시켜보겠다는 의도인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기도를 하고 고개를 드니 내가 28표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고 알려 주었다.
한남대 이사회는 대덕연구단지 2만8000평에 지어진 인바이오넷 회사 건물과 부지를 매입해 놓은 것이 있었다. 나는 이곳이 생명나노대학을 독립시킬 최적지라고 판단했다. 이과대학장의 자격으로 열심히 뛴 결과 2006년 3월, 한남대 대덕캠퍼스가 만들어지고 생명나노과학대학도 독립해 이곳에 간판을 달았다. 모든 것이 기도해 온 대로 이루어졌고 나도 생명나노과학대학 초대 학장으로 옮겨 앉았다.
나는 새 학장을 맡았기에 이전에 학장으로 1년 재임한 것은 무시되고 새로 임기 2년을 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1년만 더 하겠다고 했다. 유능한 교수님들이 많고 내가 원했던 것이 이뤄진 이상 감투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대학이 지금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계속 이뤄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보람 있게 생각한다.
나는 전임강사 시절부터 항상 오전 8시면 대학에 출근했다. 수업이 시작되려면 1시간 이상이 항상 남는데 언제부턴가 제자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주 반응이 좋았다. 제자들이 나를 많이 따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잘해주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이 생각지 않았던 상황이나 문제를 만나면 당황하고 허둥거리게 되는데 나는 이때 조언이나 실제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한번은 강사인 제자가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것 같아 모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도록 주선했는데 갑자기 시험을 앞두고 장모가 돌아가셨다. 장례식과 시험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보고 강경하게 말했다.
“운동선수도 중요한 시합이 있으면 부모가 돌아가셔도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를 치른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도도 중요한 삶이 결정되는 시험엔 슬픔을 참고 응시해야 한다. 그것을 고인은 더 원하실 것이다.”
그 친구는 예정대로 시험을 치르고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지금은 교수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때 자신에게 조언해 준 것을 항상 감사해 하는 것을 느낀다.
대학에 몸담고 있으며 적지 않은 학문적 성과를 이루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기능성 나노 소재분야’ 논문을 국제학술지에 자주 게재하다 보니 2002년 ABI(국제인명정보기관) 인명사전에 세계과학계를 이끄는 선도과학자로 등재됐고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의 탁월한 과학자 명단에도 내 이름이 기록됐다.
지금까지 내가 쓴 논문과 보고서는 170여편 정도다. 이 논문 내용을 응용해 제자들이 사업체도 차리고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사이 교회 장로로서 교회 건축을 동료 장로들과 함께 준비해 완공할 수 있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내 신앙의 동력은 항상 새벽제단에서 얻어진다. 아침 미명에 부르짖는 음성에 하나님은 언제나 응답하셨고 빠짐없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10) 지난 4일 정년퇴임 명예교수로 추대
2010년을 맞으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었다. 평소 제자들과 등산을 가끔 갔지만 서울 주변의 작은 산을 오르는 정도였다. 사실 그것도 남들보다 몇 배나 힘들고 함께 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제주도 한라산 정상에 도전해 보자는 것이었다. 체력관리와 걷기운동을 꾸준히 해온 나는 드디어 4월 16일 아내와 함께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비장애인도 4시간 정도 걸리는데 나는 7시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백록담 앞에 서 있자니 또 한 가지를 이루어 냈다는 기쁨과 감격이 가슴깊이 차고 올라왔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이래서 안 된다’고 스스로를 구속한다. 자기최면을 걸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엄청난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다. 도전하고 대들면 할 수 없는 것보다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집념 앞에는 그 어떤 어려움도 부서져 내리게 된다.
지난 4일, 대전 한남대 공대에 있는 국제회의실에서는 참 기쁘고 감사한 행사가 열렸다. 내가 39년간의 교수생활을 끝내는 정년퇴임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여러 선후배와 동료, 제자들이 참석해 격려해 주었고 오랫동안 신앙지도를 해주신 여러 목사님들도 참석해 설교와 기도를 해 주셨다.
특히 이날은 부족한 나의 삶을 간증 형식으로 기록한 ‘참으로 너를 도우리라’란 책을 발간해 출판기념회도 겸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이 책은 백수복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류재하 목사님이 집필을 맡아 주셨는데 나의 부족한 삶을 너무 자랑한 것 같아 여전히 부끄럽다.
정년퇴임은 해도 나는 명예교수로 학생들을 계속 더 가르치게 된다. 학생들과도 계속 만날 수 있어 무엇보다 좋다. 나는 이날 정년퇴임식을 하며 3가지를 결심했다. 내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한 제자들을 더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것과 교회봉사를 더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올해 65세인 나는 장로은퇴가 70세이므로 5년이 남았다. 이 5년간 선임 장로로 모범을 보이며 내가 맡고 있는 새가족 교육에 신경을 더 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2006년 설립된 한남장학회 이사장을 맡았기에 장학금 모금운동에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현재 4억원 정도 기금이 있는데 최소 10억원의 기금은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 삶을 크게 나누어 보면 세 단계로 이뤄진다. 먼저 출생해 18세 때 부흥회를 통해 중생을 경험하기 전까지의 평범한 삶이다. 2단계는 주님을 만나 삶의 의미를 깨닫고 박사 학위를 받아 장로가 되는 등 인생의 성공과 기쁨, 영광을 일시에 누리던 황금기이다. 3단계는 37세에 실명을 하고 지금까지 지내온 기간이다. 죽음을 행동으로 옮기기 직전에 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지금까지 초인적인 삶을 살았던 시기다.
그런데 이 세 단계의 삶을 회고하면 나는 3단계의 삶, 즉 실명해서 지내온 지금까지의 삶이 가장 행복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의아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진심이다. 나는 1, 2단계의 삶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늘 피부로 느끼기에 난 행복하다. 예전엔 알지 못했던 삶의 통찰력도 얻을 수 있었고 영원한 하늘나라,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며 소망을 갖고 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산책을 하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많은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하나 둘 기억해 보기 시작했다. 이 첫 자리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아내 김군자 권사다.
***[역경의 열매] 이수민 (11·끝) 시력 잃은 뒤 진정한 신앙을 얻었다
오늘 내가 한남대 교수로 명예롭게 퇴직하며 인정받는 화학자의 반열에 오르기까지의 공로는 모두 아내 김군자 권사에게 있다. 아내의 헌신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내고 있거나 이미 세상을 떠나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나와 집안만 돌본 것이 아니라 중학교 화학교사를 40년간이나 했다. 아침이면 나를 태워 대학에 내려준 뒤 출근했고 다시 퇴근하면서 나를 태워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와 거의 일거수일투족을 같이하며 때론 조수가 되고 때론 비서가 되어 나의 불편을 최소화했다. 아니 거의 없을 정도까지 만들어주었다.
1인 3역 이상을 하는 아내는 정말 피곤하고 힘들었을 텐데 그런 내색을 거의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밝게 웃으며 즐겁게 일하기에 ‘미소천사’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힘이 아니고는 힘들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미국에서 수술을 실패한 뒤 낙망 가운데 있을 때 미국장애인협회에서 찾아와 아내와 이혼할 수도 있으니 이에 대비해 자립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려고 했었다. 그때 아내는 펄쩍 뛰며 난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외쳤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고 남편과 자식들에게 모든 사랑을 퍼 준 아내에게 나는 그저 빚진 자일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두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 모두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보람 있게 살고 있다. 큰 아들은 뉴욕주립대에서 박사과정을 했고 둘째는 법대 졸업 후 시애틀 워싱턴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모두 유명 기업에 근무하며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아이들이 예민한 사춘기일 때 남들처럼 함께 놀아주지도 못했는데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하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
언젠가 크리스천으로 가장 바람직한 삶이 어떤 모습일까를 혼자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물질이 풍족하고 명예를 누린다고 해서 행복이 아님을 누구나 다 안다. 하나님이 늘 함께해 주시며 그 은혜와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삶이라면 최고라는 생각이다.
나는 매일 아침 점자성경으로 성경을 5장 정도 읽는데 그 말씀의 깊이에 빠지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성경에는 우리가 살아가며 부딪치는 삶의 문제에 대한 거의 모든 해답이 들어 있다. 성경을 읽으면 지혜의 샘이 솟고 감사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
시력이 없는 나는 남들보다 하나님과 더 많은 기도,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 특권이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눈을 감을 것이다. 그래야 집중을 하고 간절한 마음을 올려 드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24시간 모두 기도시간이 될 수 있다. 난 24시간 기도하는 남자라고 웃으며 말하곤 한다.
하나님은 작은 기도, 세밀한 기도를 모두 들으신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의 나라가 이 땅 위에 계속 퍼져 나가길 원하신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기도의 양을 따지는 분이 아니시다. 자식이 조용히 다가와 ‘아빠!’라고 한마디 부르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저 사랑스럽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 찾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이루어진다.
많이 부족한 간증을 읽어준 국민일보 독자들에게 감사드리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또 나를 아는 모든 분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여러분의 가정과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길 기도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