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통해 나타난 사실은 자신이 살던 시대 인물인 두 사람을 대표적인 멘토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학자로는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이었고, 정치가이자 경제가로는 당연히 번암 채제공(蔡濟恭:1720∼1799)을 손꼽았다.
조선 500년 동안 재상다운 재상은 많지 않았는데, 다산은 채제공이야말로 몇 안 되는 재상다운 재상으로 여기며 아버지처럼 따르고 높이 그를 존경했다 한다. 다산은 「번옹유사(樊翁遺事)를 통해 번암 채제공의 높은 기개와 당당한 정치가의 풍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83세의 영조가 52년의 군왕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자, 간난신고의 어려움 속에 영조의 손자이자 세손이던 25세의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11세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고 고아로 컸던 정조는 재기발랄한 홍국영의 도움에 힘입어 겨우 임금의 보위에 오르자, 시대는 바야흐로 홍국영의 세상을 맞았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세손을 보호하던 홍국영은 29세에 정조의 등극에 맞춰 승지에 임명되고 이어서 도승지에 올라 정조의 최측근 권력자로 우뚝 선다.
궁궐을 보위하기 위해 신설된 숙위소(宿衛所)의 대장, 금위대장(경호실장)과 군권을 쥔 훈련대장까지 겸해 천하를 호령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됐다. 여기에다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해 원빈(元嬪)이라 부르며 외척의 지위까지 차지했다. 후궁에 오른 누이 때문에 홍국영은 범접할 수 없는 권력자로 군림하면서 궁중에는 새로운 의례(儀禮)가 생겨, 고관대작들이 궁중에 들어가 인사를 올리려면 먼저 임금, 다음에는 정비인 왕비에게 인사를 올리면 되는데, 홍국영에게 아부하려던 무리들이 후궁인 원빈에게도 문안 인사를 올리도록 새로운 절차를 제정하게 됐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채제공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귀국 인사차 궁궐에 들어가 임금과 왕비에게만 인사를 올리자 집사들이 원빈인 홍 씨에게도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알려주자,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데 승통(承統)의 빈궁(嬪宮)이 아닌데, 어떻게 문안할 수 있는가!”라 말하고 그냥 궁궐을 빠져나왔다고 전해진다.
홍국영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정당한 예절이 아닌 일에는 일체 응하지 않았던 기개 높은 채제공의 모습을 그런데서 볼 수 있다고 다산은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정치상황은 어떤가? 모두가 문비어천가만 부르고 있음을 지켜 볼 수 있다. 부당한 권력에 당당히 대응하던 번암 채제공 같은 재상들의 모습을 기대해 보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채홍걸 기자>
첫댓글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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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연 등으로 정조로 부터 전폭적 신뢰가 있었기에, 감히 홍국영에게.. 그렇다고 해도 대단한 기개 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