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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26/끝)
친일(親日) : 그 떨쳐야 할 업장(業障)
“배가 강변에 닿으면
그 배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
신복룡 -줄리어스 시저
사진: 국민일보
글머리에 고대 로마의 고사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플루타크영웅전> 코리올라누스(Coriolanus) 편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로마의 집정관인 그는 선정을 베풀고 로마의 국위를 선양했으나 귀족들의 모함을 받아 반역죄인이 되어 추방되었다.
그는 복수를 하고자 적국인 볼스키족의 족장 툴루스 찾아가 병력을 요구했다.
툴루스가 기꺼이 허락하자 코리올라누스는 볼스키족을 이끌고 로마의 정복에 오른다.
이때 한 늙은 여인이 코리올라누스 앞에 나타난다. 바라보니 자신의 노모였다.
그는 며느리와 손주들을 데리고 아들 앞에 나타나 “네가 조국을 유린하려거든 이 어미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라”고 말한다.
코리올라누스는 차마 조국을 유린하지 못하고 돌아가 볼스키족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플루타크영웅전>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이 대목을 읽노라면 조국이 무엇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사실 알고 보면 조국은 속지주의이다. 우리가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었듯이 조국도 우리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국이라는 말 앞에 숙연해지며 솟구치는 열정을 느낀다.
2002년 월드컵축구를 응원한 전국의 시청자 가운데 오프-사이드(off-side)를 안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우리는 그날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조국을 외쳤다. 5천년 역사에 그런 일이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 역사에는 조국에 대한 그런 열정의 대오를 빗겨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변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혹독한 식민지 지배 정책에의 굴복, 지난 시절 부패한 왕정에 대한 환멸,
신문명의 신기함, 독립이 불가능하리라는 절망감, 그리고 반세기에 걸친 세뇌와 길들여짐 등으로 말미암아
일제 말엽이 되어서까지 독립의 열망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비분강개함이야 누구엔들 없었을까?
그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흘렀다. 역사가 바뀌기에 7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일본에 대한 시각을 달리 한다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시대의 조류를 역류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것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목청을 높여 반일을 외쳐야 하는 것이 곧 애국인 세상,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운 데 대해서
누구도 “다른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시대에 살면서, 친일과 같은 민감하고 금기시된 문제에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이
얼마나 거칠고 무례한 저항을 받는가를 나는 겪어본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친일의 문제를 좀더 냉정하게 고민해볼 것을 제안하며 이 글을 쓴다.
이 글의 논리는 릭비(Andrew Rigby)(지음), 장원석(옮김), '과거 청산의 비교정치학'(제주 : 온누리, 2007)에 제시된 모델을
바탕에 깔고 있다. 원서는 Justice and Reconciliation after the Violation(Col. : Boulder, 2001)이다.
릭비는 코벤리대학(Coventry University) 평화와화해연구소(Centre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Studies)에서 종족 분쟁을 연구했고
특히 팔레스타인문제의 해결에 심혈을 기울인 학자로서
현재는 그 대학의 종신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친일의 본질을 정교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친일이란 무엇일까? 그 본질은;
(1) 의도적으로 일본의 이익을 위해 동족에게 위해를 끼쳤는가?
(2) 동포에 대한 위해와 관계없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협조했는가?
(3) 그와 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재산이나 신분상의 편익을 받았는가?
(4) 그 과정에서 일제로부터 사기와 고문이나 위협과 같은 강박이 없었는가?
우리 안의 친일
일본의 집요하고도 구체적인 정한(征韓) 전략과는 달리 한국의 대응은
그렇게 절박하지도 않았고 전략적이지도 않았다. 그 밑바닥에는 중화주의라고 하는 백내장이 깔려 있었다.
합방 이전이나 이후를 가리지 않고 지배 계급의 전략 부재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일본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친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친일인지도 모른 채 친일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1926년 이완용(李完用)의 장례식 운구 행렬은 십리를 이루었고 고종(高宗)의 국장 이후 가장 화려(?)했다.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나 판사가 되어
‘다쿠시’(taxi)를 타고 화신백화점에 쇼핑을 하는 일에 사람들은 부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안의 친일은 오늘이라고 해서 나아진 것이 없다.
그 한 예로서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인가부터 느닷없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온 “따오기 복원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산이 72억 원이라 한다. 그리고 위정자도, 국민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이 문제는 먼저 그 노랫말을 살펴보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1절)
내 아버지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2절)
이 노래에서의 핵심어(keyword)는 처량함,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떠나감, “동쪽의 해 돋는 나라”이다.
왜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는 동쪽에 해 돋는 나라[일본]에서 살고 있을까?
왜 우리는 그토록 처량하게 해 돋는 나라를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이 노랫말에 담긴 메시지는 유쾌하지 않다. 작사자가 어떤 의도로 그렇게 썼는지 대하여는 각자가 짐작할 일이다.
관계자들은 펄쩍 뛸 일이지만 나는 이 가사에서 교묘하게 은폐된 친일을 느낀다.
따오기의 국제적 학명이 Nipponia nippon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따오기는 꿩과 까마귀와 함께 일본의 세 가지 국조(國鳥)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일본이 중국에서 따오기를 수입하여 복원한 것은 우리와 입장이 다르다.
모르고 했다면 무지요, 알고 했다면 기군망상(欺君罔上)을 한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하여 우리는 입으로 친일 청산을 외치면서도 실상 친일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알게 모르게 익숙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무엇이 친일이고 우리 몸 안에 얼마나 친일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반일을 외치고 있다.
우리는 친일 청산 요구하면서 으레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과 합방 7적의 이름을 거론한다.
물론 그들이 역사에 지은 죄를 사면 받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망국의 원인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인용된다면 그것은 나의 진심이 아니다.
그리고 젊어서 일곱 가지를 잘했으니 말년에 세 가지 잘못한 일을 덮어달라고 말하는
이른바 선선후과(先善後過)의 무리들이 있다. 애국과 친일은 이런 식의 산술적 상쇄가 가능한 수학 문제가 아니다.
고문 경찰 김태석(金泰錫)과 노덕술(盧德述)을 잡아다가 정죄(定罪)하고
이광수(李光洙)나 최남선(崔南善)에게 낙인(stigma)을 찍는 것이 친일 청산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오이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에 “민족에게 죄짓고서도 처벌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역사의 죄과(罪科)이다. 이는 어떤 논리로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일이다.
망국의 책임과 친일
해방정국에서의 가장 다루기 어려운 문제는 친일파 청산이었다.
친일을 공부하는 사람들이게는 이 문제를 만날 때 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역사가 반드시 정죄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격동의 해방정국에서 분출하는 복수심과 망국에 대한 추궁의 심리 속에 모두가 애국자처럼 외치며
이미 이성은 문제 해결의 도구가 아니었다.
더욱이 해외파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촉수 안에 머물렀던 국내파 민족주의자들에 견주어
더 몸짓이 거칠었고 목소리도 컸다. 그 가운데에 김구(金九)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구는 1945년 12월 27일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에서 친일파에 대해 언급하며,
“적지 않은 협잡 정객과 또 친일분자‧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 한다. 그것은 대의명분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라도 죄악이 많아 용서할 수 없는
불량분자만은 엄징하지 않으면 안 된다.”(“동아일보” 1945. 12. 30)고 선언했다.
더욱이 일제시대에 “국내에 남아 있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였고,
따라서 그들은 감옥에 가야 한다.”(Mark Gayn, Japan Diary, p. 433)는 그의 주장을 들은
한민당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김구의 주장에 대하여 여운형(呂運亨)은
“국내파 민족주의자의 고통을 모르는 언행”이라는 반발과 함께 제휴의 희망을 버렸다.
반민특위에 연행되는 부역 인사들
아마도 김구를 추모하는 독자들이 나의 글을 읽고 매우 분노한 댓글을 달았던 것은
내가 “우리의 현대사에서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는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증류수에서는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항변한 분의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굳이 반론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공산권이 무너지고 1989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하벨(Baclav Havel)의 말처럼,
장기간에 걸쳐 자행된 체계적 권력 남용과 외압 아래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이 체제에 묵종한 사회에서 최종적으로 누가 죄인이며 누가 그를 심판할 수 있는가?(Rigby, pp. 110-111)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승만(李承晩)은 친일 재벌 장진영(張震英)의 돈암장(敦岩莊)에서 살았고,
김규식(金奎植)은 친일 재벌 민규식(閔奎植)의 삼청장(三淸莊)에서 살았고,
김구는 금광 재벌 최창학(崔昌學)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살았고(이 집은 일본 공사 다케조에 진이치로(竹添進一郞)의 집이었다),
박헌영(朴憲永)은 함열(咸悅) 갑부 김해균(金海均)이 제공한 혜화장(惠化莊)에서 살았다.
그런 모습은 “받아 마땅한 대접”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망국의 책임자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 나라의 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는 고염무(顧炎武)의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지금의 친일 논쟁은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이 빚은 갈등이다.
우리의 망국사에는 분노만 분출할 뿐 역사에 대한 자성이나 회오가 없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힘으로 광복을 쟁취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해방정국에서의 친일논쟁은 이승만에게 너울을 씌우는 구실로 이용되었다. 그럴 만한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친일 논쟁은 한민당으로서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는 화두였다.
그들은 역공을 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설 땅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격노하여 반격에 나선 인물은 조병옥(趙炳玉)이었다. 당시 정보망을 장악하고 있었던 그는
정치판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친일 비리를 꿰뚫고 있던 터라 할 말이 많았다.
그래서 나온 논리가 친일(pro-Jap)은 먹고 살다 보니 저지른 일(pro-Job)이었다는 것이다.
조병옥은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마닐라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여운형(呂運亨)과 안재홍(安在鴻)이 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에게 불려가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에 협력할 것과 황국 신민이 되겠다고 맹서한 전력(前歷)을 공격하고,
김규식의 아들이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의 스파이로 8년간 활약한 사실을 들추었다.
따라서 고의로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민족 운동을 방해하였거나 민족운동자들을 살해한 자가 아니면
취업으로 인정하고 감싸야 한다고 강변하면서(“나의 회고록,” 173쪽) 그는 더 따져보겠느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으로서는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김구나 좌익의 주장을 따를 수 없었다.
그는 “민족 반역자나 친일파는 일소해야 하지만 지금은 우선 우리의 힘을 뭉쳐놓고 볼 일이다.
우리의 강토를 찾아낸 후에 우리의 손으로 재판하여야 하며 지금은 누가 친일파이고 누가 반역자인지 모른다.”는 입장이었다.
친일파를 처리할 수 없다는 그의 표면적인 구실은 그것이 결국은 국론을 혼란케 하여 통일을 지연시킬 뿐이라는 것이었다.
친일 논쟁에 하지(John R. Hodge)가 이승만의 편을 든 것도 한민당으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
하지로서는 본디 친일파를 두둔할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영어를 알 만한 인물로서 허물없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는 데 애로가 있었다.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에서 본다면 선명성이라는 점에서 김구가 우위에 섰던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이승만의 정치적 야망으로 볼 때 대중 동원이나 정치 자금 그리고 인물을 모아가는 과정에서
지주나 매판자본가를 깨끗이 물리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친일 청산을 주장하는 김구가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을 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였다.
때 묻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숙청을 시도할 경우에 새로운 사회 건설에 쓸 만한 사람이 부족한데 어쩌랴?
이 시대의 가진 자들 가운데 한말부터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역사를 살아온 조상 3대 3족(친가·처가·외가)의 이력서와 호적/제적등본과 족보를 내놓고
“우리 집안은 정말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집안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열 사람의 의인만 살아 있었더라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던 여호와의 약속(“구약성서 창세기” 18장 32절)은 우리에게도 유효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시 국난이 온다면 나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는 없다.
거대한 국가 폭력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의인이 없었던 적도 없지만 역사적으로 애국자가 넘쳐나는 시대도 없었다.
꼭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조국과 동포를 배신한 사람을 대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망국의 원인을 몇 명의 친일파에게 추궁함으로써 망국이라는 거대 담론을 희석시켰다.
서구라파와의 경우
친일 청산의 문제는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숙청과는 다르다.
나치가 철수한 직후부터 프랑스의 민족주의자들이 감행된 1만 명의 부역자를 처형 또는 사형(私刑)하고,
“인민재판”(crossroads justice)으로 4천5백 명의 약식 처형이 이뤄졌다.
자식에게 우유를 제공한 독일 병정에게 몸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삭발하고 조리돌림한 처사가
바람직한 것이었나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독일에게 점령된 뒤 2주가 지나도록 신문의 발행을 계속한 것은,
논지를 불문하고 부역”이라는 드골(De Gaul)의 결정이 우리에게도 가능했을까?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점령 지역에 거주했던 대다수의 생존 전략은 영웅적인 순교보다
생존의 본능에 따랐다.(Rigby, pp. 18-19, 28)
노르웨이에서 25명이, 덴마크에서 36명이, 벨기에서 230명이 처형되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920만 명의 인구 가운데 15만 명이, 벨기에에서는 8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7만7천 명이,
덴마크에서는 4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1만4천 명이, 인구 400만 명인 노르웨이에서는 6만 3천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800만 명의 프랑스에서는 12만 명이 재판을 받았다.(Rigby, pp. 20-21, 43)
죄인을 고발하고 정죄할 때는 해묵은 원한이 부역보다 더 무겁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946)의 지적에 따르면 “뉴른베르크재판은 범죄의 책임자를 가려내려는 의도보다는
‘나는 저들처럼 죄짓지 않았음을 보여주려는 충동’도 크게 작용했다.
이는 독일인 모두가 범죄자로 비난받는 것을 피하는 장점이 있었다.(Rigby, p. 5)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점령군에 의해 죽은 사람보다 동족에게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아르헨티나 독재 7년 동안에 1-3만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이에 대하여 최초로 침묵을 깬 무리들은 “어머니였다.”(Rigby, pp. 77, 176)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렇다면 해방 70년이 지나도록 아직 해결되지 않고 분파를 이루는 친일 부역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나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이 일을 매듭 짓는 것을 권고한다.
첫째, 당사자 또는 그 후손은 진정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의 고통을 거론하고 인정하며 여건이 좋아진 다음에는
“기억과 더불어 사는 법”이다.(Rigby, p. 45)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의 평결을 요구받았을 적에 그도 즉답을 못하고 몸을 굽혀 땅에 뭔가 쓰기 시작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썼다.(“요한복음” 8 : 1-11)
예수는 뭐라고 바닥에 썼을까? 다른 성서해석자들은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부탁한 이야기로 그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다시 바닥에 무엇이라고 썼을까? 하는 대목이다.
“나는 어떠했을까?”라고 쓴 것은 아닐까?
남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인권침해가해자들이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 모든 것을 고백할 경우에는
기소를 면제했다. 후회나 가책의 표현을 요구하지 않았다. 고백을 속속들이 다 듣고 알게 되면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마음은 더욱 비참해지기 마련이다.(N. Chomsky, On Power and Ideology, 1987, p. 51)
부역자들에게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여운형(呂運亨)의 경우처럼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친일을 했다고 고백한 사람도 있고(“金昌淑文存,” 1994, 244-245쪽)
대학이나 신문사와 같은 더 큰 것을 지탱하기 위해 일본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김성수(金性洙)나 백관수(白寬洙)는 말했다.
팔레스타인 부역자들의 대부분은 필요악이었다.
그들의 부역이 없었더라면 점령 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수많은 팔레스타인 가족들의 삶을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빗나간 방식으로 공동체의 복지에 헌신하려고 했던 “애국적(?) 반역자”였다.(Rigby, p. 173)
조직적인 부역자들은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지면서 적에게 협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폭넓은 대중이나 특정 집단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상주의적인 부역자들은 자신의 봉사로 말미암아 적군이 얻어가는 이익보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더 크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럴 경우에 구체적인 동기가 다를 수 있지만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보다 큰 공동체를 위하여 마지못해 적군에게 협조했다.
점령 지역이나 억압 아래에서의 삶을 생각할 때 유죄와 무죄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이다.
그 과정에서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이유를 제시하며
도덕적·법률적 원칙을 위반한 사람들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Rigby, p. ix; 26)
둘째로, 친일의 댓가로 받은 일체의 반대급부를 환수한다. 그것은 속죄의 첫 단추이다.
자기들의 재산이 친일의 댓가가 아니라 그 선대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강변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는 재판에서 승소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남아프리카에서 있었던 다음의 일화를 인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톰(Tom)과 버나드(Bernad)라는 두 소년이 있었다. 톰은 늘 버나드를 괴롭혔다.
어느 날 톰이 버나드의 자전거를 훔쳐갔다. 버나드는 톰이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았으나
힘이 부족하여 따지지도 못했다. 그러더니 톰이 갑자기 버나드를 찾아와 손을 내밀면서
화해하고 과거를 흘려보내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버나드가 톰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내 자전거는 어찌 되는 거냐?”
그랬더니 톰이 말했다.
“나는 지금 자전거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그저 화해하고 싶을 뿐이야.”(Martha Minow, “Memory and Hate?” Brown University, 1999)
이것이 유명한 “남아프리카의 자전거 화해 이야기”(Bicycle reconciliation story in South Africa)이다.
국가는 많은 피해 국민들에게 국가적 화해를 위해 자신의 손실과 불의를 수용하라고 요청한다.
자전거는 돌려주지 않은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자전거를 되찾지 못하는 한 화해는 이뤄질 수 없다.
셋째로, 국민적 합의로 일몰제(sunset law)를 제정한다.
세상의 매듭을 푸는 데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잊어버려.”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 아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한때 수행한 적이 있는 내 고향 괴산 군자산(君子山)에는 이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원효가 상좌중과 길을 걷다가 중도에 개울을 만났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물이 불어 건너기가 어려웠다. 옷을 입고 건너자니 물이 깊어 옷이 젖을 지경이었고,
옷을 벗고 건너자니 그리 깊지는 않았다. 그런데 원효는 서슴없이 옷을 벗더니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고 물을 건너려 했다.
마침 그때 옆에는 젊은 여인이 난감하게 서 있었다. 원효는 주저 없이 그 아낙을 업고 물을 건넜다.
내를 건너 저편에 이른 원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을 입고 길을 걸었다.
이때 따라오던 상좌중이 원효에게 말씀을 드렸다.
“스님, 이제 저는 스님의 곁을 떠나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출가한 스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젊은 여인을 업고 내를 건넜으니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원효가 상좌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업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스페인의 경우를 보면 오히려 지식인들이 과거를 외면하기로 결정한 망각의 협약이
정치적 안정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프랑코의 명예를 훼손하고,
군대와 보안 부대에 대한 숙청을 시도할 경우에 쿠데타가 일어나리라고 믿을 만한 증거는 많았다.
그 문제를 현재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또 다른 유혈 사태와 갈등, 그리고 고통을 초래할 것 같았다.
그래서 원칙은 살리되 “망각”을 중요 도구로 이용했다.
그렇게 해서 프랑코 정권 아래에서의 부역자 사마린치(Juan Samarinch)도 용서를 받았다.(Rigby, pp. 3, 151, 68)
망국의 죄인들을 잊을 수는 없지만 이제는 내려놓고 가자. 카에사르(Julius Caesar)가
“이탈리아내전사”(De Bello Civili)에서 말한 것처럼, “강을 건넌 다음에는 배를 강변에 두고 가야 한다.”
(Postquam nave transiit flumen, navis relinquenda est in flumine)
이제는 우리도 우익이나 좌익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에 대하여 정직하고 자유롭게 고백하고 사죄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을까? 나는 형사법학자는 아니지만 “친일파에게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논리에
법률적 하자가 없는지를 가끔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 행간에는 연좌제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나치 치하나 붕괴 이전 공산 치하와 남미에서 저지른 반인륜 범죄의 추적과는
다소 다른 성격의 것이다. 과거만을 지향하는 기억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다.(Rigby, p. 1)
넷째로, 연좌제를 배제한다. 친일 이야기를 하면서 박정희(朴正熙)를 거론하는 의견이 있었다.
친일파가 정권을 잡아 나라가 이렇게 어려워졌다는 논리이다. 박정희는 육군 중위의 몸으로 일본 군대에서 복무를 했다.
없었더라면 좋았을 일이니 허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에 태어난 젊은이가 겪어야 할 아픔(karma)이었다.
나는 그를 두둔할 뜻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육군 중위가 친일파라면 그 숱한 한국인 육군 중위 가운데 왜 하필이면 박정희만 문제가 될까?
내가 관계하는 한 애국단체에서는 모임만 시작하면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박정희가 쓴 파고다공원의 삼일문 현판을 때려 부순 무용담(?)을 회순(會順)에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주 지겨웠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는 그 모임에 가지 않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다시 그 모임에 나갔다.
과거사 청산은 당사자에 대한 “할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Rigby, p. 86)
그런 식이라면 일본 정부와 지주에게 세금과 소작료를 지불하고 부역(賦役)한 나와 귀하의 아버지도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친일의 죄상을 따지자면 중위보다 오장(伍長)이 더 악랄했다.
진보진영에 포진하고 있는 오장의 자식들이 중위의 자식들을 친일파라고 배척하는 것은 무지이며 코믹하다.
박정희가 훗날 대통령이 되지 않고 중위로 생애를 마쳤더라도 그의 행적은 친일의 멍에를 썼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해방 이후의 행적에 따라서 해방 이전의 행적을 논의하는 것은
당사자나 그 자식들에게 주홍글씨(stigma)를 써넣는 작업의 성격이 짙다.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를 물으려면 유신시절의 반민주적 통치를 논박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친일의 과오를 거론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과오를 빗나가게 겨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국의 문제는 멀리 맹자(孟子)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그 나라가 스스로 멸망할 짓을 저지른 뒤에
다른 나라가 그를 멸망시킨다.”(“孟子” 離婁章句(上) : 國必自伐而後人伐之)
강요에 따른 것이었든 자발적이었든,
우리는 그 시대를 살면서 모두 애국자였을 뿐, 암묵적으로 협조한 바는 없었을까? /끝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정치학/한국근현대사, 한국정치사상사), 건국대 중앙(상허)도서관장,
동 대학원장
역임/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