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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되신 하나님 / 사 7:10-16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인 여러분들에게 넘치기를,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많은 분들이 휴대폰 연결소리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음원을 채택해서 사용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노래지만, 연로하신 분들을 위하여 그 노랫말을 소개할까 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이 노랫말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속에서 경험할 수 있거니와, 다른 사람과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 된다고 이 노랫말 속에 들어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며 축복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사람이 그 누군가에게 진실한 사랑을 베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의 축복을 가득히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축복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이미 그 마음에는 주님의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나?
사랑이신 하나님, 그분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제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사랑이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화신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회된 것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 3:16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다. 그런데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이 다른 번역에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또는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우리 인간으로서 마당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멸망의 길이 아닌 영생의 길을 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의 예수님을 진실하게 영접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그 누구라도 쉽게 예수를 믿을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를 제대로 잘 믿으려면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존의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려면 많은 아픔과 고난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많은 고통과 손해를 겪으면서도 세상 것들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사랑을 베푸시고 있지만, 세상물질과 명예에 그 마음을 다 빼앗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런 놀라운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
예수께서 처음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아픔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우선 그의 육신의 부모들이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느날 갑자기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그녀가 성령을 통하여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에 그녀는 그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명예와 물질들을 다 포기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어제 학생들의 연극에서 요셉의 고민을 보았다.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도 참으로 힘들고 괴로웠으리라 여겨진다. 그는 원래 원칙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결심했다.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임신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마리아는 죽음을 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조용히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서 만류하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아기가 아닌 다른 아기를 임신한 여자와 결혼해야만 했다. 비록 요셉이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할지라도 그가 겪어야 했을 고통과 고민은 엄청났으리라고 생각한다. 만일 마리아가 처녀로서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마리아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숨긴 요셉까지도 큰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니, 요셉이 얼마나 크게 고민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 아니겠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났을 때, 그 천사는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아기를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아기가 태어나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까지 그는 엄청난 고민과 함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아마 어쩌면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마음을 가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정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마리아와 정식으로 결혼한 다음에도 마리아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되자 천사가 일러준대로 아기 이름으 ‘예수’라고 지었다. 그처럼 마리아와 요셉이 많은 고통과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을 때에 그들은 예수의 어머니요 아버지라는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을 물리치고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그와 같이 큰 영광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비슷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승부를 걸어야 할 일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 것이냐, 아니면 세상을 더 의지하며 살것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참으로 귀중한 줄 알고 이 자리에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쉽게 버리지 못한채 뜨뜻미지근하게 믿음생활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올인하지 못하고 새상과 교회에다가 양다리를 걸치고 어정쩡하게 살고 있는 분들이 없지 않아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이번에는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려고 사랑으로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겠다고 한 것은 인간의 과학으로 사람을 만들겠다는 인간복제의 선언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시겠다는 위대한 선포이다. 창세 이래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의 특별한 능력으로 이렇게 태어나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은 마리아의 몸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실 수 있다. 마리아 몸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게 하기 위함이었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예외없이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 동정녀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무슨 뜻으로 이 메시지를 주셨나?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난 복제인간이라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 왜 이 소식을 주셨나?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 메시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아야 하겠다. 그래야만 성탄절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선왕 다윗이 이루어 놓은 통일왕국은 솔로몬왕의 타락으로 그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와서 북왕국과 남왕국 둘로 나뉘어졌다. 북왕극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10지파가 합하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는 흐로보암을 왕으로 하는 2지파가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두 나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앗다. 이 두 나라는 외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서로 싸우는 일을 자주 하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람, 모압, 암몬, 에돔 등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남왕국 유다를 자주 침범했다. 한편 남왕국 유다는 유다대로 애굽의 손을 빌려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본문의 사건은 BC 735년 경에 일어났다. 당시 팔레스틴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했다. 당시 세계 재패를 꿈꾸고 있던 앗수르제국의 디글랏 빌레셋은 강력한 영토 확장정책을 폈다. 그래서 필레스틴 땅을 호시탐탐 노렸다. 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는 인접국가인 아람 왕 르신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에게도 같이 연합전선을 펴 앗수르에 대항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왕 아하스는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아람은 앗수르와 전쟁을 할 때 혹시 유다가 측면에서 공격해오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약한 유다를 먼저 제거함으로 이런 가능성을 사전에 제거하고자 했다.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을 해서 유다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이 소문을 들은 약한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들은 무척 두려웠다. 사 7:2절을 보면 그들이 어떠했나를 잘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여기서 ‘다윗의 집’은 남왕국 유다를 가리킨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별명이다. 이스라엘의 10지파 중 에브라임 지파가 가장 실력이 있는 지파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 유다를 쳐들어온다는 소리에 왕과 백성의 마음이 얼마나 흔들렸는지 성서는 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강한 바람이 불 때 나무를 보면 좌우, 앞뒤로 심하게 흔들린다. 어떤 때는 부러질 것 같다. 이와같이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전쟁소식에 왕과 백성들은 갈팡질팡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 위기를 피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에게 보내어 말씀하셨다. 7:4절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그들은 나무 막대기가 타고 남은 것 같다고 한다. 나무 막대기라는 것은 타지 않아야 쓸모가 있다. 불에 타게 되면 모양이 변하고 약해져서 아무데도 쓸 수가 없다. 이스라엘과 아람이 바로 이와 같이 타고 남은 부지깽이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니 왕과 백성들은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라고 한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도 아하스의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급한 현실을 눈으로 보고 있는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유다가 멸망되는 것은 시간문제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 그런 아하스의 마음을 보신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견고히 설 것을 말씀하셨다. 9절하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지금 왜 아하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나?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할 수 있었다면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바라본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안절부절한다. 이것도 해보았다가 저것도 해보고, 왔다갔다 큰일 났다고 수선을 부린다. 지나고 보면 일이 원하던 방향이든 아니든 어떤 형태로든지 다 해결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엎어지거나 자빠져 다시 일어나기 못하게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역경이나 환난을 만났을 때 믿음이 요구된다. 9절이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기 바란다.
아하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자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그래, 네가 정말로 믿지 못하겠거든 네가 믿을 수 있도록 내게 한 징조를 구하라.’ 다시 말하면 ‘기적이나 표적을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지 않았다. 10-12절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징조를 구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대답은 깊은 신앙의 표현같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불신이다. ‘징조요? 무슨 징조를 구해요. 나는 되지도 않을 당신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징조같은 것을 구하라는 말을 하지도 마십시오’라는 것이 아하스의 말이었다. 그는 이미 앗수르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앗수르만을 의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곧 여호와의 전과 왕궁 창고에 있는 모든 은금을 털어 사자의 편에 보내면서 앗수르 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왕하 16장에 이 사실이 잘 나와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추어 보면 유다가 처한 상황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이있다. 자고로 우리나라는 위급한 처지에 있을 때마다 외국의 힘을 의지하고 해결하려고 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우리나라에게 손해였다. 그래서 한때는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자. 일본놈 일어선다. 조선사람 조심하라’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의 이면에는 미국이라는 큰 힘이 작용하고 잇다. 물론 이런 어려움이 있게 되 첫째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우리의 약점을 이용해 목을 조여오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도 의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고 외국의 돈도 신뢰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할 때 우리나라의 구원이 있다.
아하스가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13절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13절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이런 말이 된다. ‘아하스왕이여, 하나님이 징조를 구하라고 했는데 구하지 않은 당신의 불신앙적인 행동이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여 하나님마저 괴롭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아하스의 이와 같은 거절은 죄많은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구원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무시한 처사였다. 아하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징조를 주시며 자신의 뜻과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 ‘내 말을 못믿겠다는 것이냐? 좋다. 그러면 네가 구하지 않아도 내가 한가지 징조를 주마. 보아라. 이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연합군이 유다를 괴롭게 하지 못할 것에 대한 징표로서 동정녀 탄생의 약속을 주셨다. 지금 쳐들어오고 있는 적의 세력 앞에서 아하스와 백성들을 지켜줄 징조로서 이 약속을 주셨다. 세상에 징조도 이런 징조가 어디 있나? 유다를 지켜줄 것에 대한 징조라면 천재지변을 일으켜 연합군의 침공을 막든지, 그들의 눈이 멀게 하여 공격을 중단시켜야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하나님은 엉뚱하게도 처녀가 아들을 낳게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당장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8백년 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8백년이 지나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 도대체 이런 것도 징조라고 할 수 있나? 아하스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 7장의 사건이 갖고 있는 의미심장한 뜻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왜 동정녀 탄생을 징조로 주셨나? 아하스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국면은 유다가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에 망하느냐, 아니냐 하는 기로에 서있다. 그런데 약한 유다의 힘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막을 방법도, 힘도, 해결책도 없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망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리고 못 믿는 아하스에게 승리할 것의 증표로서 ‘동정녀 탄생’의 약속을 주셨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처녀가 아이를 갖는 것과 네가 연합군과 싸워 이기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어려워 보이냐? 어느 것이 더 불가능해 보이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에는 어느 것이 더 어려워 보이나? 어느 것이 더 불가능해 보이나? 예, 처녀가 아이를 갖는 것이 더 어렵다. 훨신 불가능하다. 전쟁에서는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강하다 할지라도 작전을 잘 짜거나, 지형을 잘 이용하거나, 기습공격을 하면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처녀가 남자도 없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처녀 혼자서 스스로 아이를 갖는 일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여 이룰 수 없는 일을 내가,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신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 불가능한 일도 내가 하는데, 싸움에서 너를 이기게 못해주겠냐?’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었던 아하스를 책망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다르신 분이다. 사람은 입에서 나간 말이 그대로 지켜지지 않는 걍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이러이러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 반드시 된다. 백% 보증수표이다. 그러니 전쟁에서 승리할 것에 대한 징조로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라고 하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8백년 후에 일어날 일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일어난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시간에 제한을 받고 살지만, 하나님은 시간이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하나님에게는 8백년 후의 일도 현재의 일이다. 그러므로 8백년 후에 있을 동정녀 탄생이 승리의 징조가 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본문이 갖고 있는 역사적 배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누려야 할 메시지가 들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위로와 확신이 여기 있다. 우리들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에게 둘러싸여 무서워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나약한 아하스왕과 같은 존재이다. 믿음도 연약하여 아하스왕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아하스에게 주셨던 동정녀 탄생의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왜 그런가? 오늘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생각해 보라. 그 문제들을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뭐 쉬운 것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나의 힘과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우리를 향하여 성난 파도와 같이 다가오는 어려움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일엽편주와 같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현재 우리 조국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나? 또 가정의 어려움, 개인의 어려움을 생각해 보라.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나? 그러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면 용기가 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 이것이 동정녀 탄생이 주는 메시지이다. 이것이 우리가 매년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동정녀 탄생을 기념해야 할 이유이다. 14절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의 몸에서 아이를 낳게 하시는 하나님은 승리할 수 있는 조건도, 근거도, 가능성도 없는 상황 속에 있는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약속에 믿음과 확신을 갖기 바란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에 용기를 갖기 바란다. 이런 위로가 있는 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이런 소망이 있는 절기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다. 이 복된 메시지가 온 세상에 전해지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소리엘’이 부른 노래 중에 ‘야곱의 축복’이 있다. 그 노랫말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와 언제나 함께하시니, 너는 하나님의 사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나는 널 위해 기도하며 네 길을 축복할 거야. 너는 하나님의 선물,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열매, 주의 품에 꽃피운 나무가 되어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과 축복을 듬뿍 받고서 더욱 성숙한 믿음의 나무로 성장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한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셨을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함께 하늘의 귀한 상급을 가득 받는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가정에 이러한 위로와 축복과 소망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05 성탄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