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초년에 뿌린 씨앗
고 동 주
도처에 바다 가 있고, 섬들과 산이 있다 하되, 통영처럼 아름다운 짜임새를 갖춘 곳은 보기 힘 든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섬, 바다, 이름 하여 한려수도라 했던가.
나는 그 남빛바다 외딴 섬에서 세상을 처음 보았고, 가까운 뭍에서 꿈을 향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내 삶의 광장에서 통영을 떠나 있었던 기간은 비교적 짧은 편이였다. 청년시절을 거치면서 군 복무와 학업 때문에, 또 공직에 있을 동안 도청과 마산ᐧ 진주 등을 잠깐씩 거쳤을 뿐이다. 그러니까 내 생애에 10여년만 고향을 떠나 있었던 셈이다.
공직생활 초년 때였다. 그 당시 통영군수로부터 통영의 비전(vision)을 그려보라는 숙제가 나에게 떨어졌다. 예산은 생각하지 말고, 통영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구상해 보라는 것이다. 어렵다는 걱정보다 그 커다란 과제를 풀어내는 대상으로 말단 공직자인 내가 선택되었다는 기쁨 때문에 오히려 신이 났다.
그런데 뒤늦게 들었지만, 이 과제가 내게만 떨어진 것이 아니고, 수개월 저부터 여러 간부직들에게도 주어졌는데, 만족할만한 답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경과(經過)를 듣자, 퍽 부담스러워지기도 했다.
매일 새벽 2시부터 7시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달 동안 짜내고 다듬었다.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 농경지 정리를 비롯한 농업 기반조성, 도로 개설 및 확장, 관광 및 문화 기반 조성, 도서 및 육지해안 개발, 공단 조성 등 구체적인 밑그림을 신나게 그려서, 드디어 군수에게 결재를 올렸던 것이다. 3일 만에 군수의 호출이 있어 갔더니, 결재서류를 돌려주면서 그 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결재 사인(sign)위에다 ‘드디어 OK'라는 글자까지 첨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라사정은, 국민소득이 겨우 수백 불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당장은 실현 불가능한 꿈같은 사업들이었다.
몇 년 후, 나라 경제가 살아나면서 더러 예산이 허용되어 일부는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동안 나의 신분도 말단에서 간부로, 간부에서 부 단체장으로 계단을 밟았고, 마침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영시로 통합된 후, 기초단체장 민선시대를 맞아, 드디어 민선 초대 통영시장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그런 위치에서 30여 년 전, 공직 초년에 구상했던 사업을 참고로 현재 실정에 맞도록 씨앗을 뿌릴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말단직에서 구상했던 사업들이 수십 년에 걸쳐 더러 추진되었고, 이제 시장 직까지 맡았으니, 실현을 위한 열정이 남다르게 타올랐다. 평생토록 이루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던 사업들 중에 그 일부이나마 하나씩 성취될 때, 그 기쁨의 깊이는 남달랐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보건대, 통영과 나의 관계는 어쩌면 숙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흔한 사례가 아니기에 역사적인 의미로 여기에 실었지만, 혹시 자랑으로 보일까봐 걱정스럽다.
그러나 옛 속담에 이르기를 ‘같은 마을의 악사는 사람들을 탄복시키지 못한다.’든가 ‘진주는 조가비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 나는 같은 마을의 악사인데다, 조가비 안에서 한 평생 발버둥 친 꼴이니 그 결과가 시원찮은 것도 순리라고 생각하며 자위해 본다.
아무튼, 한평생을 몽땅 ‘통영 발전’이라는 푯대 하나를 들고 줄곧 외길로만 달리면서 땀과 눈물을 흘린 것, 그 길 만이라도 내게 허락된 것이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