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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가대 신학대학원 원문보기 글쓴이: stella
NO GRATER LOVE
감독: 마이클 화이트
장르: 다큐멘터리
러닝타임: 105분
개봉시기: 2012년 10월 11일
수입: (주)인영트레이딩
배급: (주)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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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상품처럼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기도는 여전히 신비입니다.”
마이클 화이트는 10년에 걸친 요청 끝에 마침내 런던 노팅힐에 있는 삼위일체 가르멜 여자 수도원의 생활을 필름에 담을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전례 없는 특전이었다. 1878년에 설립된 이 수도원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 소속이다. 봉쇄 수도원에 살면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는 이 수도원의 수녀들은 병원에 가는 일 말고는 수도원을 거의 나가지 않는다. 이들은 하루 두 차례 휴식 시간을 제외하면 종일 침묵을 지킨다.
<사랑의 침묵>은 현대의 물질주의를 거부하는, TV도 라디오도 신문도 없이 사는 닫힌 문 안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특별한 기록이다. 화이트는 수녀들의 성무일도와 여러 가지 일을 중심으로 이 수도원의 일상을 일 년에 걸쳐 기록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성주간을 정점으로 하는 일 년 동안 수녀원에는 수련 수녀의 서원식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노수녀의 죽음도 맞는다. 대체로 설명 없이 객관적 관찰에 가까운 다큐 영화이지만, 수녀들의 삶과 믿음, 의혹의 순간들, 기도의 힘에 대한 신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터뷰도 여러 꼭지 들어 있다.
수상 내역
2010년 국제종교영화제 대상
2010년 캐나다 국제영화제 우수상
2009년 시네시티 영화제 공식 초청
2009년 에든버러 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2009년 CORK 영화제 공식 초청
2009년 빅스카이 다큐멘터리 영화제 공식 초청
2009년 베를린 브릿스포팅 영화제 장편영화 부문 관객상 수상
언론 매체들의 찬사
“마치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 속 인물들이 되살아난 듯,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네버 렛 미 고> 원작자)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며 겉만 번드르르한 것을 추구하는 바깥세상과 과감하게 선을 긋고 사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 주는 유익한 기록.”
- 2009년 에든버러 국제영화제
“용기를 주고 마음을 사로잡는 깊은 감동의 영화.”
- 엠파이어
“마이클 화이트의 영화 장면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관객에게 어느 정도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 수고는 열 배의 감동으로 돌아온다.”
- 안토니 퀸, 인디펜던트
“솔직하고 꾸밈없는 수녀들을 만나는 매우 감동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따뜻하게 풀어 보여 주는 영화.”
- 니콜라스 바버, 인디펜던트 일요일판
“구원자와 인류에 대한 수녀들의 헌신이 말할 수 없이 감동적이며 인간미도 넘친다. 나도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 필립 프렌치, 옵서버
“마이클 화이트는 이 작품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 앤드류 M. 브라운, 가톨릭 헤럴드
“일주일 내내 하루 24시간 움직이며 갈수록 시끄러워지는 세상에서 차분한 묵상과 진정 가치 있는 것을 목격하게 해 주는 귀한 자료다.”
- 피터 말론, 가톨릭 타임즈
“마치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 산 브룩스, 가디언
“냉소적인 시각이나 쓸데없는 설명이 보이지 않는 점잖고 기품 있고 지적인 영화. 다큐 영화의 수작으로 평가받기에 족하다.”
- 마크 아담스, 스크린 인터내셔널
“관찰자의 눈이 경의를 표하는 듯한 영화. 햇살 스며든 복도를 원경 촬영한 장면이 참으로 유려하다.”
- 닉 브래드쇼, 사이트 앤 사운드
<사랑의 침묵>
마이클 화이트 감독 작품의 제작 배경
노팅힐 가르멜
마이클 화이트 감독은 수편의 명작 다큐멘터리를 찍은 전문 감독으로서, 바로 우리 수녀원이 있는 광장 맞은편에서 아내 저닌, 그리고 4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본인의 말에 따르면 “십년이 넘도록!”) 자신의 이웃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우리 수도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며 정중히 요청해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있지만 가톨릭 신자는 아니며, 그의 아내는 유태인입니다. 그는 가르멜회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하루에 몇 번씩 규칙적으로 울리는 수도원의 종소리에 호기심을 갖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화이트 감독에게 “저희는 매우 엄격하게 봉쇄 수도생활을 하는 수녀들로서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답변만 주었습니다. 감독이 한동안 자신의 계획을 신중히 묵혀두는 상황에서, 우리는 차츰 교회 내 다른 기관들의 영향을 받게 됐고 대중매체를 무작정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우리를 알리는 증거로써 현대 기술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됐습니다. 다른 가르멜을 비롯한 수도 공동체들이 TV, 라디오 인터뷰 등에 과감히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7년 말 마이클을 수도원에 초대하여 그가 가진 생각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앞서 주교님은 미디어 대응에 관해 전문가 도움을 얻으라는 조언을 해주셨고 그에 따라 교구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분을 초청, 인터뷰 때 우리가 빠질 수도 있는 유혹과 함정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에 대해 마이클은 열린 자세와 관대함으로 가능한 한 모든 과정에서 미리 우리의 승인을 받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한 만약 우리가 촬영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느낀다면 프로젝트를 취소하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마이클은 우리의 생활을 어지럽히려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저 얌전히 지켜보면서 조용히 찍을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2008년 1월 초, 마이클은 수도원을 찾아와 원내와 정원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하루 동안 우리와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처음에 그는 수도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익히고 우리의 일과를 관찰했는데, 핸드헬드 카메라를 든 자신의 모습에 우리가 익숙해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나중에 그는 처음 며칠간은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무척 당황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여기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어떻게 영화로 찍지?”라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곧 자신만의 감각으로 가르멜회에서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것을 영상으로 담을지 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성삼일(*부활절 전 3일인 성목요일, 성 금요일, 성 토요일)이 수도원 전례력(典禮歷)의 정점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영화의 기본 구조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성무일도(*수도자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온 세상을 위해 바치는 시편기도. 가르멜회는 하루 일곱 차례 성당에 모여 이 기도를 바침)에 함께 참석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또 저녁 묵상기도(*가르멜 수녀들은 아침 1시간, 저녁 1시간 이 묵상기도를 바침)에도 함께 했습니다. 그는 구석에 조용히 앉아, 깊은 침묵과 고요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서서히 깨닫게 됐습니다. 가르멜회에 처음 들어오는 지원자들처럼 처음에는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나중에 고백하긴 했지만요!
수주일 동안, 마이클은 수도원에서 다양한 장면들과 우리의 인터뷰를 찍었습니다. 우리는 까다로운 비평가 노릇도 했지요! 우리는 마이클이 우리가 보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가사 허드렛일 같은 것을 촬영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으며, 반면에 우리가 중히 여기는 것은 소홀히 넘기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예컨대 공동체적인 삶과 전례 기도는 잘 드러나 보이지만, 고독과 침묵의 중요성은 시각적으로 잘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은 한 두 수녀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수방(*修房, 가르멜 수녀들이 머무는 독방)이나 정원 은둔소에서 기도하는 모습 등을 충실히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마이클은 그런 식으로 어딘지 ‘포즈를 취한 듯한’ 장면들이, 평소 그가 추구하는 자연스런 관찰의 영상과는 잘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완성된 영화에 포함시키지 못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각각의 장면들이 뜻하는 바에 대해 말이나 글로써 설명해주는 연출이 있다면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최근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지나치게 설명조로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며, 음성해설을 넣는 식으로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반면에 마이클은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길 바라며, 그 자신이 체험했던 바를 관객과 직접 나누는 방식을 원했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그의 방식이 과연 통할지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마이클은 아직 편집 중인 영화의 장면들을 그의 친구들과 영화계 동료들에게 보이기로 했습니다. 이미 그들 중 몇몇은 마이클이 수도원에 관한 영화를 찍는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과 기대, 의구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본 뒤에 그들 대부분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그들 자신의 가치관, 신앙 또는 불신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죠. 마이클의 친구 중 한 사람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는데 영화를 묵묵히 지켜본 뒤 “지금까지 본 것 중 신에 관한 가장 좋은 논쟁거리”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에는 가르멜회의 모토인 “내가 섬기는 만군의 주님께서 살아계신다”
(*가르멜의 기원인 구약성서의 엘리야 예언자의 말) 외에는 그 어떤 교훈적인 이야기도, 메시지도 없습니다.
마이클의 첫 번째 목표는 2009년 6월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수도원에서 촬영을 시작한 지 일 년째 되는 때였는데, 영화의 편집, 사운드 작업 등 영화의 후반작업이 꽤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다른 영화제에도 나갔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열렸던 2010년 국제종교영화제(그리스도교뿐만이 아닌 다(多)신앙)였고 거기서 대상(Religion Today Award "In the Spirit of Faith")을 수상했습니다. 여러 영화제에 소개되면서 일반 극장에 상영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언론과 비평가들은 이례적으로 호의적이었습니다. 마이클은 영화가 상영되는 여러 장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어 기쁘게 했습니다.
마이클과 그의 아내는 영화를 본 관객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 위해 여러 차례 특별 시사회를 마련했습니다. 몇몇 질문들은 영화의 촬영 기법 같은 기술적인 부분이나, 마이클이 수도원에서 느낀 소감 등에 관한 것이었지만, 자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나 평생 봉헌하는 삶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는 마이클도 그런 질문에 잘 대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이클은 이미 성공한 감독이지만 이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놀라고 또 기뻐했습니다.
우리 지역 내 두 군데 극장에서도 일주일 동안 상영하기로 예정했지만 관객들의 요구로 상영 기간을 수주일로 늘렸습니다(자기 본당에서 영화를 열심히 소개해주신 신부님들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이클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우리들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어떻게 이런 훌륭한 배우들을 섭외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가 우리가 사실은 진짜 수녀들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마이클의 감성과,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 가운데 기도가 가지는 중요성(표현하기 어려운데도)을 포착한 그의 능력이 관객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수차례 자신의 일생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한 일 년이 최고의 시간이었으며, 자신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이메일과 메시지들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과는 다른 삶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아일랜드에 사는 한 남자는 영화가 자신의 신앙심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했고, 어느 가정주부는 자신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주었으며, 브로드무어 감옥에 9년이나 수감됐던 한 여성은 영화를 보고 다시 하느님과 가까워졌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삶에 있어 뭔가 귀중한 것을 느꼈다고 소감을 얘기해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이 영화에 대한 명예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가르멜의 소명이 얼마나 특별한가를 겸허한 마음으로 깨닫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마이클 화이트 감독이 우리가 수도원 봉쇄 구역을 떠나지 않고서도, 하느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 세상 앞에 증인으로 설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몇몇 친구들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했다며 치켜세웠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이클의 존재에 대해 익숙해지면서부터 그는 불쑥 끼어든 영화감독이 아닌, 한 사람의 친구로서 무척이나 겸손한 자세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감독 소개
마이클 화이트 Michael Whyte
마이클 화이트 감독은 영화, TV 분야에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제작했다. 연출은 물론 시배스천 폭스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 <새의 노래>(Birdsong)의 각본도 썼다. 특히 그는 유명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 스티븐 폴리아코프, 존 번, 데보라 모가치 등과 작업하며 혁신적인 다큐멘터리 작품들을 선보여 명성을 쌓았다.
Prix Europa Award, 시카고 국제영화제 특별상,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특별상, 영국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 및 베스트 TV 시리즈 특별상 등의 수상 기록을 갖고 있으며, 런던프린팅대학, 왕립예술대학, 런던필름스쿨, 국립필름텔레비젼스쿨 등 여러 영화 관련 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마이클 화이트 감독 인터뷰
- 노팅힐 가르멜 수녀원에 처음 연락을 취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그리고 왜 그들을 필름에 담고 싶었는지요?
1990년대 말이었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소개하고, 혹시 수도원 생활을 영화에 담는 데 관심이 있으신가 묻는 짧은 쪽지를 수녀원 우편함에 넣어 놓았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삶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때 그 수녀원에 수녀님들이 과연 살고 계시는지조차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지나갈 때마다 보면, 늘 비어 있는 것 같았지요. 대문이 닫혀 있는 경우가 많고, 간혹 열려 있으면 정원을 흘끗 볼 수는 있었지만 도무지 사람 사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동네로 처음 이사 가서 보니 대학 입시 전문학교, 여학교, 초등학교, 어린이 지원센터, 교회가 있었습니다. 모두 가톨릭 계통이었죠. 저희 집 앞 광장 귀퉁이에 숨어 있는 듯 보이는 건물도 눈에 뜨였습니다. 대문 위 아치에 “가르멜 여자 수도원”이라고 푯말이 붙어 있더군요. 문이 거의 내내 닫혀 있는 듯 보이는데다 수녀원이 런던 시내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수도 생활과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아서, 저는 이 건물이 한때는 수도자들이 살았지만 도시에 건물이 자꾸 생겨나자 오래 전에 떠나고, 이 건물을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 건물주가 결정을 못해 지금은 비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앉아 일하고 있는데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신기하고 조금은 낭만적이기까지 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광장을 건너 전해졌습니다. 종소리는 시간에 따라 울림이 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품 구상을 하던 중 불현듯 수도원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촬영 요청을 하는 편지를 쓰게 되었지요.
몇 주 후 답신이 왔습니다.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었죠. 무조건 거절은 아니었습니다. 아홉 달 가량 지나 다시 생각해 주십사고 또 편지를 썼습니다. 이번에도 정중히 거절해 왔지만 단호한 거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는 계속 TV 드라마를 찍었고 촬영 요청을 하는 편지와 거절 답변이 거듭되다가 2007년 11월에 성 필립보의 마리아 원장 수녀님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수도원에 관한 작품을 찍으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물으시더군요. 처음에 저는 제 친구 중 하나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금방 알아차렸지요. 하지만 그분들 생활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수녀님 물음에 시원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 수녀님께서 저더러 수녀원으로 한 번 찾아오라고 하셨고 그래서 약속 날을 잡았습니다.
처음 수녀원을 찾은 날은 2008년 1월이었습니다. 수도원에 붙어 있는 별채의 면회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습니다. 면회실은 의자 몇 개만 있는 작고 검소한 방이었고 벽에는 덧문이 달린 창이 하나 있었습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덧문이 열리고 쇠창살이 양쪽으로 접혔습니다. 창살 뒤에 수녀님 세 분이 앉아 계시더군요. 성 필립보의 마리아 원장 수녀님, 그리스도의 파트리시아 마리아 부원장 수녀님, 성 요셉의 마리아 평의원 수녀님이었습니다. 수녀님들은 저와 제 일에 대해서, 또 만약 허락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할 것인지 자세히 물으셨습니다. 30분 정도 지난 뒤 수녀님들이 제게 다시 연락하시겠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쇠창살과 덧문이 닫혔습니다. 한 두 주 후에, 와서 수도원을 둘러보아도 좋다는 초대를 받았고, 2월에 첫 방문을 한 다음 일주일 뒤부터 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호기심과 별도로, 런던 중심가에 봉쇄 수도원이 있다는 사실이 저는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분들은 수도원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영화도 전시회도 연극도 보러 다니지 않고, 런던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오락거리에도 발길을 하지 않습니다. 라디오도 듣지 않고 TV도 보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일에 평생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늘 깊은 인상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그분들에게 그런 삶의 방식에, 그러니까 엄격한 규율 아래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는 수도생활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도록 만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 수녀원엔 얼마나 자주 가셨습니까? 수녀원의 생활 리듬에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촬영하는 1년 동안 늘 규칙적으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가기도 하고 두세 번 가기도 하고, 수도원의 일정을 고려해서 한두 주 정도 가지 않은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주간엔 매일 가서 밤늦게까지 있었고, 다른 때는 한 두 주에 한 번 정도 갔습니다. 수녀원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에 따라 달랐습니다. 수녀원에 가는 날은 대개 새벽 여섯 시 사십오 분 아침기도 직전에 성당에 가 있었습니다. 일곱 시 이십분 경 아침기도가 끝나면 원장님께서 수녀원 안으로 저를 들여보내 주셨고, 그러면 종일 그곳에 있다가 끝기도가 끝난 뒤인 여덟 시경에 나왔습니다. 그분들과 같은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오후에만 촬영해도 되는 날도 아침부터 가서 종일 그곳에서 보내곤 했습니다.
처음엔 그분들과 같은 일과를 보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수도원에서 며칠을 지내고 나자 낭패스러웠습니다. 이 영화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아득했습니다. 종일 기도만 되풀이 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점차 수녀원의 생활 리듬에 익숙해졌고 그러자 그곳에 가는 날이 기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갈 땐 휴대전화나 라디오는 물론 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것은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책조차 안 가져갔습니다. 수녀원에 있을 때는 수녀님들처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수녀원에서 저한테 방을 하나 주어서 거기서 식사도 하고 생각도 정리하고 촬영 장비를 정비하고 그랬습니다.
- 수녀님들이 감독님이 계신 것을 별로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무척 자연스럽게 대하시던데, 그런 관계가 자리 잡기
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영화 찍는 것을 싫어하신 분은
안 계셨나요?
처음 며칠은 좀 힘들었습니다. 다큐 필름을 찍을 때면 어떤 출연자라도 처음엔 다 불편해 하지요. 수녀님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수녀님들이 제가 있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복도 같이 단순한 곳부터 촬영을 시작했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펴보니 수녀님들이 자주 오가는 복도가 있어서 그곳에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그랬더니 수녀님들이 제 옆을 지나가지 않고 더 먼 길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랬는데 카메라가 친근히 여겨지게 되었는지 아니면 복도에 혼자 서 있는 제가 가여웠는지 결국 본래 다니던 길로 다니기 시작하셨죠. 전 다짜고짜 처음부터 기도 시간에 끼어들거나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방식을 택했죠. 수녀님들의 휴식 시간엔 카메라 없이 같이 앉아 시간을 보내며 무엇이든 물으시면 대답해 드렸습니다.
다큐멘터리 찍는 것에 찬성하지 않거나 그 일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분명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촬영 허락 결정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내려진 터라 모두 그 결정을 따라 주셨습니다. 사진 찍히는 걸 부끄러워하시거나 남달리 과묵하신 분은 계셨지만 저에게 반감을 보이신 분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 영화를 찍는 동안 들은 말씀이나 인생관 가운데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으신지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수녀님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분들은 믿음 때문에 베푸는 삶, 철저히 이타적인 삶을 살기로 선택하신 분들입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기도의 힘을 믿기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세상에 돌려줍니다. 세상에 대한 그런 사랑과 종교적 수양, 헌신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분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화해를 이룬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태도지요. 수녀님들은 내적 자아를 파악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도조차 하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현대 세계의 온갖 것들과 오락거리에 빠져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기를 소홀히 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삶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영혼의 ‘어둔 밤’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 신앙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순간에도 회피하지 않고, 나의 말을 들어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확신에 이를 때까지 버텨내는 용기를 지니기 위해선 더 깊고 더 철저하고 더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이 필요합니다. 의혹이 존재하지 않는 척한다거나 안락한 일상 뒤에 숨는 쉬운 대안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선 용기와 헌신이 필요하고, 이건 우리의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입니다.
수녀님들과 함께 한 시간에서 제가 얻은 건 많지만, 그 대부분은 저로선 그저 갈망할 수 있을 뿐입니다. 타고난 듯한 그분들의 선의, 사랑, 관대함, 규율 있는 삶, 유머, 삶의 모든 모습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자신을 내어 주는 것, 공동체에 배어 있는 사랑의 분위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그분들의 기도 같은 것들이요.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에 그 내용이 다 요약되어 있습니다. 철학자 파울 란츠베르크의 시 구절인데요, “선하신 당신 손을 잡고 살아왔나이다. 달고 진한 축복의 잔 가득히 마시며.” 저도 죽음의 때가 왔을 때 가족 친지와 함께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수녀님들께서 이 영화를 보셨는지, 보셨으면 그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요?
네, 보셨습니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요. 수녀원엔 TV도 영상을 띠울 수 있는 스크린도 없어서 제가 TV와 DVD 플레이어를 빌려드렸습니다. 수레에 실어 가서 사용법을 알려드렸죠. 같이 보고 싶었지만, 제가 없는 곳에서 당신들끼리 보시고 의견을 나누고 싶어 하실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당신들의 삶을 정확히 표현했다고 생각해 주시길 바랐기 때문에 수녀님들의 반응이 어떨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랬는데 무척 만족해 하셨어요. 저는 이 영화가 수도원 안의 삶을 제대로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가르멜 수도회의 역사
가르멜 수도회의 영성은 은수자 전통에서 생겨나 스페인의 유명한 두 신비가(神秘家)인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향을 크게 받아 매우 관상(觀想)적이다. 가르멜의 영성은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장 오래된 규율은 이렇게 지시한다: “각자는 다른 정당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는 한, 자기 수방이나 그 근처에 머물면서 주님의 법을 밤낮으로 묵상하고 깨어 기도할 것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야는 가르멜 영성이 생겨나도록 영감을 준 최초의 인물들이다. 엘리야의 예언은 이렇게 선포하도록 격려한다: “내가 섬기는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다!” 또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해 드리는 길을 가르쳐준다.
가르멜 전통의 기원은 이스라엘 가르멜 산의 은수자 공동체이다. 엘리야 예언자는 가르멜 산에서 활동하면서 바알 신의 예언자들에게 누구의 신이 진짜 신인지 결정하자고 도전하여 그들을 이겼다.
가르멜 수도회가 시작된 것은 12세기에 순례자였거나 십자군의 일원이었던 몇 명의 사람들이 가르멜 산에 모여 은수 생활을 하면서부터이다. 가르멜의 첫 수도원이 자리 잡은 곳은 엘리야의 동굴로 여겨지던 곳이다. 1452년 가르멜 수도회의 정신대로 살며 더 깊은 영성을 추구하고 싶어 한 신심 깊은 여성들이 가르멜 수도회 수사들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 피렌체에 수녀들을 위한 첫 번째 가르멜 수녀원을 세웠다. 이 수녀원은 수녀원에 은둔하여 봉쇄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기도와 묵상, 일, 고행에만 전념하는 공동체였다. 이러한 공동체들이 빠른 속도로 프랑스와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562년, 가르멜회가 처음 출발했을 때의 겸허한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걱정하던 가르멜회의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기도와 가난에 바탕을 둔 엄격한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고 수도원 개혁에 나섰다. 이것이 ‘맨발 가르멜회’로 알려진 수도회 개혁 운동이다. 개혁을 주도하던 데레사 수녀와 그녀의 협력자 십자가의 요한 수사 신부는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그들의 개혁 운동은 성공했고 두 사람 다 성인품에 올랐다.
런던 노팅힐 삼위일체 가르멜 여자 수도원
런던 세인트 찰스 스퀘어에 자리 잡은 노팅힐 삼위일체 가르멜 여자 수도원은 1878년 9월 19일에 설립되었다. 1604년 스페인 가르멜에서 파견된 수녀들이 설립한 프랑스 최초의 가르멜 수녀원으로 이름 높던 파리의 가르멜 수녀원에서 일곱 명의 수녀(영국인 수녀 둘과 프랑스인 수녀 다섯)를 파견해 런던에 관상 기도의 새 터전을 설립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열렬한 정신을 따라 영국 복음화의 영적 발전소 역할을 할 곳을 마련코자 함이었다. 이 작은 공동체는 가난하고 이름 없는 존재로 출발하지만 20세기 초가 되었을 땐 이미 온갖 계층에서 놀랄 만큼 많은 여성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대영제국 전역으로 가르멜회가 퍼져나가게 된 데는 예수의 마리아 원장 수녀의 역할이 무척 컸다. 위대한 성녀 데레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성덕으로 이름 높던 마리아 수녀는 1942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노팅힐 삼위일체 가르멜 여자 수도원은 설립 이후 두 번의 세계대전과 사회의 급속한 문화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가르멜회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가르멜회의 정신이 배어 있는 풍요로운 영적 유산에 충실한 동시에 변화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 진리의 빛을 비추고 관상과 기도로 교회와 세상에 이바지하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바이다. -
FLOS CAR
Ne me quitte pas
ME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