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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98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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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아무래도 좁은 문은 육에 끌리는 문이 아니라, 영에 인도되는 문이 아닐까요? 좁은 문은 우리 인간의 의지나 욕심에 이끌리는 문이 아니라, 성령과 주님의 뜻에 따르는 문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는 수많은 문들이 오라고 손짓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멸망에 이르는 죽음의 문들이 보이는 특징은 화려함이요, 휘황찬란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그럴듯 해보이고, 있어 보입니다. 요란스럽고 재미있어 보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다보면, 이미 깊은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 되돌아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늘 깨어 기도하면서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어떤 문이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인가? 어떤 문이 우리를 심연을 알 수 없는 깊은 죽음의 수렁 속으로 빠트리는 문인가?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을 목격한 이후 느베르 애덕 수녀회에 입회하셨으며, 평생토록 침묵과 기도, 희생과 봉사 속에 살아가신 성녀 벨라뎃다 수녀님의 감사기도를 묵상하면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발현하심에도 감사드리지만, 발현하지 않으심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제가 성모님을 이용해 큰돈을 벌고 있다고 의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억력이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암기할수 없었던 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서원식 후 애덕회 수녀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저를 귀여운 딸로서 안아주신 대신, 마리 벨라뎃다 수녀라고 불렀을 때, 마음이 아팠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요셉피나 원장수녀님이 저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 갖은 폭언과 차별, 굴욕의 방 처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 여자가 정녕 그 벨라뎃다인가?'라고 말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저라는 것과, 마치 희귀한 동물 대하듯, 바라본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눈앞에 나타나실 때도 감사드리지만, 나타나지 않으실 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물론 우리 역시 감사 노트도 마련하고, 감사꺼리들을 찾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기도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나 축복에 감사합니다. 건강과 성공에 감사합니다. 누구나 다 할수 있는 감사기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벨라뎃다 수녀님의 감사기도는 감사기도의 모델이요, 최종적인 지향점입니다.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는,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깊은 바닥으로 내동냉이 쳐졌을 때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것에 대해, 이제 남은 것은 바닥을 딛고 올라가는 것뿐임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이런저런 원치 않는 병고나 회복 불가능한 중병에 걸렸다할지라도, 이제 조만간 주님 나라로 건너가, 그분의 얼굴을 뵙게될 희망을 지녔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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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사람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결혼을 앞둔 처녀들에게 행하는 한 가지 행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많은 처녀들이 옥수수 밭에 한 고랑씩 맡아 그 고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 한 개씩을 따는 일인데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를 딴 처녀가 그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한번 지나친 것은 다시 돌아 볼 수도 없고 다시 돌아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옥수수 하나만을 따와야 합니다.
한 번 땄으면 도중에 좋은 것이 있다 해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딸 수도 없습니다. 기이한 일은 제일 좋은 옥수수를 따러 들어간 처녀들은 한결같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못나고 형편없는 옥수수를 들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뒤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백화점에서 옷 하나를 고를 때도 백화점 내의 대부분의 옷가게를 한 번은 훑어보고 보아두었던 것을 다시 찾아갑니다. 이런 능력이 있어야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다 훑어보신 다음에 괜찮게 보신 사람들을 뽑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주장이 칼뱅의 예정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천당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을 뽑아놓고 지옥 갈 사람들은 잘 자라도 죽이고 천당 갈 사람들은 못 자라도 결국엔 살린다는 주장입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앞뒤 안 가리시고 시간 속에 한정되어 미리 인간의 운명을 정하셔야 하는 약한 존재이실까요?
오늘 독서에 예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예정설은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그 은총을 내려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미리 뽑으셨다는 말을 ‘칭의’라 하고, 그래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의화’,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영광을 ‘성화’라 말합니다.
이는 가톨릭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가톨릭교리는 의화가 칭의보다 앞선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며 위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예정설은 하느님을 정의롭지 못한 분으로 만드는 잘못된 가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짓도록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유다를 뽑아 지옥에 보내셨으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악해도 천국으로 보내시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지옥에 가게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의 본성을 예정설로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주신다는 순서를 합리화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는 예정설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심이란 하느님께서 시간과 상관없이 한 번 훑어볼 능력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세상 시작 전부터 아셨습니다. 미리 아시기 때문에 구원될 이들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도록 불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사제로 살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도록 미리 결정하시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것을 아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구원을 위해 미리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리 뽑힌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어떤 면을 보고 미리 뽑으시고 은총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말합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이웃사랑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입니다.
돈에 대한 욕구, 성욕이나 식욕에 대한 욕구, 높아짐이나 명예에 대한 욕구를 거스르는 삶이 좁은 문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마치 강 위에 떠 있는 배처럼 그 물살을 거스르지 않으면 저절로 흘러서 지옥의 폭포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거스를 줄 아는 사람을 미리 보시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미리 뽑으신 이들을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미리 결정하셔서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젓고 싶어 하는 사람을 미리 아셔서 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지가 먼저냐, 인간의 의지가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예정설은 하느님의 의지대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이고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시고 주님께서 결정해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은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뽑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뽑히지 않아서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뽑히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자신을 거스르려는 의지, 그 의지로 하루하루 자신의 욕망과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이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반면 자아와 타협하라든지, 자아를 찾고 실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미리 뽑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도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내 자와의 욕구에 거슬러 좁은 문인 십자가의 영광으로 향할 때 주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인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추계 사제연수 관계로 금요일까지 묵상을 쉬도록 하겠습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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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22-30 :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그래서 이렇게 동문서담 같이 대답을 하셨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 것인지 아는 중요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명으로 가는 문은 왜 좁다고 하시는가? 그리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바르고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흠없는 도덕성을 갖추어,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사람에 해당될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고 하셨다. 그 길을 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4절)라고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적으로 적다 많다가 아니라 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를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 선택받았다.” 혹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자답게 살고, 있는 힘을 다해서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세례를 받고 성당에 와서 미사 봉헌을 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 삶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를 갈며 비통해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모른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다. 세례를 받는 그 자체로써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부름을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27절) 하신 이유는 “불의를 일삼았었다”는 데 있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일삼게 되면 그 하느님 백성의 자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올바로 실천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들만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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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의 수에 대하여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답을 주시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몇 사람이나 구원받을지 신경을 쓰기보다는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결단하라는 말씀이고, 그것을 위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그때까지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애원을 해도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바로 지금이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의 때이며, 올바로 살아가도록 결단을 내리고 노력해야 하는 때라는 뜻입니다. 언젠가는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릴 때가 올 터인데, 그때가 되면 돌이킬 수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욱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은, 거부당한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면서, 주인과 친교를 나누고 함께 지냈음을 호소해도 집주인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리라는 내용입니다. 집주인의 표현대로라면 그들은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맥은 심판을 암시하고 있기에 종말에 대한 가르침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시간이 영원히 연장되지는 않을 것이고, 너무 늦기 전에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노력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의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생활이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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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구원과 멸망>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좁은 문’은 하느님 나라의 문인데, 실제로 그 문이 좁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좁다고 생각하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세속 생활은 쉽고 재미있고 편안한데 신앙생활은 어렵고 재미없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느님 나라의 문이 ‘좁은 문’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세속 생활의 허무함을 깨닫고 신앙생활에서 ‘참 기쁨’을 얻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느님 나라의 문은 ‘넓은 문’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곳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왜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들어가지 못하는가? 희망은 하지만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믿음을 실천해야 하고, 희망한다면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사이비 종파의 헛된 주장이고 틀린 말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들어가는 사람보다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정원제가 아니라 자격제이고,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누구든지 자격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일은 없습니다. (석차나 등수를 매기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석 합격자 같은 것도 없습니다. 들어가면 구원받는 것이고, 못 들어가면 끝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시성식을 거행하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선포하는 일이 아니라, 그를 모든 신앙인의 모범으로 삼기 위한 일입니다. 성인들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성인입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5-27)
여기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는 말은, “너희를 모른다.”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은, “너희는 나의 집으로 들어올 자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세세하게 우리가 한 일을 전부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자신은 잊어버리고 있는 일들까지, 우리의 속마음까지 전부 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변명도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판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고,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라는 말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모르실 리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이 말에 그들의 죄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함께’ 먹는 것과 ‘앞에서’ 먹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은 사랑 실천입니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먹지 않고 그들 앞에서 먹는 것은 큰 죄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에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의 고통’이 더 커집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는 말도 주님께서 자기들을 모르실 리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이 말에도 그들의 죄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길거리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본(구경한) 사람들입니다. 가르침을 듣고 실천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책을 구경하는 것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미사 전례를 구경하는 것과 미사 참례 하는 것도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묵주를 가지고 있는 것과 묵주기도를 하는 것도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는 현장에 가서 그 일을 구경하는 것과 직접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묵주를 가지고만 있어도 은총을 받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기도는 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는 묵주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밖에서 구경만 해도 되는 나라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나라입니다. (‘밖에서’ 구경만 한다는 것은 멸망 상태로 떨어졌음을 나타낼 뿐입니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28-30)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에게 하시는 경고 말씀입니다. “너희가 신앙인이라는 자만심에 빠져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에는 너희가 들어가서 차지할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 나라의 ‘안’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곳이고, ‘밖’은 비참하고 불행한 곳입니다. 여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말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후회, 분노, 절망’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자기를 쫓아내신 주님에 대한 분노,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는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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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사제는 지옥에 가더라도 그 부모는 천국에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제의 부모가 천국에 간다는 것은 그들이 자녀를 하느님께 바친 사람들이며, 그 자녀를 위해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기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사제가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사제에게 구원의 문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축성된 사제라 할지라도 올바로 생활하지 않고 교만에 빠지면 당연히 구원의 문은 닫혀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신분보다는 ‘내면적인 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이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 반영된 질문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민족으로써 이스라엘인들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반면 다른 이방인들은 결코 하늘나라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는, 과연 이방인들이 얼마나 하늘나라에 올 수 있겠냐는 교만한 의도가 섞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인들에게 구원의 문이 보장되어 있지 않음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구원의 문에 이르는 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질적으로 어떠한 사람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질책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써 올바로 살아가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아무리 자비로우신 분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불의를 일삼는다면 주님께서는 결국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서남북의 의미는 이스라엘을 벗어난 지역, 즉 이방인들의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않으며 전혀 다른 종교와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다는 것은 그들이 비록 하느님을 모를지라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 “양심”에 맞춰 올바로 살아간다면 결국 구원받으리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써, 비록 그리스도를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안도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나오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그분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즉 비 그리스도교인들보다 우리는 훨씬 좋은 환경에 놓여있으며 하늘나라를 향한 확실한 지도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 하듯,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신 기도와 성사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우리들 앞에는 주님의 잔칫상을 위한 초대장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 초대장을 열고 그에 합당한 사랑과 희생의 예복을 차려입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초대장을 받았지만 그것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 소중한 초대장은 한낱 의미 없는 종이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그 기회를 지나친다면, 주님께서는 종국에,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시금 기쁜 마음으로 사랑의 예복을 정갈하게 입을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언제나 단정하고 말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싶지만 때로는 그 옷이 색이 바라기도 하고 지저분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로 다시금 새 옷을 준비하면 됩니다. 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현재 우리의 복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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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길섭 베드로 신부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혹시 여러 명이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그 기획에 맞추어 일을 추진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많은 분들께서 나름대로의 기억 안에서 그런 체험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뭐 당장에 각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행사와 일들의 대부분은, 결코 혼자서 기획하고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모여 복합적인 생각들 안에서 중지를 모아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 안에서 마련된 행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같은 목적과 같은 방향을 가져야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 가을에 준비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주님에 뜻에 맞는 일이시기를 바래봅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여러 명이 함께 모여 기획하고 추진하는 그런 일들에 대한 체험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신학교 때의 일입니다.
신학교도 나름대로는 대학교라고 축제도 하고 그럽니다. 약간 일반 대학의 축제와 다르긴 하지만, 참 재미있고 즐거운 축제를 지냅니다. 물론 축제기간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됩니다.
한 번은 제가 그 프로그램들 중 한 코너의 기획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전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을 새롭게 기획해서 마련해야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많이 긴장되었고, 그 만큼 많이 노력 했습니다.
그런데 결코 저 혼자만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진심으로 각자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그래서 너무나도 함께하는 모습으로 그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습니다. 결과 처음 시도한 일이었지만, 좋은 결과를 맛볼 수 있었고, 제가 듣기로는 아직도 그 프로그램이 신학교 축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굳이 그 프로그램이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내용은 어떠했는지 등등을 말씀 드리지 않는 이유는, 프로그램 자체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이들이 똘똘 뭉쳐서 공동의 지향점을 잃지 않고 각자 맡은 바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자신의 성향 내지는 취향과 맞지 않은 일을 담당하게 된 사람도 있었고, 그 맡은 바를 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는 함께 똘똘 뭉쳐 준비했고, 결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신학생들.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잠재울 줄 아는 신학생들의 아름다움이 절로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사도만의 고백이 아니라 저의 고백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시도와 결코 쉽지 않은 준비 일정, 결코 쉽지 않은 모든 상황. 그러나 그러한 때, 저희 작은 공동체의 모토가 되는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뛰어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헤쳐가야 하는 풍랑이 심했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면, 우리 한 번 해 보자라고 마음먹었던 그 시간,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대로 책임을 다하며 임했던 모든 노력들.
결과는 차치하고 과정을 바라보면서 이미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일임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이 첫째가 될지, 꼴찌가 될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 꼴찌가 되는 것도 알고 보면,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라는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라는 말씀에 희망을 둘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함께 좁은 문을 찾고 그리로 들어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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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좁은문>
오늘 복음 [루카 13, 22-30]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께 질문하기를 "천당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하고 물었다.
이렇게 질문하는 의도는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이 자기네들만이 천국에 불림을 받아 들어갈 수 있고 다른 민족, 다른 백성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무시했기에 그들이 어떻게 야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데서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도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적으로 많고 적음이 아니라, 질적으로 어떠한 사람이냐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 하셨다.
즉, "유대인으로 선택받았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하며, 있는 힘을 다해서 신앙의 생활에 충실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세례를 받는 그 자체로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불림을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너희를 모른다"하신 이유는 "악을 일삼았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만, 남에게 교리를 전하고 가르친다고 하지만, 주의 제대에서 성찬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받아 모신다고 하지만, 주의 뜻대로 살지 않고, 악을 일삼아 저지름으로 해서 주께서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는 말씀이 나에게도 떨어지지 않도록 믿음을 가진 자답게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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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류시찬 보나벤투라 신부님]
성경에서는 오늘 복음에 대해 ‘구원과 멸망’이라는 소제목을 달아놓았습니다.
첫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여러 고을을 여행하시면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을 토대로 복음관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삶의 자세 또는 영적 여정에 대한 가르침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묵상하는 것이 더 유익하겠습니다.
먼저 알아들어야 할 대목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기는 하지만 실패한다고 하십니다.
처음부터 관심조차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각자 처해 있는 상황과 결부 지어 많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또 무슨 의미인지 나름대로 생각을 통해 길어 올리는 영적 유익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덧붙여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자기들이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고 하는 대목도 눈여겨봐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또는 영적 여정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계신 듯 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깊게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묵상을 할 땐 늘 그러하긴 하지만, 필히 자신의 상황이나 처지 또는 자신의 모습과 관련지어 말씀을 이해하고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영적 깊이에까지 도달한 깊은 생각을 통해 자신의 삶과 존재가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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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우리예요. 그래, 너희구나>
루카 13,22-30 (구원과 멸망)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주님, 우리예요. 그래, 너희구나>
제 배 채우려는 이들을 거슬러
주님께서 우리에게 먹히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먹습니다
우리가 벗들에게 먹힙니다
먹히시는 주님께서
먹히는 우리를 알아보십니다
우리가 벗들을 먹습니다
먹히시는 주님께서
먹는 우리를 몰라보십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섬기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벗들을 섬깁니다
섬기러 오신 주님께서
섬기는 우리를 알아보십니다
우리가 벗들에게 섬기라 강요합니다
섬기러 오신 주님께서
섬김을 받으려는 우리를 몰라보십니다
벗들을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죽으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죽자고 하십니다
우리가 벗을 위해서 죽습니다
살리기 위해 죽으시는 주님께서
죽는 우리를 알아보십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 벗을 죽입니다
살리기 위해 죽으시는 주님께서
죽이는 우리를 몰라보십니다
주님께서 몸소 먹히십니다
주님께서 몸소 가르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이 되라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십니다
우리가 제 길을 갑니다
우리와 주님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몰라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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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한 말씀으로….>
얼마 전에 외출했다가 용무가 급해서 신발을 벗고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용무를 끝내고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신발 한 짝은 밖에, 그리고 한 짝은 거실 안쪽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먼저 신발을 벗는 데 있지 않고, 화장실에 가 있으니 신발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현실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때 제가 묵상했던 삶의 방식이 변화되었습니다.
“네 발밑을 보라.” “지금(현재)에 먼저 충실하라.”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충실하라.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라는 것으로 묵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가는 좁은 문이 참 어렵습니다. 또 어찌 보면 한편으론 주님께 가는 좁은 문이 쉽기도 하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단순하게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좁은 문이란? 내 발밑을 보면서 지금 충실하게 하는 삶이 아닌가? 묵상해봅니다. 걱정을 내려놓습니다. 가장 든든한 최고의 힘인 우리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주님께 여쭙고 주님께 매달리면 되겠습니다. 고운님들의 삶이 급한 것과 중요한 것에 섞여 혼란스러워도 주님께 맡기고 지금에 충실할 수 있는 여유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고운님들을 도우소서.”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살다 보면 제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큰일은 큰 인내(기다림, 참음, 견딤)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장 28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자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고운님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말씀의 은혜로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몸과 마음이 아픈 모든 이들과 간호하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도 치유의 은총으로 편안한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님만 믿습니다.”라고 기도로 하면서, 고운님들이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아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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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00)
♧♧ 시편 58편 4절….
"악인들은 어미 배에서부터 변절하고 거짓말쟁이들은 어미 품에서부터 빗나간다."
* 악인들은 어미 배에서부터 변절하고...
이 구절은...악인들의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들의 본성이 천성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이사야서 48장 8절. 참조) 물론 아담의 타락 이래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지으려는 본죄 성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전혀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는 성미가 까다롭고 고집이 센 영혼의 소유자들의 실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돌이켜 회개할 줄 모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마음을 악하게 먹고 악한 행위를 할 뿐이니 곧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길에서 떠난 자들인 것입니다.(에페소서 4장 18절. 참조)
* 거짓말쟁이들은 어미 품에서부터 빗나간다.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론 입으로 범하는 악인이고, 보다 더 넓은 의미로는 이들이 근본적으로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불의를 밥 먹듯이 저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요한복음 8장 44절. 참조) ‘빗나간다...’라는 말은 악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본죄 성’을 쫓아 하느님의 미워하시는 죄악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시편 58편 5-6절….
"그들은 뱀과 같은 독을 지녔다. 제 귀를 틀어막아 귀먹은 독사처럼. 능숙하게 주문을 외우는 주술사의 목소리를, 요술사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독사처럼."
* 그들은 뱀과 같은 독을 지녔다...
어떤 독은 인체에 냉기를 일으켜 생명을 앗아가고 또 어떤 곳은 뜨거운 열을 일으켜 생명을 앗아가 버립니다. 다윗은 이 구절에서....이와 같은 독을 지닌 독사가 사람을 물어 생명을 해치듯이 불의한 재판관들이 그들 입에서 내뱉은 부당한 판결로 무죄한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그리고 뱀의 독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결코 없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들의 악한 뜻도 뱀의 독과 같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제 귀를 틀어막아...독사처럼.
이는 불의한 재판관들의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자세를, 평소에 뱀을 길들여 재주부리게 하는 주술사와 요술사가 아무리 능숙하게 주문을 외워도 그 소리를 듣지 않는 귀머거리 독사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들은 귀먹은 독사처럼 결코 그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을 두지 않으며 무죄한 이의 탄원도 결코 듣지 않고 자기의 악한 생각대로 왜곡되게 판결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훈계를 멸시하고(잠언 1장 7절. 참조) 악한 행위를 일삼는 자들은 필연코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잠언 1장 26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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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안식년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당시에 식사를 직접 해 먹어야 했기에 식사 때가 되면 ‘뭐 먹지?’라는 고민을 하곤 했습니다. 그날도 고민 중에 간단히 파스타를 해 먹겠다고 결론지었는데, 제가 알고 있는 파스타 요리법과 다른 것이 있을까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완벽해 보이는 훌륭한 요리법을 찾았습니다. ‘이것으로 결정했어.’ 했는데, 글쎄 다른 곳에서 더 맛있어 보이는 파스타 요리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 뒤에 한참 동안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응용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깜짝 놀랐습니다. 인터넷을 살피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녁에 있는 약속 시각도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에는 급하게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는 약속 장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인터넷을 계속 살피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리법을 찾을 때도 처음에 발견한 방법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고 다른 요리법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못 하고 시간만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실행은 하지 못하고 준비만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말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우를 참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실행하는 것입니다. 계획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준비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 안에 큰 획을 이룬 사람들이 과연 완벽한 준비를 통해서 실행하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대부분 40% 정도의 준비만 되면 곧바로 실행한다고 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구원의 문은 너무나 좁고 들어가는 사람도 몇 되지 않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렵고 힘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지금 당장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는 끔찍한 말씀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금 당장 힘을 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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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구분법}
어떤 신부님을 만났는데, 소위 명품이라는 평을 받는 가방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같이 있던 신부들이 “와~~ 이 가방 명품 아니야?”라고 말하자, “이거 짝퉁이야. 얼마 전에 이태원에서 2만 원 주고 샀는데, 진짜랑 똑같지?”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명품인지 짝퉁인지 도저히 구별하기 힘들더군요. 그런데 인터넷을 보니 비가 오면 그 구분을 정확하게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정확하게 말해서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가 오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 그 가방을 머리에 이고 비를 피하며 달려가면 틀림없는 짝퉁!
- 그 가방이 비 맞을세라 품에 꼬~옥 안고 뛰면 100% 명품!
또 하나의 명품가방 구분법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 남자 친구가 사주면 명품
- 남편이 사주면 짝퉁
과연 명품 구분법이 될까요? 그런데 이렇게 외적인 명품을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의 명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명품으로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만큼, 그 명품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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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손님이 오면 잠시 방을 바꾸게 됩니다. 방을 바꾸면서 짐을 옮기는데 생각보다 옮길 게 많습니다. 소소한 것이지만 없으면 아쉬워서 하나둘 옮기니 많아졌습니다. 이것도 몇 번 하면 요령이 생기겠지요. 저도 예전에 여행하면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깨끗한 침구, 정갈한 욕실, 냉장고의 음료수는 그냥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세심하게 배려해준 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만큼의 정성은 기울이지 못하지만, 방을 옮기는 거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지난봄 아르헨티나에 갔을 때 저를 위해서 방을 내어주시고, 맛있는 음식까지 준비해주신 어르신께 새삼 감사드립니다. 매일 아침 저를 위해서 공원 산책까지 가주신 형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처지를 바꿔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편견과 자신의 견해만 생각하기에 오해가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분노하게 됩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 예상 문제에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Detour”이라는 표지판입니다. 정답은 ‘우회하시오’입니다. 예전에는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다는 표시입니다. 내비게이션에는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회로는 시간이 걸릴 수 있고, 우회로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회로를 따라가야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회로를 따라가야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매일 가던 길이라고 우회로 표시판을 무시하면 다시 돌아올 일이 생깁니다. 잘못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상문제에 ‘우회로’ 표시판이 자주 나오나 봅니다.
25년 전에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면담하셨고, 저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미국에 오는 게 지금과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젊었고, 자신감도 있었고, 걱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게 우회로를 마련하셨습니다. 25년 동안 시골 본당에서도 있었고, 교구청에서도 있었고, 청소년국에서도 있었고, 안식년도 지냈습니다. 나이도 먹었고, 자신감도 줄었고, 걱정도 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제게 우회로를 마련하셨는지 의미는 잘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건 지금 제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이라는 우회로를 말씀하십니다. 크고 넓은 길, 성공과 재물이 보장된 길, 남들이 다 원하는 길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회로를 마련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도, 교회 공동체도 그런 길을 따라갔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멀리 돌아가는 우회로를 제시하십니다. 막히고, 사고의 위험성도 있고,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르는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무서워서 그 길을 따르지 못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고, 기꺼이 예수님께서 몸소 걸어가셨던 우회로를 따라갔습니다. 그 길이 비록 험난하고, 그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충실하게 따라갔습니다. 그 길만이 부활의 길이며, 그 길만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길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길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길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길은 결단의 문제입니다. 섬기는 삶, 겸손한 삶, 믿음의 삶, 사랑의 삶, 희망의 삶을 선택한다면, 그 길을 충실하게 걸어간다면 그 길은 좁은 문일지라도, 그 길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문이 되는 겁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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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좁은문>
-구원과 멸망-
오늘 복음의 어떤 사람과 예수님의 주고 받은 문답이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미래에 있을 구원 받을 사람들의 숫자를 묻습니다만, 주님은 미래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각자 주어진 좁은 문 통과에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입니다. 각자의 십자가가 다르듯, 함께 살아도 사람마다 좁은 문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결코 비교할 수 있는 좁은 문이 아닙니다.
멀리 밖에 있는 어느 날의 좁은 문이 아니라 오늘 각자 통과해 나가야 할 좁은 문입니다. 말그대로 누가 대신 통과해 줄 수 있는 좁은 문이 아니라 하루하루 내가 통과해 나가야 할 내 좁은 문입니다. 이래서 삶이 외롭고 힘들고 고달픈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바쁘고 힘들다는 이구동성의 고백들, 바로 각자 좁은 문들의 어려움에 대한 호소처럼 들립니다.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 나에게 주어진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오늘 복음 주제는 '구원과 멸망'입니다. 새삼 구원과 멸망은 선택에 달려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좁은 문을 선택하여 온 힘을 다해, 즉 용기와 슬기와 끈기를 다해 통과해 나갈 때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젠가의 구원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을 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회개를 통해 하루하루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좁은 문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좁은 문입니다. 하루하루 좁은 문이 닫히기전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구원은 없습니다. 죽음으로 문이 닫힌 다음 아무리 호소해도 늦습니다.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주님의 대답은 냉냉합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평생 주님을 나름대로 믿고 따랐는데 주님의 대답은 청천벽력의 충격입니다. 일방적 짝사랑의 관계 였다는 말인지요. 다시 주님의 착각이 아닌가 싶어 주님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호소가 참 절박하게 들립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호소하지만 주님은 거듭 같은 내용의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너희기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나는 모른다”라는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주님의 뜻이 아닌 내 좋을 대로 내 뜻대로 주님을 따랐음을 뜻합니다. 완전히 착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았을 것이고 주님을 알고 주님도 그를 알아 주님과의 우정도, 앎의 관계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대로 오늘 좁은 문을 통과해 나가야 할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입니다. 하여 주님께 돌아와 주님께 귀기울이는 경청과 주님의 뜻에 따른 정의의 실천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끊임없는 회개는 셋으로 표현됩니다.
“기도하라”, “공부하라”, “실천하라”입니다. 기도와 말씀공부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실천함으로 좁은 문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이렇게 기도와 공부와 실천을 통한 회개의 삶에 충실하며 좁은 문을 통과할 때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이런 좁은 문은 밖에서 볼 때 좁은 문이지 날로 내적으로 넓어져 가는 감미로운 길일 수 있음은 분도 성인의 규칙에도 나옵니다.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우정, 넓어지는 마음, 사랑의 감미, 바로 여기에 참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좁은 문을 통과해 가면서 깊고 단순하고 아름다운 품위 있는 삶도 형성됩니다. ‘살아서 돌아온 자’라는 시 역시 좁은 문들을 통과해 가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진실이 무르익는 시간이 있다
눈보라와 불볕과 폭풍우를/다 뚫고 나온 강인한 진실만이
향기로운 사과알로 붉게 빛나니
그러니 다 맞아라/눈을 뜨고 견뎌내라/고독하게 강인해라.”-박노해.
이런 좁은 문들의 삶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성령입니다. 좁은 문 통과에 힘들어 하는 나약한 우리들 도와 주시는 성령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깨닫게 되니 바로 좁은 문들을 통과해 나갈 때 주시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우리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루하루 좁은 문을 통과해 가면서 부르신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당신과의 우정도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마침내 죽음으로 구원의 좁은 문을 최종적으로 통과했을 때는 완전히 주님을 닮은 참 내 모습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이 목표하는 바 모두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좁은 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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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힘써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는 유명한 매장 패션밸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백화점이나 마찬가지인데 규모는 훨씬 큽니다. 한국은 땅이 귀한 까닭에 위로 치솟지만 미국은 땅이 넓은 탓인지 바닥에 넓게 펼쳐놓았습니다. 지진을 대비한 안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층빌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매장이 넓습니다. 동행한 분이 명품코너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는데 아주 비싸다고 하시며 한번 구경하시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석인데 어디서 보석을 찾습니까?” 했더니 “신부님은 왕자 병”이랍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납니다. 귀한 보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귀한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석을 아름답게 빛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가13,23)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가13,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보석을 잘 가꾸어야지 남이 만들어 놓은 보석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사력을 다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분투노력하듯이 우리도 구원을 위해 힘을 쏟아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 날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루가13,28) 지금 노력하지 않고 훗날 우정과 연줄에 매달려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형제들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루가8,21참조)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요한사도는“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24,13)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영적인 갈망으로 힘쓰고 있는 하나하나의 수고와 땀을 헤아리십니다. 문은 좁지만 들어가면 있을 곳이 많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 14,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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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의 말씀들은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루카 13,23)
이 질문에는 묻는 이의 비관적 선입견이 묻어나는 듯합니다. 보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많지요?"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철부지 어린이의 마음으로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기존의 관념에 매인 이들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이 "좁은 문"이 꼭 물리적으로 폭이 좁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폭이 좁은 문이라면 들어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고 기다리기 힘들어서 그렇지, 입장이 제한되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좁은 문"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나는 문이다."(요한 10,9)
예수님은 당신을 문이라 계시하십니다. 과연 예수님은 문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샘이 흐르는 기름진 풀밭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영육으로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요로워집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요한 14,6 참조)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스스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선민 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위한 다른 문이 필요 없습니다. 율법과 경신례의 철저한 준수가 구원의 담보니까요. 그런데 느닷없이 등장하신 예수님께서 회개와 의로움과 사랑을 설파하시니 헷갈립니다. 그분 가르침에 따르면, 제법 열심하고 정결한 자기들보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니(마태 21,31 참조) 그동안 안주해 온 구원관이 뒤집힐 것같은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좁은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입니다만,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설렁설렁, 대충, 하는둥 마는둥, 들어가도 그만 안 들어가도 그만'이 아니라 "힘써야" 합니다. 또 마냥 열려 있지만은 않는 문이기도 하지요.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는"(루카 13,25) 때가 반드시 온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
뒤늦게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주님과의 인연을 들먹이지만 주인은 냉정합니다. 모든 걸 아시는 분이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주님과의 인연은 피상적인 껍데기와 같은, 날려 버릴 검불 같은 끈이었던 겁니다. 그분과 먹고 마시며 그분 가르침을 들었어도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맺어지지 못한 관계는 모르는 사이만 못합니다. 새로운 초대와 기회를 가벼이 흘려보냈고 기존의 것에 매여 무심결에 거부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주님은 내내 거절 당했고 내침 당했으며 차선에 또 차선으로 미루어지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의"는 도덕적, 윤리적 범죄를 의미하지 않을 겁니다. 믿지 않은 불의함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서가 준비하고 가리키는 분을 마주하고서도 모르는 체, 보다 율법지향적이고 자기네 기득권에 도움이 될 다른 메시아를 기다린 불의한 침묵입니다.
"너희만 밖으로 쫒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루카 13,28)
그 결과는 "밖"입니다. 문을 통과해 들어가지 못했으니 구원의 바깥입니다. 구원, 하느님의 나라 안에는 선조들과 예언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든 믿는 이들, 이스라엘이 천대하고 소외시켰던 이방인들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된 이들을 "아드님과 같은 모상"(로마 8,29)이라 부릅니다. 피조물로서 얻는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30)
오늘 독서에 자주 등장하는 "미리"라는 말씀 때문에 구원예정설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신 모든 이가 다 당연히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매순간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정하셨지만 부르심에 응답을 하지 않기도 하고, 응하기는 했으나 의로워질만한 믿음을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먼저 택하시고 당신 것이라 불러주신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요.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이 적은지' 물었던 그 사람의 내면의 동요가 느껴집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정하시고 부르신 그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힘써야" 합니다. 기존 질서에 생긴 균열의 틈을 찢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의로움을 쟁취해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치 탄생의 순간에 좁디 좁은 어미의 산도를 고통스럽고 의혹 가득한 두려움으로 범벅이 되어 통과했듯이 말입니다.
구원. 참 아름답고 행복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 역시 그렇지요. 죄스럽고 모자라고 볼품없는 몰골로, 주제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보겠다고 힘쓰고 애쓰며 구원의 좁은 문이신 주님을 관통한 우리가 거기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로마 8,29)으니 그 은총을 잃지 않도록 정말로 정말로 힘씁시다. 우리의 소중한 자유의지까지 다 동원해 온 힘을 다해 힘씁시다. 그 구원의 축복을 누려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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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우리 욕구를 만족시키면 행복을 주는가?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정작 행복을 찾아낸 사람은 드문 것 같다. ‘행복’을 ‘손에 잡히지 않는 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사람들은 매년 휴가, 더 큰 차, 더 맛있는 음식,더 짜릿한 오락과 소비품 구입에 수천만 원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스트레스를주고 있다.
왜 그럴까?
-「행복 찾기-영성으로 스트레스 다스리기」중에서
♣대답은 간단하다. 앞에서 말한 것들, 즉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사실 참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잡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행복을 애써 찾으려 하면 할수록우리는 더 큰 스트레스에 짓눌리게 된다. -상동
참고로,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 : 인간의 내부에
잠재하는 5단계의 계층을 주장하였습니다.
1단계 : 생리적 욕구,
2단계 : 안전 · 안정의 욕구,
3단계 : 사회적 욕구,
4단계 : 존경의 욕구,
5단계 : 자기실현의 욕구 등으로 구분합니다.
1단계~3단계는 결핍 욕구이고, 4단계~5단계는
성장 욕구로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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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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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이제 생명으로 가는 문이 왜 좁은지 이야기해야겠군요. 그리로 들어가려는 이는 누구든지, 무엇보다 먼저, 바르고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흠없는 도덕성을 갖추어, 인간적 의로움에서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합니다. … 그 생각과 영적 능력에서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쉽게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로 달려갈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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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초대권>
"하느님 나라의 잔치상에 자리 잡을 사람>
힘들때 손이라도 벌릴까 무서워
자리도 같이 안하고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잔치상을 베풀면 언제
그랬냐는듯 친한 척합니다.
그런 부류를 주님께서 난 너희를 모른다!
우리가 어느때 주님께 음식을 드렸고
목마른 주님께 마실것을 드렸나?
미소한 형제에게 베푼 사랑이
하늘나라 잔치에 들어가는 자격입니다.
하늘나라 초대권을 주시려는데
눈 감고 살다가 나중에 아무리 초대권
받으려고 줄 서 기다려도 소용없게 됩니다.
늦기전에 주님앞에 나를 비춰봅시다.
'난 너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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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 30)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내리막과 오르막의
힘겨운 길입니다.
한순간에
미끄러져내리는
수 많은 첫째들을
만납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꼴찌가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지는 해처럼
삶은 참으로
짧습니다.
그 어떤 자리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붙잡아야 할 것은
자리가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처음과 끝
첫째와 꼴찌
모두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부패한 첫째가
아니라 회개하는
꼴찌이길
바라십니다.
첫째와 꼴찌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마지막과
마무리가
아름다운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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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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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시면 함께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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