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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통발달사 8
문호개방과 육상교통의 개화 - 치도, 전국도로망
1. 육상교통의 개화 문호 개방과 함께 치도론 대두
조선시대에는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문경새재와 충주를 거쳐 서울∼부산을 왕래했다. 함경도는 높은 태백준령 때문에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될 때까지 걷거나 당나귀를 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6개 간선도로는 관청에서 방치해 잡목이 우거진 오솔길 같았다.
그러나 국내 개화파 인사들이 선진국을 견학하고 돌아온 뒤 육상교통에도 개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조선후기의 육로교통
한강과 낙동강을 이용했던 경부 육로교통
우리나라가 개화의 문을 열기 훨씬 이전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있던 한양성과 왜구가 가장 많이 침범했던 부산 사이의 육로교통은 어떠했고 화급한 왜적의 침범소식은 어떤 방법으로 어떤 길을 택해 서울의 궁궐에 전달했을까.
1592년 선조 25년 4월 13일 15만의 일본대군이 부산을 함락했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치욕적인 대침략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 조정은 육로교통의 개화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종3품의 벼슬로 부산을 통치하던 수령인 부산 첨사(僉使) 정발(鄭撥)의 태만 때문에 부산성이 함락되었지만, 이 급보를 한성 조정에 빨리 전달하게 한 사람은 부산지역의 수군(水軍)을 통솔하던 박흥(朴泓)장군이었다.
다리가 길고 날씬한 젊은 수군을 뽑아 서울로 급히 급보를 전달하게 했으나 13일에 떠난 급보가 17일 아침에서야 궁궐에 도착했으니 부산에서 서울까지 5일이 걸린 셈이다. 이렇게 화급한 소식을 전하는 통신병이 달릴 때는 배도(倍道)를 했다.
보통사람들이 이틀 걸리는 길을 하루 이하로 줄여 전달하는 것이다. 당시 부산∼상주∼문경새재∼충주∼서울간 1천20리를 가려면 보통사람은 빠르면 10일, 늦으면 15일이나 걸렸다.
임진왜란의 급보가 서울에 전달될 때까지 걸린 5일간 부산을 함락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 4월 17일에는 밀양을 함락하고 선봉이 낙동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렇게 왜군들은 노도처럼 북진해 상주∼문경을 거쳐 4월 28일 충주에 도착했다. 왜군들이 충주에 집결한 것은 한양을 침공하기에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충주가 부산∼서울 길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요지임을 왜군이 간파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조선시대에는 문경새재와 충주를 거치지 않고는 서울∼부산 왕래가 불가능했다. 남한강과 낙동강으로 연결되는 강운(江運)을 이용하면 인마의 왕래와 화물수송이 가장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이다. 한강∼충주∼낙동강의 서울∼부산 코스 중 충주가 두 강을 이어주는 육로교통상의 중간 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역할을 했다.
서울에서 떠나는 여행객이나 보부상들은 마포에서 배를 타고 경기도 팔당의 양수리까지 나아가 여기서 남한강을 이용해 양평→이포→여주를 거쳐 충주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충주→안보(수안보)→문경새재→함창에 있는 낙동강 상류까지 걸어 들어가 배를 타고 낙동강을 통해 부산까지 갔다.
낙동강∼충주의 육로∼한강으로 연결되었던 부산∼서울 길은 국내외 관리들뿐 아니라 일반백성이나 상인들도 이용했던 중요하고 빠른 길이었다. 더구나 무거운 짐을 가지고 다니던 상인들은 육로보다는 강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에 낙동강과 한강연안의 나루인 포(浦)나 창(倉)은 항상 여행객과 상품들로 붐볐다.
제1차 임진왜란은 명나라 원군과 권율(權慄) 장군의 반격으로 끝났으나 선조 30년(1597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시한 화의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14만의 왜군이 다시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맞았다. 조정은 이때까지 이용했던 우역제도가 너무 느려 제 역할을 못하자 더 빨리 긴급한 공문서를 전달할 수 있도록 파발제도를 만들어 보발과 마발을 두었다.
서울∼의주간 중국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한 서발에는 말을 탄 마발을, 서울∼함경도 아노진간의 북발에는 병사가 뛰는 보발을, 부산까지의 남발에는 보발을 두었다. 남발은 경기도 광주의 신천참(新川站)에서 출발해 충주의 임오참을 거쳐 동래 초량참까지 모두 중간역 역할을 하는 34곳의 참을 두었다. 이 참들은 오직 국가의 화급한 장궤를 임금에게 올리는 통신병만 사용하는 비상교통망이었다.
30리마다 설치된 참(站)에 주둔한 병사들이 국가의 시급한 문서를 받아 쥐고 다음 참까지 뛰어 전달하는 릴레이식 전달방식이었다. 얼마 후에는 보부상들의 사발통문을 이용해 산과 강을 하루 낮 또는 하루 밤 사이에 달려내, 배도로 달리는 보발병(步撥兵)보다 더 빨리 소식을 전달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의 발과 말(馬), 배로 달리는 경부간 육로교통은 1905년 경부선 기차가 개통될 때까지 이어졌다.
가장 미개했던 함경도 교통
경원선 철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동해안을 연결해 동해 바다에서 나는 풍부한 해산물을 내륙으로 유통하고 러시아와의 교역에도 중요한 몫을 하는 철도였다. 경부선, 경의선, 경목선, 경인선은 그런대로 지세가 편평해 철도부설공사가 비교적 쉬웠으나 경원선은 태백준령이 험난해 5개 간선철도 중 제일 늦게 착공되었다.
이렇게 험난한 함경도 교통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정책이 바뀔 뻔한 적도 있었다. 제14대 선조(1552∼1608년) 때의 일이다. 선조는 선정에 힘썼으나 국력이 쇠약해져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7년간에 걸쳐 전란 속에서 큰 시련을 겪었다.
선조 16년(1583년)에는 함경도 북관(北關)쪽에 오랑캐가 침입해 두만강 조선쪽의 경원부(慶原府)를 함락하고 남진할 태세였다.
조정에서는 전국에 동병령(動兵令)을 내리고 신상절(申尙節)과 신립(申砬) 등의 장수를 보내어 오랑캐를 막도록 했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에서 동원된 병사들이 철령을 넘어 북진하는데 강추위가 몰아친 1월이라 높은 고개 철령을 넘다가 지치고 얼어죽는 병사가 부지기수였다.
사람 몸 하나가 태백준령을 넘는데도 이 고생인데 군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무거운 군량미의 수송은 첩첩산중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군사들도 중요하지만 군량미는 군졸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어서 수송을 연구한 끝에 병조판서였던 이이(李珥)는 엉뚱한 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철령(鐵領) 넘어 함경도로 양식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서얼(庶孼)을 허통(許通)하도록 윤허하시옵소서’라는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궁여지책으로 선조 임금께 올렸던 것이다.
이 시절 서자나 얼자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고 과거도 볼 수 없었다. 대갓집 서자가 가난한 집 적자와도 혼인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이렇게 왕조시대는 신분구조가 엄격했는데, 군량미 수송문제로 서얼을 해제하라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함경도 북관땅으로 가는 교통이 얼마나 험하고 어려웠으면 서얼 허통까지 들고 나왔겠는가. 함경도 땅은 분명히 조선 땅이었지만 높은 태백준령이 한양과 함경도를 갈라놓았기 때문에 개화 이후에도 함경도는 두만강 건너 러시아와 오히려 교역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조선말 개화바람을 타고 이 땅에 상륙한 외세들이 조선내의 이권을 서로 쟁탈하려 혈안이 되어 경원선 부설권을 노릴 때까지 한양의 조정은 함경도의 통솔은 물론 외침을 막는데 불편한 교통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다.
갖가지 묘안을 짜냈지만 별 뚜렷한 효과가 없었다. 험준한 산악과 높은 태백산맥을 넘어야 했기에, 함경도로 가는 길은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될 때까지 오직 사람의 발과 당나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문호개방과 치도론 대두
조선조 말의 도로 상황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여진, 몽골, 일본 등의 외침을 막기 위해 외적이 침입할 수 있는 중요한 길을 폐쇄해 교통로의 개발을 중단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길이 옛날의 원시적인 오솔길을 면치 못했다. 이에 따라 부락단위의 자급자족식 경제구조로 변해 지방간의 경제유통을 위한 물자를 대량 운반하는 수레와 이 수레들이 다닐 수 있는 넓은 도로가 필요 없었다.
다만 인마(人馬)만 통행할 수 있는 오솔길이면 만족했다. 그러니 문호가 개방되면서 들어오는 외국인들은 우리의 옛길에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를 다녀간 외국인들과 조선총독부의 기록을 통해서 조선말엽의 육로교통상황을 알 수 있다. 독일외교관으로서 1882년 우리조정의 고문으로 부임해 여러 해 근무했던 묄렌도르프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조선의 도로는 매우 빈약하다. 길은 조악하고 다리는 거의 없다. 교통의 수단은 소와 말이다. 수레는 매우 구조가 허약하고 선박은 원시적이며 초라한 조각배들이다. 도로와 다리를 잘 계획해 축조하고 주선과 지선을 가진 합리적인 철도교통을 건설한다면 조선은 복지국가로 발전할 것이다.’
1894년 한성(서울)에 부임한 영국공사와 같이 왔던 영국의 여류여행가 비숍 여사는 제물포에 내려 서울로 들어오면서 겪었던 당시 조선 도로의 형편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의 길은 인마의 통행으로 자연히 생긴 것인데, 노면이 조악해 운송기관을 전혀 사용할 수 없어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네 사람이 맨 가마 하나가 지나는데도 양쪽 가옥의 처마에 걸려 애를 먹는 것이 일쑤였다.
도로의 폭은 1m도 안되고 논과 밭둑을 지나는 길고 꼬불꼬불한 돌투성이 길뿐이다. 그 길은 넓은 곳이라도 소 두 마리가 같이 갈 수 없고 좁은 곳을 한 사람이 서 있으면 통행을 막을 정도이다.’
1935년 총독부에서 발간했던 서정(庶政) 25년사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조선의 도시들은 옛날부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성의 내외도로는 협소하고 오물투성이에 굴곡이 심하다. 교통위생상 결함이 많아 장래 개화된 신식교통수단을 사용하는데 큰 지장을 초래할 형편이다.
도로는 인공수리를 하지 않아 황폐하고 여행객은 겨우 밭둑을 통행하며, 화물은 사람과 소의 등으로 운반하는 상태다. 하천에는 교통량이 없는 곳이 많아 거의 작은 도선에 의존하고 있다.’
1937년 총독부에서 펴낸 ‘조선토목사업지’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도로시설은 특별한 법규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각 도·군·면에서 지방주민의 자치적 관습에 따랐기 때문에 수레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는 거의 없다.
그밖의 도로는 도로 폭이 매우 협소하고 구배는 자연지형에 따라 만들어져 겨우 우마가 통행할 수 있을 정도다. 그것도 일정한 도로가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대개는 통행인이 임의로 좌우로 통행하기 때문에 조선의 도로는 행인들의 편의에 따라 이동되는 상태다.’
또 헐버트라는 독일 토목기사도 그의 저서 ‘조선지(朝鮮誌)’에서 조선의 도로와 관리상태가 형편없음을 지적하고 서울의 간선도로인 중심가마저 토막집과 가게들 때문에 길이 막힌 곳에서는 두 대의 마차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라 했다. 노점상인들은 도로를 침범해 가게를 짓는 것을 예사로 안다고도 썼다.
길모어라는 미국 여행가도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서울의 거리를 표현했다. ‘길이 좁고 낮은 초가와 기와지붕이 길 가운데로 튀어 나왔기 때문에 말 탄 사람은 지나기가 어려워 말에서 낙마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말 안장을 단단히 잡아야 겨우 지나갈 수 있다.
대궐정문으로 통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 입구의 큰길 하나만 넓고 그 외는 모두가 노변 가게들이 침범해 노폭이 좁다.’
조선시대에는 한성과 지방을 연결하는 6개 간선도로가 있었다. 제1로는 한성∼의주간, 제2로는 한성∼동북방의 경흥간, 제3로는 한성∼동해안의 평해간, 제4로는 한성∼부산. 제5로는 한성∼제주간, 제6로는 한성∼강화간이었다.
이 6개 간선국도는 구한말까지 큰 변화 없이 건재했지만 외적의 침입로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관청에서 개·보수를 하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잡목이 우거진 오솔길이나 다름없었다.
개화도로 필요성의 자각과 첫 치도령
일본의 강압으로 맺었던 첫 국제통상조약인 한일수호조약에 따라 1876년 2월에 부산항을, 1880년 3월에 원산항을, 1881년 12월에 인천항을 각각 일본에 개항하면서 우리나라는 폐쇄적인 중세의 봉건시대를 벗어나 서양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개항 당시의 우리나라 도로사정은 미개한 옛날 상태였으나 도로 개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때였다. 그런데 한일우호조약 체결 두 달 후인 1876년 4월 예조참의 김기수를 대표로 한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건너가 서양 문물과 새로운 도로를 보고 넓고 반듯한 길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김기수는 귀국 후 일본에서 견문했던 것을 고종에게 보고한 후 그의 저서 ‘일동기유(日東記遊)’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본의 길은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흙으로 다져 비가 와도 진수렁이 아니더라. 길은 편평하고 곧으며 넓게 축조하야 정결함이 이를 데 없더라.’
길과 도로의 개념은 엄밀히 따지자면 다르다. 길(通路)은 사람이나 가축의 보행이 가능한 좁고 꼬불꼬불한 옛길을 뜻하고, 도로(道路)란 수레나 차의 통행이 가능한 넓고 평탄하며 곧은 교통로를 말한다. 따라서 넓은 도로는 과학문명을 받아들여 이 나라를 개화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처럼 문호가 개방되어 쇄국정치가 사라지면서 외국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국내 개화파 인사들의 선진국 견학을 통해 새로운 도로에 관한 인식이 싹트게 되었다.
1881년 6월에는 조준영, 어윤중, 홍영식 등 소장개화파가 중심이 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일본에 두 번째로 건너가 새로운 문물제도와 도로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돌아와 국왕에게 우리나라도 장차 서양식 도로가 필요함을 알렸다.
그 직후 고종은 지금의 동구릉인 건원릉까지 길을 보수하라는 최초의 치도령(治道令)을 내렸다. 개항 이후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가 개화하는 과정에서 최고의 위정자가 새로운 길의 필요성을 실현한 첫발이라 하겠다.
조선말기에 치도론(治道論)을 가장 강하게 주장해 새로운 도로개발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이었다. 그는 1882년에 일본을 다녀온 뒤 개화도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산업을 일으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먼저 도로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2. 한국 도로의 개화와 발전
조선 한성부는 우리나라 첫 도로규칙인 도로보호법을 1896년 공포했다. 이어서 가장 부담이 되는 도로보수의 책임과 한계 그리고 가가(假家)보상법을 만들었다. 1904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륙정복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1906년 치도국을 신설하고, 전국 주요 도로개발 7개년 사업에 들어갔다. 이때 만든 도로 4곳은 개화 도로 형태를 갖춘 첫 신작로였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첫 도로정비규칙인 치도법 공포
한성부윤(서울시장)이었던 박영효는 김옥균의 주장에 동조해 1883년 한성부(漢城府)에 치도부서를 설치하고 도로 개수비로 해마다 5만 원씩 지출하기로 했다. 김옥균은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며 개화파 대변지인 한성순보에 치도약론(治道略論)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치도를 잘하면 농산물을 운반하기 편리해 인력을 절감할 수 있고 그 잔여 인력을 공장과 기술 산업에 취업시키면 국민에게 복을 가져온다…….”
그는 이 글에서 우리나라를 다녀간 서양인들의 말을 인용해 ‘조선은 산천이 미려하고 백성들은 강직하며 대범하나 사람과 가축의 분뇨가 길에 산적해 있다고 하니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길을 넓히고 청결하게 하고 분뇨는 농사에 사용하면 농업과 위생이 동시에 해결될 것’이라 했다.
서양문물과 서양인들이 들어와 문명이 개화되면서 공로교통이 발달되어야 백성의 생활이 편해질 뿐 아니라 경제가 부흥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전국의 길을 다 고치고 넓혀 나가려 했으나 당장 그럴 만한 능력과 돈이 없어 우선 한성부터 먼저 치도사업을 벌였다.
그는 ‘치도(治道)하는 것이 부국이 근본이요, 상민과 농민에게 유조(有助)하고, 전국의 남녀노소가 모두 이 효험을 볼 터인즉 나라가 진실로 개혁해 개화한 나라가 되려면 치도부터 행하는 것이 옳은 이치’라며 독립신문에서도 치도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렇게 김옥균의 치도론뿐 아니라 독립신문에서도 적극적이라 한성부는 ‘도로를 편하게 신칙하는 조목’이라는 도로보호법을 1896년 공포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첫 도로규칙인 셈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 동·리의 거리와 구덩이는 각각 해당 집주인이 문 앞과 담 뒷길을 수축한다.
둘째, 도로의 편함을 위해 개국 504년 4월 이후로 길을 범하여 집을 짓는 것과 길에 물건을 파는 좌판과 땔나무 등을 늘어놓는 것을 금한다.
셋째, 사람들이 내왕하는 도로 밖의 남는 땅에는 집 짓는 것을 허용한다.
넷째, 길 위에 줄이나 새끼를 칠 수 없다.
다섯째, 남녀노소 모두 도로에서 대소변을 금한다.
여섯째, 도로변 가옥들은 창 밖으로 대소변이나 오물, 구정물을 버리지 못한다.
일곱째, 깨어진 그릇은 땅속에 묻어 길에 버릴 수 없다.
여덟째, 죽은 짐승은 공한지에 묻고 길에 버릴 수 없다.
아홉째, 도로변에 돈사 축조와 도야지 사육을 금한다.
열째, 백성들은 자기 집을 보수하기 위해 도로에 흙을 파서 구덩이 만드는 것을 금한다.
열한째, 패목과 패물, 종이와 천 조각 등을 소각해 도로에 방치함을 일체 금한다.
치도법에 이어 한성 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법도 내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토현(광화문)에서 홍인문(동대문)과 대광통교(광교)에서 숭례문(남대문)까지는 이 나라의 대도(大道)이거늘 가옥이 도로와 하천을 침범하는 것을 필히 금지할 것이다. 두 도로의 폭이 50척 또는 70척 되는 곳이 허다하니 그 폭을 55척으로 규정하고…….”
이와 같은 도로 폭 규정은 한성 안에 무질서하게 늘어서 도로를 침범하는 가게 등 무허가 가옥들을 규제하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본질은 임금이 계신 수도 서울의 도로부터 정비하고 보수 확장하려는 본격적인 치도사업의 시작이었다.
이어서 지방도로에 관한 법도 공포되었다. 그 예로 경북관찰사(도지사)였던 박중양은 도로보존 규칙을 다음과 같이 공포했다.
“도로의 유지보존은 도로변의 각 면·동·리에서 부담하며 항상 노면을 평탄하게 유지하고 물이 잘 빠지도록 관리할 것이며 파괴된 곳이나 돌이 튀어 나와서는 안 된다.”
이런 새로운 도로 규칙을 만들었으나 법에 무딘 서울 백성들의 옛날 습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순검들이 단속에 나섰지만 도로상황은 여전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가장 부담이 되는 도로보수의 책임과 한계 그리고 임시 가옥인 ‘가가(假家)’를 보상하는 법을 만들었다.
큰 도로는 정부가, 동·리 길은 집주인이 보수하며, 1896년 4월 이후 새로 세운 가가는 보상하지 않으며, 도로 폭 55척 이상의 길 옆에는 가가를 허용하되 허가기간은 10년이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러한 치도정책에 따라 서울의 길은 차츰 개화의 옷을 입기 시작했지만 치도 때문에 나오는 쓰레기더미가 골치 아픈 문제로 등장했다. 도로에 쓰레기를 못 버리게 하니 청계천이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경무청 순검들은 사대문을 지키고 있다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우마차를 잡아 의무적으로 청계천 쓰레기를 실어 내가도록 하고 한 번에 수고비로 돈 2전5푼씩을 한동안 지불했다.
이때부터 내부(내무부) 토목국에서는 남대문-용산, 신문(광화문)-삼개(마포), 염천교-삼개 등 3개의 신작로를 장안 길처럼 넓게 뚫어 나갔다. 도로보호규칙이 공포된 1896년 4월부터 장안의 도로들이 정비되어가자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도로교통법이 처음으로 공포되었다.
4월에 공포한 ‘도로를 편하게 신칙하는 조목’을 다시 보완해 공포했는데, 새로운 법이 두 가지 더해졌다. ‘말을 탄 사람은 도심도로에서 빨리 달리는 것을 금하며, 도로에서 보행하는 자와 타고 가는 자가 왕래하다가 서로 만나면 각기 오른쪽으로 피해 가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우리나라 첫 도로교통법인 우측통행규칙이었다.
‘개화도로’ 주장한 독립신문
여명기에 상륙했던 모든 서양문물이나 서양 사람들은 대개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왔다. 당시 서울과 조선내의 각 항구를 연결하는 길은 험한 오솔길이라 육로를 이용하는 대량수송은 꿈도 꾸지 못했다.
서울의 관문인 인천의 도로도 좁고 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길은 개화문명의 중요한 출입로여서 어느 지방도로보다 개발이 시급했다.
경인선 철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전국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곡물이나 수산물과 기타 생필품은 배에 실어 일단 인천에 하역한 다음 여기서 서울까지 옮길 때는 한강을 이용했다. 인천항에 내려놓은 화물은 범선에 실려 강화도를 돌아 한강을 타고 서울로 들어와 용산이나 마포 나루터에 내려졌는데, 운행시간만 거의 8시간 걸렸다.
이 즈음 나라가 빈약해진 것은 조선의 도로가 미개해 경제가 빠르고 활발하게 유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나왔다. 경인선 개통 2년 전인 1897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은 전국의 미개한 육로교통을 한탄하며 도로개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중(國中)의 도로는 인체의 혈맥과 같으니라. 고로 혈맥이 웅폐하고는 장수하는 자가 없으며 도로가 협소하고 험난해서는 잘 되는 나라가 없나니, 아국(我國)의 금일 잔악한 형세는 상하로 정이 불통함이니라. 정이 불통함은 도로가 험잔함이라, 비록 500년 국도(國都)에서 불과 10리 되는 오강(五江: 마포, 서강, 용강, 용산, 광나루)길도 험하고 추하고 협소하야 거마의 왕래가 불편하나니, 한강을 10리 지척에 두고 있는 도성의 길조차 이처럼 험해 무역과 왕래를 방해하니 참으로 한심하도다.”
인천의 제물포가 외국에 개방되자 한강보다는 육로 여객 교통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양인들이나 일본인,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서양물건들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오솔길을 통해 등짐이나 나귀에 실려 서울로 들어왔다. 하지만 길이 좁아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서울∼인천간을 걸어서 오가려면 지금의 영등포 옆 오류동인 오류골을 거쳐야 했다. 아침 일찍 인천이나 서울을 떠나 오류골에 도착하면 점심때가 되어 나그네들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오류골은 제법 번화한 주막거리를 이루었다.
그런데 서양이나 일본인들은 조선주막으로 들어가면 너무 지저분해 밥을 먹을 수 없어 일본인들이 식당을 차리기 시작했고, 외국인들은 자연히 깨끗한 일본식당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렇듯 오류골의 조선 주막이 지저분한 이유는 부패한 관습이 한몫하기도 했다. 하인을 많이 거느린 양반이나 조정의 고급관리들은 공짜로 점심을 먹곤 함으로써 운영하기가 어려워 자연히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타향으로 떠나버리면 그 자리에 일본인들이 들어앉아 주막거리를 번성시켰던 것이다.
이 시절 경인간의 험로를 오가던 외국 외교관이나 기술자, 또는 무역상인,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당나귀를 이용했으나 그것이 불편해 점차 가마를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 가마를 타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흔들리며 80리를 가자니 의자생활을 하던 서양인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여행이 아니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의자가 달린 서양 가마인 교자(驕子)가 나타나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요즘 기준으로 치면 택시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가장 가까웠던 온양온천으로 휴양 갈 때도 외국인들은 천안역에 내려 교자를 타고 천안∼온천간을 오갔다.
구한말에 가장 교통이 왕성했던 경인간 육로가 너무 험하고 협소해 불편한 것을 참다못한 서울주재 외교관들은 적극적으로 개선을 촉구했다. 1902년 공동명의로 연판장을 만들어 경인간 육로를 시급히 넓게 만들어 달라고 우리 조정에다가 강력히 건의한 게 그것이다.
치도국과 첫 신작로
1904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은 일본은 이 해에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수탈과 대륙정복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조선 땅의 도로 개·보수 사업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먼저 일본은 내무성의 토목 기사들을 한국에 파견해 전국의 도로 상황을 조사하고 중요 도로의 개·보수 계획을 세웠다.
이어 1905년 우리나라에 강제로 통감부(統監府)를 세우고 식민 통치의 앞 단계 정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일본과 손쉽게 교역할 수 있도록 도로 정비를 서둘렀다. 내륙의 농산물과 광산물 등 자원이 풍부한 지역과 이를 수송할 각 항구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를 새로 닦거나 보수했다.
1906년 통감부는 이 도로 사업을 실천하기 위해 내부(內部) 아래에 도로 사업을 총괄하는 치도국을 신설하고, 전국 주요 도로 개발 7개년 사업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1907년부터 제1기 사업으로 진남포∼평양, 목포∼광주, 군산∼전주, 대구∼경주를 잇는 노선도로 네 곳에서 개수와 신설작업이 이어졌다.
경인간의 도로 개수는 1899년 경인선 철로의 개통으로 일단 제1기 사업에서 밀려났다. 그러니까 이들 4개 도로는 개화 도로 형태를 갖춘 첫 신작로(新作路)였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도로가 전군도로(全群道路)였다.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을 수탈해 가기 위해 1905년에 착공해 1906년에 개통한 전군도로는 전주∼군산간 46km의 오솔길을 넓힌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만든 도로였다.
이 첫 신작로는 일제가 호남 지방의 비옥한 평야에서 나는 곡물을 수탈해 군산항까지 마차로 수송하고 여기서 배에 실어 일본으로 보내기 위한 도로였다. 도로가 지나는 곳의 농토나 가옥을 강제로 헐값에 매수해 우리 농민들의 피땀으로 만든 도로였다.
개통식에는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이 참석했다. 그는 인천의 제물포에서 서양 마차를 화물선에 싣고, 군산항에 내려 개통 테이프를 끊은 다음 전용 마차로 처음 이 길을 달렸다.
도로사업을 의병 차단에 이용
제2기 사업으로 1908년부터 공주∼소정리, 수원∼이천, 마산∼진주, 해주∼용포간의 신작로 공사가 속속 착공되었다.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벌인 사업이지만 비로소 마차용 개화 도로가 등장해 지방간의 교통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서울은 물론 지방 대도시에서도 성곽을 헐고 신작로를 성 안으로 이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해 나갔다.
통감부가 치도국을 세운 이유는 수탈과 침략을 위해 조선의 도로교통을 개척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곳곳에서 출몰해 일본인들을 괴롭히는 조선의 의병들을 소탕하려는 꿍꿍이도 있었다.
일본의 침입으로 농토와 상권을 빼앗긴 우리 백성들은 떠돌며 행상과 보부상으로 생계를 이었으나 철도와 일본인들 때문에 생업마저도 빼앗겼다. 그런가 하면 도시에서 하루 품 팔아 먹던 마부나 지게꾼들이 인력거와 역마차가 생겨 일자리를 잃고 떠돌다가 마침내 의병에 가담하는 일이 날로 늘어갔다.
이런 이유로 통감부는 의병에 가담했던 우리 젊은이들을 도로 건설 현장에 투입해 혹사했다. 더러 생계 보장이라는 미끼로 유인해 투항해 오는 의병들을 싼 품삯으로 도로 공사에 끌어들여 의병의 범람을 막으려 하기도 했다.
일제는 우리 땅에 일찍부터 도로를 닦았지만, 정작 우리 백성들이 필요한 곳에는 건설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사는 곳이나 군사적·경제적인 목적에 필요한 곳에만 도로를 닦아 나갔다.
1915년부터 자동차 영업이 번성하기 시작하자 지방 여러 곳을 연결하는 신작로가 꼭 필요했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 운수업자들이 원하는 대로 도로를 놓아주지 않았다. 특히 조선인 운수업자들에게는 필요하다면 자비로 도로를 닦으라며 외면하곤 했다.
남쪽은 평야가 많고 인구 밀집 지대여서 길 닦기가 비교적 쉬웠지만, 산악 지역인 북쪽은 자동차 영업용 도로를 닦는 데 엄청난 돈이 들어 도저히 자비로 부설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지사나 군수에게 거금의 뇌물을 바쳐야 비로소 도로 개축을 해주어 겨우 영업 노선 허가를 받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이전 통감부 시절의 도로 개·보수 사업은 자동차용이 아닌 마차용이라 자동차가 마음대로 달릴 수 있는 과학적인 구조와는 거리가 먼 엉성한 도로였다. 근대 토목공학적인 자동차와 마차용 도로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완전히 장악한 한일합방 직후였다
3. 한국 도로 개혁과 발전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전국도로망 완성
일제는 총독부를 앞세워 1911년부터 자동차용 도로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제1기 7개년 치도사업은 공사비 1천만 원으로 7년간의 공사를 통해 1천300리의 도로 개보수를 완성했다. 이 시기에 83만여 원을 절약해 한강 인도교를 가설했다.
제2기 치도사업은 공사비 750만 원을 들여 2개의 국토종단노선을 비롯해 조선의 주요도로를 연결해 개통했다. 그 후 1945년 일제가 철수할 때까지 이와 같은 대대적인 치도사업은 없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조선 전국의 도로사업 시작
조선총독부는 통치수단의 하나로 미개발 상태의 한반도 내 도로망의 건설과 개보수사업을 시작했다. 통감부시절의 도로공사와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제1·2기의 치도공사(治道工事)는 당시의 일본 국력으로는 대단히 큰 사업이었다. 1등 도로의 폭은 겨우 7m(4간), 2등 도로는 5m(3간)밖에 안되었고, 도로에 편입되는 부지는 기부(寄附)라는 명목 아래 수탈당했다.
또 공사는 거의가 무상 부역으로 시행되었다.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는 거의 비포장 자갈길이었다. 통감부시절의 28개 노선 총 연장 817km, 총독부시절초인 1911년부터 1916년까지 34개 노선 2천690km를 정비하고 확장하는 제1기 공사는 당시 원시적인 토목기술과 괭이, 삽 그리고 손수레에 의존했다.
이렇게 조선치도공사 최종연도인 1942년에 한반도 내 도로의 총연장 거리는 2만6천989.9km이나 그중 43%가 넘는 1만1천829km를 1916년까지 건설했다.
제2기 치도공사는 1917년부터 시작해 6년간 계속 공사로 1922년에 끝낼 계획이었으나 되풀이된 경기불황 등의 영향으로 계획량의 53%밖에 추진되지 않고 나머지 계획은 무기한으로 연기됐다.
1911년 7월에 제1기 공사를 시작할 당시 국내 전 도로를 1·2·3등으로 구분해 경성(京城)∼부산(釜山), 경성(京城)∼목포(木浦), 경성(京城)∼인천(仁川), 경성(京城)∼의주(義州), 경성(京城)∼원산(元山)도로는 모두 1등 도로로 지정했고, 경성(京城)∼춘천(春川)∼오리진(五里津), 경성(京城)∼해주(海州), 경성(京城)∼강릉(江陵)도로는 2등 도로로 지정했다.
즉 서울을 기점으로 각 지방 도시로 가는 도로는 모두 1·2등 도로였다. 그런데 1등 도로들 중에서 서울∼인천 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가 조선시대 임금의 능행(陵幸)길이나 파발길이였다. 이 도로들은 다른 지방도로와 달리 비교적 넓고 잘 정비되어 있어 새로 개수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1911년 제1기 도로개발사업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을 하면서 군사나 경제 양면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을 통치하고, 앞으로의 중국대륙 침략을 위해 막대한 자본과 긴 시간이 요구되는 철도부설보다는 조선 전국의 간선 도로를 먼저 근대화하는 것이 필요함을 실감하여 총독부를 앞세워 1911년부터 자동차용 도로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총독부를 설치한 초기 조선의 질서 있는 발전과 진화를 위해 계획된 사항은 그 수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 가장 급한 사항으로 제일 먼저 시작한 사업이 4가지가 있으니 철도건설, 토지조사, 토지측량, 치도사업이다.
토지조사는 거의 마무리에 가까웠으며 철도도 수년 전 1천 마일(1천600km)의 개통을 보았으나, 계획한 철도 전부는 아직 완료되지 못했다.
측량도 부산·인천과 같이 중요 측량공사는 계속 진행되었으나 1천만 원의 공사비를 투입한 제1기 치도사업은 1917년 10월 전부 준공했다. 일본에서는 국도, 현도 및 리도(里道)의 구분은 있으나, 공용국도는 대체로 부·현의 시설과 재정형편에 따라 각자 개수해 통일된 개혁은 없다.
조선에서는 총독부가 도로에 관한 제도를 확립함과 동시에 통일된 계획을 수립했다. 도로의 제도로는 1, 2, 3등급과 등외 도로의 4등급으로 구분해 이의 관리, 도로 유지수리 분담, 축조시의 폭, 부지와 자재, 굴곡 등의 제한은 일정하며 또 전반에 걸쳐 1, 2등 도로의 선로는 통일했다.
1, 2등 도로는 국비로서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도로의 총 연장이 3천여 리를 넘어 공사비가 1리 평균 1만5천 원이라 총 4천500만 원의 보수비가 필요하게 되어 한꺼번에 전부를 개보수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따라서 우선 제1기 사업으로 1천만 원의 공사비를 계상해 가장 급한 노선부터 개수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총독부 설치 당시 조선의 전 지방을 바라볼 때,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없고, 조선의 도로망 지도는 전혀 백지상태였다. 평양∼진남포간, 전주∼군산간, 광주∼목포간, 기타 몇 개 노선처럼 구한국 정부 시대에 개수된 것도 있었지만 거의가 한 지방의 소구간에 걸친 단편적인 보수에 지나지 않고 이의 총 연장도 200리에 불과해 조선의 도로 전체를 볼 때 백지상태와 다름이 없었다.
이런 백지상태에서 도로망을 설치하는 일은 제1기 치도사업의 과제였다. 따라서 도의 경계와 어느 지방의 이해타산에 구속되지 않고 우선 조선 전반의 교통망에 긴급히 필요한 간선도로를 통일적으로 개보수함을 그 목적으로 했다.
제1기 치도사업은 1911년에 총 공사비 1천만 원으로 시작해 6년간의 공정을 진행시켜 총 685리를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7년간의 공사를 통해 총 1천300리의 도로 개보수를 완성했다.
1917년 시작된 제2기 치도사업
1917년부터 착공해 1922년에 완공하는 제2기 치도사업 계획은 당시의 기존 여건과 비슷하여 지방비로써 개보수한 도로는 극히 적었다. 지방 산업의 발전에 따라 도로 개수가 시급한 곳이 많아서 도저히 한정된 국비로 개수할 수가 없었다.
전체 계획 도로 중 일부 국비보조금과 지방비로 개보수한 도로의 총 연장거리는 1911년 이후 제1기 사업이 끝나던 1917년까지 395리인데, 여기에 구한국 시절의 200여 리를 합해 제1기 완성 도로 685리와 함께 총연장 1천280리에 달했다.
1917년까지 완성된 전국의 도로 1천200여 리의 개통은 조선 전체 필요한 도로망으로 볼 때 대체적인 윤곽을 잡은 것에 불과하며, 조선 내 주요 간선 전부를 연결 관통하기에는 완전치 못한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경성∼부산노선의 경우 대구 이남 노선은 미개수(未改修)였고, 경성∼목포노선에는 전북 일부지역에 미개수선이 있었으며, 경성∼원산∼회령노선에도 곳곳에 미개수 도로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경성∼의주노선은 제1기 치도사업에 들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부족한 지방비를 국비로 보조하여 이들 미개수 도로를 완성하고 조선 내 주요 간선 도로 전부를 연결 관통하는 것이 바로 제2기 치도사업의 목표였다.
제2기 치도사업은 총 공사비 750만 원을 들여 부산으로부터 충주∼경성∼평양∼의주를 연결하는 노선과, 목포로부터 경성∼원산∼나진∼회령에 도달하는 2개의 국토종단노선을 비롯해 평양∼원산선, 경성∼강릉선 등의 횡단선과 마산∼목포의 남해안선, 군산∼서산∼개성∼진남포∼안주에 도달하는 서해안선, 북에서는 안주∼만포진선, 북청∼성진∼갑산∼혜산진선 등 간선도로는 물론 전 조선의 주요도로를 연결해 개통했는데, 개보수한 총 거리는 약 2천여 리에 달해 이로써 한국의 근대 치도사업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일제가 1945년 철수할 때까지 이와 같은 대대적인 치도 사업은 그 후에 없었다.
치도사업의 효과
구한국 말까지 우리나라 지방 간에는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거의 없는 상태여서 물자의 수송은 사람의 어깨나 소·말 등의 가축에 의존했다. 특히 북부 강원도와 함경도지역의 길은 준령 험로가 대부분이라 행인의 통행과 물자수송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어 100리 길이 2일 이상 걸리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쌀 1석을 방출하는데 수 원(圓)의 운송비가 들어 원산지의 쌀값이 1석에 3∼4원에 불과하던 것이 경성으로 오면 과다한 수송비로 인해 7∼8원으로 비싸게 팔렸다.
1911년 이전에는 도로의 미개수 때문에 물가(物價)의 차이가 이렇게 컸던 것이 1917년 제1기 치도사업이 끝나자 주요 도로는 우마차가 통행하였고, 행인의 교통이 빈번한 곳에는 자동차가 운행할 수 있게 되어 물가의 차이도 원산지와 서울 사이에 크지 않게 됐다.
1910년과 1917년의 자동차 수를 비교해도 교통의 변화는 뚜렷하게 드러났다. 인력거는 900대에서 4천 대로, 짐수레는 1천300대에서 1만1천 대로, 소달구지는 3만6천 대에서 6만8천 대로, 역마차는 400대에서 2천200대로 급증했다. 자동차는 한 대 밖에 없던 것이 총 운행 대수 90여 대로 늘어나 수십 개 노선에서 총 400리를 영업하기에 이르렀다.
제1기 치도사업 완성에 따른 이러한 자동차의 증가는 바로 수송비의 절약과 신속한 수송 등의 그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지방의 물가는 자연히 균등해지면서 수요 공급이 원활하게 되어 교통과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매일신문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제1기 치도사업 완성-한강 인도철교(人道鐵橋)도 준공- 조선 총독부가 시공당시에 1천만 원의 예산과 6개년의 일정으로 계획한 1, 2등 도로 개수 사업은 한강 인도철교의 낙성에 의해 그 완성을 보게 된지라.
고로 10월 7일(1917년)을 기해 한강변에서 제1기 치도완성 축하회를 개최하고 한강 인도철교의 도교(渡橋)식을 거행하고자 하는지라. 이날은 장곡천 총독이 친히 참석해 일대 축연을 열 것이며, 경성 부민에게 여흥을 기부해 대대적으로 축의를 표시하고자 한다더라.
제1기 치도사업 개수 리정(里程) 1천300리는 1911년이래 7개년간의 계속 사업으로서, 총 공사비 1천만 원의 예산으로 착공한 사업은 지방 예산 또는 시간 관계 등에 의해 다소의 착오와 지장이 없지 않았으나 공사는 극히 순조롭게 진행되어 공정이 일약 진척해 한강 인도철교의 낙성을 보아 10월 7일에 동교 교반에서 축하회를 거행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구 조선의 도로는 황폐가 극에 달해 수송은 대개 사람의 어깨와 말의 등에 의존하는 외에는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구한국 시대에도 이미 도로 개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예산을 계상해 주요 도로의 개보수에 착수했으나, 총독부 설치 이전의 개수 사업은 예산이 빈약해 극소인 22개선 205리의 도로에 불과했다.
구 조선의 개수 계획은 조선 전 국토에 걸쳐 전체적 계획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극히 단편적인 시행에 그쳤던 고로, 총독부는 깊이 연구 심사한 결과 1911년 초에 전국에 걸쳐 개수도로를 확정하고 이에 관한 각종 제도를 정해 도로 행정의 근본 계획을 수립했으니, 금번 준공을 보게 된 제1기 치도공사는 본 계획에서 제1차로 계획한 것이다.
당국에서는 당초 교통운수에 대해 개수의 완급순서를 정하고 6개년 동안에 중요 노선 28개선 587리의 개보수를 시행하기 위해 총 공사비 1천만 원을 계상해 기공했으나, 재정 관계로 부득이 공사 지연을 초래해 7개년간의 계속사업으로 수정하고 금년에 이른 것이다.
기 개수 리수도 경제 상태의 변천에 따라 경비를 절약하고 노선을 증가해, 34개선 685리의 개수를 시행했을 뿐 아니라 83만여 원을 절약해 이 돈으로 한강 인도교를 가설했다.
기 개수된 도로의 연장 리수는 680여 리인 바, 이에 대해 구한국 정부 시대에 개수한 208리, 또 국고의 보조를 얻어 지방청에서 개수한 300여 리를 합하면 1, 2등 도로의 총 연장 리수는 1천289리에 달하였으니, 이를 조선이 필요한 도로망의 총 연장 리수 3천102리에 비하면 4활강의 개보수를 시행한 것이다.
이외에도 지방관청의 정비 또는 부역에 의해 부분적으로 개수를 마친 600여 리가 더 가산함에 이르렀다. 이어 당국에서는 본 공사의 준공에 이어 제2기 치도계획을 수립하고 총 공사비 750만 원을 계상해 477리의 개수에 착수하기 위해 현재 준비중에 있으니, 도로의 발달이 국운의 성쇠와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는 근래 지식인들의 주장을 인정하는 바이다.
당국이 확립한 계획의 정한 바에 의해 속속 추진중에 있음은 진실로 시세를 달관하고 세상에 일보를 먼저 내딛는 소치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공사가 국가 경제의 많은 이익의 큰 효과를 주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대한제국 말기의 한성의 도로 상황
이 땅의 도로 교통에 개화바람이 불어 닥친 것은 고종이 일본군대의 궁궐 침입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했던 1896년이었다. 이해 6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섰던 새문(新門) 담벽에는 한성판윤(서울시장)의 이색적인 공고문이 나붙었다.
‘길을 보수한 후 길가에 더러운 물건과 그릇 깨어진 것을 버리지 말 것이며, 물건 파는 좌판을 늘어놓지 말 것이며, 대소변을 금지할 것이니 만일 이 조목을 범하는 자는 죄를 중하게 다스릴 것이니라.’
바야흐로 이 해는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치열한 이권다툼, 동학란, 민비 시해, 아관파천 등으로 나라안팎이 시끄러운 때였다. 그러나 조선의 수도인 한성은 서양 사람들이 많이 들어 와 우리민족과 같이 생활하는 터라 교통의 개화도 서둘러야했다.
무엇보다 한성 안의 큰길 작은 길 할 것 없이 깨어진 그릇과 똥·오줌 투성이에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좌판들 때문에 서양사람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이에 당시 한성판윤이었던 관찰사 유 기환(兪箕煥) 씨가 한성시내 도로를 정비해야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고 도로정비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한성부 관찰사 유기환 씨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개명하는데 힘쓰는 고로 6월 19일에는 치도(治道)하려고 정동에서부터 장전골목과 남문안의 칠문(七門)이상과 모교(毛橋)이하를 보행하면서 가가(假家)등을 상세히 적발해 쉬이 헐기를 신칙(申飭)하였다더라. 만일 관찰사가 이 중요한 길을 규칙과 같이 수정해 백성과 우마가 편히 왕래하게 되면 관찰사의 업적이 적지 않고 백성들이 관찰사의 공덕을 찬양하리라더라. (독립신문)’
당시 길바닥에 넘쳐나는 그릇조각이나 사람과 가축이 배설한 오물도 문제였지만 가가건축 금지령을 어기고 계속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무질서한 무허가 점포들이 더 큰 골칫거리였다.
‘종로 큰 관통 길은 조선인과 서양인이 내왕할 뿐 아니라 어로(御路)인 고로 작년부터 경무청에서 가가를 헐고 다시 짓기를 금했는데, 그전에 가가를 하던 김 경천 등이 다시 가가를 짓는다하니 필경 경무청에 붙잡혀 죄를 당할 듯 하고, 여기뿐 아니라 성 안팎 도로에 가가 짓는 이는 모다 붙잡혀 죄를 당할 것 같더라. (독립신문)’
가가철거사업은 1895년부터 한성부(서울시청)와 경무청이 도로의 공권을 확립하기 위해 강행했으나 하루 벌어먹는 장안서민들의 반발도 심했다. 당시 한성 장안에 우후죽순처럼 난무하던 가가들 때문에 길이 막힘을 독립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길 위에 가가 짓는 것이 근일에는 풍속이 되였으나 조선의 옛날풍속이라 할지라도 금법인줄 모르고, 어지간한 길에는 가가와 집을 길 위에다 모다 지어 전국 백성이 왕래하는 길을 무리하게 빼앗아 집터를 만들었도다.
실상 생각하면 나라 법을 범하였을 뿐 아니라 곧 남의 물건을 탈취한 것이요, 자기 몸만 생각해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아니한 것이라. 길이란 것은 한사람에게만 매인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내왕하는 땅위에다 자기 집을 짓는다함은 나라의 법도를 침범하는 처사이니 한심하도다.’
길도 개화를 해야 잘 살 수 있다는 도로교통개화론이 나오기 전까지의 개화(開化)라는 뜻은 단순히 사람들을 계몽해 지식이 발달하고 이에 따라 생활과 문화 풍속도 발전시킨다는 뜻으로 통했다. 즉 사람만을 생각했던 개화였다.
그러나 도로를 정비하면서 경험한 것은 좋은 길이 없으면 개화가 활발하게 나갈 수 없다는 기본이치를 배웠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1890년을 넘어서면서 조정에서 길도 개화를 해야 한다는 뜻을 굳힌 결과였다.
4, 한성내의 도로개화 사업 1913년부터 17년간 모두 496만 원 투입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 내의 경제와 군사정책을 원활히 펴기 위해 전국의 중요한 길을 보수 신축했다. 1913년에 시작한 경성시내 31개 도로공사가 끝나자 2기 경성도로 공사는 새로 16개 노선을 선정해 시행했다.
1913년부터 17년간 모두 496만 원을 투입해 총연장 2만1천325km의 도로를 조성했다. 한강 인도철교는 1917년 9월 제1기 전국 치도사업이 마무리될 시점에 맞추어 개통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1895년, 난립한 가가 철거와 도로정비 시작
서울의 도로 개화는 도로상 점포인 가가(假家)들을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서울의 가가들은 건국 초부터 생겨났으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도로를 침범했다. 특히 영·정조시대에 들어와 상공업이 발달되어 도성이 경제적으로 번성해지자 가장 심했다.
지난 1886년에 조선 정부의 초청으로 신문학을 교육시키기 위해 내한한 미국선교사 길모어(Gilmore)의 수기에 따르면, 대궐 정문으로 통하는 길, 즉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화문까지의 도로는 정돈되었으나, 그 밖의 모든 길은 가가들이 침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광화문 네거리에서 흥인문(興仁門, 동대문)까지와 경희궁 앞까지에 이르는 동서관통 대로는 국왕이 능행(陵幸)하는 주 통로였기 때문에 능행이 있을 때마다 도로를 점거한 가가들은 철거했다가 국왕이 환궁하면 그날로 다시 세워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왕의 능행이 잦을 때는 심한 경우 한달에도 여러 차례 헐었다가 다시 짓곤 했다.
원래 서울의 양대(兩大) 대로(大路), 즉 광화문에서 흥인문(興仁門)까지, 그리고 종각에서 숭례문(崇禮門, 남대문)까지의 도로 폭은 70∼80척이었는데, 이 큰길을 가가(假家)들이 무질서하게 침범하여 30∼40척으로 줄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오개혁 이후인 1896년 9월 정부는 한성 내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件)이라는 도로 정비법을 공포하여 종전 도로의 너비를 55척으로 줄이면서 이 규정 폭을 침범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합리적이고 계획적으로 가가를 허락하면서 엄격하게 정비하여 도로의 질서가 잡혀갔다.
영국인 여행가로 유명한 비숍(Isabella B Bishop) 여사가 1894년부터 1896년까지 네 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쓴 견문기(Korea and her neighbors)에 보면 그녀는 마지막 방문 때인 1897년 2월 서울의 도로 개수사업을 크게 찬양했다. 그녀는 우선 가가정비로 말끔히 정리된 종로거리의 정연한 모습을 찬양한 뒤 서울 시내 가로의 신설·확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울의 도로개수사업은 주요 간선도로의 수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많은 좁은 길들이 넓혀지고 노면(路面)은 완만하게 깎거나 자갈로 메웠으며, 노견(路肩)에는 경계석이 설치되었는데, 주민이 스스로 시행한 것도 있다.
그리고 그밖에 무엇보다도 악취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위생법규가 시행되고 집 앞에 쌓인 눈을 온 가족이 나와서 치울 정도로 문화수준이 놀랍도록 향상되었다.
그전에 도로를 점거했던 가가의 주민은 대부분 집을 팔고 이사를 갔다. 넓은 길이 나고 외국상점이 들어섰다. 높은 언덕에 지어진 프랑스공사관은 그 위용을 러시아공사관과 다투고 있다.
북경으로 가는 길(무악재)도 한 폭의 그림 같던 종래의 자태를 잃어버렸다. 좁고 바위투성이인 샛길을 따라 짐 실은 나귀가 헉헉대며 오르내리고, 천자의 사신이 국왕의 영접에서 누렸던 영화로운 정경은 울퉁불퉁한 바위모습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바위틈을 넓히고 그 양옆을 깎고 다듬어 이제는 옹벽과 암거를 갖춘 대로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낮아진 고갯길을 인마(人馬)가 오가고 있다.’
비숍은 이상과 같은 서울의 도로 개화는 당시 우리 조정의 관세업무를 맡았던 영국인 총세무사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과 한성부 판윤 이채연(李采淵)의 노력의 결과였다고 평가했다.
1896년에서 1905년의 10년간 한국정부는 구·미인들이 집중 거주했던 정동(貞洞)일대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을 거쳐 독립문에 이르는 도로를 수축·확장하였으며, 독립문 밖 현저동에서 홍제동에 이르는 무악재 고개는 1902년경에 러시아공사의 권고에 따라 6척 정도 깎아내려 도로의 옛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서울의 도시개조사업은 고종황제가 앞장을 서서 브라운이나 이채연(李采淵)을 시켜 도로 및 하천 정비, 서양식 건축물 축조, 새로운 공원 조성, 문명시설 도입, 산업시설지역 설정 등을 내용으로 한 대규모의 도시와 도로개화사업이 추진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도로건설과 정비의 주축이 된 것이 새 궁전인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방사선도로의 조성이었으며, 이때 경운궁∼원구단간의 소공동 새 도로도 조성되었다.
일본인이 서울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885년부터인데, 조선정부가 지정해 준 남산일대에 정착한 일본인 거류민(居留民)과 영사관(領事館)이 협력하여 진고개∼남대문간의 도로를 개수했다.
1895년 8월 하순에 공사를 착수하여 도로 양편의 가가를 철거하고 도로 폭을 넓히고 배수로를 설치했으며, 공중변소와 가로등까지 가설하였을 뿐 아니라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충무로 파출소까지 신축했다. 오늘날의 충무로 1·2가는 이때에 이룩된 것이다.
서울의 성벽 철거와 도로신설
서울에서 서대문∼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전차궤도(電車軌道) 부설공사가 시작된 것은 1898년 10월 말이었고, 종로∼남대문∼원효로의 궤도 공사는 1899년 말에 시작하여 1902년 1월까지 이어졌다. 이 전차궤도 부설공사도 당연히 동·서·남대문의 좌우성벽을 헐어야 했지만 성벽을 그대로 두고 전차는 좁은 성문을 통과하여 달리게 했다.
새로운 이기인 전차에 대한 당시 시민들의 강한 거부 반응과 조선조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국보를 보존하려는 우리 민족의 강한 의지 때문에 성벽을 철거할 수 없었다.
3개 대문 중 숭례문은 원래 인마의 교통이 폭주했다. 그 좁은 성문으로 전차가 달리고 1905년부터는 경부철도가 개통되자 많은 철도승객까지 숭례문을 통과하여 이 성문은 매우 혼잡을 이루었다.
따라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槿助)는 1905년 6월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앞으로 공문을 보내어 남대문 양쪽의 성벽을 헐고 성문을 우회하는 2개의 통로와 또 하나의 대로를 뚫어 통행을 편리하게 하자고 했으나 한국정부로부터 묵살 당했다.
그런데 통감부가 설치되어 조선의 내정 일체를 간섭한지 1년 후인 1906년 3월 조정의 친일파 대신들이 고종에게 동대문과 남대문 좌우 성벽(城堞) 철거를 주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남의 양 대문은 원래부터 황성(皇城)으로 통하는 요충로이기에 행인들의 어깨가 서로 마찰하고 거마가 폭주하는데 전차마저 그 가운데를 관통하여 서로 피하기가 어렵게 되어 항상 접촉사고가 많으므로 교통운수의 형편상 편리한 방도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루 좌우의 성벽을 각각 8간씩만 철거하여 전차통행 선로(線路)로 삼게 하고 원래의 문으로는 백성만 내왕하게 하면 서로 뒤얽히어 비좁은 폐단은 없어질 듯 하오니 삼가 윤허하심을 바라옵니다.”
이렇게 하여 남대문, 동대문의 문루는 원형대로 남겨두고 좌우 성벽을 헐어 폭 8간의 새 길을 내고 전차 궤도를 깔게 되어 구도로까지 세 개의 도로가 생겼다.
남대문 좌우에 도로를 개설하는 공사는 1908년 10월에 완공되었는데 남쪽으로 연장하여 남대문역(서울역 앞)까지 연장 436m에 폭 34∼54m의 개화도로가 생겨났다. 이어 남대문에서 동현(銅峴, 을지로), 광화문, 왕십리간 등의 간선도로도 넓은 폭으로 개·보수하면서 서울의 성벽은 차례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가로수를 심은 것은 고려시대지만 가로수가 일반화된 것은 개항 이후부터이다. 1895년 3월에 내무아문(內務衙門)에서는 각 도와 읍에 ‘도로 좌우에 수목(樹木)을 식양(植養)함을 권하고 매호(每戶)의 마당과 공한지(空閑地)에 과실나무를 심을 것이며, 상목(桑木, 뽕나무)을 각별히 식목할 사’라는 도로 보호법을 시달하였다. 이것은 바로 가로수를 심어 도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1897년 10월 청량리(淸凉里)에 묘소를 잡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국장(國葬)을 치를 때 혜화동 주민 홍태윤(洪泰潤)이 동대문 밖에서 민비 묘소가 있는 흥릉에 이르는 길의 양편에 자비를 들여 백양수(白楊樹)를 심은 것이 개항 후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수였다.
이 가로수는 민비의 흥릉을 지키는 위병(衛兵)들이 엄히 보호한 때문에 잘 자라서 이 도로는 한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 도로로 유명했다.
서울의 31개 노선 6년간에 걸쳐 개·보수
1910년 8월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는 조선총독부를 서울에 설치한데 이어 한성 또는 한양으로 불러오던 서울의 이름을 경성(京城)으로 바꾸었다. 1912년 11월 경성시내 도로를 확장 정비하기 위해 경성시구개수예정도로(京城市區 改修豫定道路) 31개 노선을 개·보수한다고 발표했다.
제1노선은 광화문에서 황토현 광장(黃土峴廣場,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는 노선으로 너비가 30간(間)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유일한 도로였다.
제2노선은 남대문에서 남대문정거장에 이르는 너비 19간의 노선을 비롯하여 15간 노선이 3개(태평로·종로·남대문로), 너비 12간 노선이 5개(율곡로·우정국로·을지로·돈화문로 및 대학로 일부와 훈련원로), 너비 10간 노선이 6개, 너비 8간 노선이 15개였다.
도로는 일본 동경의 시구개정(市區改正) 기준에 따라 좌우에 보도를 설치하고, 중앙을 차마 도로로 사용하는 방식을 모방했다. 여기서 도로 너비의 단위인 1간(間)은 6척이다. 1척이 30.3cm이니 1간은 182cm이다.
일제는 서울의 31개 노선을 공사비 총액 197만 원을 들여 1913년부터 1918년까지 6년간에 걸쳐 개·보수했는데, 때마침 조선총독부가 1911년부터 1917년까지의 7년간에 걸쳐 전 조선 내 간선도로 제1기 치도공사(治道工事)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성 내의 도로공사는 제1기 치도공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1913년에 시작한 경성시내 제1기 도로 공사가 1918년에 거의 끝나자 1919년 6월부터 시작한 제2기 경성도로 공사는 새로 16개 노선을 선정하여 시행했다. 이것 역시 동시에 시행되었던 제2기 전국 치도공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경성부청(京城府廳: 서울시청)은 1913년부터 1929년까지 17년간 모두 496만 원을 투입하여 총연장 2만1천325m의 도로와 225㎡의 광장을 조성했다.
서울시내 도로개화 사업에서 소수의 도로는 새로 닦았으나 거의 조선시대 한성의 기존도로를 직선화하거나 확장하고 주요도로는 보도와 차도로 구분했다. 교통량이 가장 빈번한 구간에는 아스팔트 또는 매커담 공법으로 포장을 했다.
이렇게 하여 경성부청에서는 총독부의 지원으로 이 공사를 제2기 전국 치도공사가 끝나는 1928년까지 총 47개 계획노선 중 21개 노선만 완공하였고, 나머지는 완공하지 못했다. 이후 경성 내의 도로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의 교통량은 그 정도의 도로로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는 점과 그동안의 개·보수에 공사비가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과 대전이 끝난 직후 1920년대 말에 불어닥친 전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조선총독부의 재정상태가 매우 어려웠던 것도 한몫을 했다.
대륙 침략과 조선통치 위한 한강철교 건설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을 핑계로 구한말인 1905년 조선을 감독하기 위한 임시 통치기관인 통감부를 설치한 이듬해인 1906년부터 일본은 조선 내의 경제와 군사정책을 원활히 펴기 위해서는 도로정비의 필요성을 직감했다.
그 결과 통감부 내에 치도국을 세우고 전국의 중요한 길을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보수 신축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중요지역을 연결하는 이 치도사업은 자동차가 나타나기 전이어서 인마나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는 정도로 우선 다듬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합방을 하면서 경제나 군사 양면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을 통치하고 앞으로의 중국 대륙침략을 위해 막대한 자본과 오랜 시간이 필요한 철도보다는 전국의 간선도로를 먼저 근대화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끼고 치도사업을 1911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1922년까지 2기로 나누어 시작한 제1기 7개년 치도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수도 서울의 한강에 철교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1899년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인천과 서울의 중심부를 이어주는 한강철교는 1900년에 개통되었지만 이것은 차마나 사람이 통행할 수 없는 기차전용 철교였다. 1913년을 시작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자동차시대가 개막되고 한강 이남과 이북의 교통량이 활발하게 늘어나자 차마나 사람의 통행을 편하게 이어주는 한강철교의 건설이 필요했다.
총독부에서는 83만 원의 건설비를 들여 1916년 초에 경부선 철교 옆에 인도철교를 기공하여 1917년 9월 제1기 전국 치도사업이 완수될 시점에 맞추어 개통했다.
한강 인도철교의 건설은 제1기 치도사업 중에서 공사규모나 건설비, 인력, 신기술 투입이 가장 컸던 대역사(大力事) 중의 하나였다. 이 최초의 한강 인도교 길이는 630m, 중앙차도 폭은 4.5m, 양쪽 인도의 폭은 각각 1.6m의 좁은 다리였지만 이 철교에 대한 서울시민의 기대와 공사의 어려움을 당시 신문들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강에 건설중인 인도철교의 모래톱 다리는 준공된 모양- 80만 원의 거액을 들여 작년 봄(1916년 2월)부터 공사를 시작한 노들의 인도 대철교는 그동안 공사를 신속히 진행하여 작년중에 모래톱 다리기둥과 노들강(노량진의 한강) 돌기둥 기초공사는 대략 마치고 작년 겨울 결빙된 뒤로부터는 일시 공사를 중지했다가 금년 봄 얼음이 풀리면서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지나간 3월 말일까지 모래톱다리는 전부가 준공된 모양이다.
노들강 다리도 요사이 돌기둥이 거의 다 되어가며 한편으로는 철교걸기를 시작하였는데 이 철교의 재료는 원래 경인철도회사에서 가설하여 사, 오년 전까지 사용하다가 완전치 못한 점이 있다하여 뜯어 두었던 것을 다시 조립한 것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강 위로는 일곱 간(12.7m), 물속 모래톱에는 3간(5.5m) 높이로 건설한 것이다. 전체 모양은 현재 노들강에 쌍 선으로 건설되어 있는 기차철교와 대동소이하고 다만 철교의 양옆으로 철판을 더 달아 사람을 통행케 하고 그 가운데는 차마가 통행할 것이다.
인도교 양편에는 견고한 철 난간을 달아 낙성되는 날에는 실로 노들의 한 장관을 이룰 것이며, 이로 인하여 노들강에는 같은 대 철교가 도합 셋이 되겠더라.’
5.신공법 최초로 사용한 한강인도철교 최초의 관광버스 전용도로인 금강산 유람길
한강 인도철교는 당시 국내의 인도용 다리 중에서 가장 길고 규모가 컸으며 최신공법을 이용해 건설한 다리였다. 한강 인도철교의 개통으로 서울중심부와 한강 이남의 노량진은 물론 인천과 수원 간의 자동차 소통이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교두보가 되었다.
한편 1916년에 평강역과 원산역에서 금강산의 내금강을 연결하는 최초의 관광자동차도로가 완성되었다 .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남북의 신속한 교통을 연결한 한강 인도철교
서울의 한강 인도철교 건설로 남부인 영등포와 북부인 서울장안을 잇는 육상교통이 개통되었다. 하지만 폭이 좁은 인도교라 전차를 영등포까지 연결할 수는 없었고, 자동차와 사람만이 통행할 수 있었다. 한강 인도철교 건설과 관련해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실었다.
‘용산과 노량진사이에 가설중이던 한강의 인도철교는 다리를 다 놓아 대부분이 준공되었다. 인도교는 대소의 두 개가 있어 큰 것을 한강대교, 적은 것을 한강소교라 이름 지을 듯 하다는데 공사는 9월 안에 마치겠고 10월에는 성대한 개통식이 거행될 터이라.
이 다리의 공사예산은 총 80여만 원에 이른다하며 요사이 공사를 하는 것은 다리바닥에 철판을 깔고 다리 가에 난간을 세우는 일이요. 그와 동시에 다리의 입구에는 돌기둥에 다리의 이름을 새겨서 네 개를 세우고 철교 전후의 양편쪽에는 돌기둥으로부터 쇠사슬을 장식하여 인도와 차마도(車馬道)를 구분할 예정이더라.
이 철교의 준공과 동시에 경성 용산의 시민에게 또한 희소식이 올 것은 경성수도물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노량진의 인천수도 상수원지로부터 직경 1척 5촌의 큰 철관을 철교 밑으로 부설하여 경성·용산 방면에 수돗물을 보낼 터인즉 이것이 실현되면 요사이와 같이 날이 조금만 더워도 그날부터 저녁에는 수돗물 구경도 못하는 곤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리가 완공되어 즉시 물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관계로 인하여 아마 명년부터나 공사를 시작할 터이므로 경성시민이 이 물을 먹기까지는 아직도 1년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후 교통량이 폭증하자 제2기 치도사업이 끝나던 1922년에 다시 인도교의 폭을 배로 확장하여 전차철로를 영등포까지 연결하였다. 이는 서울장안과 영등포를 하나로 묶어 서울을 광역시로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강 인도철교에 대하여 공사를 감독했던 모씨는 말하길
“저 철교는 조선의 인도교(人道橋) 중에 가장 큰 것인데, 이 다리는 소위 트러스트 브리지(Trust Bridge)라 하는 것으로 거미줄과 같이 얼기설기한 쇠기둥과 쇠 횡강은 강한 바람과 무거운 하중에 대하여 지탱하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며 가로 걸려있는 철선은 한 개라도 쓸데없는 것이 없소이다.
이 철교에서 비용이 제일 많이 든 것이 다리의 기둥인데, 이 다리기둥은 홍수 또는 어떠한 저항에도 견딜 만큼 신식의 학문이치로 쌓아 올린 것이요. 이 다리기둥을 쌓아 올리는 데는 수백 명의 인부가 압축한 공기의 공급을 받으면서 강 속으로 들어가 잠수철함 중에서 강바닥의 모래와 흙을 파 올리고 또한 강 밑도 깊이 판 뒤에 암반에다가 양회를 다져서 쌓아 올린 것이요.
잠수철함을 놓는 방법이라든지 기타 조금만 틀려도 즉시 20만 원이나 30만 원의 손해가 나도록 돈이 많이 들고 어려운 것이요. 한강 인도철교의 다리기둥은 전부 열 개요, 기둥과 기둥 사이는 200척이요, 또 다리기둥의 머리는 일곱 자 길이로 되어 있소. 다리 전체의 길이는 2천70척인 즉 간수(間數)로 치면 345간이라 이 다리가 개통되면 경성∼인천 사이의 교통은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로 신속 편리해질 것이요.”
이 기사로 미루어 보아 한강 인도철교는 당시 국내의 인도용 다리 중에서 가장 길고 규모가 컸으며 최신공법을 이용해 건설한 다리였던 것이다. 한강 인도철교의 개통으로 서울중심부와 한강 이남의 노량진은 물론 인천과 수원 간의 자동차교통이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큰 교두보가 되었다.
따라서 한강 인도교 개통 이전에 이미 건설되었던 노량진의 상수원지의 음료수도 이 다리 덕분에 서울장안까지 보급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5년 7월의 대홍수로 한강 인도철교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대홍수는 고물철교에 불과했던 한강 인도철교를 크게 파손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 말까지는 전 세계 경제가 대불황기였고,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재정상태가 빈약하여 1925년 대홍수로 파손된 인도철교는 응급 복구하여 약 10년간 사용되었다.
1934년 8월 총 공사비 250만 원을 들인 새 다리 공사가 착공하였고, 1937년 5월에 완공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노량진의 한강 구 인도철교는 이 때 재건한 것이다.
83만여 원 들여 19개월 만에 인도교 개통
총독부가 시작했던 조선 치도사업 제1기공사의 마지막인 한강의 인도철교가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7개월만인 1917년 9월에 완공되어 그동안 나룻배로 한강을 오가던 한강 이북과 이남의 교통을 육로로 연결시키는 또 하나의 도로교통혁명을 일으켰다. 이 사실을 당시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제1기 치도사업의 최종공사로 지난 9월에 낙성한 한강 인도철교는 한강 기차철교의 상류에 위치하여 경성∼인천 간, 경성∼부산 간, 경성∼목포 간 도로의 연락교로서, 경부선 1등 도로에 더하여 군사와 경제상 교통의 주륜이다.
총 공사비 83만4천 원으로서 대정 5년(1916년) 2월초에 기공하여 금년(1917년) 9월에 전부 준공하였는데, 공사 일수 19개월에 불과하나 교상(橋床)의 연장이 1천449척, 소교가 621척으로 도합 2천70척의 대 철교로 좌우 인도 폭이 각 6척, 중앙의 차도 폭이 15척을 합하여 유효 폭이 27척이다’.
이어 성대하게 거행된 도교식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강 인도철교의 도교식이 9월 7일 오전 11시에 그 다리 가에서 경성과 용산 시민의 열성적인 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식장과 축하회장은 큰 국기와 녹문장막들로서 화려하게 꾸며놓고 개식하기 전부터 경성·용산 시중에 은은히 울리는 폭죽 속에서 1천여 명의 내빈이 모이기를 기다려 식을 열고 식의 절차는 제관의 축사와 토목국장의 예사, 총독의 개식사, 내빈의 축사 등이 있었다.
11시 30분 총독 이하 내빈이 다리를 처음으로 건너갔고 정오부터 대 연회가 시작되어 ‘폐하 만세’를 세 번 부르고 12시부터 오찬과 여흥이 개시되었으며 1시부터는 경성부 주최 각종 여흥이 일제히 시작되어 일반 시민의 도교를 허락하였다. 여흥으로는 광교, 다동, 신창기생들의 무도와 가장행렬, 조선신문사의 꽃 자동차, 인천의 자전거 축하대가 참가했다.
용산은 문성산 위에서, 경성은 한양공원에서 계속 연화를 올리며 두어 대의 꽃전차도 시중을 종횡으로 다닐 것이요. 용산시민은 개통 당일을 휴업하여 축의를 표하고 시가는 각 곳에 녹문과 국기를 달았는데, 이미 6일에는 각 동에서 축하치장에 분산하더라.’
이로써 기차 도강용 철교와 사람과 차마 도강용 철교가 한강에 완성되어 남북의 교통을 원활하게 만든 대 역사를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로 축하했다.
‘한강의 인도철교 준성 되어 금일로서 개통을 거행하는 뜻 깊은 가치를 창조하였도다. 한강 인도철교의 개통과 더불어 제1기 국도공사 1천285리의 완성을 보게 되니 교통상의 편리는 재언할 필요가 없도다.
이의 거사는 모든 심력과 돈으로서 이룬 진보가 아닌가. 팔보환, 자양환, 조경환(한강을 오르내리던 증기선)은 오랜 경로를 헤쳐 금일에 이르러 모든 사람의 대 찬양을 전하고 있네. 철교와 같이 튼튼한 뿌리 국도와 같은 평탄한 상업으로 진일보하여 절대 위력을 발휘할 지고.’
어떤 공사든 그 규모가 크고 신기술이 필요한 공사라면 어려움과 함께 거기에 얽힌 뒷이야기들이 전해지기 마련이다. 가장 어려웠던 공사는 당시로서는 신 공법이었던 한강 물밑에 다리기둥 부설하기였다. 여기에 얽힌 한강철교 기초공사의 고심담을 듣기 위해 매일신보사 기자가 작업인부들을 인터뷰했다.
‘우선 43척의 동철화(銅鐵靴)를 사용한 것이 신 공법의 묘미요. 제1기 치도공사의 끝을 장식한 한강다리 건설에 대하여 가장 큰 고심과 노력을 소비한 것은 그 기초공사인 다리기둥을 쌓는 것이요.
한강의 푸른 물 위에 다리를 받치고 있는 6개의 돌기둥은 물위에서 보면 사, 오 척에 지나지 못하나 그 물속으로 땅속까지 깊이 파서 바닥에 암반이 나온 후에 기둥을 부처 쌓은 것인 즉, 물속이 58∼59척이나 되며 가장 깊이 들어간 것은 90척이나 되어 그 위에는 주야로 수백 만 관의 무거운 철교를 받치고 있어 해마다 여름 장마동안에 삼십 척이나 불어난 물결을 받아 충돌할 지라도 결코 불안한 염려가 없게 되었소.
이 다리기둥은 보시는 바와 같이 돌로 쌓은 기둥으로 그처럼 무겁고 큰 기둥을 어떻게 깊은 물 속 암반까지 붙게 하였는고 하는 것이 곧 고심한 바요. 이것은 영묘한 기술의 결정이라 하겠는데, 이에 대하여 그 대강을 설명코져 하오. 기둥 각각에 강철판으로 만든 폭 13척, 높이 43척의 큰 신을 신기고, 신 밑은 보시기를 엎어놓은 듯이 깊이가 8자가량 되는 허정(虛穽)이 있도록 만든 것이요.
이 신에 무거운 추를 올려놓아 그 누르는 힘으로 차차 가라앉게 하는 것인데, 그 허정에다가 압착한 공기를 펌프로 집어넣어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의 둥근 통속으로 인부가 들어가면 압착공기로 물을 몰아내는 고로 인부들은 그 속 마른 땅바닥에서 굴토작업을 할 수 있소.
그리하여 한편으로 둥근 통 안쪽 주위에 돌을 쌓아 시멘트를 굳히며 천천히 다리발을 만들어 올리는 것이요.
그동안에 땅속 허정 안에 있는 인부들은 모래바닥을 파내어 둥근 통에 담아 내보내고, 내보낸 곳에는 두 겹의 기계장치가 있어 압착한 공기가 나오지 못하게 하며 밑바닥을 파냄에 따라 다리발은 차츰 가라앉으면서 들어가고 모래와 조약돌을 다 파내어 튼튼한 바닥이 나오면 큰 신의 위치를 돌려 돌을 깎아내어 단단히 닿게 한 후 지금까지 일하던 허정을 시멘트로 메꿔 버리고 다시 그 위로 시멘트를 쌓아 굳혀 버리는 것이요.
강철판 신발안의 인부들이 내부공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외부 다리기둥도 다 완성이 되어 상부에 철교를 안칠 쇠가래를 까는 것이외다.
이같이 다리기둥을 가라앉히는 데는 몇 천 관이나 나가는 무거운 것이기 때문에 조금 잘못하면 그 위치가 기울거나 삐뚤어질 염려가 있소. 그러므로 이를 염려하여 아무쪼록 똑 바르고 일 점이라도 틀리지 않게 공사를 해야 하오.
이 강철판 신을 동철화(銅鐵靴) 즉 ‘잠수함’이라 부르며 구조(構造)한 물건을 정확히 가라앉히는 데는 현재 가장 완벽한 기계라 오늘 개통한 한강 인도철교의 돌기둥도 그와 같이 온전하게 쌓았기 때문에 아무리 무거운 물건이나 세찬 홍수라도 굳게 견딜 것이외다.’
한강다리 때문에 새로 생긴 풍류
이렇게 완성한 한강 인도철교는 교통의 편익 외에 개통 직후부터 서울의 명물로 등장하여 갖가지 풍류를 만들어 냈다. 초기에는 주말이면 거대한 철교를 구경하러 나오는 서울 사람들로 한강 백사장이 붐볐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엔 토요일 오후만 되면 ‘한강 쌍철다리’ 구경 가는 것이 유행했다. 쌍철다리란 1905년에 개통한 기차철교와 그 옆에 나란히 개통된 인도철교를 가리키는 유행어였다.
이어 밤에는 청춘남녀들의 데이트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1918년부터는 자동차 광고에도 한강철교가 등장했다. 이때 서울장안에 있던 3개의 자동차 수입판매상들과 택시회사들은 자동차를 그린 다음 필히 옆에다가 한강 인도철교를 그려 넣어 자동차의 쾌속함을 강조하는 데 이용했다.
1922년 전차철로가 영등포까지 연결되고 전차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주가 한강 인도교 가운데 늘어서자 새로운 자동차 드라이빙 풍류가 생겼다. 종로에서 기생을 대동한 한량들이 택시를 불러 타고는 ‘전봇대 누비세’하면 운전수는 으레 한강철교로 가자는 뜻으로 알았다.
그리고는 철교 가운데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전주 사이를 S자형으로 꼬불꼬불 운전하는 솜씨를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한강 인도교는 이렇게 좋은 면으로만 이용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가난과 비극에 휘말린 인간들의 자살 장소로도 이용됐다. 이런 한강다리 자살소동은 지금까지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지만, 당시의 신문은 한강철교의 파노라마를 역시 놓치지 않았다.
‘한강철교의 유행-한강철교는 요사이 경성사람들이 행락을 즐기기 위하여 제일 많이 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여름의 경성에는 한강철교가 제일 유행하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그 외에도 이 철교를 중심 삼아 여러 가지 유행이 생겨나고 있다.
첫째 유행은 자동차의 광고판에 한강철교의 광경을 반드시 그리는 일이니, 요사이는 이것이 많이 고쳐진 모양이나 작년 재작년쯤 자동차부가 많이 생길 때는 한강철교의 간판이 제일 유행하였다.
그 다음에는 살기 싫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한강철교로부터 뛰어 내리는 일이 유행하는 것이니, 이 철교 개통 후에 그 난간으로부터 저승길로 향한 사람이 육십여 명이나 된다함을 보아도 얼마나 유행하는지 알 것이다.
또 그 다음에는 가장 재미있는 유행으로는 요사이 개화한 청춘남녀의 연애장소는 반드시 한강철교의 재미있는 한 광경이 빠지지 아니하는 일이니 철교에 사람이 많지 않은 저녁에 그곳을 지나면 어느 때든지 볼 수 있는 사랑 놀음이다.’
1916년에 국내 첫 자동차전용도로 신설
일제의 총독부는 동해안의 무진장한 수산물과 태백산의 광산물을 수탈하고 금강산의 관광을 개발하기 위해 경성∼원산 간의 경원선과 원산∼회령 간의 함경선 철도 부설을 1909년에 계획하고 노선 답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원산∼회령 간은 동해안의 저지대를 따라 놓으면 큰 어려움이 없지만, 경성∼원산 간은 강원도의 험준한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가장 중요한 금강산을 관통하는 경원선 부설은 매우 어려운 난공사라는 문제가 있었다.
경원선은 금강산을 관통해야만 황금노다지 관광수입을 올리겠는데, 험준한 산맥을 뚫고 깎아 철로를 놓자니 공사비가 기하급수로 들 뿐 아니라 공사기간도 오래 걸려 계획한 목적을 빨리 달성할 수 없다는 고민에 빠져 2년 동안 탁상공론만하고 있었다. 이때 철도국의 한 고급간부가 가장 쉽게 경원선을 놓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 방법이란 금강산을 약간 비켜가지만 비교적 공사하기 쉬운 추가령의 낮은 지대에 있는 철원∼평강∼삼방을 거치는 경원선을 놓은 다음 평강과 원산 두 곳에서 금강산으로 자동차도로를 닦아 유람버스를 투입하면 공사비도 적게 들고 공사기간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금강산 절경의 관광노다지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에 만족한 총독부는 1911년부터 경원선을 착공하여 1914년에 개통한 즉시 평강역과 원산역에서 금강산의 내금강을 연결하는 최초의 관광자동차도로를 닦아 1916년부터 유람버스를 운행시켜 목적을 달성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 금강산 관광객은 평강역에 내려 금강산행 유람버스를, 원산에서는 직접 유람버스를 타고 동해안 통천∼장전∼고성으로 내려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10인승 버스를 두 노선에 각각 두 대씩 투입하여 승객이 찰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운행하다가 이후 관광객이 계속 늘어나자 1920년에는 두 노선에 15인승 버스 4대씩을 투입, 정기적으로 운행했다.
그러다가 1930년에 철원∼내금강 사이에 우리나라 최초로 금강산 전기철도가 개통되면서 평강∼금강산 간의 유람버스는 철수하고 말았다.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