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요한복음5장19~29절
제목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두 가지 목적입니다(요20:31).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는 자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요한은 7가지 기적과 표적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안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로 포주를 만들었고,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의 죽을 병을 고치심이고,
세 번째 표적으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입니다.
본 단락은 위 사건을 통해서 계시하신 진리를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수여하는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행동(10절)과 말씀(17절)에 격분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긴다며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고,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權勢)로 하는 일이라고 변호하십니다.
1.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19~20절)
1) 아버지의 일을 하는 아들 예수님(19절).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본절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나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는 말씀의 주해(註解)임을 알 수 있습니다.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19절 “아버지의 일을 하는 아들 예수님”,
30절 “보내신 자의 원대로 하는 아들 예수님”
이 두 구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떠나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오직 아버지의 말씀과 뜻대로 행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신적인 아들 예수님은 자기 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절대적인 뜻대로 행하십니다.
19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의 모든 활동의 근거가 아버지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안식일에도 일하는 것은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안식일에도 일하는 것을 본받아서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는 일은 아버지를 본받아 하는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20절)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들이 아버지의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이유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여 아버지가 하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 "사랑하사"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본질적 관계에 나타난 사랑을 가리킵니다(Bauer).
"보이시고"란 말은 계시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미래사로 된 것은 그 보이는 행위가 현재 뿐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계속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의 계시가 아들에게 집중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서 그대로 행동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역(中保役)을 통하여 계시하시며 행하십니다(마 3:17, 11:27).
*마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일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일" 이란 말을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이 일들보다 더 큰 일"이란 뜻이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부활(復活)시키실 큰일을 가리킵니다.
2. 생명을 주는 아들의 권세(21~26절)
1)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여주실 더 큰 일들입니다(21~23절).
(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21절).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의 "더 큰 일"이란 말을 설명하는 것임이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은
두 가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하나는 영적인 부활의 결과로 주어지는 현재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인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미래적인 생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살릴 자를 살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의 심판 권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인데,
다음 구절 들(22,24)이 이 사실을 자세히 해설합니다.
(2)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22절).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 귀절은 헬라 원어에서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 귀절이 윗 귀절의 설명 문구인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심판(審判)"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살리시고,
어떤 사람은 그 본래 정죄된 대로 두시는 그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고 심판의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독자적으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임받은 아들이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따라서 아들의 생명 수여는 자신의 판단에 근거한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입니다(23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은 그 아들을 공경하는 데서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이 뜻은 하반절에 밝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신 처지를 가리킵니다.
2)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두 가지 측면(24~25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심판할 권세를 부여 받은 사실을 근거하여 행하고 계심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이 권세를 사용하여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수여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대신 정죄를 선고 하십니다.
(1) 영적인 부활의 결과로 주어지는 현재적 생명(24절)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진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들음과 믿음이 얼마나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사람에게 믿음을 발생시키는 작용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을 믿어 영접하게 됩니다.
갈3:2에도 말하기를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하였습니다.
듣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을 소유함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 곧, 영생은 사람이 계획할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영생(永生)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다시 설명합니다.
영적인 부활의 결과로 주어지는 현재적 생명, 곧 영생을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사망은 영적인 사망입니다.
영적인 사망은 인간의 영이 죽어 있는 영적인 상태입니다.
이 죽음의 상태에서 영이 다시 사는 상태로 회복된 것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은 중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가진 모습입니다.
이렇게 영의 중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들은,
새로운 생명에 적합한 활동을 합니다.
새 생명의 근본적인 활동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영생을 지금 현재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들이 누리고 있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칩니다
(눅 17:21; 고후 5:17; 골 3:3; 벧전 1:23).
*눅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골3:3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2)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절)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25절이 언급하고 있는 “죽은 자들”은
24b에서 설명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죽은 자들이 아들(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음성을 듣는 자들은 살아납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주신 복음 전도를 가리킵니다.
후대의 복음의 사신들이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친히 하시는 말씀이나 음성처럼 권위(權威)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권위(權威)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 되신 이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사업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곧, 그가 살리시는 운동을 섭취하셨기 때문입니다(21절).
음료수가 수원지에 마련되었으므로 도시에 그 물이 쉽게 공급됩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전하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과 같이 될 수 있으며, 그의 친 음성과 같이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참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롬10:14,15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은
① 그는 말씀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실때에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총 밑천입니다.
말씀을 검이라고 하였고(히4:12), 양식 이라고 하였고(히5:12,벧전2:2),
영이라고 하였고,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요6:63).
②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음성의 역할을 할까요?
그는 그리스도의 생활을 모본한 자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였고, 갈6:17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하였고,
고후3:18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것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중생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들이 그들을 부르는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아들이 생명을 주기를 원하는 자를
생명을 수여하는 음성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요1:12~13과 3:6에서 보았듯이 죽은 자에게 중생을 통해 생명을 수여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요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때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이러한 중생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경험적인 측면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중생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동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생과 믿음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그렇게 인지되는 것이고,
논리적으로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중생의 역사가 앞서고,
그 다음 예수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3)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26절).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여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란 말은 아들에게는 없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 "주어"란 것은 시간적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영원한 시간을 말함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주는 역사(役事)를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 이른 바,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하신 "생명"은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생명 운동의 근원입니다(요 1:4).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3. 심판하는 아들의 권세(27~29절)
1)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27절)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
(1) 그리스도께서 인자(곧, 사람)의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는 것입니다(빌 2:7-10).
*빌2:7~10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자정죄(自定罪)하는 것 뿐입니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곧, 그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사실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실상 그것에게서 심판을 받음과 같습니다.
곧, 그것은 그들의 자정죄입니다.
2)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의 동시성(28~29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주는 생명의 또 다른 면은 28~29절에 언급된 육체적 부활을 통한 생명입니다.
25절은 단지 “죽은 자”를 언급하는 반면,
28절은 이 죽은 자와 구별하기 위해서 “무덤 속에 있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당한 자를 염두에 두는 말씀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을 통해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된 모든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부활할 때가옵니다.
이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이때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할 것이고,
악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을 입게 될 것입니다(29절).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동시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서로 반대 되는 성격의 부활이 미래에 동시적으로 있으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을 시간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천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20:5~6에 근거하여 신자들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1천년의 간격을 둡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28~29를 비록하여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생명과 심판의 부활을 동시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17:32,23:6, 24:15, 고전15:12, 히6:2)
*행17: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23: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고전15: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히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1)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옵니다(28절).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것은 별세하였던 신자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킵니다.
(2)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29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닙니다(3:19-21).
*요3:19~21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악을 행하는 자들이란 빛을 미워하고 빛에게로 나오지 않는 불신자들을 가리키며,
선을 행하는 자는 신자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선을 행하는 자는 24절에 언급된 믿는 자들을 가리키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정죄의 심판을 받게 될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진정한 신자란 선을 행하는 자, 곧 아들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고, 불신자는 그 반대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말하는 바 선을 행하는 것은 아들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행과 악행은 각각 믿음과 불신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29절의 말씀은 예수를 믿지 않고도 선을 행하는 사람이 생명의 부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될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 하였습니다.
(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행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계20:12,13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19~23절)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 생명(生命)과 심판(審判)을 모두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완벽한 순종(順從)으로 맡기신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順從)하며 맡기신 일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자,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요14:6).
죄로 인해 하나님을 찾을 수도 하나님께 갈수 도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영생(永生)의 길(道)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예수님께 찬양과 감사의 고백을 드립시다.
예수님은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가지신 분입니다.(25~29절)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자신의 말을 듣고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만, 그 말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심판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9,20절).
‘아들’은 아버지의 대리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하는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일 뿐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이것(치유)보다 더 큰 일(21,22절)을
아들에게 맡기시고 아들 역시 그 사랑에 순종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도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 없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순종’없이 구원(영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2)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하실 것입니다(21~23,27절).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권세로 사람을 살리고 또 심판히기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사람은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철저히 예수님의 뜻에 달려잇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공경하는’자만이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거절한다면 심판을 자취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영생과 심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24~27절).
그러니 ‘바로 지금’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영생을 얻은 자이고,
이미 심판(사망)을 면한 자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말씀이 비록 당장에는 쓰더라도,
말씀이 들릴 때가 기회인 줄 알고 돌이켜야 합니다.
말씀이 업신여김을 당할 때 더는 소망이 없습니다.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2) 이 땅에 살아있는 자들만 아니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28,29절).
하지만 이미 죽은 자에게는 기회가 없고 심판만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께 내 인생의 주도권을 양도하여 하나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그날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의 심판이 영원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어떤 부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