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파마머리
권덕봉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
-이채의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에서
꿈에 갈색 파마머리를 보았다. 붉은색이 살짝 드러나는 짧은 파마머리가 반짝 빛났는데 아름다웠다. 이게 무슨 일인가?
수필 동인지 발간 기념회에 참가하라는 안내가 있었다. 내게 짧게 읽을 글을 준비하라 했다. 동인지에 실린 내 글에서 읽을 부분을 정해 오라는 주문이었는데, 경험이 없어 새 글을 준비해오라는 주문으로 알았다. 화면으로만 보다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될 회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지금은 배가 불룩 나오고 눈꺼풀은 아래로 처졌고 입술은 앙다물어 웃음이 없는 노인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꽤 쓸만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줄 기회라 생각했다. 궁리 끝에 지금의 감염병이 우한 폐렴이라고 알려지던 발생 초기에 써 두었던 글을 준비했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알 수 없는 돌림병에 걸린 이들을 돌보는 간호사들의 사연이 티브이 화면에 스친다. 방호용 고글착용으로 생긴 눈가와 콧등의 상처를 거즈로 덧대어 감추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들의 눈매에 가득한 선한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그들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고 그래서 세상에 향기가 퍼진다며 이채의 시를 인용하여 찬양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나도 젊었을 때는 잘 웃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무향 무취의 늙은이만 남았다. 그래도 악취로 세상을 어지럽히지는 않고 있으니 이만하면 어떤가 하고 은근히 물으며 마무리된다.
기념회가 있는 날이다. 눈이 내리고 있다. 창밖을 살펴보니 도로에 벌써 많은 눈이 쌓여있다.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넘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두꺼운 장갑을 끼고 우산을 들었다. 휴일이라 그런지 도로에는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눈을 피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눈을 수북이 얹은 사내가 다가와 버스요금을 물었다. 금액이 얼마인지 모르겠으며 현금으로는 낼 수 없고 카드로만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그가 슬그머니 없어졌다. 문득 그에게 잘못된 정보를 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옆에 있는 젊은이에게 물었더니 내 말이 맞는다고 하여 안심했다.
후드(hood)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남자와 대화하고 있다. 가는 곳이 어디냐고 여자가 묻고 남자가 대답한다. 여자의 목소리가 맑다. 정류장에 그려져 있는 노선도를 짚어가며 자기와 같은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한다. 남자가 현금을 주겠다고 하고 여자는 그만두라고 한다. 내려야 할 곳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정류장에 다가오자 그들이 내 앞에 섰다. 마음이 불편했다.
먼저 버스에 올라 노약자 좌석에 앉으며 후드를 벗는 여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내 또래쯤으로 보였다. 이마의 깊은 주름과 눈가의 엷은 미소가 보였다. 버스의 제일 뒷좌석에 앉아 살펴보니 남자는 내리는 문 앞에서 불안한 듯 밖을 살피고 있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는 그녀의 파마머리가 아름답다. 밝게 빛나는 짧은 갈색 파마가 젊은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남자가 먼저 내리고, 몇 정류장 더 가서 내가 내릴 때까지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준비해간 글을 읽는 중에도 파마머리가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그동안 남을 원망하거나 나 자신을 탓하지 않고 살았다. 각자 자기의 인생을 책임지며 열심히 살아내야 마땅하다고 굳건히 믿었다. 그래서 남의 어려움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주 차비를 빌려달라며 나타나던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자며 금품을 거둔 뒤 부정하게 사용하는 단체들의 사례도 내 눈감기의 훌륭한 명분이었다.
그런데 꿈에 마저 파마머리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악취로 세상을 어지럽히지는 않는다고 자조만 하고 있어서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못 된다는 것인가. 선한 행동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알려주려는 것인가.
누구나 다 있는, 방짜였던 한때가 있었음을 내세우고 싶은 부질없는 욕심이, 파마머리 그녀가 보낸 소리 없는 질책에 사정없이 흔들리니 공부는 아직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