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불상과 석탑 [유홍준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5)
- 신라와 달리 현세적 작품 많았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고려시대 불상은 고려시대 때 제작된 불상을 말하며 미술사에서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고려시대 제작된 불상은 물론 그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까지
다 사용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굉장히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고려시대에는 석굴암 같은 것이 없었을까”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당시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굴
암이 석굴암으로 기능을 하고 있었어요.
익산 미륵사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문화유산의 양만 가지고 “고려시대 불교
문화는 이랬다”고 정의내리는 것은 모순되는 측면이 있어요.
고려시대 때 불상들이 주로 지방에서 파격적이고 서민적인 것이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궁중적이고 왕권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이것들에 더해서 다른 것의 의미로, 또 문화를 누리는 혜택이 지방까지 더 퍼져나갔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요.
이런 의미를 빼버리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본 “고려시대 사람들은 조각기술이 떨어져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 '조미륵보살입상'같은 황당한 것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가능해져요.
기존 미술사 관련 책들을 보면 거의 모두 석굴암과 논산에 있는 은진미륵을 비교하면서 “고려시대 조각
수준은 통일신라에 비해 떨어졌다”고 써 있는데, 이는 비교의 대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한 시대는 그 시대가 주도하고 있었던 문화의 흐름이 있어 불상을 갖고 말하면 21세기 사람들은 통일신라
사람들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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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석가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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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관촉사 은진 미륵
지금 시대는 불상 대신 자동차와 컴퓨터 등을 만들어 쓰고 있는데, 이를 단순 비교해 조각기술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문화유산을 크게 잘못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불상은 경기도 광주 춘궁리에서 나온 철조석가여래좌상부터 얘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통일신라 하대 호족들의 자화상과 같은 구산선문 시대 만들어졌던 불상이 고려초에 들어와 이처럼 젊고
씩씩하며 당당하고 능력있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조형됐고, 그런 절대자 중의 한 사람인 왕건에 의해 고려가
통일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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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춘궁리 철조석가여래좌상春宮里 鐵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 332호 고려초기
높이 2.88m 일명 ; 광주(廣州) 철불 원래 ; 경기 하남시 춘궁동 현재 ; 국립중앙박물관
지금까지 알려진 철불 가운데 가장 크고 조각이 우수한 동양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세밀하게 주조된 나발의 머리에는 둥근 육계가 있으나 머리와의 구별은 희미해져 있고,
그 중앙에 고려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계주가 박혀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지만 뺨의 굴곡이 없고 턱이 짧은 편이다.
콧잔등은 면을 칼로 잘라낸 듯 평면적이면서도 예리하다.
날카로운 코, 예리한 눈썹, 가늘고 길게 치켜 올라간 눈, 작고 꼭 다문 입술의 묘사에서 자비로
움이 줄어들고 관념적으로 변해가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긴 귀의 날씬한 모습이 첨가되어 우아함과 근엄성을 잘 조화시킨 부처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상당히 커진 얼굴도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눈썹 선에는 한 단 낮은 턱을 돌려 힘이 넘친다.
일반적으로 불상의 눈은 눈매를 가늘게 표현하여 눈동자를 새기지 않거나 아니면 주조가 끝난 뒤
눈동자를 그려 넣은 경우가 대부분이나 여기에서는 길게 치켜을라간 눈의 한 가운데에 한단 낮게
등근 눈동자를 새겨 넣었다.
작은 입은 꼭 다물고 입가를 살짝 눌러서 미소를 표현하려고 했지만 반쯤 뜬 눈으로 인해 오히려
근엄한 느낌을 준다.
정면에서 볼 때 좌우로 길고 활처럼 예리하게 휘어진 귀도 고려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가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으나 가슴까지 내려와 목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짓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시대적인 특성을 나타낸 것이다.
신체는 어깨가 벌어지고 무릎의 폭이 넓어 안정적이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전체적으로 다소
둔증하고 얼마간 맥이 빠진 모습이다.
특히 건장한 어깨와 팔에 비해 가슴과 허리가 갑자기 줄어들어 비례가 어색한 편이다.
젖가슴의 윤곽 등 상체의 신체 굴곡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모델링 되었으며 우견편단으로 걸친
대의는 아주 얇아 몸에 밀착되어 있다.
옷주름은 불상의 규모에 걸맞게 예리하고 굴곡이 있어 생동감을 주나 다소 간략화되어 추상적인
느낌을 더한다.
상체에 비해 하체의 조각은 간략화되었고 무릎 밑으로 내린 촉지인의 쑤인도 아주 작다.
이 철불의 양 무릎에는 딱딱하게 굳은 옻칠 흔적이 남아있어 원래는 불상 전체에 두텁게 옻칠을
한 다음 금을 발라 도금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철불은 어두운 색깔과 거친 표면구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법당의 주존불로 봉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의 내부에는 두텁고 날카로운 철못이 단을 이루며 촘촘히 박혀 있는데, 이처럼 틀잡이(型持)용의
보조 철못을 다량으로 사용함으로써 두께가 일정하고 거대한 규모의 철불 주조가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의 균형은 매우 잘 이루어져 있으며 당당한 어깨와 두드러진 가슴 등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일련의 8세기 불상계통, 곧 우견편단의 옷차림과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 성도상(成道像)의
전형 형식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지만, 상 전체에 고려적인 특징과 새로운 왕조의 활력이 가득
하다.
그리고 너무 예리한 얼굴이며 조각 각 부분의 둔화, 특히 원소재지에 남아 있는 석조대좌의 연화
무늬 수법이나 지리적인 조건 등에서 이 불상의 실제 연대는 통일신라불상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고려 초의 걸작품으로 추측된다.
이토록 거대한 규모의 철불 조성은 상당한 세력을 지닌 호족이나 왕실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
했을 것이다.
코끝과 두 귀 아래 끝, 그리고 두 손가락과 무릎 아래 부분 등은 손상되어 지금은 석고로 땜질
하였다.
이 불상은 원래 경기 하남시 춘궁동(春宮洞)의 폐사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옮긴 것으로,
당시는 광배의 조각과 석조대좌 등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 이 곳에는 석조대좌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남아 있다.
호족연합으로 정권을 잡은 태조 왕건도 통일 뒤에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으며 과거제도 도입
등 광종의 개혁을 거쳐 11세기를 넘어서게 되면 중앙집권의 귀족문화를 만들어내게 되지요.
고려 초기 문화는 그래도 호족 연합세력적인 성격 때문에 지방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귀족문화가 꽃피는
인종(재위 1123~46년)과 의종(재위 1146~70년) 연간인 12세기 3·4분기까지 문화 담당 계층은 중앙 귀족
이었어요.
그러다 무신란이 일어나 귀족문화의 중심세력이 무신귀족으로 넘어가면서 문신들이 갖고 있었던 자기 절제성,
인문적·도덕적인 것을 지키고자 했을 때 나타나는 검소하고 질박한 풍이 사라지고 상감청자의 등장 등에서
보듯 공예가 굉장히 화려해지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는 다시 문화의 주도층이 요즘말로 하면 ‘매판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들로 또 한 차례 바뀌며 고려말에는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 계층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지요.
이처럼 470여년 지속된 고려왕조도 지배층이 100년, 150년 단위로 끊임없는 변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문화의
성격도 조금씩 바뀌어 나갔습니다.
어쨌든 고려초기는 왕권중심적이고 규범적이며, 아카데믹한 것 등으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난 불상들이 조형
됩니다.
예를 들어 충남 보령 성주사지(터)에서 나온 테라코타(소조) 불두(佛頭)들은 통일신라의 불상처럼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고려초기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지요.
서산 보원사지에서 발견된 철불은 석굴암 본존불과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해 8세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등 논란이 많은 불상이에요.
그러나 귓불이 바깥으로 휘다가 어깨까지 닿은 것이나 코를 대패로 밀듯이 반듯하게 만든 것 등은 고려시대
인 10세기에 나타나는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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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보원사 터 철조여래좌상 통일신라 후기
높이 150 cm , 무릎너비 118 cm, 두께 86 cm 충남 서산 운산면 보원사 터 출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충남 서산군 운산면 보원사터에서 1918년 조선 총독부 청사로 옮겨 왔다고 하는 철불이다.
한국의 철불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주조가 완벽한 작품으로는 단연 보원사지 철불이 손꼽힌다.
석굴암 본존불을 빼닮은 이 철불은 따로 주조해서 끼웠던 두 손은 없어졌지만 항마촉지인의 수인이
분명하며, 밝게 미소짓는 원만한 얼굴에 체구가 장대하며 터질 듯한 양감이 돋보인다.
우견펀단의 옷차림과 가부좌한 무릎 중앙의 부챗살 모양 옷주름도 석굴암 본존불과 똑같다.
얼굴에 비해 턱은 작고 볼에 살이 올라 있다.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의 여래상에서는 보기 힘든 민머리
(素髮)에 육계는 낮고, 선이 반듯한 이마 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은주물 자국이거나 아니면 계주 구멍일 가능성이 높다. 자비로운 얼굴은 체구에 비해 작고,
눈썹이 가늘고, 반쯤 뜬 눈은 날카롭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입술은 작고 얇으며 귀는 길게 활처럼 밖으로 휘었는데, 이는 얼굴이 크고 귀가 작게 표현되는 8세기
불상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전체적인 인상은 대체로 딱딱한 편이나 자세히 보면 입가에 미소가 감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렸하다.
양손은 따로 팔목에 끼어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팔의 자세로 미루어 항마촉지인이라고 짐작된다. 법의는 오른팔과 어깨가 드러나게 입었다.
드러난 몸에 보이는 젖가슴이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옷깃은 한 겹의 단을 대었고, 그 밑으로 규칙적인 옷주름을 만들었다. 왼팔에 난 주름은 너무 많다.
결가부좌를 튼 두 다리 사이 밑으로 부채꼴 옷주름이 나 있다.
조성 연대는 10세기초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데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질 철불의 모본이 되는
작품이다.
터질 듯한 팽만감과 당당한 어깨, 그리고 넓은 무릎폭에서 오는 신체의 장대성(長大性)은 9세기대의
대형 여래상에서도 간혹 발견된다.
무릎 폭을 특히 넓고 육중하게 하여 신체의 장대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비례면에서는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이에 비해 8세기대의 여래좌상들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다소 빈약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인 비례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
이 철불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통일신라 8세기 설, 9세기 설, 고려시대의 복고 양식으로 보는 설 등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입의 길이가 눈의 1.5배 되는 그리스의 인체비례와는 정반대로 눈의 길이가 입의 1.5배 되는 것도 10세기
고려시대 양식입니다.
시대를 측정하기 힘든 이 불상에 대해 삼불(三佛) 김원용 선생은 “10세기에 만든 8세기풍의 복고적 작품”
이라고 해석했지요. 고려시대 철불들의 경우 팔이 빠져나가고 없는 게 특징입니다.
남원 실상사의 철조약사여래불상도 그렇고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대개 속을 텅비게
주조를 한 뒤 별도로 나무를 조각해 끼워넣은 손목아래 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빠져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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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철제여래좌상 (實相寺 鐵製如來坐像) 보물 41호 통일신라(9세기전반)
높이 269cm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 약사전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신라 선종사찰(禪宗寺刹) 가운데 초기에 창건된 실상사 창건 당시
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본존불상으로 창건조사인 홍척국사(洪陟國師) 내지 2대조사인
수철국사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귀의를 받아온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여러 선종 사찰들이 앞다투어 개창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것이 실상사를
본거지로 한 실상산파이다.
통일신라 후기(9세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만들기 시작한 철불상 가운데 그 최초의
예란 점에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철불상은 9세기 전반기 불상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는 대표작으로 중요시 된다.
불상은 여기저기 산화되고 손상을 입능 상태다. 이는 실상사가 세조 때 폐사된 이후 절터만 남아 있다가
1690년에 중창되기까지 오랜 기간 노천에 방치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불상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정면은 향하고 있는 이 불상은 두 발을 양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
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현재 광배는 없어졌고 사각대좌위에 앉아 있다.
무릎 아래부분 역시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자리잡고 있는데
머리와 육계의 구획이 분명치 않다.
머리는 보통의 불상보다 크고 비교적 넓은 얼굴에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좁아진 이마, 이마에서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아담한 코,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돌출된 인중, 두터우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꼭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
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통견의 불의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
스러운 모습이다.
후대에 쓰여진 사적기에 이 철불이 약사불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재 약사전에 모셔저 있지만, 현재 두
손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끼워놓았는데, 1987년 복원불사(復原佛事) 때 나온 원래의 철제 손들도 이와
같아서 나무손은 후대에 보수하면서 원래의 손을 그대로 복제한 것으로 생각된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을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거머잡고 다른 손가락을 활짝 펴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은 맞대고 있는데,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9품인 중의 하품중생인이므로 이 불상이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짙다.
근엄하면서도 박력있는 얼굴, 당당한 가슴과 잘쑥한 허리, 불쑥 나온 아랫배 등은 아직도 긴장감이
나타나 있어 신라중엽 불상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음을 말해 주지만, 8세기에 나타
나던 유연한 탄력감이 아닌 경직되고 이완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에서,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조성된 초기철불의 걸작으로서 당시
철불상의 실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중국에서 선종을 배우고 돌아온 선사들은 지방 호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들에게서 막대한 후원을
받았으므로 이 시기에 들어오면 이전과는 달리 지방에서도 사찰 건립과 불상 조성이 빈번하게 이루어
지게 된다.
통일신라시대 철불의 대부분이 선종 사찰에 봉안된 사실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 선종 사찰에서 조성한 불상들은 이 철 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도 경주의 획일적인 중앙 양식과
달리 지방 양식을 띠기 마련이다.
실상사에는 백장암 3층석탑(국보 제10호)을 비롯하여 많은 보물급 문화재가 있다.
한 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문화유산인 셈이다.
경남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이나 팔공산 갓바위에 있는 경북 경산시 관봉석조여래좌상 등 산
위에 있는 불상들은 대개 10세기에 만들어지는데, 서산 마애삼존불·석굴암과 마찬가지로, 이런 부처님들이
전부 바라보는 곳은 동짓날 해뜨는 쪽인 동동남 15도 방향입니다.
경남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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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 팔공산 갓바위 (관봉) 석조여래좌상
해방이후 가 본 사람이 없어 우리 미술사 책에는 소개가 안돼 있지만 금강산 내금강에 가면 묘길상이라
부르는 고려시대 마애불 중 가장 걸작인 높이 15m짜리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어요.
원래 묘길상암이라고 하는 보살상을 모셔놓은 암자가 있다가 없어진 뒤 사람들이 보살과 부처를 구별하지
못하니까 그냥 묘길상이라고 부른 것으로 정확하게 얘기하면 묘길상터 석조마애여래좌상이라 불러야
됩니다.
마하연 근처 묘길상터의 석조마애여래좌상
1880년대 말 금강산 묘길상 마애불.
삽화 오른쪽에 있는 선비의 키와 비교하면 묘길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당당한 호족들의 이미지를 가지고 인자함을 표현하려 했던 기풍과 서산 보원사의 복고적인 기풍이 함께
이어져 온 것이 10세기 무렵 불상의 특징입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격전을 치른 뒤 세운 논산 개태사지 석불입상(삼존불)은 현재 손하고 얼굴의 이미지가
맞지 않아요.
원래 얼굴도 손도 굉장히 험악한 이미지였는데, 절에서 성형수술하듯 얼굴을 세척하고 글라인더로 밀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됐습니다.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도 부처님 얼굴이 심술궂은 모습으로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이
보여주던 실존적 고뇌로부터 해탈된 모습이나 친절성 같은 것을 전혀 찾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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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93호 국립박물관
개태사지 석불 입상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 좌상
충남 부여 대조사와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 보이듯 불상의 모습에선 지방성도 강하게 나타나지요.
둘 모두 거의 같은 형식으로 장승을 만들 때처럼 인체비례를 무시한 게 특징이지요. 또 이마가 지나치게 길어
기이하게 보이는 은진미륵의 경우, 실제 구리장식이 떨어져나간 모자부분을 제외하면 3.8 등신, 4 등신의
어린아이 모습입니다.
칠갑산 장곡사의 석조대좌 위에 나무광배를 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 불상 중 가장 불량끼가 많은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경복궁 회랑에 있다가 지금은 박물관 전시실로 들어간 철불 등 고려시대 불상의 매력은 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평범성에서 찾을 수 있어요. 10~11세기가 되면 이런 종류의 불상들이 전국 곳곳에서 만들어집니다.
장곡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제 174호 충남 청양 대치면 장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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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장곡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부 석조대좌長谷寺 鐵造 毘盧舍那佛坐像 附 石造臺座
보물 제 174호 고려 전체 높이 2.26m, 불상 높이 61cm 충남 청양군 대치면 칠갑산 장곡사
원래 석등의 대석 부분이던 높다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신라말 고려초에
유행하던 철제비로자나불상 계통의 하나로 이름나 있다.
나발의 머리에 육계는 거의 구별할 수 없으며, 삼각형에 가까운 작은 얼굴에는 긴 눈썹과 작고 가는 눈,
빈약한 코와 작은 입, 좁은 이마, 양감(量感) 없는 얼굴 등이 표현되어 불상을 무척 빈약하게 만들고
있다.
체구는 짤막하면서도 얄팍하고, 어깨는 지나치게 넓어 부자연스럽고, 가슴도 빈약하다.
신체는 사각형적인 형태인데, 가슴과 배 등이 반듯하고 어깨 또한 직각일 뿐더러 상체에 비해 무릎이
지나치게 낮고 폭이 넓어 균형을 잃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있는데, 드러나 있는 오른쪽 어깨가 너무 소홀
하게 처리된 느낌이이고, 몸의 굴곡과 전혀 관계없는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다
두 손도 옹색한 느낌을 주는데,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는 지권인을 하고 있다.
이는 비로자나불만이 취하는 독특한 손모양으로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를 지닌다.
나무로 된 광배는 후대에 만든 것으로 불상과 크기가 맞지 않으며, 머리광배·몸광배 안에 꽃모양의
장식이 채색되어 있다.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채색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옆에 놓여 있는 장곡사 철조약사여래
좌상(국보 제58호)의 광배와 같은 양식이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얼굴, 빈약한 체형, 허술한 오른쪽 어깨의 처리 등에서 9세기 중엽 비로자나불 양식
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충북 괴산 각연사 비로자나불(보물 제433호)과 거의 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보인다.
강릉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과 평창 월정사 8각9층석탑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 같이 원통형 보관을 쓴 불상은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강원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지요.
대포집 경력이 30년쯤 된 질퍽한 인상을 주는 ‘성주풀이’의 고향인 안동 제비원의 마애보살상 등 고려불상
들은 나름대로 매력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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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썼고 통통한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조각 기법뿐 아니라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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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석조보살좌상(보물 제 1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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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115호 경북 안동시 이천동 제비원
북한에서 불교문화센터로 만든 금강산 보현사를 가면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부터 가랑이를 쫙 벌리고
앉아있는 파격적인 것 등 금강산 일대에서 출토된 고려말 불상들의 다양함을 확인할 수 있어요.
납작한 얼굴을 입체화시킨 현대조각의 기법이 보이는 수안보 미륵리 석불입상에선 백제불상이 갖고 있는
순정 같은 것이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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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 미륵사지 미륵보살입상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동에 있는 불상은 고려시대 민중불교가 지향했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줍니다. 운
주사 와불이 유명한데 와불은 원래 소승불교에서 부처님 열반상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불기립불
(不起立佛)이나 미기립불(未起立佛)로 부르는 것이 맞아요.
운주사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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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천탑을 만들면 서울이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일종의 반역 내지 혁명사상 때문에 조성된만큼 불상도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서 총 양, 총합적인 이미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닌 스테레오타입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탑의 경우 불국사 석가탑에서 변형된 것으로, 9세기의 전형이 된 실상사의 쌍탑에 이어 고려시대로 접어
들게 되면 역시 지방적인 특색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서산 보원사지 5층석탑이나 부여 장하리 3층석탑 등 옛 백제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석탑의 경우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모델로 한게 많은 것이 특징이에요.
서천 비인의 5층석탑이나 정읍 은선리 3층석탑 모두 정림사지 5층석탑을 기본으로 하면서 변형시킨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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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普願寺)지 5층석탑 보물 제104호 충남 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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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장하리3층석탑 보물 제184호 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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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비인 5층석탑
정읍 은선리 3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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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월정사의 8각9층석탑이나 묘향산 보현사의 8각13층석탑처럼 고구려 영향권에 있었던 지역들은 고구려
사찰 8각탑의 전통을 이어받아요.
운주사에는 도넛 모양이나 그냥 삐죽하게 돌을 쌓아 만든 탑들이 수십개 늘어서 있습니다.
오대산 월정사 팔각 9층 석탑 고려 11세기, 높이 15.15m, 국보 제48호,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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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보현사 8각 13층 석탑.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탑이다. 추녀마다 풍경, 북쪽말로 '바람방울'이 104개나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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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사 10층 석탑 고려 1349년, 1350cm, 국보 86호,
원래 경기 개풍군 광덕면 경천사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금강산에서 고려불상들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듯 탑은 내년 10월 개관예정인 서울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조형미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부도로는 서울 경복궁 옛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과 비가 단일 석조
물로는 가장 화려합니다.
커튼을 늘어뜨린 것 같은 모습까지 조각해 놓았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1만2000조각 난 것을 이어
붙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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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고려 1085년, 6.1m, 국보 제101호,
원래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 현재 경복궁
원주 법천사지의 부도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을 갖고 있는 비중의 하나이지요.
부도는 고려말 석종형으로 다시 조선시대에 들어가면 종형으로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정리〓최영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