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론의 핵심인 '식민지 근대화론'의 진실을 하나하나 살펴, 그것이 사실과 부합하느냐를 역사뒤에 감추어진 진실로서 밝혀 나가려하고 있다. 이 글을 접하니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가 오버랩돼부네...ㅎ. 그녀는 일본의 작가지만 내가 존경하는 작가이다, 그 이유를 여기서 밝힐려면 이야기의 집중도가 떨어지니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살펴보기로 하자.
경수기 아짐의 이야기 전개를 잘못따라가면, 삼천포로 빠지니 유념합싯따!
참고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의상이나 소품들의 모습은 사실과는 괴리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한, 일본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진실을 호도하는 것을 차츰 밝힐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조국때문에 내 스승님께서 머리가지끈거리실꺼라고 상상한다. 미구에 한말씀 훈수놓으시겠지...! ********* ***********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재밌자는 뜻으로 여담 하나. 조금 전에 티비 채널을 돌리다 보니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가 재탕, 삼탕, 사탕되어 방영되고 있었는데, 나는 이런 류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야인시대’라고 몇 년 전에 히트쳤던 드라마도 있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공통적으로 웃기는 것은 일제시대 논다리들의 복장인데 하나 같이 멋들어진 중절모를 쓰고, 깨끗한 와이셔츠에 네꼬다이를 메고, 잘 다려진 양복 바지저고리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그 위에 비단 목도리를 척 두른 데다가 광빨나는 백구두를 신고 몰려다니면서 기생들이 있는 요정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김두한 정도 오야붕이 되면 아예 찌푸차를 타고 댕기기도 한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 일제시대 때 한국사람들이 근대화돼서 그때 꽤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의 밑바닥 하빠리 인생들인 깡패새끼들이 저 정도로 호강을 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랬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남아 있는 긴도깡의 일제시대 사진을 보면 그 당시 깡패들의 패션은 꺼러지 모드였다. 물들인 군복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여름철에는 찢어져 너덜거리는 란닝구 바람에 당시 유행했던 논다리 패션의 상징은 바지 뒷춤에 꽂아서 척 걸친 수건이었다. 그것도 땟국물이 꾀죄죄한... 겨울철에는 어디서 주워온 건지 정체불명의 오바나 잠바를 걸치고 댕겼다. 구두는 다 헤진 가죽구두를 수선하고 또 해서 가죽을 이어붙인 만년묵기 깔창구두였다. 모자는 짚으로 만든 다 떨어진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쓰고 다녔다. 요정은 무슨? 탁빼기 사발에 닭다리면 꿀이었다. 외상을 안 갚아서 주모 눈치를 있는 대로 보면서 홀짝거리다가 어디서 쌈 났다 하면 우루루 몰려가는 게 논다리들의 일상이었다.
이런 생꺼러지들이 양복이라도 제대로 입고 댕기고 찌푸라도 타고 댕기면서 똥폼을 지길 수 있게 된건 근대화시기라는 일제시대가 아니라 해방 후에 정치깡패 소리를 듣던 자유당 시절에 들어와서였다. 물론 김두한 정도의 거물급 오야붕은 일제 말기에 오면 쌈질할 때 깜장색 가죽장갑을 끼고 한판 뜨고 나면 양복을 걸치고 요정에 갈 정도는 되었지만 대부분의 논다리들은 사실상 꺼러지나 다름없었다. 시장통에서 삥을 뜯어봐야 문딩이 콧구멍에 마늘 빼먹기였고, 수입원이라는 것이 영화관 기도나, 자전거 보관소가 고작이었다.
식민지근대화는 한국인의 삶의 질을 그렇게 높여주지 않았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의 조선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당시에 조선 땅을 다녀간 외국인들이 기절초풍을 했다고 말하는데, 근대화가 36년 동안 진행되어 멋진 근대국가로 변모한 해방된 한국 역시 미국인의 눈에는 경이로울만큼 가난한 나라였다. 별로 근대화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육이오 때 참전한 미군이 한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분뇨냄새에 코를 움켜쥐어야 했는데 참전한 미군의 기억에 70년이 지나도 선명한 것이 한국의 산하에 너무나 심했던 똥냄새였다. 36년의 근대화라는 것은 이것 하나 해결하지 못했다. 한국은 여전히 농업국가였고, 국민의 80% 이상이 농민이었고, 농민의 80%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조선말이나 해방 후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국민 대다수의 삶은 예상 외로 요지부동이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잘 내세우는 표본 중 하나가 바로 소학교들인데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짓이 바로 학교들을 짓는 일이었는데 웃기는 점은 저거 일본에 지은 학교들보다 한국에 지은 학교들이 더 삐까번쩍했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판자떼기로 학교를 짓고 한국에는 벽돌로 지었다. 왜 그랬을까? 대부분의 한국인 자녀들이 한사코 서당에만 몰리고 일제가 세운 신식학교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염이 허연 서당 훈장에게 댕기머리를 하고 바닥에 꿇어앉아 천자문을 배우려고 하지 양복 입고 신지식을 가르치는 소학교에 오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번쩍거리는 신식 건물에 멋진 책걸상을 갖다놓으면 우루루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결국 야마가 돈 왜인들은 서당에 쳐들어와 아이들의 댕기머리를 잡아채어 저들의 학교로 끌고가야 했다. 서당 폐지령을 내려 전국의 모든 서당을 때려부셨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이렇게 찬양해 마지 않는 국민교육에 일본이 광분했던 이유는 미개한 조선인들을 깨우쳐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짐승들을 부려먹으려고 해도 몇 마디 말은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소도 쟁기를 끌게 하려면 최소한 “이랴~”나 “워어~” 하는 몇 마디 말은 알아먹어야 했다. 일본이 한국 청년들을 끌어다가 일본군으로 써먹기 위해 일본말을 가르치는데 30년이 걸렸다. 태평양전쟁의 말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군인으로 써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도스께끼”와 “아이스께끼”를 구분할 수 있게 되자 그때부터 사정없는 징병이 시작되었다. 식민지근대화는 무슨... 개뿔.
식민지근대화론의 광신자가 운영하는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글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식민지근대화론이 성립하려면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상과 정체성에 대한 조작과 날조를 잘 보여준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와 같은 조선혐오론에 각종 통계자료를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길게 소개할 가치는 없는 내용이어서 인터넷에서 주워올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짧은 것으로 골랐음을 밝힌다. 주워온 곳은 지만원의 ‘시스템 클럽’이라는 곳이다. 글의 제목은 ‘개조선 바로보기’다. 작성자 이름은 ‘코리아퍼스트’인데 작성자가 아니라 그 역시 어디서 퍼 왔을 것인데 출처는 밝히지 않고 있다. 한 번 보자.
---------------------------------------------------------------------------------- 조선인에게는 이런 미신이 있었다 "머리에 이가 많으면 장수한다. 부자가된다. 복이 들어온다" 머리에 상투를틀고 여자도 물론 머리카락을 자르는일이 없이 머리위로 말아올려 모양을냈다. 머리가 길수록 그 무게는 목을 짓눌렀다. 일본에 의해 노예에겐 해방, 양반에겐 기득권박탈.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자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일본이 조선에 시행했던 업무 첫번째는 머리를 깎는 단발령. 두번째가 거리에 공중화장실을 설치하고 널부러진 똥을 치우는일. 같이 있으려니 냄새나고, 머리의 이가 옮고 일본인은 조선인과 도저히 같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샤머니즘에 중독되어있으니 설득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강제로 시행했다. 단발령을. 조선인의 주장은 이러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 몸 전체 머리털, 살갗은 부모로부터 받았다." 단발령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폭력도 발생했는데 이는 일부였고 대부분의 조선인은 자신의 종교와도 같았던 머리카락이 잘릴때 불안감이 있었으나 그 후에는 적응하여 좀더 편하게 살아갔다. 조선의 미개한 문화를 끝까지 지속하고 싶은건 양반이었으며 이를 벗어남이 당혹스러운건 노예였으니 같은 조선인이라 하여도 그 이견차이가 극심했다. 조선인구의 70%인 노예(40%) 및 하층민(30%)은 일본에 의해 자신과 자녀를 핍박하던 양반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조선인구의 30%인 양반 및 기득권층은 꿀빨았던 조선을 일본에게 내어주고 기득권을 빼앗겼으니 세상 지옥이었을것이다. 내가 조선의 양반이었을지 노예였을지는 확실히 알수없지만 분명한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나처럼 양반집 자손이라는것이다. 단 한명도 노예의 자손이라는 사람이 없는게 신기하지 않는가? 조선인의 70%는 인간대접 못받는 개똥이, 소똥이, 돼지엄마, 큰년, 작은년, 돌쇠,... 이러한 노예 및 하층민이었다 일본에 의해 조선의 노예들은 성과 일본식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그걸 앞다투어 자랑하고 다녔을것이다. "김가야~ ,박가야~, 이가야~, 정가야~" 이렇게 말이다. 나는 지금껏 조선 지배층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보아왔으니 당연히 일본이 싫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단 한번이라도 조선인구70%인 노예관점에서 조선을 바라본적이 있었는가? 조선의 노예들은 일본에게 고마워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반면, 양반새끼들은 짜증났겠지. 10살배기 어린 여자아이도 기방에서 창녀로 만들어 술시중을 들게하던 미친 생활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으니 조선독립을 꿈꾸지 않았겠어? 여자노예를 처참히 짓밟고, 남자노예를 평생 괴롭히던 조선이 좋아? 동정심이 없는거야? 난 조선에서 노예로 살아가던분들을 생각하면 양반에 대한 분노를 조절하기 힘이든다. 조선은 미개하고 타락한 원시부족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양반의 혼을 뒤집어쓴 역사학자들에게 깜빡 속아서 지금껏 살아왔다. 이러한 사실이 나를 더 분노하게 만든다. 진짜 개조선이다 개조선.
그리고는 덤으로 이런 글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윌리엄 그리피스 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
조선은 ... 85%가 문맹이다. 여자들은 항상 규방에 감금되다시피 되며, 바깥주인의 허락 없이는 거리에 못나간다. 이러한 율법은 너무도 준엄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그의 딸을 죽였고,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 어느 영국인이 조선에서는 가장 청결하다고 하는 인물이 그가 지금까지 본 가운데 가장 더러운 인물이었다고 놀렸다. 그는 조선인이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공무원들은 탐욕에 미쳐서 백성의 피를 빨아먹었다. 조선은 공무원들의 마치 물을 마셔도 갈증이 계속되는 것 같은 관권 만능이라는 병에 걸려 있으며 그로 인한 출혈로 죽어가고 있다 -----------------------------------------------------------------------------------
극도의 자기비하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정신분열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의식세계에 갇혀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오류와 착시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시대상황에 대한 무지이다.
위의 글에서 그리고 있는 조선은 19세기의 조선이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쳐 먼저 근대화 산업화를 이루어낸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고 수탈하던 서세동점의 시대였다. 서구의 시각으로 볼 때 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남미의 각국은 원시부족의 미개한 땅에 다름없었고,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역시 개국할 때 문명국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서구 각국과 불평들 조약을 체결했고 오래 동안 굴욕을 견뎌내야 했다. 개국하기 전에 일본과 조선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문명했고 어느 쪽이 더 미개했을까? 일반 대중의 삶이 어느 쪽이 더 양호했을까?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착시는 바로 개국하기 전의 조선과 메이지 유신 후에 근대화에 성공하여 열강의 반열에 들어간 다음의 일본을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리가 흑선을 끌고 동경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와 일본이 군함을 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를 기준으로 양국을 비교하면 오히려 조선이 선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