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화술사 하차투리안/ 박은정
하차투리안은 네모난 박스를 들고 유랑을 한다
왈츠를 추듯 우거진 정글을 가볍게 턴을 하고
수백 년 동안 사라진 기억을 단숨에 기억해내는 유연함
하차투리안은 단련되어간다
침묵으로 만든 꽃다발을 창에 걸고
무수히 오르내리는 밤들처럼
앞발을 들고 하차투리안
네모난 박스는 죽은 인형들의 집합체
입을 열면 비가 내리고 온 강이 범람하고
떠내려간 사람들은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온다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정은 말문이 막힌 표정
그러니까 슬프고 발랄한 침묵으로
오늘은 아주 이상한 일들이 많은 날일 테니까
정오가 되면 하차투리안은 이불을 말고
흔들의자에 기대 낮잠을 잤다
귀가 먼 부랑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하차투리안 하차투리안 우리의 전사 하차투리안
당신은 우리의 복화술사
당신은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매일매일 비밀을 발설하지
멋쩍게 웃던 하차투리안이 잠시 코를 곤다
일상의 불운 따위는 개나 던져주라지
하차투리안이 걷는다 두 팔을 크게 흔들며
그의 마법이 뚱뚱해졌다 날씬해졌다
늑골 속에서 회오리가 분다
수정 구슬을 들고 타로카드를 섞으며
내 목소리가 들리니
너는 지금 딴청을 부리고 있지만
아냐 견딜 수 있어 하차투리안
우리는 한때 불운을 즐기지 않았어
무감각과 무기력을 유일한 취미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의 입에서 나비가 날아다니고
내일 하루도 늙지 않고 죽을 수 있다면
거룩하게 잠이 들 텐데
우리는 목소리를 잃은 지 오래
날마다 똑같은 생을 되풀이하는 복화술사
문득 살아온 날들이 행방불명된다.
- 2011년 <시인세계> 신인상 당선작
■ 박은정 시인
- 1975년 부산 출생
- 2011년 <시인세계> 등단
-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외
《 심사평 》
말하는 자의 삶과 시 /김종해
우편, 이메일, 온라인을 합하여 제17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투고자 수는 246명, 작품 편수로는 3천 편을 상회한다. 이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응모자는 24명이다. 다들 예비시인으로서의 발상법과 화법, 언어구사가 매끄럽고 유려하지만 좀더 낯선 의미망과 제 목소리를 갖추고 있는 신인은 드물었다.
최종심에 세 사람이 남기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스테인리스」외 9편의 박은영, 「애장골」외 10편의 이현옥, 「복화술사 하차투리안」외 10편의 박은정이 이들이다.
이현옥의 「애장골」은 시의 완성도 면에서 무난하지만 화자가 풀어내는 비극적인 가족사의 서사가 시로서 잘 숙성되지 못한 흠을 보이고 있다. 주제를 파고드는 응집력이 부족하고 전체적으로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은영의 「스테인리스」는 무료급식소의 노숙자가 가진 ‘빈 그릇’에 담긴 사회성과 그를 보는 화자의 인간적인 연민이 그려져 있다. “이팝나무가 슬며시 젓가락을 내밀자 햇빛을 반사하는 눈부신 끼니”와 같은 표현은 탁월하다. 이 같은 시의 표현이 작품 전체를 받쳐주는 평형수준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뽑힌 박은정의 「복화술사 하차투리안」은 유랑하는 복화술사의 삶과 일상을 내것과 교감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차투리안은 자신이 설정한 인형극의 상황을 “매일매일 비밀을 발설하지만” 화자 자신도 “날마다 똑같은 생을 되풀이하는 복화술사”임을 진술한다. 설정된 대상의 삶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고, 나와 함께 노래하고 말한다. 시를 읽음으로써 읽는 이에게 쉽게 시가 전달되는 시, 이런 시를 박은정은 쓰고 있다. 시인으로서의 앞날이 기대된다.
《 심사평 》
시의 핵심을 끝까지 붙잡는 긴장감 / 신달자
예심을 넘어온 작품이 24명, 그 중 한 명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시를 읽은 첫 번째 인상은 시가 비슷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시가 불필요하게 길었고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시의 전달보다 시 예술 영역의 확장을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찾기 어려운 것이 심사자의 심정이었다.
마지막 남은 작품들은 이현옥 「애장골」, 박은영 「스테인리스」, 박은정의 「복화술사 하차투리안」이었다. 이현옥은 톡톡 튀는 언어들과 표현들이 있었지만 내용이 잘 잡히지 않아 아쉬웠고, 박은영도 이야기를 풀어 가는 재주가 잇는데 너무 불필요한 말들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당선된 박은정의 시도 크게는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에 무리가 없고 시의 중요한 핵심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긴장으로 인하여. 셋 중에서 시인의 명예에 오를 수 있었다. 시가 화면과 함께 떠오르게 하는 시적 장치가 매력이라고 더 덧붙이고 싶다.
시인의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다. 낙선자들은 더 분발하고 당선자는 겸허히 약점을 극복하고 정진 있기 바란다.
《 심사평 》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창출 / 권혁웅
이현옥, 박은영, 박은정의 시가 최종적인 논의 대상이 되었다.
이현옥(「애장골」외 10편)의 문장은 다정하고 유머러스하고 농염하다. “녹색 철대문이 툭, 뱉어낸 우체부는/ 왜 빨간 인주를 또, 들이밀까요”와 같은, 힘주지 않고도 시가 되는 구절들이 툭툭 나온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좋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우선적인 덕목이라면, 이현옥의 자리가 거기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시 곳곳에 꾸며낸 감정들이 얹혔다. 호흡이 풀어지고 방금 한 말을 또 하고 의성어나 의태어에 재차 기대는 것은 아직 자신감이 모자란다는 증거다. 자신을 조금만 더 믿는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박은영(「스테인리스」외 9편)의 시는, 어느 지면에 응모하든 본심에 올랐을 작품이다. 시선이 안정되어 있고 전언이 분명하며 대상을 확실히 포획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안정감은 짐이기도 하다. 안정된 시선은 정형화된 시선이고 분명한 전언은 당위적인 전언이며 사로잡은 대상은 놓친 대상이 많다는 증거다. 유비에 기대어 작업하는 시의 장점과 단점이 이번 시편들에서 극명하게 보인다. 개성을 밀고 나가 보편성에 이르는 것이지, 보편성에서 지분을 물려받아 개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했으면 한다.
박은정(「복화술사 하차투리안」외 10편)의 시는 앞의 시들보다 좀 더 어눌하고 좀 덜 선명하지만,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다. 고백체 말 사이에 현실을 촘촘히 박아 넣는 솜씨도 좋다.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창출할 줄 안다. 대상이 없는 고백, 다시 말해서 신파에만 주의한다면 돌올한 시들을 낳을 것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으나, 이정훈(「쏘가리 호랑이」외), 이복현(「혀」외), 안명하(「조심鳥心」외) 등의 시편들도 내려놓기에 안타까운 시편들이었음을 부기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