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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제 1차 침입이 있은 뒤 5년이 지나 성종이 죽고 목종이 왕위에 올랐다.
목종은 18살밖에 안 되어서 어머니 천추 태후가 정치를 도와주었다.
한데,
외가 친척인 김치양이 천추 태후와 사통을 하며 권력을 휘둘러서 조정이 어지러웠다.
특히, 간신 배들이 들끓었다.
이 무렵, 예부시랑으로 있던 강감찬은 대신들에게
"거란이 또 쳐들어 올 것입니다.
대책을 미리 세워야 화를 당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으나,
그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부귀와 영화를 누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 나라가 머지 않아서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히겠구나!'
강감찬은 948년, 즉 정종 3년에 금주 고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강궁진은 고려 태조를 섬긴 삼한벽상공신이었다.
▶'삼한벽상공신'이란,
왕건이 나라를 일으켜 통일 사업을 할 때 공을 세운 신하를 일컫는다.
어느 해에 한 신하가 말을 타고 금주 고을을 지나다가,
밤하늘에서 큰 별이 꼬리를 길게 끌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별이 떨어진 어느 집으로 말을 달려 간 신하는, 기와집 앞에서 주인을 찾았다.
하인이 나와서 방금 그 댁에 아들이 탄생하였음을 알렸다.
"오, 이 댁이 뉘 댁인가?"
"삼한벽상공신 강궁진 어른 댁입니다."
"별이 떨어지자 아들을 낳았으니, 부디 잘 기르도록 전하여라."
신하는 말머리를 돌렸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강감찬이었지만,
웬일인지 키가 자라지 않았다.
얼굴 또한 못생겼다.
그러나 강감찬은 머리가 아주 좋고 꾀가 많았다.
강감찬은 학문과 무예를 닦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14살 때 이미 천문, 지리, 병법까지 통달한 그는,
활 솜씨 또한 남이 따르지 못할 만큼 훌륭했다.
성종 2년(983)에 강감찬은
36살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강감찬은 재상으로 있을 때,
하루는 송나라에서 온 사신이 그에게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문곡성을 본 지 오래 되었는데, 바로 제 앞에 계시는군요."
문곡성이란, 큰 인물이 날 것을 점친다는 별 이름이다.
강감찬은 양주고을 목사로 부임해 간 적이 있다.
양주는 지금의 서울로서, 고려 시대에는 작은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이 무렵에 양주는 호랑이가 들끓어서 그 피해가 적지 않았다.
가축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물려 갔다.
▶'호랑이한테 물려 간다'는 어른들의 말씀은 이때 유행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기운이 장사인 목사가 부임해 와서 호랑이를 없애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람들은 작달막하고 못생긴 강감찬을 보자 실망을 했다.
"호랑이가 더 기승을 부리겠군."
"어째서?"
"호랑이가 우리 고을에 부임해 온 목사를 보면 얼마나 사람을 깔보겠어?"
그렇지만, 강감찬은 서슴없이 고을 백성에게 말했다.
"호랑이를 소탕하여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겠소!"
강감찬은 장정들에게 마을 주변의 숲을 모두 베도록 하여 허허벌판을 만들었다.
다음에는 활 잘 쏘는 사냥꾼들을 모아 덫과 함정을 만들어 놓고,
나타나는 호랑이를 모두 잡아 죽였다.
"강감찬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강감찬을 쳐다보았다.
강감찬은 허허벌판을 일궈서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그러자 고을 사람들은 호랑이 덕분으로 엄청난 곡식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은 강감찬을 우러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양주 고을에는 인구가 갑절이나 늘었다.
그런 강감찬이건만 조정 대신들은 거란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그의 말에 코방귀만 뀌었다.
부귀 영화와 권력 다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목종에게는 왕자가 없었다.
천추 태후와 김치양은 목종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노려,
무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다음 왕이 될 대량원군 순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하였다.
그러자 천추 태후와 김치양은 임금마저 해치려고 하였다.
목종은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개경으로 돌아와 자기를 지키라고 하였다.
강조는 5천 군사를 이끌고 대궐로 쳐들어가서 우선 김치양을 비롯한 그 일당을 모조리 죽이고,
천추 태후와 함께 도망가던 목종마저 목을 베었다.
이것을 '강조의 정변'이라 한다.
☞ 강조는 천추 태후를 귀양보내고, 대량원군 순을 임금으로 세웠다.
이가 현종이다.
'강조가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목종은 가만 놔두었어야 했는데…….'
강감찬은 큰 변란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거란이 트집을 잡았다.
강조가 임금을 죽였으므로, 그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다.
고려 조정에서 사신을 보냈으나 거란의 성종은 이미 침입할 구실을 잡았으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감찬은 현종에게 말했다.
"거란은 기회만 노리고 침입할 구실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빨리 방비를 서둘러야 하옵니다."
현종은 강조에게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통주로 나가라고 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것이 '거란의 제 2차 침입'이다.
거란군은 홍화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고려의 장수 양규와 이수화 등은 그곳을 지켜 냈다.
거란의 성종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20만 대군을 이끌고 통주로 진격하였다.
강조가 이끈 고려군은 거란군을 보기 좋게 무찔렀다.
강조가 거란군에 대승을 거두고, 그날 밤에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물러갔던 거란군이 기습을 하여 강조는 물론, 부하 장수들이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했다.
거란의 성종은 다시 홍화진을 공격하였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남쪽으로 진군하여 곽산, 안주, 숙천 등을 짓밟고 서경으로 향했다.
서경의 관민들은 성을 굳게 지켰다.
현종은 개경이 적에게 짓밟힐 위기를 맞아 긴급히 중신회의를 열었다.
중신들은 하나같이, "항복하는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하고 말했다.
63살 된 강감찬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아니 됩니다! 강동 6주를 내 주고 항복한다면, 우리 고려는 영원히 오랑캐의 노예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된다 말씀이오?"
"우선 화평을 제의해서 시간을 벌고,
상감께서는 남쪽으로 피난을 하시어 적이 지칠 때를 기다림이 좋을 듯하옵니다.
적의 기세가 제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제풀에 지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기회를 노려 일시에 공격하면 되옵니다."
현종은 강감찬의 제의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듬해인 1011년 1월 1알,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 때 개경이 함락되었다.
현종은 나주로 갔다.
한편,
하공진은 어명을 받들어 1월 3일에 거란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화평을 도모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고려 임금을 사로잡아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다.
"나주는 개경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거란의 성종이 하공진에게 물어 보았다.
"굉장히 멉니다."
"몇 백 리나 되는가?"
"몇 백 리가 아니라, 몇 천리가 되옵니다."
하공진은 거짓말을 하였다.
거란의 성종은 몇천 리가 된다는 말을 듣고는 고려 임금을 사로잡을 생각을 버렸다.
거란의 성종은 그 동안 몹시 지쳐 있었다.
고려군이 거란군의 뒤를 위협하므로,
거란의 성종은 하공진의 철군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철군을 하는 대신, 고려 임금이 친조(임금이 직접 찾아가는 일)를 해야 한다."
거란의 성종은 개경에 들어온 지 10여 일이 지난 뒤에,
하공진을 볼모로 잡고 군대를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고이 돌아가지 못했다.
고려군의 저항과 기습을 받아서 거란의 성종은 막대한 피해만 입고 돌아갔다.
명장 양규도 이때 전사하였다.
볼모로 거란에 잡혀갔던 하공진은
거란의 성종에게 벼슬을 받아 지내기도 하였으나,
조국이 그리워서 도망치다가 붙잡혀 죽고 말았다.
하공진의 충절은 길이 빛난다.
거란에 짓밟힌 개경은 쑥밭이 되었다.
현종은 1월 21일 나주를 떠나 사흘만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현종은 강감찬의 계책으로 거란의 제 2차 침입을 막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강감찬은 옆에서 임금을 모실 만큼 큰 벼슬에 올랐다.
"거란은 강동 6주을 찾으려고 침입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반드시 또 쳐들어 올 것입니다."
"그럼 어찌해야 되겠소?"
현종은 강감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과 싸울 수 있도록 힘을 기르고, 그 때까지 그들을 구슬려 놓아야 하옵니다."
"허허허, 공은 어릴 때부터 꾀가 많았다는 말은 들었소.
거란의 대군을 막을 지혜 또한 훌륭하오."
강감찬을 칭찬한 현종은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저들을 구슬렸다.
거란은 이듬해인 1012년에 사신을 보내어 친조를 독촉하였다.
고려 왕이 직접 찾아오라는 것이다.
고려 조정은 이 문제로 또다시 술렁거렸다.
강감찬이 말했다.
"우리 임금이 다른 나라에 가서 고개를 숙인 예는 일찍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나서는 아니 됩니다.
거란이 친조를 독촉하는 것은 강동 6주를 찾기 위하여 전쟁 시비를 거는 것이옵니다.
먼저 동여진족에 대한 수비를 튼튼히 하여, 거란과 맞 싸울 태세를 갖추십시오."
동북 방면의 동여진족들도 고려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을 꺾어 놓아야, 거란과 더불어 양면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강감찬은 또 한가지 지혜를 짜내었다.
현종이 꾀병을 앓도록 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그 해 6월에 형부시랑 전공지를 거란에 보내었다.
전공지가 거란의 성종에게 말했다.
"상감께서는 지금 몹시 앓아 누워 계십니다."
"무엇이라고? 아픈 사람을 오라고 할 수는 없지. 그 대신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하여라."
비로소 강감찬의 예측대로 거란의 본색이 드러났다.
현종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 대책을 강감찬에게 물었다.
강감찬은 단호하게 말했다.
"영토를 호락호락 내 주는 바보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내버려두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방비 태세를 더욱 굳게 갖추기만 하면 됩니다."
거란은 아무 소식이 없자 계속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이듬해인 1013년, 강감찬은 중추원사가 되었다.
강감찬은 자기의 논밭을 몽땅 나라에 바쳐 군대를 양성하는데 썼다.
고려군은 날로 강성해졌다.
거란군은 압록강에 다리를 놓는 등 전쟁 준비를 서두르는 한편,
작은 부대로 고려 국경을 침입하였다.
그 때마다 고려군은 승리를 거듭하였다.
현종 6년(1015) 4월, 야율행평이 고려로 와서 말했다.
"강동 6주를 빼앗겠다!"
강감찬은 야율행평을 즉각 잡아 가두었다.
그 뒤부터 고려와 거란과의 사이는 날로 험악해져 갔다.
1018년, 현종은 강감찬으로 하여금, 서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강감찬은 서경 유수가 되어 이 해 5월 초순에 개경을 떠났다.
그 해 10월에 서북면 행영 도통사로 임명을 받은 강감찬은 71살의 늙은 몸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1018년 12월, 거란의 성종은 사위인 소배압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도록 하였다.
이것이 '거란의 3차 침입'이다.
소배압은 제 1차 침입 때 서희와의 담판에 눌려 돌아간 소손녕의 형이다.
10만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서 거란군을 막도록 하였다.
강감찬은 이미 20만 8천 3백여 명의 군사를 훈련시켜 놓고 있었다.
강감찬은 홍화진에 진을 치고, 작전을 짜기 시작하였다.
홍화진의 동쪽에는 삼교천이란 큰 내가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장마만 지지 않으면 물이 얕아서 쉽게 걸어 건널 수 있었다.
"날랜 군사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적을 공격하시오."
강감찬은 강민첨에게 명령하였다.
그런 뒤,
강감찬은 수백 장의 쇠가죽을 밧줄로 매어 강의 상류를 막도록 하였다.
또 군사를 강 양쪽에 숨겨 놓았다.
얼마 뒤,
소배압의 군사들은 강물이 얕은 곳을 골라서 삼교천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때를 노려, 강감찬은 상류에 막아 놓은 물을 터놓았다.
"아악, 물벼락이다!"
"비도 안 오는데 웬 물이냐?"
거란병들은 갑자기 쏟아져 내려오는 물에 휩쓸려 아우성을 치다가,
강 양쪽에서 쏘아 대는 고려군의 화살을 맞았다.
비명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속았다!"
소배압은 고려의 강감찬의 작전에 말려든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많은 병사를 잃은 소배압은 겨우 전열을 정비할 수가 있었다.
소배압은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적이다!"
이때, 산골짜기에 숨어 있던 강민첨의 군사들이 튀어나와 공격했다.
거란병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홍화진의 첫 싸움에서 패한 소배압은 개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개경을 함락시키고 고려 임금의 항복을 받을 속셈이었다.
강민첨의 군사는 남쪽을 향해 지름길로 달려 내구산에 숨어 있다가,
남쪽으로 진군해 오는 적을 무찔렀다.
소배압은 또 큰 피해를 입고 서경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마탄에 숨어 있던 고려군의 기습을 받아 소배압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소배압은 불과 1천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산 속으로 도망쳤다.
남은 군사를 모으니, 그래도 5, 6만은 되었다.
소배압은 다시 대열을 정비해 가지고 개경을 향하여 진군하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김종현에게 명령하였다.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빨리 개경으로 달려가서 지키시오!"
또, 강감찬은 동북면 병마사에게도 3천 3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소배압은 마침내 신은현까지 이르렀다.
이곳은 개경에서 백리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었다.
신은현은 현종의 '청야 전술'로써 사람은 물론 곡식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란군이 약탈을 할 것에 대비하여 모든 것을 싹 비워 버렸던 것이다.
"이거 굶어 죽겠네!"
"나는 지쳐서 한 발짝도 못 옮겨 놓겠어."
거란병들은 당황하였다.
소배압은 개경에 염탐꾼을 보내어 그곳의 형편을 알아보았다.
염탐꾼이 돌아와 보고했다.
"개경은 수많은 군사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소배압은 힘이 쭉 빠졌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계획을 세우는 도리밖에 없다.'
소배압은 야율호덕을 개경에 보내어 거짓으로 화의를 제의하게 하고는, 도망갈 길을 엿보았다.
또, 기병대를 남쪽으로 내려보내어 고려군이 뒤쫓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보낸 거란의 기마병 척후병들은,
금교역에 도착한 날 밤에 고려군의 야습을 받아서 전멸하였다.
소배압은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고려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어 가며, 마침내 귀주에 이르렀다.
▶이 때,
강감찬은 귀주와 동쪽들에 진을 치고 소배압의 군사를 가로막고 있었다.
강감찬은 부하들을 격려했다.
"이제는 지쳐서 비실비실하는 거란의 주력 부대만 처치하면 된다!"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뜻하였다.
마침내 귀주 벌판에서 양군이 결전을 벌였다.
▶그 때 강감찬의 명령을 받고 달려온 김종현의 부대가 거란병의 뒤를 치기 시작하였다.
"도망치자!"
거란병들은 일제히 흩어져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적을 추격하여 오랑캐들을 한 놈도 살려 주지 마라.!"
강감찬의 명령이 떨어졌다.
고려군은 적을 추격하여 마구 무찔렀다.
들과 산에는 거란병의 시체가 널렸다.
소배압은 갑옷과 투구도 벗어버리고는 석천을 건너 반령으로 말을 달렸다.
거란병들도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때, 압록강을 건너 살아 남은 거란병은 겨우 수천 명밖에 안되었다.
▶이 유명한 고려군의 승리를 강감찬의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귀주 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외적을 크게 무찌른 3대첩의 하나로 손꼽힌다.
강감찬은 72살의 늙은 몸으로 우리 민족을 오랑캐의 말발굽에서 구해 냈던 것이다.
거란은 그 뒤, 두 번 다시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