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金德齡경수(景樹), 충장(忠壯)
시대출생사망유형관련 사건직업성별분야본관
조선 |
1568년(선조 원년) |
1596년(선조 29) |
인물 |
임진왜란 |
의병장 |
남 |
역사/조선시대사 |
광산(光山) |
요약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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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韓絢
시대출생사망경력유형관련 사건직업성별분야
조선 |
미상 |
1596년(선조 29) |
의병장 |
인물 |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
주모자 |
남 |
역사/조선시대사 |
요약 조선후기 이몽학과 결탁하여 난을 도모한 주모자.
생애 및 활동사항
서얼 출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맹위를 떨쳤다. 1594년에는 겸사복(兼司僕)으로서 적군이 퇴각한 충청도에 의병들이 갖추어놓았던 군기들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명나라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하여 속오법(束伍法)이 시행되면서 속오군을 창설하였는데, 이에 응모하여 선봉장이 되어 이시발(李時發) 휘하에서 호서지방의 속오군을 훈련시켰다.
이때에 충청도 홍산의 서얼출신으로 무량사(無量寺)에 거처하던 이몽학(李夢鶴)과 결탁하여 난을 도모하였는데, 마침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홍주로 가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병하면 뒤에 합세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몽학은 무량사 승려들과 더불어 난을 주도하여 홍산·임천·청양·정산 등 6개의 고을을 점령하고, 그가 있는 홍주로 갔다. 이때 홍주목사가 민병을 수습하고, 남포현감·수사(水使) 등이 수영병(水營兵)을 이끌고 홍주에 들어가자 이몽학은 홍주를 공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챈 그는 면천으로 도망하였으나 면천군수 이원(李援)에게 잡혀 이몽학과 함께 참수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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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류재집(四留齋集) 이정암(李廷馣)생년1541년(중종 36)몰년1600년(선조 33)자중훈(仲薰)호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본관경주(慶州)봉호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시호충목(忠穆)특기사항성혼(成渾), 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
四留齋集卷之八 / 行年日記[下]
선조 | 29 | 1596 | 병신 | 萬曆 | 24 | 56 | 忠淸道 觀察使가 되다. ○ 12월, 지중추부사가 되고 黃海道 觀察使를 겸하다. |
丙申二月。除拜海州牧使。
○七月初。鴻山逆賊李夢鶴。嘯聚不逞之徒金慶昌,李龜,張後載,僧凌雲,私奴,彭從等數百人。連陷鴻山林川定山靑陽大興等邑。執捉鴻山縣監尹英賢,林川郡守朴振國以去。到洪州見敗。爲其下林億明,林大根,金慶昌等所殺。斬首來降。卽馳啓罷兵。魁賊夢鶴。乃宗姓孼産。初爲選鋒將韓絢募粟官。誆誘愚民。聲言倭將淸正。還渡入寇。當倡率義兵討之。以立奇功云。故厭亂避役之徒。靡然從之。雲合響應。不數日衆至數千人。列邑守令。望風遁去。如入無人之境。適洪州牧使洪可臣。閉門守城以拒之。賊徒知不得成事。潰散以去。自中相啚也。拿致韓絢鞫之。則兇謀一一承服。遂與夢鶴尸首。梟示四方。洪州牧使及兵使李時言,水使崔湖,御史李時發等。皆論賞加資。余以不能進討及餘黨擅斬之故。被論。先罷後推。蓋以變初。海運判官趙存性。恇怯上京。誇張賊勢。過實上達。而余料狂賊無終日之計。不出十日。必有內自相圖者。坐鎭公城。使兵使收兵。以遮京城要路。又令洪州守城。水使外援。通文于湖南。遮截林川等地。使不得奔迸。而此等曲折。未及狀啓。五日之內。賊魁授首。故意外被論如是。可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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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9년 무신(1668) 4월 13일(신사)
09-04-13[05] 김인후ㆍ강항ㆍ김덕령을 추증하다
고 유신(儒臣) 교리 김인후(金麟厚)를 이조 판서에, 절사(節士)인 좌랑 강항(姜沆)과 의병장인 좌랑 김덕령(金德齡)을 제조(諸曹)의 참의(參議)에 추증하였다.
김인후는 자가 후지(厚之)이고 호가 하서(河西)이다. 대대로 호남의 장성(長城)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문재(文才)가 숙성하여서 신동이라고 불리웠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경학에 밝고 행실이 뛰어났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오랫동안 강관으로 있었는데, 아주 깊이 인정을 받았다. 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옥당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매번 인종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혼자서 산속으로 들어가 통곡하고서 돌아왔으므로 ‘해마다 7월이면 온 산중에 통곡소리’라는 시구가 있게 되었다. 논자들은
“을사 사화(乙巳士禍) 이후 사류로서 출처(出處)가 바르기로는 김인후만한 사람이 없다.”
고 하였다. 졸함에 미쳐서는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었다. 그가 지은 시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강항은 영광(靈光)에 살았으며 글재주가 있어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유년에 형조 좌랑으로서 재신(宰臣)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이 되어 바닷가 고을에서 군량미를 모으다가 온 집안이 왜적에게 잡혔는데, 여러 차례 죽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으로 잡혀가서는 몰래 납서(蠟書)로써 왜적의 동태를 알렸으며, 모습을 저들처럼 바꾸어 훼손시키거나 의관을 바꾸지 않은 채 지내었는데, 4년이 지난 경자년에 왜인들이 비로소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선조가 불러서 서울에 도착하자, 왜적의 정세에 대해 두루 물어보았으며, 이어서 술을 하사하고 말을 지급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왜인들이 그의 절의를 몹시 칭찬하였는데, 심지어는 소무(蘇武)와 문천상(文天祥)에게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이를 듣고서 가상히 여겨 탄식하였으며, 당로자에게 글을 보내어 그를 거두어 서용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당론이 한창 성한 때라 끝내 폐기된 채로 생을 마쳤다. 그가 지은 《수은집(睡隱集)》ㆍ《간양록(看羊錄)》 등의 서책이 세상에 전한다.
김덕령은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신력(神力)이 있고 비할 바 없이 날래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상복을 벗고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이 남쪽 지방에서 군사들을 위무할 때 불러보고 격려하면서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선조가 형조 좌랑에 제수하고 또 군호(軍號)를 고쳐 초승(超乘)이라고 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고무되어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왜인들도 듣고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적과 대치한 3년 동안에 끝내 적의 목을 벤 공이 없었으며, 성질 또한 술주정이 심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병신년에 일어난 호서의 적당(賊黨)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한현(韓絢)이 의병장으로서 동참하였다가 죽었는데, 여러 적도들이 김덕령 역시 함께 모의하여 서로 호응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름이 한현의 밀서(密書) 중에 들어 있었다. 이에 상이 크게 놀라 승지 서성(徐渻)을 보내어 체포하게 하였는데, 서성이 도착하기 전에 김덕령은 조정의 명이 있었음을 들었으므로 먼저 스스로 나아갔다. 치대(置對)함에 미쳐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柳成龍)은
“이치상 반드시 살려둘 수 없다.”
고 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감히 살리자는 의논으로 편들어주는 자가 없었으며, 판의금부사 최황(崔滉)이 또 속히 형신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포상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주-D001] 정유년 : 1597 선조 30년.[주-D002] 병신년 : 1596 선조 29년.[주-D003] 이몽학(李夢鶴)의 난 : 선조 29년(1596)에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이 일으킨 반란임. 이몽학은 서얼 출신으로 임진 왜란 때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부하로 들어갔는데, 그와 함께 반란을 모의, 왜군의 재침입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장정을 끌어 모았으며, 동갑계회(同甲契會)란 비밀 결사를 조직해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 때 홍산ㆍ임천(林川)ㆍ청양(靑陽) 등을 함락해 세력을 떨쳤으나 홍주(洪州)를 공격하다가 홍가신(洪可臣)에게 패하였으며 자신의 부하인 김경창(金慶昌) 등에게 살해되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선조 고사본말(宣祖故事本末) 제도토적지기(諸道土賊之起).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