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루의 시 2

[이정환]

2. 내용

이정환 시조의 주요한 내용 특징을 몇 가지 항목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내용적 특징은‘심미적 서정, 초월적 비가, 실존적 성찰, 생명회복 의지, 역사의식 구현, 동심을 드러내는 노래’다.

가. 심미적 서정

시는 근원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언어는 기호이지만, 일정한 뜻을 가지고 있고, 언어와 언어가 만나게 되면 운율을 만들어낸다. 심미는 아름다움을 식별하여 가늠하는 일이다. 이것은 미적 자질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언어를 활용하여 생산된 시가 미적 성취를 이룰 때 정서적 반향이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심미적 서정의 세계를 이정환 시인이 어떻게 축조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⑴

그윽이 저물어서

물소리에 별이 뜨듯

다듬이에 감겨들던

풀물 밴 유년시절

달빛은 문지방 너머

연한 살결 내보였다

무명 적삼 홀로 해맨

꿈속 어느 벼랑쯤

헛놓은 발걸음에

단잠 깨던 봄 한나절

가난은 장다리꽃밭

나비 떼로 묻어났다

솔가지 한 짐 지고

큰 기침이 멎던 뜨락

지게 위에 꽂힌 꽃을

품에 불쑥 안겨주고

허허허 너털웃음에

산 솔빛이 흔들렸다

-「봄날에」전문

⑵

저 물젖은 장밋빛깔의 분명한 이름은 뭘까

여헌은

도저히 말로

이를 수 없다지만,

맞선을 보던 그날의 홍조 흐르던 귀밑머리

-「꽃밭에서」전문

⑴은 서정성이 농후하고 전통적인 흐름을 보인다. ‘그윽이 저물어서/ 물소리에 별이 뜨듯’이라는 대목에서 ‘물소리에 별이 뜨듯’이 주는 표현의 묘는 참신하다. 공감각이 긴 울림을 준다. ‘다듬이에 감겨들던/ 풀물 밴 유년시절’도 그러하다. ‘문지방 너머/ 연한 살결’을 내보이는 달빛이 주는 정감도 살갑다. 뒤이어 한 아이가 등장한다. ‘무명 적삼 홀로 해맨/ 꿈속 어느 벼랑쯤// 헛놓은 발걸음에/ 단잠 깨던 봄 한나절’에 ‘가난은/ 장다리꽃밭/ 나비 떼로 묻어’난 경험을 되살려 놓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솔가지 한 짐 지고/ 큰 기침이 멎던 뜨락// 지게 위에 꽂힌 꽃을/ 품에 불쑥 안겨 주’던 아버지다. 그 때 아이는 듣고 보았던 것이다. ‘허허허/ 너털웃음에/ 산 솔빛이 흔들’리던 것을. 시의 화자는 이러한 유년시절 봄날의 한 스토리를 끄집어내어 소담한 정경을 되살려 놓고 있다. 꿈같은 혹은 설화와 같은 장면이다. 「봄날에」에서 토포필리아와 바이오필리아를 동시에 본다. 박기섭은 ‘정과 한의 서정이 뛰어난 조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⑵는 ‘물젖은 장밋빛깔’과 ‘맞선을 보던 그날의 홍조 흐르던 귀밑머리 ’빛깔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감흥을 단시조로 엮은 것이다. 자아 즉 귀밑머리와 세계 즉 장밋빛깔의 동질성으로 말미암아「꽃밭에서」는 중장에 등장하는‘여헌’이라는 존재와 오버랩 되어 묘한 시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⑴

에워쌌으니 아아 그대 나를 에워쌌으니 향기로워라 온 세상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온 누리 향기로워라 나 그대 에워쌌으니

-「에워쌌으니」전문

⑵

자목련 산비탈 저 자목련 산비탈 경주 남산 기슭 자목련 산비탈 내 사랑 산비탈 자목련 즈믄 봄을 피고 지는

-「자목련 산비탈」전문

⑶

1

마주 앉아서

말없이 천년

눈빛으로 천년

눈빛으로 천년

덧없이 마주 앉아서 눈빛으로 천년

2

잠이 옵니다 온몸으로 잠이 스미어 듭니다

아득한 벼랑 끝에 별빛 내리듯 내 영혼 몸 밖으로 빠져 나가고 썰물인 듯 썰렁하니 빠져 나가고

흰 뼈만

남습니다, 아아

또 다시

천년

-「천년」전문

⑴은 숨 가쁜 전개를 보인다. 무려‘에워쌌으니’가 세 번 ‘에워싸고’가 한번 활용되면서 나와 그대가 한 호흡을 이룬다. 그리고 ‘그대와 나’의 자리가 종장에서 바뀌면서 작은 반전을 이룬다.「에워쌌으니」는 구조상 ⑵과 유사하다. 시조집에 실린 순서로 보아「자목련 산비탈」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에워쌌으니’는 포위하다는 뜻을 지닌 말인데, 이 말이 사랑의 언어로 전이되면서 묘한 울림을 가지는 시어가 된 것은 시인의 언어 운용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짧은 단시조 안에서 지나친 말의 되풀이는 내용의 단조로움을 야기할 수도 있는데, 시적 장치로 말미암아「에워쌌으니」는 그것을 피해가고 있다.

김복근은 이정환의「에워쌌으니」를 구조는 단순하지만, 함의하는 의미망은 크다, 너와 내가 하나로 에워싸여 주체할 수 없이 뜨거운 사랑을 지향한다. 동어반복은 자칫 시의 미감을 헤칠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에워쌌으니’와 ‘향기로워라’가 반복되면서 리듬감을 절묘하게 살려내면서 전혀 단조롭지 않고 오히려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단형시조의 새로운 형태미를 보여주면서 의미 유추를 다양하게 전개할 수 있는 시적 장치로 시의 맛을 체감하게 한다고 하였다.

김양헌은 ⑵ 역시 반복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반복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한다. 배경은 경주 남산이기에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자목련이라는 봄날의 꽃이 ‘경주 남산 기슭’에서 피어남으로써 그 의미가 달라진다. 즉 ‘즈믄’이라는 천년의 이미지와 접맥되어 도저함을 얻는다. 지시어 ‘저’가 적절하게 놓여 눈길을 끌어당기고, ‘내 사랑 산비탈 자목련 즈믄 봄을 피고 지는’이라는 전이된 이미지가 미완성의 문장으로 처리되면서 흡사‘천년’의 길이와 깊이에 닿는 듯한 시적 정황을 이룬다. 이우걸이‘우리 시조문학 사상 가장 경제적인 어휘로 쓴 빼어난 연시라면 과찬이 될까.’라고까지 했을 만큼「자목련 산비탈」은 심미성 짙은 작품이다.

아래는「자목련 산비탈」에 대한 시인의 산문이다. 그가 얼마나 경주 남산 기슭 자목련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지를 넉넉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4월 초순 통일전 뜨락은 자목련이 만개한다. 아무리 보아도 자목련 꽃송이는 새로 보인다, 수백 수천의 자목련 새들이 곧장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치고 있다. 나는 그것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언제 날아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목련 새들은 한 마리도 비상하지 못하고 땅으로 내려앉는다. 내려앉아 이내 시들고야 만다. 그것은 못내 슬픈 일이다. 해마다 나는 그 일을 되풀이해서 격지만, 자목련 새는 눈물꽃나비처럼 꿈속에서만 날아오를 뿐이다.

경주 남산 기슭 하늘을 날아오른 새여. 자목련 새여. 눈물 어룽지게 하는 자줏빛 나의 새 떼들이여.

김만수는‘자목련 산비탈’은 세 번 거듭 반복되면서 어떤 유장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것을 아무런 생각도 더하지 않은 무념의 상태에서 중얼거려보면 음악에 가깝다. 그러나 시인은 종장에서 그 순서를 바꾸어 ‘산비탈 자목련’이라는 파격을 만들어낸다. ‘자목련 산비탈’에서 ‘산비탈 자목련’으로의 리듬의 전환은 이 시 속에서 지속되어온 기계적 리듬에 새로운 활기와 긴장을 만들어낸다고 하였고, 김제현은 평범한 소재를 어떻게 시조의 반복과 전환이라는 맛깔스런 장치로 전환이 가능한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김양헌은 척박한 곳에서 자목련이 피어나고 있음을 언어가 없어도 리듬에 맞추어 말하고 있는 셈이라고 보았다.

⑶은 단시조와 사설시조의 혼용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 ‘마주 앉아서/ 말없이 천년’이 ‘눈빛으로 천년’과 연결되면서 그 덧없음이 극치를 이룬다. 그리고 그 덧없음 끝에 ‘잠’이 찾아오고 ‘아득한 벼랑 끝에 별빛 내리듯 내 영혼 몸 밖으로 빠져 나가’ 버린다. 그리하여 끝내 ‘흰 뼈’만 남고 ‘또 다시 천년’이다. 즉 영원이다. 사랑은 영원과 이어져야 하고 이어져 있다는 메시지가 이면에 깔려 있다.

⑴

벤자민이 서 있는 분아래 희고 단단한 받침대로 놓여 묵묵히 그저 묵묵히 한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때로 푸른 잎들을 무성히 바람결에 흩날리듯이

비로소 나는 그렇게 한 사람을 위하여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나의 견고한 어깨며 팔다리며 더운 피 들끓는 심장을 끝끝내 넘어지지 않을 받침대로 삼아 그대 어여쁜 발아래 두 무릎 아래 세웠나니 그대가 가진 그 모든 소중하고 무겁고 아픈 것들을 다 보듬어 안고 이 자리에 그대 설지라도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조금도 고통스럽지도 괴롭지도 않을

내 몸은 철제 받침대

마지막까지 남을 버팀목인 것을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전문

⑵

얼굴이며 뺨이며 그 뺨의 점까지며 열 길 물속보다 더 깊어 종내 헤아릴 길 없는 그 마음까지도 검은 것은 그렇듯이 속조차 검은 것은 숯이기 때문이다

옛 서라벌의 외딴 마을 외딴 집 조반을 끓이던 숯이기 때문이다, 불길 닿으면 금세 활활 타오를 것을 꿈꾸는

꿈꾸는 그대 마지막 사랑이기 때문이다

-「숯」전문

⑶

붓은 따라갈 뿐이다 이미 마음으로 그 마음의 눈으로 궁굴려 놓은 것을 붓을 잡은 손은 거침없이 화폭 위로 혹은 흰 모래톱 위로 오고갈 뿐이다

어여쁜 손놀림이 어깨선의 움직임이 젖은 머리칼이 때 없이 뒤로 젖히어 향기로이 흔들림이 어디 잠시의 쉼이라도 있던가

허공에 버려지는 붓, 저 홀로 불탈 때까지

-「붓의 의미」전문

⑷

꽃 피어 자책합니다, 참 많이도 모자랐지요

저 꽃들이, 무수한 꽃송이, 송이들이 당신의 귀엣말인 듯하여 낯을 들지 못합니다, 감히 무어라 고개 들어 답하지를 못합니다

밤 새워 지키고 선들 어쩌지를 못합니다

-「봄의 자책·2」전문

사설시조 네 편이다. ⑴은 비근한 생활 속의 소재로 영원성을 노래한다. ‘벤자민이 서 있는 분아래 희고 단단한 받침대로 놓여 묵묵히 그저 묵묵히 한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때로 푸른 잎들을 무성히 바람결에 흩날리듯이’가 시선을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그 순간 ‘희고 단단한 받침대’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소 긴 중장은 ‘비로소 나는 그렇게 한 사람을 위하여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나의 견고한 어깨며 팔다리며 더운 피 들끓는 심장을 끝끝내 넘어지지 않을 받침대로 삼’은 다음 ‘그대 어여쁜 발아래 두 무릎 아래 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대가 가진 그 모든 소중학고 무겁고 아픈 것들을 다 보듬어 안고 이 자리에 그대 설지라도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조금도 고통스럽지도 괴롭지도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 까닭이 종장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내 몸은 철제 받침대/ 마지막까지 남을 버팀목’이기 때문이라고.「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는 사설시조가 갖추어야 할 일반적인 조건을 잘 구비하고 있다. 또한 제목에서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이미지가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영원 지향성은 매우 애절하다.

⑵는 초장이 상대적으로 길다. 호흡이 가쁜 점층 구조다. 초장의 진술로 보아 시의 화자는 모든 것이 검다. 몸과 영혼이 검은 것은 숯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예사 숯이 아니다. ‘옛 서라벌의 외딴 마을 외딴 집 조반을 끓이던 숯’이어서 ‘불길 닿으면 금세 활활 타오를 것을 꿈꾸는// 꿈꾸는/ 그대 마지막/ 사랑이기 때문’에 속조차 검은 것이라고 항변한다. 그 진정성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울러 한 점 연기도 없이 오래도록 타오르는 숯을 통해 영원성을 표상하고 있다.

⑶은 붓을 통해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는 이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붓은 따라갈 뿐이다 이미 마음으로 그 마음의 눈으로 궁굴려 놓은 것’을 ‘붓을 잡은 손은 거침없이 화폭 위로 혹은 흰 모래톱 위로 오고갈 뿐이다’라는 묘사에서 붓은 단지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중장 ‘어여쁜 손놀림이 어깨선의 움직임이 젖은 머리칼이 때 없이 뒤로 젖히어 향기로이 흔들림이 어디 잠시의 쉼이라도 있던가’라는 반문을 통해 한 예술가의 아리땁고도 숭고한 자세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붓은 종내 ‘허공’에 버려지고 ‘저 홀로 불’타버린다. 붓의 헌신이지만 붓과 화가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결구이기도 하다.

⑷는 꽃 피는 봄날의 정서를 담백하게 노래하고 있다. ‘꽃피어 자책합니다, 참 많이도 모자랐지요’라는 회고조의 첫머리에서 꽃 피는 일과 자책의 관련성에 대해 오래 숙고하게 만든다. ‘저 꽃들이, 무수한 꽃송이, 송이들이 당신의 귀엣말인 듯하여 낯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히 무어라 고개 들어 답하지를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밤 새워 지키고 선들 어쩌지를 못’함을 고백하면서 끝맺고 있다.

이정환의 사설시조는 그 이채로운 미학적 구조와 개성적인 언어 운용으로 사설시조의 존재 이유를 담보하고 있다.

⑴

1

내겐 미명이로다, 어질머리 어질머리로다

수천수만 지느러미

비단잉어 떼의 지느러미

내게는 어질머리로다

다만 미명이로다

2

혼미로다 그대, 내 안에 노니는 금빛잉어

불가해의 혼미로다,

내 안에 노니는 금빛잉어

못물도 천년의 못물,

내 안에 노니는 금빛잉어

-「매혹」전문

⑵

내 노래보다 먼저 산을 넘은 그대 그 산밑 아무도 찾지 않는 빈집에 노래를 부둥켜안고 홀로 사위어 가고 있던 내 노래보다 먼저 속울음이었던 그대 불현듯 산 하나의 둘레와 높이로 사랑을 이루었던 그대, 천길 단애를 딛고 서서 산을 넘으면 거기 산비탈 오두막집 그리움의 문고리가 있어 아프게 흔들어대던 천년의 깊이로 내려선 그대, 내 안의 먼 그대

-「내 노래보다 먼저」전문

두 편의 연시조는 모두 사랑을 주조로 하고 있다. ⑴과 ⑵의 흐름은 이정환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반복법이다. 이 시인은 서정시에서의 반복의 효용성을, 그 가치를 알고 있다. ⑴에서 ‘미명이로다, 어질머리로다, 지느러미, 혼미로다, 못물, 내 안에 노니는 금빛잉어’이라는 말들이 되풀이되면서 새로운 의미 체계와 운율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제목「매혹」과 연결되어 울림을 일으킨다.

⑵는 시종 나와 그대가 절절한 공명의 시공간 안에 놓여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견인하고 밀어내기도 한다. 그대는‘내 노래보다 먼저 산을 넘은 그대’다. ‘그 산 밑 아무도 찾지 않는 빈집’에 ‘노래를 부둥켜안고 홀로 사위어 가고 있던’그대다. ‘내 노래보다 먼저 속울음이었던 그대’였기에 ‘불현듯 산 하나의 둘레와 높이’로 천길 단애를 딛고 선 채로 ‘사랑을 이루었던 그대다. 또한 그곳에는 ’산비탈 오두막집’에 ‘그리움의 문고리가 있어 아프게 흔들어대던’그대가‘천년의 깊이로 내려선’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픈 것은 그가‘내 안의 먼 그대’이기 때문이다.「내 노래보다 먼저」는 이렇듯 사랑의 오뇌를 진솔한 언어로 담백하게 그리고 있다.

⑴

1

내 속엔 무수한 짐승 떼들이 산다

내홍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불붙은 산

등짝에

불화살 맞은

내란의

짐승 떼들이 산다

2

나는 도적이다, 그리움으로 채워진

궤짝을 훔친

나는 도적이다, 그 궤짝 등에 짊어지고

천년의

분화구에 뛰어든

슬픈 도적이다, 나는

3

아아, 이리도 가슴을 후려치는

북채가 있어

마침내

둥기둥 울리는 봄날의 북이 되었구나

꽃처럼

찢어지곤 하는

애련의 북이 되었구나

-「너의 초상」전문

⑵

시칠리아섬 에트나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 내 속에 있었던 것, 그대 속에 있었던 것

천년을! 천년에 또 천년 그 너머의 세월을! 안으로 안으로만 들끓던 것, 시칠리아섬에 가보면 알리라, 에트나 화산은 그대 가슴인 것을

그 깊이 못다 헤아릴 슬픈 굴헝인 것을!

-「에트나 화산」전문

⑶

비로소 너와 나는 마주하고 서 있다

왕버들 수십 그루 가슴에 심은 너와

수심의 즈믄 가지가 뻗어 아픈 내가

그리움이 저렇게 고인 것이라 믿는다

수십만 뿌리를 돌아 마침내 다다른 곳

사랑이 이룬 둘레와 깊이라고 믿는다

-「주산지」첫째, 둘째 수

⑷

구름 한 채씩을 온몸에 휘감고

구름 한 채씩의 꿈을 가질 일이다

세상을

환하게 밝힐

책을 펼칠 일이다

-「벚꽃 속에서」전문

⑴은 특이한 발상을 보이고 있다. ‘내 속엔 무수한 짐승 떼들이 산다/ 내홍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불붙은 산’이라고 진술한다. 첫 수 종장 ‘등짝에/ 불화살 맞은/ 내란의/ 짐승 떼들이 산다’에서는 보다 구체적이다. 한 자아가 치열하게 자신과의 쟁투를 벌이는 현장이다. 둘째 수 ‘나는 도적이다, 그리움으로 채워진/ 궤짝을 훔친// 나는 도적이다, 그 궤짝 등에 짊어지고// 천년의/ 분화구에 뛰어든/ 슬픈 도적’이 곧 나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시를 푸는 열쇠는 ‘그리움으로 채워진 궤짝’이다.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갖가지 물건들이나 오래 묵은 편지묶음 같은 것들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슬픈 도적은 천년의 분화구에 뛰어들었다고 말했으니, 현재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는 뜻이다. 셋째 수를 보자. ‘아아, 이리도 가슴을 후려치는/ 북채가 있어// 마침내/ 둥기둥 울리는 봄날의 북이 되었구나/ 꽃처럼/ 찢어지곤 하는/ 애련의 북이 되었구나’하고 장탄식하며 끝맺고 있다. 끝내 이루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불타는 갈망의 산물이「너의 초상」이라는 생각이 든다.「너의 초상」에 대한 시인의 산문을 보자.

분화구를 오랫동안 내려다본 적이 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분화구 아래는 들끓어 오르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청자와 같은 푸른 빛깔이었다.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진 궤짝을 등에 지고 그 속으로 뛰어든다면 순식간에 다 녹아 없어져버릴 듯 하였다. 머릿속이 어둠으로 꽉 차 있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곧장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국의 하늘이 퍽이나 맑고 푸르러 나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도적이다. 천년의 분화구에 뛰어든 뒤로 여태 나오지 아니 한, 나오지 못한 슬픈, 도적이다.

어떻게 해서 ⑴「너의 초상」이라는 노래가 읊조려지게 되었는지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을 ⑵와 연계지어 읽으면 두 작품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의미의 진폭을 색다르게 맛보게 할 것이다.

「에트나 화산」의 경우에는 지향점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역정을 보여준다. 위의 시조는 뜨거운 용암이 분출되는 활화산 ‘에트나’를 통하여 나와 그대의 내부에서 들끓고 있는 정념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千年을! 千年에 또 千年 그 너머의 세월을!’거치면서 집단무의식으로 유전된 것이다. 불의 들끓음과 유동성(流動性)에 집중하는 것은 이 시조의‘불꽃’이‘정념의 불꽃’임을 뒷받침한다. 욕정이나 의지는 동일하게 신체의 용기 속에 담겨져 있다. 무의식의 이론은 욕정이나 의지의 작용이 삶의 근동(根動)이 되는 에너지원임을 증명한다. ‘에트나 화산’은 내부에서 들끓는 용암이 분출함으로써 활화산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용암은 수천 년 동안 잠복된 채로 들끓어 왔던 것이다. 이처럼 나와 그대에게 내재된 의지적 표상도 무의식의‘슬픈 굴헝’에 잠복되어 있으며, 수천 년을 거듭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들끓고 있기만 하다. 따라서 결행되지 못하는 의지는 ‘슬픈 굴헝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에트나 화산」이 대상에서 촉발되는 주체의 의지적 표상을 나타내고 있다.

「너의 초상」과「에트나 화산」은 대상은 다르지만, ‘너와 나’ 혹은 ‘그대와 나’사이의 애달픈 사랑을 밀도 높게 육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두 작품에 함께 쓰인 ‘천년’은 여기서 단순한 시간의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깊이로 읽게 만들고, 사랑의 영원성의 표상으로 생명력을 가진다.

⑶은 청송 주산지 앞에서 ‘나’와‘ 너’가 마주선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왕버들 수십 그루 가슴에 심은 너와/ 수심의 즈믄 가지가 뻗어 아픈 내가’가 마침내 한 자리에 마주 선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움이 저렇게 고인 것’이라고 ‘수십만 뿌리를 돌아 마침내 다다른 곳’이어서 ‘사랑이 이룬 둘레와 깊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단언하고 있다. 열정적인 「너의 초상」과는 달리「주산지」는 잔잔한 어조로 사랑을 노래한다.

⑷에 대해서 유성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인은 환하게 핀 벚꽃 속에서 구름 한 채와 책 한 권을 상상적으로 불러온다. 구름 한 채씩만큼 꿈을 가지라는 말은 아마도 시인이 벚꽃과 구름의 형태적 상관성에서 유추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거기서 ‘세상을/ 환하게 밝힐/ 책을 펼’치는 일 또한 환하게 핀 꽃 더미에서 유추한 것일 터이다. 이처럼 ‘구름/ 책/ 꽃’의 연쇄 속에서 우리는 환하게 피어 있는 꽃,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꿈, 그 꿈을 펼쳐나갈 책의 선명한 생성의 리듬을 한꺼번에 보게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꽃의 시듦, 구름의 사라짐, 책의 낡음이라는 분명한 소멸의 흔적을 동시에 읽게 되니, 그것이 곧 꿈이 가지는 양가적 속성일 것이다. 이러한 단호한 펼침의 동선이 단수 안에 밀집함으로써 더욱 완결성에 값하게 된다.

「벚꽃 속에서」에 대해 아주 심도 있는 해석을 하면서 삶의 궁극적 이치를 직관하고 해석하는 힘과 잘 연관 짓고 있다. 유성호는 이어서 단시조가 소소한 인생 세목까지 담아내기에는 부적절한 양식일 수도 있겠지만, 직관의 단호함이 단시조 미학이 가질 법한 촌철살인의 장치라고 간주하고 정형 양식의 백미를 상기시키고 있다.

⑴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애월 바다」전문

⑵

모든 사랑은 애월로부터 비롯되어

바다에 다다라 일만의 파도가 된다

한번도

아파해 않는

부딪침을 보아라

꺾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우격다짐으로 바위섬을 내쫓지도 않는다

발길을

붙드는 애월

타는 노을을 보아라

모든 사랑은 백록담으로부터 비롯되어

무지개처럼 온통 섬 하늘에 드리워져

네 속의

속뜰의 잎에

햇살 드는 것 보아라

-「다시 애월에 와서」전문

⑶

유도화 붉어도

서럽지 않은 밤

땅이 타오르면서 가지마다 번져 올라

잊었던

그날의 노래

이제도 붉음을 알겠다

무장

그리운 이의

앞섶자락을 보는 듯

유도화 너는 시방 높다랗게 선 채로 붉어

파도를

꺾으며 우는

한 사내를 붙들겠다

-「유도화, 너는」전문

⑷

내 안에 나는 없고 꽃들로 가득했다

못물로 출렁였다 노을로 타올랐다

맨발로 달려오고 있는 그림자가 붉었다

내 목에 어느 날 별빛타래 걸렸다

자주구름 걸렸다 새가 사뭇 우짖었다

무한정 문이 열렸다 바람 들이닥쳤다

-「주상절리」전문

⑸

심호흡

심호흡

붉은 벽 앞의 심호흡

붉은 벽 안의 심호흡

붉은 벽 밖의 심호흡

무작정

다가설 수 없는

꽃밭머리

심호흡

-「적벽」전문

사랑의 노래는 이어지고 있다. ⑴의 배경은 제주도다. 애월은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지명이 주는 말의 울림에서 노을 지는 ‘사랑을 아는 바다’라는 의미 부여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자 시의 화자는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인 것을 조심스레 말한다. ‘노을’이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풀어놓는 바람에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라고 했을 것이다. 편지는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것이다. 이제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로서 ‘사랑을 하는 바다’라고 말한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다. 그가 찾아와서 하는 일은 ‘물결을 매만지는 일’이다. 그 일만 ‘애월 바다’는 허용하고 있다.

아래는「애월 바다」로 2007년 제17회 이호우시조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밝힌 시조 사랑에 대한 결연한 소감인데, 그가 얼마나 시조 하나를 붙들고 전념하고 있는지 잘 헤아리게 한다.

우리 겨레에게 한글과 더불어 고유의 시인 시조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사회는 그 사실에 매우 둔감하다. 진정한 정신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문학 양식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이들이 적다. 우리 시조시인들은 모름지기 좋은 작품을 생산하여 독자들과 학습자들의 손에 들려질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소통의 시학으로서의 시조, 언어예술로서의 시조는 첨단정보화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정신적 양식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오종문은 ‘애월 바다’는 애월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만나는 제주의 석양, 잔잔한 바다 위로 노을이 물들 때면, 이 길에서는 걷는 이들이 곧 풍경이 된다. 그러나 제주의 바다는 제주 사람의 거친 삶을 지탱해 주는 생생한 살의 현장이었고, 역사적으로도 풍요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유배의 땅이었으나 시인은 ‘사랑을 아는 바다’라고 말한다. 제주 사람 혹은 제주의 모든 것을 사람으로 품고 있어 ‘애월’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리는 것이고, 이럴 때면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전하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물결만 매만지며 편지를 쓰고 싶은 것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설레 본다.

⑴은 ⑵「다시 애월에 와서」와 함께 연계해 읽으면 음미의 맛을 더할 것이다.

⑶의 대상은 유도화다. 다음 논의를 보자.

이정환의「유도화, 너는」앞에서 여백에 대한 생각을 잠시 했다. 압축을 많이 한 내용이나 시행 배열에서 여백을 고려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짧은 작품에서는 여백을 염두에 두고 시행을 배열하는 경우가 많다. 외형이 왜소하면 자칫 내용까지 소품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시행의 간격을 띄어놓고 행간으로 시의 품을 좀 더 넓히고자 한다. 배행으로 여백을 살리며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유도화, 너는」에서도 여백을 고려한 시행 배열을 볼 수 있다. 그것이 표현된 언어 이상의 심오한 의미를 발현하는지는 더 봐야겠지만, 시인이 여백을 염두에 두고 배열한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점에서 배행이라는 장치가 거두는 효과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선 시행을 보면 초장과 종장을 2, 3행으로 잘게 나누고, 중장은 일행으로 배열한 것을 볼 수 있다. 작품의 길이가 좀 짧은 편이라 여백으로 확장을 꾀한 것이다. 단수에 비하면 짧은 게 아니지만, 요즘 긴 시가 많아 두 수도 소품 같아 보일 수가 있다. 그래서 시인도 배행을 통한 확장을 생각하고 시행을 좀 더 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행은 작품의 호흡을 좀 길게 늘이면서 단조롭지 않게 만들고 있다. 또한 시행의 앞뒤에 좀더 넓은 여백을 생성하면서 시행의 의미를 심화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독자의 시선과 호흡을 느리게 유도함으로써 행간에서 유도화를 그려보게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여백보다 <유도화>라는 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도화가 중요한 정보원이니 그에 대해 먼저 알아본다. 유도화(柳桃花)는 복사꽃처럼 붉어서 얻은 이름으로, 여름에 제주도를 가면 여기저기서 만나는 꽃이다. 중국에서는 이 꽃을 ‘협죽도(俠竹桃)’라 부르는데, 잎이 좁고 대나무를 연상케 하는 가는 줄기와 꽃의 색깔이 복숭아꽃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유도화는 제주의 푸른 하늘과 바다에 대비되는 붉은 빛깔이 인상적인 꽃이다. 그런데 유도화가 강한 독성을 갖고 있어서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시인은 유도화의 이런 몇 가지 특성에서 착상을 한 듯하다. 유도화의 고혹적인 색깔이나 모습 외에도 독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어떤 여성을 떠올린 것이다. 꽃을 여성으로 표상하는 것은 예전부터 내려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예가 있다. 그러므로 꽃과 여성을 엮을 때는 발상이나 비유가 새롭지 않다는 점에 유념하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만난 <유도화>를 그리고자 한다. 아무리 익숙한 것도 어떻게 그리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선 시인은 <붉음> 즉 색깔의 느낌에 주목한다. 그것도 <독성이 강한 붉음>이라는 점에서 보면 강렬한 연상이 가능하다. 첫째 수는 이 이미지를 역사와 결부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건을 유도화에 포갠 듯 보이는 것은 <땅이 타오르면서 가지마다 번져 올라> 같은 구절 때문이다. 구체적 언급은 없지만, 이 구절이 단순히 꽃 피는 형상만 그린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그것을 받는 종장이 또 무슨 사건을 연상시키기에 더욱 그렇게 읽을 소지를 지닌다. 여기서 <잊었던/ 그날의 노래/ 이제도 붉음을 알겠다.>도 제주 고유의 역사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날>만 해도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데, <그날의 노래>라는 결합이 또 다른 의미를 짚어보게 하는 것이다. 제주도를 흔히 <4․3>의 상흔 속에 겹쳐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일이 아직도 해소하지 못한 현실 속의 <붉음>을 엮어서 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날>이 반드시 역사적 사건의 환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표현의 앞뒤 문맥에서 구체적인 정보나 암시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용을 뜯어봐도 문면에 드러나는 게 없으니 의미를 분명하게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언어의 이면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표현은 오히려 다른 해석을 가능케도 한다. 둘째 수 종장에 나오는 <한 사내>와 얽힌 어느 날을 <그날> 혹은 <그날의 노래>로 상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첫째 수와 둘째 수의 연결 고리가 사라지고, 앞에서 읽고자 한 역사성이 다르게 읽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유도화는 한 여인의 깊은 사랑과 매혹적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렇게 읽어도 무리한 읽기는 아닌 게 두 수를 1과 2로 나눠 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두 수에서 굳이 유도화 이상의 연결고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읽으면 작품이 좀 협소한 느낌을 준다. 시가 역사를 반드시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역사를 환기하는 지역의 꽃이 많기 때문이다. 유도화가 반드시 제주의 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같이 발표한 시편이 제주에 관한 것이라 연관을 지어 읽게 된다.

여기서 다시 유도화의 독성이 환기하는 바를 짚어보자. 꽃은 일반적으로 독하지 않은데 유도화는 독성이 강한 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성은 오히려 아름다움을 부각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편을 만들어내는 양귀비처럼 말이다. 양귀비는 꽃과 여인이라는 자연스러운 결합을 이루는 동시에 그 속에 담긴 독과 뗄 수 없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이런 아름다움이야말로 역사를 바꿔놓는 예로 많이 회자되지 않았던가. 그런 것을 연상시키는 게 둘째 수의 종장 <파도를/ 꺾으며 우는/ 한 사내를 붙들겠다.>이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파도를/ 꺾으며 우는> 사내가 있는데, 유도화가 바로 그를 붙들 만한 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유도화의 아름다움을 부각하면서 꽃의 매혹을 환기한다. <수로부인>에게 절벽 위의 꽃을 꺾어다 바친 <노옹>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문득 떠올려주는 것이다. 마지막 장은 그런 꽃에 얽힌 얘기들을 염두에 두고 쓴 듯한데, 더 말이 없는지라 여운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그런데 다시 보면, 첫째 수의 <유도화 붉어도/ 서럽지 않은 밤>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다른 느낌을 준다. <서럽지 않은> 게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왜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인지, 작품 안에서는 맥락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파도를/ 꺾으며 우는/ 한 사내>는 오히려 깊은 슬픔을 연상시키는데, <유도화>가 <붉어도> 왜 <서럽지 않은 밤>이 되는지, 이 구절은 설명이 쉽지 않다. 압축을 많이 하다 보면 의미가 잘 안 통하거나 문맥이 어긋나기도 하지만, 단순한 정황의 도입인지도 모르겠다.

다소 길게 인용하게 된 것은「유도화, 너는」에 대한 정수자의 논의가 매우 심도 있기 때문이다. 내용뿐만 아니라 시조의 형식적 특징이나 기사 방식 즉 조형미학에 대한 면밀한 접근을 통해 정형미학의 지향할 방향을 환기하고 있기에 시조를 창작하는 이들에게 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한 편의 시나 시조를 독자들은 무심히 읽을 때가 많지만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을 하는 눈을 가진 평자에게는 다각도로 읽히면서 형식과 내용의 균형과 조화의 접점을 보면서 그 작품에 대한 가치를 규명할 수 있다. 「유도화, 너는」에 대한 정수자의 깊이 있는 해석으로 말미암아 예사로이 창작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유도화, 너는」은 유도화가 왜 붉은지를 추적하면서 꽃에서 ‘무장/ 그리운 이의/ 앞섶자락을 보는 듯’하다면서 ‘높다랗게 선 채로 붉’기 때문에 ‘파도를/ 꺾으며 우는/ 한 사내를 붙들’ 정도가 되겠다고 진술한다. 결구에서 ‘파도를/ 꺾으며 우는/ 한 사내가 등장함으로써 자칫 밋밋하게 끝나버릴 시편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⑷는모두 9개의 단문으로 구성되어 이미 작품의 구조에서 ‘절리’의 양상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의도하였든 하지 않았든지 간에 개성적인 이미지의 발현이다. ‘가득했다, 출렁였다, 타올랐다, 붉었다, 걸렸다, 우짖었다, 열렸다, 들이닥쳤다’와 같은 형용사와 동사가 연첩을 이루면서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서로 부딪쳐 변용과 변주를 일으킨다. 사랑의 정조에 대한 모든 시적 정황들이 혼재함으로써 사랑의 완성에 기여하고 있다.

⑸는 정형미학의 구조상 표기 방식이 이질적이다. 이러한 연행 배열은 시조 고유의 맛을 반감시킬 수 있다. 시인은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겠지만 과감히 그러한 방법을 도입한다. 같은 호흡으로 가는 구절끼리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미적 질서를 세우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연행으로 볼 때‘2/ 3/ 2/ 3’의 기사 형식이다. ‘심호흡’이 6번 ‘붉은 벽’이 3번 되풀이 되고 있다. ‘붉은 벽’과 ‘심호흡’은 묘한 결합을 이루면서 ‘적벽’을 꽃밭머리 ‘적벽’이게 만든다.

⑴

시간을 녹이는

풀벌레 울음소리

가을 저녁 풀숲 아래로 몇 날 며칠 동안

시간이

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가득하다

-「십일월」전문

⑵

산비탈 내리닫는

바람

되돌리지 못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억새풀이 흔들린다

네게로

닫던 발걸음

끝내 되돌리지 못해

-「명적암 가을」전문

⑶

코스모스가 남아 있던 자리에

눈이

내린다

녹슨 못을 무수히 거꾸로 박아 놓은 길

맨발로

그 못 디뎌 밟는 소리

산을

돌아나간다

-「십이월」전문

⑷

강물 위로 새 한 마리 유유히 떠오르자

그 아래쪽 허공이 돌연 팽팽해져서

물결이 참지 못하고 일제히 퍼덕거린다

물속에 숨어 있던 수천의 새 떼들이

젖은 날갯죽지 툭툭 털며 솟구쳐서

한 순간 허공을 찢는다, 오오 저 파열음!

-「새와 수면」전문

네 편은 모두 자연을 관조하고 쓴 작품들이다. 그러나 단순한 스케치가 아니다. ⑴은‘풀벌레 울음소리’에서 시간을 녹이는 것을 본다. ‘가을 저녁 풀숲 아래로 몇 날 며칠 동안’이나 ‘시간이/ 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가득’한 것을 발견한 시의 화자가 ‘십일월’인 것을 뒤미처 깨닫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즉 다음과 같다.

시간 → 풀벌레 울음소리 → 시간 → 물소리

자연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 사이의 깊은 내적 연관성을 떠올리게 한다.

⑵는‘산비탈 내리닫는/ 바람’과‘억새풀’의 부딪침이 ‘네게로/ 닫던 발걸음’끝내 되돌리지 못하는 일과 결부지어지면서 아픔이 배가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김일연은 갈대가 유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것이라면 그 유약함에 대비되는 바람은 강하고 불가항력적이며 무조건적이라며 그 바람처럼 그 발걸음도 ‘끝내 되돌’릴 수 없는 발걸음이다. ‘끝내 되돌리지 못해’가 적절한 자리에서 두 번 반복되어 그 발걸음이 한두 번이 아닌, 오래 반복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되돌릴 수 없는 발걸음이기에「명적암 가을」이 더욱 애잔하고 아름다워지는 처연한 의미의 강조와 함께 운율의 아름다움도 살리고 있다고 한다.

⑶은 제목이 십이월이다. 배경은 ‘코스모스가 남아 있던 자리’에 ‘눈’이 내리는 정황이다. 그 정도의 설정은 평범할 수 있다. 하지만 중장 ‘녹슨 못을 무수히 거꾸로 박아 놓은 길’이라는 의미 부여로 말미암아 잘려나간 코스모스 줄기는 광물적 상상력으로 거듭나게 된다. 종장은 아주 신비스럽다. 즉 ‘맨발로/ 그 못 디뎌 밟는 소리/ 산을/ 돌아나간다’로 끝맺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것을 두고 못을 디뎌 밟고 산을 돌아나가는 이미지로 재창조한 것은 순교의 이미지에로의 자연스러운 전이를 이룬다.「십이월」의 깊이는 이러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시안은 내 마음을 대변하듯 흔들리는 억새풀과 흔들리게 하는 바람에 있다. 바람을 되돌리지 못하듯 내 발걸음도 되돌리지 못해 화자는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억새풀’로 ‘흔들’린다. 바람은 내 마음에 이는 바람이다. 산비탈 내리닫는 바람과 바람처럼 네게로 내닫는 발걸음과 흔들리는 억새풀이 묘한 정운을 부른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은 ‘되돌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초장 말음보 ‘못해’와 종장 말음보 ‘못해’를 호응 일치시키면서 여운을 주는 이정환 특유의 단시조 미학이다.

⑷는 또 다른 측면에서 자연의 비의를 육화하고 있다. ‘강물 위로 새 한 마리 유유히 떠오르자 그 아래쪽 허공이 돌연 팽팽해’졌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물결이 참지 못하고 일제히 퍼덕거’린다. 조응이다. 이어서‘물속에 숨어 있던 수천의 새 떼들이 젖은 날갯죽지 툭툭 털며 솟구쳐서 한 순간 허공을 찢는’일이 일어난다. 시의 화자는 그 순간 ‘파열음’을 듣는다.

『분홍 물갈퀴』란 이정환의 근작시집이 도착했다. 이 시집은 수많은 소리와 색조로 수런거린다. 시선이 맞닿은 「새와 수면」이란 작품은 풍경과 시간의 교차점을 복원했다. 한 행이 한 연이다. 한 행으로 줄어든 한 연의 말들을 복각해본다. 아니 처음부터 한 행이었다. 줄어든 말들이 없다. 풍경의 중심에 새 한 마리 보인다. 그 새가 돌연 솟구치자 새의 그림자를 섬세하게 담았던 물결들이 일제히 따라 허공에 솟구친다. 그림자들은 강물의 드센 힘줄처럼 따라 솟구친다. 숲 속을 산책하다 문득 치솟는 꿩의 날갯짓을 연상해보라. 꿩의, 날개의, 싱싱한 근육의 힘이, 온 산을 진동시켜 지척지간 몸에 다가오는 힘의 떨림을 기억하라. 그러니까 시인은 저만치 강물 위의 새를 보지만 그 새가 날아오를 때 숲 속 꿩의 드잡이질치는 힘의 움직임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만지고 있다. 원근이 교차한다. 그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 새가 교류했던 강물과의 정서 합일이 새를 따라가면서 치솟게 하는 물결의 역동성을 떠받쳤던 것. 만상이 서로 간섭하고 길항하는 풍경의 선연한 단면 위로 시인의 시선이 정확하게 꽂혔다.

한 마리의 새가 유유히 앉아 있다 문득 솟을 때의 파란처럼, 새는 그저 강물을 차고 솟아오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잠시나마 앉아 있던 물자리를 찢어 던지며 차고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허공이 돌연 팽팽해지고, 강물도 저리 온몸으로 요동을 치는 게다. 퍼덕거리며 일제히 날개를 펴는 물결이 모두 새가 된다. 그렇게 물속에 숨어 있던 수천 새 떼가 저마다 허공을 열며 솟아오른다. 허공을 찢는 파열음이 천지에 가득하다. 치솟는 게 물이건 새이건 무슨 상관이랴. 시도 저렇게 품은 게 있으면 무수한 물결을 끌고 도약하는 것! 한 소식 같은 파열음이 수면에 은비늘처럼 쏟아진다.

수면을 가르거나 또는 스치면서 새가 나는 것이야 우리가 흔히 보는 정경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눈을 통해 이 정경은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바뀐다. 우선‘강물 위로 새 한 마리 유유히 떠오르자’새와 수면 사이의‘허공이 돌연 팽팽해’짐을 시인의 눈은 포착한다. 이윽고 시인의 눈은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결에서 참지 못하고 일제히 퍼덕거리는 새 떼들까지 포착한다. 튀어 오르는 물결에서 물속에 숨어 있던 수천의 새 떼들을 읽어 내는 시인의 눈은 실로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시인의 관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데, 시각적 이미지가 마지막 순간 청각적 이미지로 바뀌고 있지 않은가. 어찌 보면 물결이 일어난 다음 가라앉으면서 나는 소리가 바로 파열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시각적 이미지에 힘입어 마지막 행의‘저 파열음!’이라는 구절은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 같은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화로 인해 야기되는 팽팽한 시적 긴장감이 너무도 생생하다.

「새와 수면」은 흔히 볼 수 있는 정경을 포착하여 새로운 자연 질서 혹은 정서적·미학적 세계를 축조함으로써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가 서로 밀접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명징하게 그리고 있다.

⑴

나는 이 봄날에 몹시 몸이 달아올라

오래 기다렸던 퍼펙트를 노래하련다

참으로

이루기 힘든

너를 노래하련다

11점에 당도할 동안 한 점도 얻지 못하면

그 세트는 퍼펙트다 네가 내게 늘 그랬다

한 점도

얻지 못한 나는

깊은 어둠이었다

나는 이 봄날에 자목련을 그리려 한다

한번 피고 나면 곧장 지는 너의 얼굴

눈 속에

심부의 안쪽에

새겨두기 위해서다

만개 직전이 곧 자목련의 퍼펙트다

그런 연후에는 내리꽂히는 급전직하

떠나는

너의 뒷모습도

늘 슬픈 퍼펙트다

-「퍼펙트」전문

⑵

평생 눈 멀 일을

좇았다, 언어의 숲

말로 표현 못할

아름다움 앞에서

때로는 질식하였다가

간신히 깨어나곤 했다

이국에는 그가 있었다

아름다움이 서 있었다

깊숙한 눈빛이

몹시 강렬하였다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그런 바람 아니었다

평생 아름다움을

좇았지만, 아직 그는

숨 막히는 절경과는

맞닥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국땅에서

질식하고야 말았다

아름다움이 서 있었다

그리다 언덕길 위에

그의 눈길은 멀리서

천천히 파고들었고

비로소 설화의 한 대목

직조 되고 있었다

-「아름다움이 서 있었다」전문

⑶

끔찍하게 여긴다니

끔찍하다 되받으니

눈발이 치던 밤이

더욱 추워집디다

이런 말 저런 말들이

부질없어집디다

가는 길 창창하여

먼 하늘을 봅니다

함께 다다를 곳

눈에 환히 보여서

사는 일 끔찍하여도

끔찍이 그립니다

-「첫눈 오는 밤」전문

⑴은 스포츠 용어로 가끔씩 쓰이는 ‘퍼펙트’라는 외래어를 활용하여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갈망 혹은 희구를 4수로 노래하고 있다. ‘나는 이 봄날에 몹시 몸이 달아올’랐기에 ‘오래 기다렸던 퍼펙트를 노래하’고자 한다. 그것은 ‘참으로/ 이루기 힘든/ 너라는 존재다. ‘너’라는 대상을 노래하겠다는 것이다. 11점은 탁구 경기 점수를 말한다. 상대방이 11점을 얻을 동안 한 점도 내지 못하면 그 세트는 퍼펙트다. ‘네가 내게 늘 그랬다’라는 대목에서 보듯 그러한 상황을 많이 겪은 이가 시의 화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두고 ‘깊은 어둠이었다’라고 단언한다. 셋째 수에서는 장면이 바뀐다. ‘봄날의 자목련’이 등장한다. 자목련을 그리려 하는데 아쉽게도 그것은 ‘한번 피고 나면 곧장 지는 너의 얼굴’이어서 ‘눈 속에/ 심부의 안쪽에/ 새겨두기 위해서’ 그리겠다고 한다. 넷째 수를 보자. ‘만개 직전이 곧 자목련의 퍼펙트’라면서 ‘그런 연후에는 내리꽂히는 급전직하’를 생각한다. 그리고 ‘떠나는/ 너의 뒷모습도/ 늘 슬픈 퍼펙트’인 것을 절감한다.「퍼펙트」는 퍼펙트 상황을 제시하면서 이룰 수 없는 다가설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열망을 노래하고 있다.

⑵에는 이국도시가 등장한다. ‘그리다’다. 이‘그리다’는 ‘그리다’이기도 하고 낯익은 한 언덕길일 수도 있다. 음악가, 화가, 작가가 평생 미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가장 아름다운 것을 좇아서 긴 방황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는 ‘평생 눈 멀 일’을 좇았던 그다. 불행하게도 그는 눈이 먼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비유이기도 하다. 즉 달리 말하면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버린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 그가 ‘말로 표현 못할/ 아름다움 앞에서’ 질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름다움’이 서 있었던 곳은 이국땅이었다. 그는 ‘깊숙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절경’이었다. 그곳은 ‘그리다 언덕길’이었다. ‘그의 눈길은 멀리서/ 천천히 파고들었고’ 곧장 ‘설화의 한 대목’되었다.「아름다움이 서 있었다」는 특별한 표현이나 눈길을 끄는 시적 언사가 없지만, 아름다움의 근원, 아름다움의 본질을 희구하는 집요함이 잘 결집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 ‘그’가 혼용해서 쓰이고 있는 점이다. 굳이 구분될 수 없는,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일심동체로 볼 수도 있고, 그 아름다움이 오로라와 같은 시적 존재일 수도 있기 때문에 구별하여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예는「너의 초상」이라는 시조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너’와 ‘나’라는 인칭 대명사가 결국 하나로 읽힌다. 이것은 혼선을 유발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시적 트릭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⑶은 말의 변용에서 오는 정서적 반향을 노래하고 있다. ‘끔찍하게 여긴다니/ 끔찍하다 되받으니’라는 언어적 상호작용에서 그것을 여실하게 읽는다. 그래서 ‘눈발이 치던 밤이/ 더욱 추워집디다’라고 읊조린다. 하여 말들의 부질없음을 맛본다. 길은 아직 멀고 ‘함께 다다를 곳/ 눈에 환히 보’이는 까닭에 ‘사는 일 끔찍하여도/ 끔찍이 그’리는 일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노라고 노래한다.「첫눈 오는 밤」은 비근한 소재로 감정의 흐름을 묘파한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작품들을 대상으로‘심미정 서정’을 형상화한 세계를 살펴보았다. 언급한 시편들이 이룬 미학적 성취는 어느 정점에 이른 느낌을 주고 있다. 자연을 소재로 하되 사랑을 주조로 깔고 다채로운 변주를 통해 감동의 진폭을 넓히고 있으며, 자연의 비의를 탐색하여 삶의 깊이를 견인한다.

나. 초월적 비가

그는 어떤 측면에서 영원 지향의 세계에 경도된 시인이다. 그것은 그가 믿고 있는 신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기도 하지만, 유한한 인생살이에서 늘 느끼는 한계의식이 그로 하여금 영원을 향한 초월적 비가를 노래하게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람과의 사랑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나고, 신을 향한 시편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⑴

나

죽으면

눈물 한 방울

흘리잖고

먼 산이나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볼

마침내 말없을 그대

영영

말 잃을 그대

천지에

환한 봄일 적에

나

죽으리

천년을 읊은

그 봄날

나 죽으리

그 날에

나 죽은 그날에

영영

말 잃을 그대

-「별사」전문

⑵

1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수천수만 줄기의 희디흰 나의 뼈대

저문 날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2

꺾이고 꺾이어서 마디마디 다 꺾이어서

꺾이고 꺾이어서 마침내 사랑을 이룬

저문 날

모든 뼈대는

물소리를 내고 있다

-「헌사」전문

⑶

1

아아, 꽃 핀 자리

그 속은

다만 허공

내 뼛가루가 떠올라

저리 투명한 허공

다 비운

몸이 떠도는

떠돌아 어둠에 닿는

2

비로소 내 몸은

꽃가지 휘인 빈집

동북 편 하늘

그 어디쯤에 놓인 빈 집

저물어

붙잡혀 있네

영혼이 떠난 빈집

3

나 산 밑에 와 홀로 저무네

나 산 밑에 와 기인 긴 어둠이네

슬픈 일 달리 있으랴

나 산 밑에 와 묻히네

-「산밑에 와서」전문

⑷

당신이 앉았던 자리마다 꽃입니다

당신이 우러르던 하늘마다 꽃입니다

터질 듯 보듬어 안던 그 시간도 꽃입니다

꽃보다 먼저 당신이 왔습니다

당신이 걸어온 길 애닯도록 붉은 것은

내 마음 그곳에 홀로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꽃」전문

⑴은 역설적인 이별가다. 소월의 진달래꽃의 정조가 이 작품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나/ 죽으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먼 산이나 하염없이/ 바라볼’뿐인 이는 ‘마침내/ 말없을 그대’다. ‘영영/ 말 잃을 그대’다. 시의 화자는 자신의 죽음의 날을 봄으로 택한다. ‘천지에/ 환한 봄일 적에/ 나/ 죽으리’에서 그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 까닭은 ‘천년을 읊은/ 봄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가 죽더라도 그대는 말을 잃어버릴 뿐 그 이외의 다른 반응은 없다. 슬픔의 극치에 이를 때 그 누구도 어떠한 행위나 언사를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함께 죽음을 맞지 못한다면 남은 한 사람은 이렇게 실어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⑴을 두고 권기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새로운 시각으로 읽은 점이 주목된다.

고려가요에서 김소월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시는 주로 이별을 당하는 쪽 즉 피해자의 입장에서 많이 노래했다. 그런데 이 시조는 이별을 주는 쪽 즉 능동자가 주체가 되어 노래하고 있다. 그것도 ‘천지가 환한 봄날 나 떠나면 영영 말 잃을 그대’라는 몸서리치도록 황홀한 믿음의 정한으로 읊고 있다. 평시조의 틀을 지니면서 자유시가 주는 행간의 의미와 호흡도 적절히 살리고 있다.

⑵는 ⑴과 연관 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첫 줄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라는 표현이 숨을 틀어막는 듯하다. 화자는 ‘수천수만 줄기의 희디흰 나의 뼈대’와 같은 ‘물소리’를 꺾어서 사랑하는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고 거듭 고백한다. 사랑의 고백 중에 이만큼 소름 끼치는 언사가 더는 없을 듯하다. 둘째 수는 꺾임의 연첩을 이룬다. 마디마디의 무수한 꺾임 끝에 ‘마침내 사랑을 이룬’ 저문 날의 ‘모든 뼈대는/ 물소리’를 낸다. 사랑도 이런 사랑이 더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극에 도달한 사랑이다.

이상옥은 이 작품을 사랑의 극치이고 헌사의 극치이며 시인은 그리스도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뼈를 꺾으신 주님의 사람을 형상화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뼈의 이미지와 물의 이미지는 참 이질적인데도 이 시에서는 참 잘 어울린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주님의 사랑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수 있다고 보았다.

「헌사」는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불멸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시편이다.

⑶은 ‘아아, 꽃 핀 자리/ 그 속은/ 다만 허공’이라는 구절에서 보듯 존재와 소멸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허공은 ‘내 뼛가루가 떠올라/저리 투명한 허공’이라고 규정짓는다.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이 눈에 그려진다. 또한 그 허공은 ‘다 비운/ 몸이 떠도는/ 떠돌아 어둠에 닿는’ 무한한 공간이다. 둘째 수에서‘비로소 내 몸은/ 꽃가지 휘인 빈집// 동북 편 하늘/ 그 어디쯤에 놓인 빈 집’이라고 말하면서 ‘저물어/ 붙잡혀 있네/ 영혼이 떠난 빈집’이라고 슬프게 그리고 있다. 그리하여 ‘나 산 밑에 와 홀로 저물고’ 나 ‘산 밑에 와 기인 긴 어둠’이 되어서 ‘나 산 밑에 와 묻’힌다고 노래한다. 결국 ‘나’는 몸을 버리고 영원의 모습을 가진 ‘산’에 묻혀 산이 된다. 이 작품의 셋째 수 초장과 중장은 음보 면에서 파격이다. 의도적인 것은 아닌 듯하고 율독상 유려하게 읽힌다.

⑷는‘당신’을 노래한다. 여기서‘당신’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당신이 앉았던 자리마다 꽃’이요, ‘당신이 우러르던 하늘마다 꽃’인 까닭이다. 그리고 당신과 나는‘터질 듯 보듬어 안’게 되어 그 시간마저도 꽃이 되고 만다. 둘째 수에서‘꽃보다 먼저 당신이 왔습니다’라는 표현에서 당신의 존귀함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어서 ‘당신이 걸어온 길 애닯도록 붉은 것’이라는 대목이 주는 상징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 마음 그곳에 홀로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꽃」은 인간을 향한 사랑 노래를 넘어 신에 대한 경외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⑴

올 데까지 와서 영영 돌이킬 수 없을지언정

꿈틀거리는,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은

묵묵히 수면 아래 있거라 물낯바닥 아래 있거라

그러나 치솟아 오르는, 분수 마냥 치솟아 오르는

그 무엇들이 거기 있어 바다는 퍼덕인다

불현듯 거대하게 살아 거대하게 퍼덕인다

-「부침」전문

⑵

누구나 한번쯤은 거기에 이르고 싶어 한다

바이칼호 그 깊이 모를 한복판에 몸을 던져

마침내 모든 이에게서 잊혀지고 싶어 한다

검푸른 무한의 심연 그 중심에 박힌 불꽃

그는 비로소 깊이 들어선 것이다

그 불꽃 이 지상에선 다시 찾지 못할 것이다

-「그 불꽃 이 지상에선 다시」전문

⑶

이대로 얼어붙지 않을 우레의 포효로

나는 뚫고 싶다, 그 무언가를 꿰뚫고 싶다

바위를 짓찧는 것보다 더 매몰찬 힘으로

뚫은 것과 뚫린 것의 분별이 어려운

그런 깊이에까지 내처 이르고 싶다

어둠이 눈부신 한밤 그 황홀의 심연까지

-「폭포」전문

⑴은 기존의 시조 가락과는 많이 벗어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율격을 넘어 틀에 매이지 않는 율동을 보임으로써 바다 이미지와 접맥되어 보다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올 데까지 와서 영영 돌이킬 수 없을지언정/ 꿈틀거리는,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은’이라는 거침없는 수사법이 돋보인다. ‘묵묵히 수면 아래 있거라 물낯바닥 아래 있거라’고 하다가‘그러나 치솟아 오르는, 분수 마냥 치솟아 오르는/ 그 무엇들이 거기 있어’ 바다는 ‘거대하게 살아 거대하게 퍼덕인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떠오르고 가라앉는 것의 되풀이가 인생이라고 간주할 때 부침이 없는 삶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부침」은 가라앉아 있을 때와 떠올라야 할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하는 시편이다.

⑵는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누구나 한번쯤은 거기에 이르고 싶어 한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구체적인 현장이 제시된다. ‘바이칼호 그 깊이 모를 한복판에 몸을 던져/ 마침내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지기 위해서다. 그곳은 또한 ‘검푸른 무한의 심연’이고 그는‘그 중심에 박힌 불꽃’이 되어 ‘비로소 깊이 들어’서 버렸다. 그래서 ‘그 불꽃 이 지상에선 다시 찾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 존재가 영원에 이르기 위해 무한 고독을 스스로 택하여 ‘심연’에 내려간 것이다.

⑶은 폭포의 이미지에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 깊이 천착하고자 하는 구도자적 면모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이대로 얼어붙지 않을 우레의 포효로//나는 뚫고 싶다, 그 무언가를 꿰뚫고 싶다’라는 대목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힘은 ‘바위를 짓찧는 것보다 더 매몰찬 힘’이다. 그리고 ‘뚫은 것과 뚫린 것의 분별이 어려운/ 그런 깊이에까지 내처 이르고 싶’어하면서 ‘어둠이 눈부신 한밤 그 황홀의 심연까지’ 이르겠노라고 말한다.「폭포」는 그런 점에서「그 불꽃 이 지상에선 다시」와 그 맥을 같이 한다.

⑴

그대

어두운 곳의

가장 어두운 부분인

늪의 의미를 문득 일깨워 준 첼로여

온몸이 현 위에 실려 늪물은 사뭇 떨리나니

때로 꽃 지는 벼랑 끝에 세워져

누군가 온 몸으로 온 몸으로 탄주할 때

늪 속의 가장 깊은 곳까지

소용돌이치던

첼

로

여

-「첼로·2」전문

⑵

온몸으로 금세 무너질 듯한 온몸으로

벼랑 끝 딛고 서서 자아올리는 선율

마침내 장중함으로 한 채 집을 세우느니

손닿으면 더없이 큰 공명으로 아득히

천지간의 울음이 그 중심으로 몰려 와

마침내 천년의 소리 천애까지 닿느니

-「첼리스트에게·1」전문

⑶

나는 부상한다, 저 뭉게구름보다 더 높이

꺼져 내리는 지상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교감

떠올라 아득히 떠올라 구름 밖을 난다

지상의 일 다 떨쳐낸 하늘 끝에 이르러

끝내 불타는 온몸 하얀 뼛가루로 떠올라

소리란 소리를 모두 꿴 빛이 된다, 아득히

-「첼리스트에게·2」전문

⑴과 ⑵와 ⑶은 ‘첼로’를 통해 얻은 영감을 시화하고 있다.

⑴은 특이한 표기법으로 말미암아 첼로의 형태를 연상하게 한다. 첼로의 이미지를 ‘그대/ 어두운 곳의/ 가장 어두운 부분인/ 늪의 의미를 문득 일깨워 준 첼로여’라는 대목에서 에로틱한 정조를 읽을 수 있다. 몹시 육감적이다. 뒤이어 ‘온몸이 현 위에 실려 늪물은 사뭇 떨리나니’가 그것을 보다 잘 뒷받침해준다. ‘때로 꽃 지는 벼랑 끝에 세워져/ 누군가 온 몸으로 온 몸으로 탄주할 때/ 늪 속의 가장 깊은 곳까지/ 소용돌이치던/ 첼/ 로/ 여’에서 절정의 순간을 본다. 악기를 통해 어떤 정서적 결합을 이루면서 궁극에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열망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⑵는 ‘온몸으로 금세 무너질 듯한 온몸으로// 벼랑 끝 딛고 서서 자아올리는 선율’이 ‘장중함으로 한 채 집을 세우’는 장면을 그린다. 그것은 ‘손닿으면 더없이 큰 공명으로 아득히// 천지간의 울음이 그 중심으로 몰려’오는 새로운 의미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더욱 의미가 심화되는 것은 ‘마침내 천년의 소리 천애까지 닿’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결구에 있다. 시의 화자는 첼로의 선율에서 ‘천지간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기에 때문이다.

(3)은 또 다른 상승 이미지를 구현한다. 즉 ‘나는 부상한다, 저 뭉게구름보다 더 높이/ 꺼져 내리는 지상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교감’이라고 하면서 ‘떠올라 아득히 떠올라 구름 밖을 난다.’ 그리고 ‘지상의 일 다 떨쳐낸 하늘 끝에 이르러/ 끝내 불타는 온몸 하얀 뼛가루로 떠올라’서 ‘소리란 소리를 모두 꿴 빛’이 되고 있다. 더 이상 지상에서 찾을 수 없다. 하늘과 일체를 이루어 버렸기 때문이다.

⑴

나무 꼭대기 위에 시방 몇 장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나무뿌리는 느낍니다

나무에게 심장이 있다면 그 심장에 전해져 오는 천둥같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몇 장의 나뭇잎이 잠시 은연히 흔들릴지라도

-「몇 장의 나뭇잎이 잠시」전문

⑵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메아리쳐 울리는 소리, 지심을 뚫고 오르는 소리

그리워하고 있는 동안 나무는 나이테를 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워하고 있는 동안 이마의 주름살은 도리어 펴져서 잊혀진 그 먼 날의 서방 정토, 붉디붉은 꽃잎 속에 파묻힐 것입니다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둥둥둥 울리는 소리

-「고목의 시」전문

⑶

길의 끝에 이르러 출렁이는 길을 본다

모든 이루어지는 것들의 이루어짐보다 더 무겁고 깊게 살과 뼈를 저미는, 영혼 깊숙한 곳을 온통 아프게 차지하고 있는 저 넉넉한 이루어짐의 평온, 저 다함없는 함몰의 시간, 그 끝없는 시름의 일직선상 그 위로

희디흰 바닷새 한 마리

문득

치솟고 있다

-「바다 앞에서 ․ 3」전문

⑷

내일 오겠다고 돌아선 바람 다시 본 일 없듯 잠시 후 오겠다고 물러간 일파만파 다시 본 사람 없듯

저 천지를 진동할 듯한 폭음 끝에 빚어진 기암괴석 월포 바다 기슭에 굴러 내려와 박혀 이제까지 저렇듯 침묵하고 있는 까닭 깎이고 이지러지고 패인 그대로 침묵하고 있는 까닭 눈여겨보는 이 애시당초 없듯

끝없는 그 끝을 향해 날아오르는 눈물꽃나비 눈물꽃나비 여태 아무도 본 일이 없다

-「눈물꽃나비」전문

⑴과 ⑵ 그리고 ⑶과 ⑷는 모두 장시조다. ‘나무 꼭대기 위에 시방 몇 장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나무뿌리가 느’끼게 되는 일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중장이다. ‘나무에게 심장이 있다면 그 심장에 전해져 오는 천둥같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아주 미세하게 ‘몇 장의 나뭇잎이 잠시 은연히 흔들릴지라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강 이미지와 상승 이미지의 묘한 결합으로 생명의 상호작용이 일어남으로써 하늘과 땅의 조응과 교감이 생생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곧「몇 장의 나뭇잎이 잠시」라는 작품이다.

⑵도 역시 같은 연계 선상에 있다.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메아리쳐 울리는 소리, 지심을 뚫고 오르는 소리’를 듣게 되는 일은 그리움과 직결된다. 즉 ‘그리워하고 있는 동안 나무는 나이테를 감지 않을 것’이고, ‘그리워하고 있는 동안 이마의 주름살은 도리어 펴져서 잊혀진 그 먼 날의 서방 정토, 붉디붉은 꽃잎 속에 파묻힐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리움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둥 둥 둥 울리는 소리’이다. 그 소리가 생명을 견인하는 힘이다.「고목의 시」는 그러한 의미심장한 생명정신을 축조한 시편이다.

⑶에 대해 구모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조집『금빛 잉어』에 실려 있는 시인데 이정환의 미학적 입장이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길의 끝’에서 시작하려 하며 그 곳에서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 한다. 지상의 모든 것이 다하는 완성의 시간, ‘함몰의 시간’에 그는 ‘희디흰 바닷새 한 마리/ 문득 치솟고’있음을 본다. 모든 존재들이 무화되면서 순백의 미가 출현하는 순간. 왜 순간인가? 순백의 미는 살아있는 존재의 시간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의 시간이 단절되는 지점에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지점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현상의 세계와 다른 차원으로 이월하는 위험천만한 행위에 다름이 없으므로, 시인은 다시 자기 혹은 존재의 지평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기표현이 가지는 자율적인 활력이 갖는 의의는 이처럼 존재를 열고 아름다움이라는 지평에 이르려는 지난한 과정에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인은 추억의 부름에 이끌리거나 내면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면서 시적 지평을 개진한다. 따라서 시인의 시 쓰기는 완결의 형식이 아니라 과정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정환의 시조가 일정한 형태에 구속되지 않는 일과 일치한다. 오히려 삼장 구조의 형식적 완결성은 시인의 시적 과정과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시인의 미적 목표가 끝없이 지연되듯이 형식적 완전성 또한 유보되는 데 기인한다. 인용한 시조는 초장의 문제설정이 중장의 과정을 거쳐 종장을 통해 해소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전개에 있어서 중장의 충분한 서술이 바탕이 되었기에 종장의 귀결이 돌연하지 않다. 특히 ‘문득’이라는 어구가 지시하듯이 시인의 미적 지향이 자연스럽다.

매우 밀도 높게 논의하면서 미학적 성취에 대해 다채롭게 말하고 있다. ⑷에 대해 구모룡의 논의다.

이정환은『분홍 물갈퀴』에 실린「시인의 산문」을 통해 자신의 시적 탐구의 대상으로 ‘눈물꽃나비’를 표상한 바 있다. ‘내가 음악을 듣고, 시를 쓰고, 노래하는 것은 눈물꽃나비를 만나기 위한 소망 때문이다. 눈물꽃나비는 나에게 무엇인가? 대체 그의 존재는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아직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눈물꽃나비를 찾아 나는 날마다 길을 떠난다.’에서 보듯 마치 화두처럼 쉽게 풀 수 없는 의미를 지닌 것이 ‘눈물꽃나비’인 듯하다. 그래서『금빛 잉어』에 게재된 동명의 시편을 찾아본다.

쉽게 요해될 수 없는 표상으로 등장한‘눈물꽃나비’이다. 하지만 1연과 2연이 말하고 있는 시간의 흐름과 사물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그 끝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을 집약하는 이미지가 아닐까? 아직 학명으로 존재하지 않는 명명이라 할 때 이는 분명 시인이 찾고자 하는 필생의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 눈물과 꽃과 나비가 한데 융합된 이미지의 지평, 비애와 미와 승화가 함께 하는 경지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구체적인 존재의 실감에서 오는데 아름다움 앞에서 존재론적 슬픔은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시인은 궁극적으로 ‘나비’의 지평으로 넘어가고자 하지만, 곧장 넘을 수 없는 경계에서 쓴 시가「비가, 디르사에게」라 할 수 있다. 희랍어 어원을 둔 ‘디르사’는 성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도시 혹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신부 등의 뜻을 내포한다. 시인 또한 이러한 어원에 착안하여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신부’의 의미를 패러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과 같다’고 하듯이 ‘디르사’는 지상의 삶과 고통의 시간을 모두 치유하고 영원한 화평의 세계로 인도하는 종교적 법열의 위상을 지닌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디르사’가 지닌 기독교적인 내포를 변용하여 미적 궁극 혹은 미의 법문을 지시한다. 그래서 ‘디르사’는 이별의 슬픔과 삶의 고통들이 마침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구모룡은『분홍 물갈퀴』에 실린「시인의 산문」을 통해 ‘눈물꽃나비’의 존재를 환기하면서「눈물꽃나비」가 내포하고 형상화하고 있는 내밀한 세계를 탐구하는 가운데 연작시조인「비가, 디르사에게」에 나타난 희랍어 어원을 둔‘디르사’를 등장시켜서 결국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닿을 길 없는 미의 세계의 표상에 주력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영원지향적인 미학적 세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⑴

녹슨

철문 한 짝

비스듬히

닫힌 빈 집

죽어 묻힐

자리를 찾아

비틀거리는

방아깨비

아궁이

그 불탄 자리 곁

홀로 드러눕는다

-「부재」전문

⑵

죽은 이들의

뼈마디 수만큼이나

꽃은 또다시 피어나서

말없이 일러준다

결단코

헛된 것이 아닌

絶滅의 하늘길을

저 별들 쏟아지지 않고

별빛만 쏟아지는

밤의 산비탈에 핀

철쭉밭 붉은 길

오래 전

죽은 이들의

뼈마디 같은 바람이 분다

-「붉은 철쭉밭」전문

⑶

내 영혼 이곳까지

드높이 떠올랐구나

그 무슨 설움의 힘이 천의 날개에 휩싸여

그 무슨 설움의 힘이 저리 밀어 올린 것일까

곧장 타올라라

활활 불타올라라

꿈꾸어온 높이만큼 아득히 타올라라

귓전을

치는 그 소리

흰 뼛가루를 흩는다

-「산정의 잠자리 떼」전문

⑷

너와 함께 나란히 목곽묘에 눕는다

눈 감고 서나서나 영원을 꿈꾸는 밤

별밭의 별빛 이불을 가슴까지 덮는다

꿈꾸지 말지니, 붉은 빛 무리 영원을

이제 곧 한자리에서 죽어갈 터이니

토기와 철정과 함께 삭아갈 터이니

-「순장」전문

⑸

한 무리 억새꽃이 흔들리어 하염없던

한 사내 굽은 어깨 흔들리어 하염없던

그 가을

남녘 햇살 속

슬픈 시간의 함몰

-「하관」전문

⑴이 제시하는 정경은 어둡다. 부재 상황이기 때문이다. ‘녹슨/ 철문 한 짝/ 비스듬히/ 닫힌 빈 집’이라는 장면 설정에서 모든 것은 짐작된다. 인기척이 없는 그곳에 아직 살아 있는 생명이 있다. 죽기 직전이다. ‘죽어 묻힐/ 자리를 찾아/ 비틀거리는/ 방아깨비’다. 방아깨비에서 생명을 다해가는 한 사람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 방아깨비는 혼자 ‘아궁이/ 그 불탄 자리 곁’에 드러눕고 만다. 아궁이와 오래 함께 했던 이들은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고 없는데, 다른 곳도 아닌 그곳을 찾아들어 마지막을 맞는 것이다

⑵는 붉은 철쭉밭에서 ‘죽은 이들의/ 뼈마디 수만큼이나// 꽃은 또다시 피어나’고 있는 것을 본다. 꽃의 수와 죽은 이들의 뼈마디 수가 어찌 같을 수야 있을까. 그러나 그러한 표현에 의외로 수긍이 간다. 셀 수 없기 때문이다. ‘絶滅의 하늘 길’을 두고 헛된 것이 아니라는 표현은 삶과 죽음을 달리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별빛만 쏟아지는/ 밤의 산비탈에 핀/ 철쭉밭 붉은 길’로 ‘오래 전/ 죽은 이들의/ 뼈마디 같은 바람’이 불고 있음을 진술하면서 이 시는 끝맺고 있다. 뼈와 꽃과 별빛과 바람이 혼연일체를 이루어 생사를 초월하여 교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⑶은‘산정의 잠자리 떼’를 바라보면서 ‘내 영혼 이곳까지/ 드높이 떠올랐구나’하고 상승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다. 자아와 세계의 일치를 본다. ‘잠자리 떼’에서 설움을 읽고 ‘그 무슨 설움의 힘이 천의 날개에 휩싸여/ 그 무슨 설움의 힘이 저리 밀어 올린 것일까’하고 반문하고 있다. 잠자리를 비상하게 한 힘을 ‘설움’이라고 보고, 사람에게도 그 설움이 꽉차있을 때 드높이 떠오르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음을 은유한다. 그리하여‘꿈꾸어온 높이만큼 아득히 타올’랐을 때‘귓전을/ 치는 그 소리/ 흰 뼛가루를 흩’으면서 잠자리 떼들은 일순간 산화한다. 이 대목에서 깨끗이 생을 마감하는 한 사람의 종언을 읽는다.

⑷는 죽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너와 함께 나란히 목곽묘에 눕는다// 눈 감고 서나서나 영원을 꿈꾸는 밤’에 ‘별밭의 별빛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잠든다. ‘꿈꾸지 말지니, 붉은 빛 무리 영원을’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이다. ‘이제 곧 한자리에서 죽어갈 터’이고, ‘토기와 철정과 함께 삭아갈 터’이므로 ‘붉은 빛 무리 영원’을 꿈꾸라고 말하고 있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처럼「순장」은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삶과 죽음을 통해 영원성을 희구하는 세계를 담고 있다.

⑸는 지극히 평범한 한 생애의 마지막 시간이 꺼져가고 있는 것을 드리고 있다. ‘한 무리 억새꽃’과 ‘한 사내 굽은 어깨’가 ‘흔들리어 하염없던// 그 가을/ 남녘 햇살 속/ 슬픈 시간의 함몰’이라는 정황을 바라보면서 숙연해진다. 이 숙연함이 삶을 견인하는 힘이 됨을「하관」에서 여실히 읽는다.

⑴

시간의 울음은 한 순간 저리 붉어서

더없이 붉어서 숨 막힐 듯한 미간美間

모가지

뚝, 꺾이기까지

기막힐 듯 한 미간眉間

-「꽃」전문

⑵

나는 나를 거두어 네게로 가겠다

삼강이 별빛처럼

입맞춤하는 그곳

강 저편

갈대 사이의

네게로 가겠다

이젠 삼단머리 풀어 내리지 않아도

옥색 앞섶자락 풀어 헤치지 않아도

마침내

네게로 가겠다

강물소리 차디찬 밤

-「삼강나루」전문

⑶

지금 내 어깨 위에 내리퍼붓는 함박눈

네가 보낸 것임을 이제 나는 알겠다

두 팔이 설해목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는 밤

-「설해목처럼」전문

⑴은 꽃을 ‘시간의 울음’이라고 보고 ‘한 순간 저리 붉어서/ 더없이 붉어서 숨 막힐 듯한 美間’이라고 본다. 또한 ‘모가지/ 뚝, 꺾이기까지/ 기막힐 듯한 眉間’임을 상기시킨다.「꽃」을 두고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축자적인 뜻을 충실하게 재현한 작품이라고 말한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삼강나루」를 두고 유성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자아를 거두어들인 채 강을 건넌 저편 갈대 사이의 너에게로 가겠다고 소리친다. 강물소리마저 차디찬 밤에 삼강나루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결기 어린 고백과 다짐은 나의 존재가 너에게로 가는 과정에 의해 완성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알게 해준다. 이는 가지가 뚝뚝 부러지면서 너와 함께 하는 설해목 이미지와 더불어 시인이 얼마나 너라는 타자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이때 궁극적 지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너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서서히 퍼져가고, 궁극에는 가장 신성한 존재로 그 상징적 범위를 확장해 간다.

(2)의 ‘나는 나를 거두어 네게로 가겠다’고 말하는데 그곳은 ‘삼강이 별빛처럼/ 입맞춤하는 곳’이다. ‘강 저편/ 갈대 사이’에 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 굳이 ‘삼단머리 풀어 내리지’도 ‘옥색 앞섶자락 풀어 헤치지 않아도’ 된다. ‘강물소리 차디찬 밤’에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유성호가 언급한 것처럼「삼강나루」는 종국에는 신성한 존재와 만나고 자기 존재를 갱신하는 그 확장의 순간을 포착하여 노래하고 있다.

⑶은 ‘내 어깨 위에 내리퍼붓는 함박눈’을 두고 ‘네가 보낸 것’이라고 본다. 그런 까닭에 ‘두 팔이 설해목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는 밤’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주86)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너’를 향한 간절한 연모지정이 표출되고 있다. 즉 ‘나를 부러뜨리면서까지 한 몸으로 존재하는 너라는 존재에 대한 외경과 추인을 고백한다.’고 본 것은 시인의 중심이 궁극적 타자에게로 향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⑴

한 점 별빛으로 당신 눈 안에 들어가서

한 점 꽃잎으로 당신 눈 속에 피어나서

그 어떤

손길로도 이제

짓이기지 못합니다

-「비가, 디르사에게·1」전문

⑵

귀하고 귀해서 차마 가질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나는 눈물로 받아 안고

온전히 내 것인가요

내 것인가요 묻습니다

-「비가, 디르사에게·15」전문

⑶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것도 아닐 수가 없다고 도리질하며

꿈같은

꿈속의 일을

꿈 바깥에 펼친 밤

-「비가, 디르사에게·18」전문

⑷

가랑비 속으로 지금 걸어가고 있는 나

젖을 대로 젖어서 더 젖을 데 없는 나

온몸이

울음인 것을

울음 기둥인 것을

-「비가, 디르사에게·35」전문

⑸

밤은

모든 것이

하나임을 말합니다

어둠이 어느덧 생의 근원임을

젖거나

물들지 않는

검은 못물임을 말합니다

-「비가, 디르사에게·60」전문

⑹

누군가는 빛에게서 천애를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빛에게서 심연을 보았습니다

심연의

심연에 묻힌

고운 어둠을 보았습니다

-「비가, 디르사에게·70」전문

⑴에서 ⑹까지는 시를 향한 사랑 노래다. ‘한 점 별빛으로 당신 눈 안에 들어가서/ 한 점 꽃잎으로 당신 눈 속에 피어’났기 때문에 ‘그 어떤/ 손길로도 이제/ 짓이기지 못’하는 어떤 숭고한 존재에 대한 진술이다.

⑵는 ‘귀하고 귀해서 차마 가질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나는 눈물로 받아 안’은 이가 뜨거운 반문 ‘온전히 내 것인가요/ 내 것인가요 묻습니다’라는 노래다. 사랑에 대한 부단한 확인이다.

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아무것도 아닐 수가 없다고 도리질하며’에서 보듯 내적 갈등의 심화를 읽는다. 그리하여 ‘꿈같은/ 꿈속의 일을/ 꿈 바깥에 펼친 밤’이라는 의미심장한 결구를 생산한다. 꿈과 현실의 행복한 일치를 여기서 본다.

⑷는 ‘가랑비 속으로 지금 걸어가고 있는 나/ 젖을 대로 젖어서 더 젖을 데 없는 나’가 마침내 온몸이 ‘울음 기둥’이 되는 시적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무상의 승화다. 이 작품을 두고 이규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디르사’는 히브리어로 구약성서 솔로몬의 '아가'에 나오는 이름. ‘나의 사랑하는 그대’라 한다. 시조집에는 단시조의 형태 속에 담은 76편의 연가가 있다. 전편에 담긴 애틋함과 아련함을 보면서 이 시인의 사랑의 대상에 대한 인유를 나는 종교적 의미를 떠나 차고 뜨건 현실로 읽는다. 꽃인가 하면 낙화이고 환희인가 하면 이내 비애인 사랑의 함의는 익숙할 법하면 다시 빠져드는 함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젖을 대로 젖어 더 젖을 데 없는 지경을 지나면서도, 돌아보지 말았어야 할 소금기둥이 되면서도 이 서사는 내일도 모레도 한결같다. 그리하여 다시 묻는다. 천일의 눈물을 하루의 개화와 바꾸시겠는가. 예! 하는 소리 여기저기 들린다. 그렇다면 아직 우린 쓸 만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편들을 묵묵부답의 앞섶 자락에 바친다.’는 후기의 한 문장처럼 시인이여, 그대가 묵묵부답으로 견디려는 영원, 묵묵부답으로 지키려는 인연, 그 원동력이 묵묵부답임을 안다.

사랑은 묵묵부답이고, 묵묵부답으로 견디려는 영원이며, 또한 원동력이 묵묵부답이라는 해석이 개성적이다.

⑸는‘밤은/ 모든 것이/ 하나임을 말합니다’라고 하면서 ‘어둠이 어느덧 생의 근원’이자 ‘젖거나/ 물들지 않는/ 검은 못물’이라는 자각을 한다. 밤이 도래함으로써 나와 나의 진정한 합일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⑹은 보다 심오하다. ‘빛에게서 천애’를, ‘빛에게서 심연을 보았’다고 진술하면서 끝내 ‘심연의/ 심연에 묻힌/ 고운 어둠’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조두진은 ‘시인은 디르사에게 바치는 노래들을 통해 하나 됨을 갈망하며, 고난의 길을 걷는 순례자의 태도로 창작에 임하고 있다. 여기서 ‘디르사’는 시인이 오랜 세월 찾아 헤맨 열망이자,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시조’일 것이다.’라고『비가, 디르사』전편을 진단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한 평생 시와 더불어 사는 시인은 시를 앓고 시를 번뇌하다가 온갖 다양한 사유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연작 시조집『비가, 디르사』는 그러한 사랑의 정조를 76편에 꿴 것인데 어느 때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어느 때는 신에 대한 사랑을, 어느 때는 도달하지 못할 시에 대한 사랑을 육화하고 있어 다소 혼란에 빠뜨릴 때도 있다.

하지만 시를 읽는 사람은 어느새 함께 사랑하고, 함께 고뇌하며, 시를 통해 대리 만족과 그 고통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⑴

형이상학의 불과 저 형이하학의 중천

떠다니는 구름, 증기기관차의 기적

쉼 없이 솟구쳐 오르는 것

곤두박질치는 것

우리 사랑 그 구름, 구름의 때 없는 적멸

밀고 가는 힘과 밀어내는 힘 사이의 중천

불같은 마른 짚단들

불멸을 꿈꾸는

-「절정」전문

⑵

지척을 무너뜨린 안개

걷잡지 못할 노도

이미 예측된 사태

종내 들이켜야 할 쓴 잔

날짐승 속 날개를 찢은

혹은 그의 목뼈를 꺾은

잔등에 내려찍히는

연신 내려찍히는

짐승의 모난 뼈다귀

혹은 고독이 절인 가시

끝끝내 굽힐 수 없는

연자맷돌에 매일 수 없는

-「끝의 끝에서」전문

⑴과 ⑵는 매우 특이한 시풍과 언어 운용을 보인다. ⑴은 전통적인 율격이 아니다.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도 이채롭다. ‘형이상학의 불과 저 형이하학의 중천// 떠다니는 구름, 증기기관차의 기적’이라는 심상의 직조는 탄력을 가지고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그리고 ‘쉼 없이 솟구쳐 오르는 것// 곤두박질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는 인생의 단면을 축약한 느낌이다. 둘째 수에서는 사랑이 등장한다. ‘우리 사랑 그 구름, 구름의 때 없는 적멸// 밀고 가는 힘과 밀어내는 힘 사이의 중천’이라는 대목에서 사랑의 허무함과 거리감 혹은 무수한 애증의 교차를 본다. 그런데 그 ‘불같은 마른 짚단들’은 끝내 ‘불멸을 꿈꾸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것이 또한 절정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⑵는 십자가의 수난을 떠올리게 한다. 강렬한 이미지들로 축조되어 있다. ‘지척을 무너뜨린 안개/ 걷잡지 못할 노도// 이미 예측된 사태/ 종내 들이켜야 할 쓴 잔’이라는 대목에서 그리스도의 예비 된 고난이 표현되고 있다. 그 정황은 ‘날짐승 속 날개를 찢은/ 혹은 그의 목뼈를 꺾은’이라는 섬뜩한 구절로 이어진다. ‘잔등에 내려찍히는/ 연신 내려찍히는// 짐승의 모난 뼈다귀/ 혹은 고독이 절인 가시’로 말미암아 극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하리라는 불굴의 의지가 결구에서 ‘끝끝내 굽힐 수 없는/ 연자맷돌에 매일 수 없는’이라는 미완의 문장으로 매조져지고 있다. 제목이 왜 ‘끝의 끝에서’이겠는가. 끝까지 꿋꿋이 수난을 이기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절절이 녹아 있다. 그 간절함이「끝의 끝에서」의 행간마다 핏물 고이듯 낭자하기까지 하다.

[흐르는 물]

와,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 글을 다 읽으면 시조 전반에 대해 많이 배우고 알게 될 것 같습니다.
틈 나는 대로 와서 보고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정환]

성함이 몹사리 궁금합니다

[흐르는 물]

한꺼번에 읽기가 벅찬데 선생님 게시판실을 따로 만들어서
부분 부분 목차 별로 끊어 올리시면
읽기에는 훨씬 더 편하고
요긴한 부분을 더 상세히 살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정환]

수정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강북수유리/정호순]

선생님 허락하신다면 매일 와서 목차 한 편씩 읽고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강북수유리/정호순]

이름 수정했습니다.
지금 시조를 한창 배우고 있습니다.
시조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교과서 큰 지침서가 되겠습니다.
더 많이 보고 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이정환]

고맙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강북수유리/정호순]

선생님 이 카페에 <중정의 생명시학 1 - 시조비평집 이정환>
게시판실을 따로 만들어 놓으시면 시간 나는 대로 여기 와서
목차별로 읽어보고 제가 올려보겠습니다.

[이정환]

네네

[이정환]

이 방을 '중정의 생명시학'으로 옮기고 시스루의 시 2를 탑재합니다.

양지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