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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교 신춘 소설 나비춤
나비춤 ㅡ 김성희
나비춤 ㅡ 김성희
오전 10시의 시곗바늘은 옛 고궁의 돌담을 따라서 천천히 도는 듯했다. 도심의 높고 웅장한 빌딩마저도 초겨울 들판의 미루나무같이 다소곳했다.
나란히 쓸쓸해서 나란히 다정한 11월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화윤에게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역으로 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 사월의 벚꽃처럼 눈꽃이 흩날렸다. 낮고 흐린 하늘을 온통 뒤덮은 눈꽃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미묘한 하늘빛을 내 머릿속에 이미지로 저장했다. 지하 70여 미터의 캄캄한 지하철 안에서 그 하늘을 잇대어 내내 달릴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끝에 그가 서 있을 것 같았기에.
그러니 11월은 내게 영원히 지속되는 암전이다. 차가운 찰나에서 뜨겁게 치솟는 그리움의 침전물이다.
플랫폼을 지나 화장실 앞의 전신 거울에서 타인 같은 나를 보았다. 아침에 잘 차려입었다고 생각한 샤넬 코트와 머플러가 거울 속에선 영락없는 짝퉁으로 보였다. 어깨에 멘 가방은 진품이었으나 그마저도 거울은 가짜로 만들어 버렸다. 진짜와 가짜가 혼재된 내 모습을, 니 뭐꼬! 거울은 그렇게 묻고 있었고 나는 짝퉁, 하고 가만히 읊조렸다. 그 말은 생각보다 폭력적으로 느껴졌고 불현듯 내 마흔세 살의 삶을 와장창 깨부술 것 같았다.
그러나 명랑하라, 오늘 태어난 태양의 쾌활함을 장착하고 집과 밖, 지하와 지상, 진짜와 가짜를 적당히 섞어서 매일 삶의 영양분으로 섭취하라.
생의 한 걸음 한 걸음 보폭을 유지하며 계절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감각을 훈련하라. 무기력해지면 기꺼이 외출하라. 무엇보다 가짜가 되기 위해서 또 무엇보다 진짜가 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비현실 같은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서 바깥으로 더 바깥으로 소풍 가는 날의 씩씩한 걸음처럼.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도 바쁘게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을 본다. 또 그들을 위해서 길 한쪽을 열어주고 얌전히 난간을 붙잡고 서 있는 사람들도 본다. 이 사람들은 한가로운가, 내 옆을 빠르게 스치며 올라가는 사람들은 무엇에 그리 바쁜가, 어떻게 물어볼 수도 없는 질문을 내게 던진다. 나는 왜 빠르게 걸어 올라가지 않는가. 나는 바쁘지 않다. 그렇다고 무기력한 것도 아니다. 나는 직장을 때려치웠다. 딱, 세끼 밥과 하루 커피 두 잔과 담배 다섯 개비 그리고 친구와 가끔 영화를 보고 미술관을 갈 경제적 여유를 선물로 받았다.
지금 나는 조경사에 대해서 취재하려고 친구 화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화윤은 플로리스트이다. 그녀의 화원은 지하철 3호선 끄트머리쯤의 대곡에 있었다. 나는 그녀가 꽃을 장식하는 것을 보고, 꽃이 보이는 창가에서 그녀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실 것이다. 화윤은 직업상 조경사들과 친분이 있다. 오늘 그녀가 아는 조경사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지금 내가 쓰려는 소설의 주인공이 조경사이기 때문이다.
화윤을 만나러 갈 때면 생기가 돋는다. 그게 그녀의 화사한 꽃들, 어쩌면 꽃향기, 아찔한 빛깔들 때문인가, 주변의 한적함인가, 그녀의 환한 미소인가, 함께 피우는 담배 때문인가. 지하에서 불쑥 지상으로 올라서면 내내 기다렸다는 듯이 펼쳐놓는 한강, 그 풍경 때문일까. 그 유유히 흐르는 물결.
작년 이맘때에 나는 보험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조회를 마친 후의 소란한 틈을 타서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나를 본 소장이 우리 진소유 씨는 실적도 없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만 한다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다. 매일 직장이란 지옥의 맛을 되씹으며 나는 지하철에 앉아서 핸드폰 메모장에 썼다. 내가 한 달 동안 보험영업 실적이 없었을 때 소장은 나를 시계추라고 힐난했었다.라고 대과거로 쓰면 그 일이 오늘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물론 핸드폰에 기록한 날짜가 있으나 감정적으로는 오늘과 동떨어진 일이었다. 이 양립 불가능한 시제 속에서 나는 엄연히 존재했다. 우리는 시제의 불일치 속에서 얼마든지 잘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 맞지 않은 영업직에 매일 힘겨워하면서도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우울감을 과거의 시간으로 묻어 두고 핸드폰을 닫았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창백한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한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그 남자가 눈을 번쩍 뜨는 바람에 내 시선을 물벼락으로 맞고 말았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핸드폰으로 고개를 떨구었고, 핸드폰 할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지하철 문화를 그도 알고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남자의 구두가 내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저어 실례지만 …….
-무슨…… ?
나는 어떤 상황이 초래될지 두려워서 한없이 착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한주 초등학교 졸업생 진소유 아닌가요? 6학년 4반 부반장?
그 중저음의 목소리가 밝힌 이력은 나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란 말인데 누굴까, 나는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를 찬찬히 보았다.
-아! 맞아. 황태영? 아이들이 황태자라고 불렀잖아.
나는 그의 코끝에 있는 점으로 겨우 알아보았는데, 그는 내 코끝의 점으로 단번에 나를 알아보았다고 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자리를 비켜주자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앉으며 왜 그렇게 자기를 노려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노려볼 게 많은 세상의 피해자라고 말하려다가 눈이 나빠서 그랬다고 했다. 그는 아무튼 반갑다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반가움에 호들갑을 떨기엔 좀 멋쩍어서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어색한 웃음에 그가 어색한 친밀감을 드러내며 한강 둔치까지 나를 억지로 끌고 갔다. 그의 한강 입성을 축하하듯,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팡파르처럼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나는 이 상황이 조금 웃겼다. 30년이 지나서 우연히 마주친 여자 동창을 다짜고짜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자고 데려온 것도 그렇고, 나 역시 사촌 언니가 소개로 고객과 약속이 있음에도 그를 따라온 것도 그랬다.
다행히 유람선은 막 출발한 후라서 나는 안도했는데, 그는 몹시 실망한 듯이 보였다. 실망한 표정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에 머쓱했는지 자기가 중국에서 모처럼 서울에 왔고 온 김에 한강 유람선을 꼭 한번 타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 내 휴대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친정엄마가 계시는 요양병원이었다. 내가 오후 시간에 방문을 신청했는데, 그걸 재차 확인하려고 전화한 모양이었다. 나는 3시까지 꼭 가겠다고 했다.
지금 엄마는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신다. 어렸을 적에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일을 나간 엄마를 늘 기다렸다. 엄마가 꽈배기 공장에서 가져올 꽈배기도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나는 엄마를 기다리면서 숙제를 하고 스케치북에다 동글동글한 얼굴을 무수히 그렸다. 가끔 엄마가 편두통이 심해서 일을 나가지 않았던 날이 있었는데 그날은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지 않는 평화를 느꼈다. 잠자는 엄마의 고른 숨소리가 여린 햇살 속으로 퍼지는 방에서 나는 무얼 하든 마음이 편안했다.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순환하듯이 이제 엄마가 요양원 침대에 누워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린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3시까지 요양병원에 가야 한다.
강 둔치에는 햇살이 쏟아져서 11월임에도 전혀 춥지는 않았다. 황태영은 고향 집 대청마루인 양 둔치에 벌렁 드러누웠다. 내가 황태영 옆에 나란히 누워도 허물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옆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은 온통 6학년 2학기 가을 운동회 장면일 것이다. 이어달리기, 차전놀이, 교장 선생님 손잡고 달리기 등등 아이들의 환호에서 황태영 이름이 터져 나왔다.
1학기 기말시험에서 그가 1등을 했고, 그의 엄마가 6학년 전체에 간식을 돌렸다. 부반장인 나와 반장인 황태영이 그걸 일일이 다른 반에 전달했고 또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골고루 빵과 주스를 나누어 주었다. 내가 부반장이 된 이유는 엄마가 꽈배기를 우리 반에 한 번 돌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황태영과 나는 손발이 척척 맞아서 일사불란하게 간식을 돌렸고, 둘 다 코끝에 점이 있다고 아이들이 커플이라고 했다. 더욱이 여름방학 캠프에 함께 참여한 후에 나는 황태영을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서 거의 숭배했다. 밤마다 황태영의 캐리커처를 그렸으나 그것을 그에게 전해주지는 않았다.
6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 첫날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실에서 황태영을 찾았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그에게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선물로 주려고 했다. 그가 방학 중에 전학 갔다는 선생님의 전언을 듣고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체험했다. 곧 그 가슴을 일으켜 세우며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황태영은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었고 또 공부를 매우 잘했고 퍽 잘생겼다. 숙맥 같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황태영이 몸을 벌떡 일으키고 앉아서 이번엔 말없이 강물을 바라보았다. 30년이란 세월의 공백을 메워줄 이야기가 없는 우리 사이에 강물이 흘러들었다. 나는 보험회사에 취직하면서 초등학교 동창에겐 연락하지 않기로 세운 원칙을 그만 강물에 흩어 버릴까 생각했다. 초등학교 친구인데 어떤 상품이든지 하나는 들어줄 것 같은 기대가 생겼다. 나는 지금껏 오빠 대학병원 사람들과 화윤이 주변의 사람들 도움으로 근근이 영업 성과를 내고 있었다.
-난 동창회를 한 번도 안 나갔는데 6학년 4반 애들은 잘 있어?
그 역시 사업이 워낙 바쁘고 중국에 있어서 나간 적 없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돼?
그는 건설회사라고 말하곤 웃었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편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강은 왜? 저 푸른 강물 위에 집이라도 짓게?
그러고는 네가 나와 동반자살이라도 하잘까 봐 겁이 났다고 덧붙였다. 그는 동반자살이라는 말이 퍽 낭만적으로 들린다고 했다. 그러고는 세상에는 낭만적인 죽음도 있을까 하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죽음은 없다고 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한강을 택하는 건 떨어졌을 때 아프지 않아서이겠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의 말에 나는 웃지 않았다. 30년 만에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무작정 한강으로 온 것도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를 따라왔을까? 첫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아니면 그를 잠재적 고객이라고 생각해서 글쎄, 안 만났으면 모르겠지만 막상 지하철에서 만나고 보니 이번 달 실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놈의 숫자 그래프에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서 ‘곁’이란 얼마만큼의 거리인지 가늠해 보았다. 언제부턴지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치매를 앓는 엄마와는 모녀로서 따뜻한 정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껏 엄마 곁에서 엄마가 느낀 외로움만큼 나도 여자로서 외로웠다.
오직 내 편을 하나 만들고자 했던 결혼이었다. 남편은 대학 선배였고 내게 다정했다. 그는 직장에서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혼 생활 내내 그가 지독하게 남의 편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나를 매사 가르쳤고 또 시댁의 하녀쯤으로 생각했다. 내가 결혼 전후로 뚜렷한 직업도 없었고 사회성이 없다고 딸의 양육권도 주지 않았다.
이혼의 상처를 안고 나는 아픈 엄마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서 고치 안의 애벌레처럼 외로움을 친친 감고 살았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사촌 언니가 보험회사에 입사를 강요했고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험회사에 출근할 때는 아침마다 빌딩 숲을 걸어 세상으로 들어가는 설렘이 있었다. 먼저 시간적 여유로움이 좋았다. 밤이면 오롯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 내게 아침이면 교육팀장이 세상의 돈은 다 벌 수 있을 의지를 활활 불태워 주었다. 나는 친구나 지인, 친척에게 전화하는 일에 나를 불사르기만 하면 되었다. 뚜렷한 존재감 없이 살던 내가 친구나 지인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그들은 자랑하고 싶었던 남편, 보석, 해외여행에 대한 자랑을 한껏 하고서 어느 정도 열기가 식어서야 늘 변하지 않는 나의 근황을 묻곤 했다. 그들은 내 이혼에 놀랐고 내가 막 보험설계사를 시작했다고 하면. 그래? 하고 한 번 더 놀란 후에 그래, 언제고 한번 보자는 기약 없는 말을 했다.
나는 강물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한 남자의 삶이 머리카락에서부터 바래지는 듯했다. 그의 부분적으로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흰 나비 떼 같이 강바람에 날렸다. 건설회사란 마초 같은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톰 브라운 재킷과 바지로 그의 경제적 지표를 잘 드러냈다. 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강물에 다 비치는데.
-그래? 그럼, 네 명품 옷을 셈한 내 속물근성을 보았단 말이지?
황태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한 번 부반장은 영원한 부반장이라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때도 총명하고 당찬 모습이었다고. 황태영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의외였다. 물론 똑똑한 오빠가 보던 문학책을 학교에 가져가서 쉬는 시간에 펼쳐보던 내 겉멋을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서울엔 무슨 일로 왔어?
그는 거래처 사장의 장례식에 왔다고 했다. 장례식장에 가기엔 다소 과감한 그의 재킷과 바지였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온 사람이 혼자 한강 유람선을 타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신뢰해야만 했다.
둔치에는 여대생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요즘은 비혼주의니, 비출산 선언이며, 탈코르셋을 거침없이 외치는 여성들이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다.
나는 왜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을까? 아내가 되고 싶었다는 것.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아내이면서 막연히 나만의 언어로 세계를 구축하는 일. 그걸 꿈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나는 꿈꾸었다. 나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나와 불일치를 이루는 세계를 그리려는 너무 안일하고 다소 진부한 꿈을 꾸었다. 당연히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물 위에 바람이 달아나면서 제가 달아난 방향을 물결무늬로 그려놓았다. 금세 풀리는 수수께끼는 강물의 풍경이 되었다. 그가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강의 풍경을 몇 장 찍었다. 그러더니 나와 셀카를 한 장 찍자고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내게 짐짓 항의하듯 말했다.
-멀리 북경에서 온 친구와 사진 한 장 찍는 게 왜 어렵지?
-헤이, 친구. 북경과 서울은 가까워. 우정이 있으면 불원천리 어딜 못 가겠어. 그렇지만 한강에서 셀카는 연인들의 전유물이야.
-초등학교 친구는 영원한 마음의 연인 아니야?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틀린 말이 아닐 뿐 아니라 굉장히 달콤한 말이었다. 그래서 덜컥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번호를 알려주면 사진을 보정해서 보내려고 했다.
그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침을 먹지 않은 게 생각났다. 담배도 간절히 생각났다. 화윤과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우는 루틴을 놓쳤다. 커피와 담배에 금단현상인 듯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리 커피라도 한 잔 어때? 고민이 많아 보이는데 카페인이 고민을 반으로 줄여 줄 수도…….
그는 응. 그래, 라고 말만 하고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에너지바 한 개를 꺼냈다. 그 반을 그에게 내밀자 그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내가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함이 입안에 가득한데 기분은 그지없이 씁쓰레했다.
삶에는 이길 수 없는 적이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고통이 있다. 그 적은 삶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지금 황태영이 어떤 궁지에 몰려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가 겪을 삶의 무게이다. 내가 밥벌이를 위해서 솜씨도 없는 영업으로 사람에 전전긍긍하며 밤마다 종이 위에 언어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안간힘에 비하면 그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저 가을을 타는 중년의 정서라면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뭔가? 이렇게 친구를 고객으로 전환하려고 내심 쩔쩔매는 이 불온하고 가엾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직원 조회 때 간식으로 놓인 초코파이 두 봉지를 가방에 넣고 사무실을 나온다. 회사 앞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께 그걸 드린다. 다리가 불편한 아저씨가 굽는 호두과자를 사서 화윤을 만나러 간다. 하루의 일진이 호되지 않기를 바라고 내 딸이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주술적 행위다. 나는 막연하고 작은 행운에 기대어서 한 달을 살아갈 돈을 벌고 그 나머지 여력은 소설 쓰기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여전히 강물을 보고 있었다. 그 가슴 안에 쓸모없는 말을 버리려고 온 듯했다.

뒤로멈춤앞으로
-친구야 강물이 닳아서 없어지려고 해. 우리 그만 일어나면 안 될까?
내가 툭 던진 말에 돌부처처럼 앉아만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명령을 따르는 램프의 지니 같이 성큼 걸어가는 바람에 내가 바삐 걷다가 그의 팔꿈치를 잡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황태영을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던 가냘픈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졌는데, 이상하게 그 기쁨이 부지불식간에 통증으로 느껴졌다.
카페 쪽으로 걷던 그가 갑자기 강물 쪽으로 향해 쏜살같이 뛰어갔다. 놀라고 당황한 나는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그는 강물에다 대고 야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가슴 속에 울분 혹은 설움을 마구 쏟아내려는 듯했다. 그 순간 나도 그렇게 막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내가 한 번쯤은 저러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어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황태영, 나도 거기로 뛰어갈까?
내 목소리에 그가 구두를 툭툭 털며 걸어 나왔다. 멋진 퍼포먼스였다고 말하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그가 추울 듯해서 서둘러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나는 커피와 티라미수 케이크를 주문하고 강물이 바라보는 창가에 앉았다. 유리에 반사된 물결의 반짝임은 실제보다 더 빛났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해가 잠시 구름에 가려지면서 강물이 어둡게 흘러갔다.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나는 싱거운 말 한마디를 툭 던졌다.
-네가 옛날에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 싱거운 말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면서 오히려 내가 저를 좋아하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마흔을 갓 넘긴 남자와 여자가 스스럼없이 좋아한다는 말이 오가는 것은 초등학교 동창이라 가능했다. 한순간 첫사랑이란 아득한 빛에 내가 빛났고 그러자 그의 고민이 혹시 나를 향한 감정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가 어이가 없어 혼자 웃었다.
그건 그렇고 만약 그가 지금 금전적인 고민을 이를테면 사업이 부도 위기에 처했다면 어쩌지. 나는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또한 오늘 저녁은 그와 술을 한 잔도 할 수도 없다.
-소유야, 너는 삶에서 진짜 소유하고 싶은 게 뭐 있어?
-나는 나 자신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근데 말이야, 때로는 삶이 가학적 채찍을 마구 후려칠 때가 있지. 그런 삶의 폭력성에도 비굴하게 삶에 매달리고, 맹목적으로 목숨을 구가하는 것은 탐욕이 아니라 인간에겐 인지상정이겠지?
나는 그의 말이 옳다고 강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수긍 탓인지 따뜻한 커피 탓인지 그는 안정을 찾은 얼굴이었다.
내내 말이 없던 그가 갑자기 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가끔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무대 위에 올려졌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겠다니, 텅 빈 객석에 오직 한 명의 관객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들려줄 이야기가 없어서 슬펐다.
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시고 아픈 엄마의 탄식을 듣고, 공부 잘하는 오빠의 설교를 듣고, 남편이 나에 대해 불평하는 말을 듣고, 딸아이의 칭얼거림을 듣고, 고객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살았다. 나는 계속 듣기만 해서, 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그래서 그 이야기를 밤마다 노트북에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말이야, 그다지 멋있게 살고 있진 않지만, 그다지 비열하게 살고 있지도 않아. 예쁜 딸이 있는데 그 아이를 자주 볼 수는 없어 슬퍼. 그리고 밤마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
나는 겨우 그 말만 했는데 알 수 없는 피로감을 느꼈다. 내 피로감을 그도 느꼈는지 내 중학교 졸업식에 그가 왔었다고 했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고 피로가 싹 가시는 말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중국에서 사업을 벌여서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온 가족이 중국으로 이주했다. 그가 외할머니 생신 겸 한국에 왔고 우리 동네에 있는 중학교 졸업식에 왔지만, 이미 식이 끝나버렸다고 했다. 그는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결혼도 했고 지금은 아버지 사업을 돕고 있다고 했다.
-이야! 감동인데. 라디오에 사연을 올려야 할까 봐.
그는 내 말에 웃지 않았다. 그가 퀭하니 깊어진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을 말하려는 듯이 보였다. 무슨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기에 저토록 가엾은 얼굴일까? 저 얼굴로 내게 무슨 부탁이라도 해온다면 어떡하나? 나는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안고 있는 고민을 함께 나누어야 할 책임은 없다. 책임은 없지만, 그의 고민에 빠져서 함께 허우적댈 첫사랑의 연정은 있었다.
나는 이달 말에 어머니 요양비를 낼 일에 머리가 복잡했다. 의과대학 교수인 오빠는 어머니 병원비와 요양병원비를 내주었다. 오빠는 아주 가끔 새언니 모르게 돈 쓸데가 있다며 내게 부족분을 부탁하기도 했다. 딸자식으로서 당연하지만 내 형편에는 버거운 지출이었다. 불현듯 여기 더 앉아 있다가는 그의 빚보증이나 보험회사 대출을 대신 받아주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내가 이만큼 속물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내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찬찬히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내게 아직 그의 힘듦을 말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황태자의 면모를 유지했다. 나도 보험사의 명함을 내밀지 않았기에 순수한 옛친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고민이나 고통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길 손 모아 빌면서 슬쩍 발을 뺐다.
-아, 어쩌지. 아까 친정엄마 병원에서 호출 온 것을 깜빡했어. 엄마가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내가 가야 해.
-그래, 맞아. 너희 어머니는 늘 아프셨지.
그는 비로소 생각이 난 듯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나대로 양심에 찔려서 공연히 가방을 뒤적이다가 손에 힘이 풀려서 가방이 쏟아졌다. 내 비루한 영혼도 쏟아진 기분이었다.
내가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참, 소유야, 미안하지만 나한테 백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꼭 갚을게
백만 원이라는 액수에 내심 놀랐다가 이내 안도했다. 그 금액이라서 참 다행이었다. 내 첫사랑, 내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온 꽃값으로 충분한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딱 그 돈만큼 여유가 있다며 웃었다. 그러고는 우린 친구니까 전혀 마음 쓰지 말라고 했다.
나는 백만 원 송금 버튼을 누르면서 황태영이라는 첫사랑이 영영 사라지는 기분을, 순수한 한 시절이 지금 막 지워지고 있는 생각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얼른 악수를 청했고 서둘러 카페를 나왔고 교환하자던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못했다. 그날 이후 가을이, 겨울이 빠르게 흘러갔다.
다시 봄이 문밖에 왔을 때, 엄마는 산들산들 봄바람을 타고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오랜 병석에서 아들, 딸도 잘 알아보지 못하던 엄마가 돌아가시자 나는 그 죽음에 상실감과 동시에 홀가분함을 느꼈다. 홀가분함이 매정함과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양심의 가책은 엄마의 넋이 극락왕생하길 바라는 간절한 기도로 대신했다. 새언니는 며느리 도리로서 또 부잣집 딸답게 큰 사찰에서 엄마의 49재를 올려드렸다.
그때 절에서 나비춤을 보았다. 큰 고깔을 쓰고 긴 소매가 달린 장삼을 입은 스님이 춤을 추는데 그 모양이 나비가 나는 듯해서 나비춤이라고 했다. 다르게는 영산재라고도 했다. 불교 의식에서의 행위 동작으로 불법을 상징하는 춤이었다. 빠른 동작이 거의 없고 어깨나 고개도 거의 움직이지 않아 조용하고 완만한 몸짓이 특징이었다. 대개 한 발짝을 넘지 않는 공간에서 느린 한배로 추는 춤의 동작이다. 그건 마치 내 삶의 몸짓 같았다. 고치 안에서 조용히 꿈꾸는 삶은 느리고 조용했다. 꿈꾸는 것이 많아서 슬픈 영혼이 그 슬픔에서 해탈하려는 몸짓 같았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엄마가 살던 아파트를 팔아서 오빠와 나누었다. 대출이 많아서 몫이 많진 않았다. 나는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문호들은 대부분 법학을 전공했으므로.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쓸 것이므로.
무엇보다 작년 늦가을, 황태영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보험회사를 오가며 실적 없는 세월의 시계추로 나를 소진했을 것이다. 그런 삶이 하찮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 궁금했다는 그가 아니었다면, 소설 쓰기에만 전념하지 못했을 것이다.
날씨가 다시 추워지고 있었다. 나는 혼자 먹을 김장김치를 쇼핑몰에서 둘러보다가 입금 알람을 읽었다. 무심히 들여다보는데 동그라미가 너무 많았다. 자세히 보니 일억이란 돈이 황태영 이름으로 입금되었다. 잇따라 한 통의 긴 문자가 날아왔다. 그 문자를 읽고 나는 지구 바깥으로 날아갈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황태영이 한 달 전에 영면에 들었다는 문자였다.
작년 11월 초, 그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가 건강검진을 받던 날 함께 따라간 그가 의사에게 평소 자신의 옆구리와 등의 통증을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의사는 정밀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검사 결과는 청천벽력 같은 췌장암 말기였다. 바로 그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헤매다 지하철을 탔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결과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그것을 거부할 방법을 알아내려고 무조건 한강을 가다가 뜻밖에 나를 만났다.
그는 순수했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고, 가을 소풍 때 탔던 대관람차의 기억으로 한강의 유람선을 타보고 싶었다. 한때 그의 마음에 가득했던 어린 여자애가 훌쩍 시간을 건너 마흔 살을 넘긴 모습을 보고서 그 역시 삶에서 죽음으로 껑충 건너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풀이 죽어 있었는데, 삶에서 한없이 풀이 죽어 있는 나를 보았고 쏟아진 내 가방에서 홍보용 물티슈를 보았다. 내 계좌를 알기 위해 돈 백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선뜻 빌려준 그 돈이 지상에서 받은 가장 값진 선물이었다고. 그도 내게 큰 선물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치료를 거부하고 여행을 하다가 마침내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내게 이 돈을 전해주라고 그의 어머니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황태영이 이 생애에 지은 무수한 인연을 다 허물고 다른 그이 별로 날아갔다. 그가 한 가지 소유하려고 한 것이 추억이었을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든지 닿을 수 있는 추억은 좋은 인연의 공덕으로 쌓을 수 있는 값진 보물이다.
아니 어쩌면 그의 짧은 생을 소설에서 조경사로 윤회할 줄 알고서 이를테면 내게 준 원고료였을까.
12월의 흐린 오후였음에도 세상이 이토록 환하다니!
■ 당선소감 / 김성희
소설 창작반 박덕규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2022년 한 학기 동안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 소설 심사평 / 한승원 소설가
이번 응모작들은 수준이 높다. 기초 공부가 잘 되어 있고, 반짝거리는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밝고 환한 방’ ‘나비춤’ ‘너럭바위 고인돌의 고요’ 등 3편을 최종 후보작으로 골라냈다.
소설의 문장과
읽고 난 다음의 감동과
소설적인 미학
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나비춤’은
세련된 문장과 표현력, 형상화 하는 힘이 신뢰할 만하고,
인물 설정이나 구성력이 돋보이고 그런 만큼 읽고 난 다음의 감동, 주제 도출하는 수법도 좋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