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춘(早春) 이른 봄
春雨梨花白 東風柳色黃 誰家吹玉笛 搖揚落梅香
춘우이화백 동풍유색황 수가취옥적 요양락매향
봄비 내리자 배꽃이 하얗고
봄바람 불자 버들개지 노랗네
옥피리를 누가 부는가
매화향기 흩날리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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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죽의 원래 이름은 알현(閼玄)인데 생몰연대는 불분명하다.
취선(翠仙), 또는 월연(月蓮)이란 호를 갖고 있었는데
조선 중기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충재(冲齋) 권벌(權橃) 가문의 여종이었다.
권벌의 손자 석천(石泉) 권래(權來)의 시청비(侍廳婢)라고 전하고 있으니
대략 15세기 말엽에서 16세기 초엽의 인물일 것이다.
사대부가 여인들도 언문이라 불렸던 한글 이외에
진서(眞書)라고 불렸던 한자를 배우기는 쉽지 않은 시대였다.
비슷한 시기 명문 반가(班家) 출신인 허난설헌이
오빠들에게 학문을 배운 것도 이례적이라고 전해지는 판국에
여종 출신의 설죽이 어떻게 한시를 지을 정도의
학문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자신의 딸에게도 한문을 가르치지 않는데
여종 출신에게 배우게 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만큼 그녀는 영특했던 것이다.
원유(遠遊) 권상원(權尙遠)의 시문집
백운자시고(白雲子詩稿) 말미에 필사된 설죽의 시는 166수에 달한다.
설죽이 자유자재로 한시를 지을 만큼
뛰어난 학문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시들은 한결같이 빼어난 수준이다.
설죽도 나이를 먹으니 한 남성에게 의탁해야 했다.
여종 출신의 여류 시인은 누구에게 의탁해야 하는가?
설죽은 양반가의 첩이 되는 길을 택했다.
수촌(水村) 임방(任埅)이 지은 수촌만록(水村漫錄)에는
설죽이 석전(石田) 성로(成輅)에게 몸을 의탁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성로가 봉화 유곡의 정자에 도착하자 사대부들이 모였다.
이때 설죽도 자리를 함께 했다.
사대부들은 석전 성로가 죽었을 때 부를 만시(輓詩)를 지어
좌중을 울리면 성로의 시침을 들게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설죽은 즉석에서 만시를 지었고 좌중은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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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죽은 성로의 호 서호정(西湖亭)을 따서 만시를 지었다.
寂寞西湖鎖草堂 春臺無主碧桃香
적막서호쇄초당 춘대무주벽도향
靑山何處埋豪骨 唯有江流不語長
청산하처매호골 유유강류불어장
서호정 초당 문은 닫혀서 적막한데
주인 잃은 봄 누각에 벽도향만 흐르네.
청산 어느 곳에 호걸의 뼈 묻으셨는지
오직 강물만 말없이 흘러가네.
두보나 이태백이 울고 갈 정도로 잘 구성된 시(詩)다.
설죽은 성로를 따라 한양으로 왔다.
설죽은 자신 때문에 성로가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고
광해군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은 동학 권필이
귀양가다가 폭음사(暴飮死)한 후 세상을 등지고 시와 술로 생애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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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전과 나눈 시 중에는
蠶嶺煙霞主 石田詩主人 相逢不覺醉 月墮楊花津
잠령연하주 석전시주인 상봉불각취 월타양하진
잠두봉 경치도 으뜸이고
석전의 시도 으뜸이라오.
그대를 만나 취하기 전인데
양하진에 벌써 달이 기우네.
幾年流落幾沾裳 鶴髮雙親在故鄕
기년유락기첨상 학발쌍친재고향
一夜霜風驚雁陳 天涯聲斷不成行
일야상풍경안진 천애성당불성행
여러 해 떠돌며 치마에 눈물 흘러
긴 밤 무서리에 기러기떼 놀라 날다가
하늘가에 울음 그치니 가지를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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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여인(貧女)이란 시는
일부만 전해지는데 그녀의 사회의식이 드러나 있다.
☞ 빈녀(貧女) - 가난한 여인
貧女上織機 終日織不多 飢來手無力 何以能擲梭
빈녀상직기 종일직불다 기래수무력 하이능척사
가난한 여인이 베틀에 앉아
종일 베를 짜지만 많지 않네.
배는 고파오고 손에 힘없는데
어떻게 북을 놀릴 수 있겠나.
성로가 광해군 때의 정치에 분개했다면
설죽은 그를 뛰어넘는 신분제와 가난에 분개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