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이면 한강으로 시라시를 뜨러 갔다 빚보증으로 논밭을 날린 후 어머니는 책값이며 차비가 없어 꾸러 다녔다 어머니가 떠오는 시라시는 식구들 마른 삶에 도랑물을 내었다 시라시를 따라 강의 깊은 데까지 가 등에 업힌 막내와 자맥질도 하였다 눈물자국 같은 물빛이 뜰채에 걸려나왔다 물의 정수리를 오래 들여다본 죄로 햇살에 눈이 멀어 어머니 돌아오는 걸음이 출렁거렸다 어디 먼 바다로부터 제 어미의 길을 되짚어 시라시가 오는 철이다 곁에 감기던 식구들 다 떠나고 어머니 혼자 봄밤을 지새우는 날 얼음장 떠가던 그 밤처럼 무릎 시리게 떠오르는 물빛 기억들
시라시: '시라시'라고 부르는 작고 가는 실뱀장어. 외국에 양어종자로 팔았다 ------------------------------------------------------------------
초봄이면 한강으로 시라시를 뜨러 갔다
초봄 날씨는 겨울 못지않게 춥습니다. 게다가 꽃샘추위에는 동장군도 저리 가라죠. 그런 날씨에 한강에 들어가는 일은 정말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엄습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죠. 당장에 두 눈 뜨고 어머니만 쳐다보는 아이들이 있으니까요.
빚보증으로 논밭을 날린 후 어머니는 책값이며 차비가 없어 꾸러 다녔다 어머니가 떠오는 시라시는 식구들 마른 삶에 도랑물을 내었다
"빚보증으로 논밭을 날린 후"라는 말 앞에는 당연히 "아버지가"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겠죠. 아버지가 퍼질러 놓은 빚 때문에 생활이 곤궁해진 어머니는 시라시를 뜨러 다니십니다.
시라시를 따라 강의 깊은 데까지 가 등에 업힌 막내와 자맥질도 하였다 눈물자국 같은 물빛이 뜰채에 걸려나왔다 물의 정수리를 오래 들여다본 죄로 햇살에 눈이 멀어 어머니 돌아오는 걸음이 출렁거렸다
어머니에게는 갓난아기도 있습니다. 등에 업은 아이와 깊은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기도 하셨어요. 그런 날에도 어김없이 눈물자국같이 가느다란 실뱀장어들이 뜰채에 걸려 나왔습니다. 여기까지는 서술입니다. 어머니의 생활에 관한 서술이죠. 그러나 "물의 정수리를 오래 들여다본 죄로"부터 시작하는 구절은 시가 됩니다. 산문과 운문의 경계가 여기입니다. 정수리는 가장 약한 부분입니다. 그런 물빛을 오래 보시다 보니 눈이 약해졌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걸음이 느려집니다.
어디 먼 바다로부터 제 어미의 길을 되짚어 시라시가 오는 철이다 곁에 감기던 식구들 다 떠나고 어머니 혼자 봄밤을 지새우는 날 얼음장 떠가던 그 밤처럼 무릎 시리게 떠오르는 물빛 기억들
초봄입니다. 시라시들이 대양을 떠돌다 이제 다시 모천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떠나고 어머니 혼자 쓸쓸히 봄을 맞는군요.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한강에 들어가시던 어머니를 떠 올립니다.
아프지 않은 어머니들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자식들도 아프긴 매한가집니다. 하지만 자식들은 또 자식을 낳아 기릅니다. 순환이자 연결이 되어 세상은 흘러갑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파도 어머니들은 표시를 내지 않습니다. 괜찮으시다는 거죠. 괜찮다, 괜찮다는 말이 나를 좀 봐줘, 날 좀 봐, 하는 말로 들린다면 당신도 이젠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일 거예요. 세상 험한 꼴을 다 보고 사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