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실록31권, 세조 9년 윤7월 4일 신유 1/1 기사 / 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육전청의 잔치에서 종친과 재추에게 기생을 멀리할 것을 이르다
육전청(六典廳)의 유신(儒臣)들에게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니, 중추원 사(中樞院使) 최항(崔恒)·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수온(金守溫)·예문 제학(藝文提學) 이승소(李承召)·병조 참판(兵曹參判) 김국광(金國光)·공조 참판(工曹參判) 성임(成任)·행 상호군(行上護軍) 강희안(姜希顔)·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강희맹(姜希孟)·행 상호군(行上護軍) 이파(李坡)와 여러 낭청(郞廳) 등이 잔치에 나아왔다.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에게 명하여 잔치를 감독하게 하고, 또 내녀(內女) 3인과 4기녀(妓女)를 내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4기녀(妓女)는 옥부향(玉膚香)·자동선(紫洞仙)·양대(陽臺)·초요경(楚腰輕)인데, 모두 가무(歌舞)를 잘 하여 여러 번 궁내(宮內)의 잔치에 불려 들어가니, 임금이 ‘네 기녀[四妓]’라고 불렀다. 옥부향(玉膚香)은 일찍이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와 사통(私通)하였는데, 뒤에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과 사통하였다. 초요경(楚腰輕)은 어려서 평원 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의 사랑을 받다가 평원 대군이 졸(卒)하자,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과 사통하였는데, 임금이 이영(李瓔)을 폄출(貶黜)하고 초요경도 쫓아냈다가 얼마 아니되어 초요경이 재예(才藝)가 있다고 하여서 악적(樂籍)에 다시 소속시키니,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과 또 사통하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비밀히 이증(李璔)에게 묻기를,
"바깥 소문이 네가 초요경과 사통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가? 어찌 다른 기생이 없어서 감히 서로 간음하는가?"
하니, 이증(李璔)이 울부짖으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여,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변명하였으나 이증(李璔)은 이날도 초요경의 집에서 묵었다. 뒤에 판사(判事) 변대해(邊大海)가 몰래 초요경의 집에 묵었다가 이증(李璔)의 종에게 매를 맞아서 이때문에 죽었다. 임금이 매양 종친(宗親)과 재추(宰樞)에게 기생을 멀리하고 가까이하지 말도록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이 무리는 사람의 유(類)가 아니다."
하고 잔치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기생의 무리들로 하여금 분(粉)을 사용하여 그 얼굴을 두껍게 바르게 하니, 그 모양이 마치 가면(假面)을 쓴 것과 같았는데, 이들을 천시(賤視)하고 혐오(嫌惡)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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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賜宴六典廳儒臣于慶會樓下。 中樞院使崔恒、同知中樞院事金守溫、藝文提學李承召、兵曹參判金國光、工曹參判成任、行上護軍姜希顔、中樞院副使姜希孟、行上護軍李坡及諸郞廳等赴宴。 命都承旨盧思愼監宴, 又出內女三人及四妓奏樂。 四妓玉膚香、紫洞仙、陽臺、楚腰輕也, 俱以善歌舞, 屢入內宴, 上呼爲 ‘四妓’。 玉膚香嘗爲孝寧大君 (補)〔𥙷〕所私, 後翼峴君 璭通焉。 楚腰輕少爲平原大君 琳所嬖, 平原君卒, 和義君 瓔通焉。 上貶瓔而黜楚腰輕, 未旣楚腰輕以才復屬樂籍, 桂陽君 璔亦通焉。 上知之, 密問璔曰: "外間以汝通楚腰輕, 信有諸? 豈無他妓, 敢相亂歟?" 璔號泣叩頭, 誓天指地, 以辨其誣, 璔是日宿於楚腰輕之家。 後判事邊大海潛宿楚腰輕家, 爲璔奴所擊, 因而斃。 上每戒宗親、宰樞遠妓勿近, 曰: "此輩非人類也。" 當宴, 必令妓輩用粉厚塗其面, 狀如假面, 以賤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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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군(桂陽君) : 1427~1464. 세종의 왕자로, 자가 현지(顯之)인 이증(李璔)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도와 1455년에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좌익 공신(左翼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世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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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39권, 세조 12년 9월 11일 기묘 1/4 기사 / 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형조에 전교하여 여기 초요경 등 4인의 천민 신분을 면하게 하다
형조(刑曹)에 전교(傳敎)하기를,
"여기(女妓) 초요경(楚腰輕)·양대(陽臺)·자동선(紫洞仙)·옥부향(玉膚香) 등에게 천민(賤民)의 신분을 면하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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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傳于刑曹曰: "女妓楚腰輕、陽臺、紫洞仙、玉膚香等, 免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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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6권, 예종 1년 7월 17일 무술 2/5 기사 /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평양부의 관비 대비가 사헌부에 이덕량·박종직을 고발하다
평양부(平壤府)의 관비(官碑) 대비(大非)가 사헌부에 장고(狀告)하기를.
"부윤(府尹) 이덕량(李德良)의 반인(伴人) 박종직(朴從直)은 기생 망옥경(望玉京)과 간통하고 또 소서시(笑西施)와도 간통하려 하였는데, 소서시가 응하지 않자 박종직이 원망을 품고서 이덕량에게 호소하니, 이덕량이 그 어미 내은이(內隱伊)와 소서시 등에게 곤장을 때려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저 대비(大非)가 관찰사에게 고하고자 하였으나, 부민(府民)의 소송을 가지고 고장(告狀)을 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관찰사 어세겸(魚世謙)은 기생 함로화(含露花)와 간통하고, 도사(都事) 임맹지(任孟智)는 초요경(楚腰輕)과 간통하였으므로, 분부에 이미 4개월이나 머물러두고서 전혀 청리하지 않습니다. 어미가 이미 곤장을 맞아 죽었으므로 관찰사에게 고하니, 또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덕량은 또 형제 두 사람에게 장을 때리고, 소서시를 공신(功臣)의 구사(丘史)로 삼아 본부를 침학하고자 하였으며, 또 어미가 죽자 전찬(奠饌)과 부물(賻物)을 주어 내가 신소(申訴)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원상과 승지 등에게 내어 보이고 의논하였다. 즉시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한척(韓陟)을 보내어 이덕량·박종직과 여러 공사에 연류된 사람을 붙잡아 오게 하였다.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대비(大非)는 한 아녀자일 뿐인데, 멀리에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니, 쌀·베[布]·염장(鹽醬) 등의 물건을 내려 주어 서울에 머무는 비용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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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府官婢大非, 狀告憲司云: "府尹李德良伴人朴從直, 奸妓望玉京, 又欲奸笑西施, 笑西施不應。 從直銜之, 訴德良, 德良杖其母內隱伊及笑西施等, 幾死。 大非欲告觀察使, 而以府民之訴, 無人書給告狀。 且觀察使魚世謙, 通妓含露花, 都事任孟智, 通楚腰輕, 留本府已四月, 專不聽理。 母旣杖死, 告于觀察使, 亦不聽。 德良又杖兄弟二人, 以笑西施爲功臣丘史, 將欲侵虐本府, 又以母死, 給奠饌賻物, 沮吾申訴。" 上出示院相及承旨等議之。 卽遣義禁府鎭撫韓陟, 拿德良、從直及諸辭連人以來。 傳于承政院曰: "大非一女子耳, 遠來訴冤, 其令賜米、布、鹽醬等物, 爲留京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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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6권, 예종 1년 7월 27일 무신 1/3 기사 /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박종직·이덕량·어세겸·임맹지 등을 국문하여 아뢰도록 하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이덕량(李德良)의 반인(伴人) 박종직(朴從直)이 국상(國喪)을 당하여 기생 망옥경(望玉京)과 간통하고, 또 기생 소서시(笑西施)를 불러 사통하려고 하였다. 이덕량은 박종직의 호소를 듣고 소서시와 형제인 종[奴] 막달(莫達)·말동(末同)을 때려서 상하게 하였고, 어미인 종[婢] 내은이(內隱伊)를 때려서 죽게 하였으며, 고소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임소(任所)의 관비(官婢) 소서시(笑西施)를 공신(功臣)의 구사(丘史) 봉족(奉足)으로 삼아 도무사(都務司) 임흥수(林興守) 등을 위협하고자 하였고, 소서시의 형제(兄弟)에게 관재(棺材)와 상구(喪具)를 주었으며, 또 내은이가 병사(病死)하였다고 거짓으로 하게 하여 판관(判官) 목철성(睦哲成)에게 고장(告狀)하게 하였고, 또한 소서시와 대비(大非)를 때렸다. 관찰사(觀察使) 어세겸(魚世謙)은 기생 사로화(舍露花)와 간통하고, 도사(都事) 임맹지(任孟智)는 초요경(楚腰輕)과 간통하였으니, 아울러 국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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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傳旨義禁府曰: "李德良伴人朴從直當國喪, 奸妓望玉京, 又招妓笑西施, 欲私焉。 德良聽從直之訴, 敺傷笑西施及兄奴莫達、末同, 敺殺母婢內隱伊, 而畏訴, 以任所官婢笑西施, 爲功臣丘史奉足, 欲以威脅都務司林興守等, 贈笑西施兄弟棺材喪具, 又詐成內隱伊病死告狀。 判官睦哲成, 亦敺笑西施及大非。 觀察使魚世謙奸妓舍露花, 都事任孟智奸楚腰輕, 竝鞫以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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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7권, 예종 1년 8월 16일 정묘 1/4 기사 /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사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보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정사를 보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숭원(李崇元)이 아뢰기를,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평양(平壤)의 관비(官婢) 대비(大非)의 공초(供招)에, 「저는 기녀(妓女) 함로화(含露花)가 관찰사(觀察使)의 반인(伴人)의 방 밖에 있고, 초요경(楚腰輕)이 도사(都事)의 방 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고 하였으므로, 그 간통한 자취가 이미 뚜렷한데, 함로화 등이 장(杖)을 견디고 오히려 실정을 다 말하지 않으니, 청컨대 형장(刑杖)을 가하고 다시 국문(鞫問)하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신숙주(申叔舟)를 돌아보면서 물으니,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기녀들이 만약에 다만 뵈러 온 것이라면 그 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 대비(大非)의 원한을 품은 고소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문하지 말고, 이덕량(李德良)을 속히 국문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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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御思政殿視事。 同副承旨李崇元啓: "義禁府啓: ‘平壤官婢大非供云: 「我見妓含露花, 在觀察使伴人房外, 楚腰輕在都事房內。」 其姦迹已著, 而含露花等, 忍杖猶不輸情, 請加刑更鞫。’" 上顧問申叔舟, 叔舟對曰: "妓等若但來謁, 則其罪有間。 彼大非含怨之訴, 亦不可信。" 上曰: "勿問, 速鞫李德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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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61권, 연산 12년 1월 2일 임오 7/10 기사 / 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운평에게 풍두무를 미인이 춤추듯이 가르치게 하다
전교하기를,
"운평에게 풍두무(豐頭舞)004) 를 가르치되, 초요 경무(楚腰輕舞)005) 춤추듯이 하게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