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님의 글입니다.
: 저는 집안 형제들중 유일하게 항렬을 따르지 않은 이름입니다. : 어릴적부터 김해김씨 안경공파 72대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부친대에는 O培, 형제대에는 種O, 자식대에는 O洙. : 물론 제 아들 둘도 항렬을 따라 지었습니다. : 그런데 홈페이지를 보니 세수라는 것이 있어, 보다가 어려워서 여쭙니다. : 세수에는 22세로 되어있는데, : 제 본관과 항렬을 말할때 72대로 말해야 하는지, 세수로 말해야하는지 : 궁금합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김호님! 홈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님께서는 [김해김씨 금녕군파 22세 종자 항렬로 안경공파]가 되겠습니다.
이를 풀어보면, 관향(貫鄕=本)은 김해(金海), 성씨(姓氏)는 김씨(金氏), 시조(始祖)는 가락국 수로왕(駕洛國首露王), 입중조된파(立中祖派)는 금녕군파(金寧君派), 중조(中祖)는 휘목경(諱牧卿), 세수(世數)는 중조로부터 22세(世=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순서), 지파(支派)는 안경공파(安敬公派)입니다. 안경공파를 포함한 금녕군파의 별칭으로 경파(京派)라고 하며, 종(鍾)자 항렬은 중조(中祖) 목경(牧卿)할아버지의 21세손(世孫=代孫)이고 안경공(安敬公) 영정(永貞)할아버지의 15세손이 되겠습니다.
모든 씨족(氏族)의 보첩(譜牒)기재는 시조(始祖) 또는 중조(中祖)로부터 그 후손으로 내려가면서 각 세대마다 세(世)나 대(代)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세(世)나 대(代)는 같은 뜻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순서를 의미하며 김해김씨 보첩에서는 세(世)로 표기하고 있으며, 우리 김해김씨는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 이후 유구한 세월이 지난 관계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여 구성되는 가락국(駕洛國) 왕세계(王世系)외 각파 중조(中祖)위의 세대(世代)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우리 김해김씨의 구보(舊譜)는 1754년 갑술보 및 1771년 신묘보, 1799년 기미보, 1802년 임술보 등이 있는데 이들 보첩에서 모두 시조(始祖)로부터의 세수기록(世數記錄)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위 보첩이 간행될 당시 호남지방에 시조(始祖)로부터 후손들을 연잇은 보첩이 있었는데 각 세대의 연도가 정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 보첩 등에서 부인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뒤에 이 보첩을 정덕보(正德譜)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보첩에서 선원세계(璿源世系)라고 하여 시조(始祖)로부터 각파 중조(中祖)위의 상계에 대한 기록을 참고로 싣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이러이러한 보첩이 있었다고 참고만 할 뿐이지 여기에 세수(世數)를 연이어서는 아니됩니다.
안경공파(安敬公派)는 금녕군파(金寧君派)의 지파(支派)로서 1970년대 이전에는 금녕군파에서 분파하지 않고 같이 보첩을 간행하였으나 1978년 무오보를 시작으로 안경공파 세보를 별도로 간행하고 있습니다. 중조(中祖)는 금녕군(金寧君) 휘목경(諱牧敬)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구보서문(舊譜序文)은 1754년 갑술보와 1799년 기미보 서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구보 서문을 인용함은 구보(舊譜) 전체의 내용을 인용한다는 의미이므로 세수(世數) 또한 중조(中祖)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주요 족보의 세수(世數)등에 대한 규정입니다.
1. 1754년 갑술보
一 惟我金氏肇自駕洛訖于今累千年 而世代久遠譜牒無傳 各派世系 皆中絶莫知其係何葉 故謹取東史取載 我始祖以下十餘代名諱特爲載綠於譜冊之首以存愼重之義 而各派中祖則昭穆難序 故分門各派自此始計代數 오직 우리 김씨의 시초는 가락국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여러 천년에 이르렀으며 세대 또한 오래 되어 보첩이 전해짐이 없으므로 각파에서는 모두 세계가 함께 중간에서 끊어지고 그 계통이 어느 갈래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런고로 삼가 동사(東史=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것을 취하여 실은 바이다. 우리 시조 이하로 10여대의 이름의 휘자를 특별히 보책의 첫머리에 기록하여 실은 것은 신중하게 모신다는 뜻이며 각파의 중조님의 소목의 차례로 알기가 어려운 까닭으로 갈라져 나온 문중의 각파에서는 이로부터 시작하여 대수를 계산한다.
一 湖南井邑地有一譜 自始祖以下六十餘代連繼 而此非印本公籍 又多可疑 無稽之語決非信筆不敢合錄 而年代久遠之後 或恐有眩眞之弊 故特書于此以徵後焉 호남의 정읍지방에서 족보 하나가 나왔으니 시조로부터 아래로 60여대를 연이었으나 이를 공식적인 족보에 인본(印本)하지 않았음은, 의심나는 것이 많고 상고할 수가 없는 말은 결코 믿고 쓸 것이 못되니 감히 합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대가 멀어지고 오래된 후에라도 혹시나 진실이 현혹되는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서 특별히 이렇게 기록하는 것이니 후일에 경계토록 하라.
2. 1771년 신묘보 범례(凡例)
一 惟我金氏肇自駕洛訖于今累千年 而世代久遠譜牒無傳 各派世系 皆中絶莫知其係於何葉 故謹取東史所載 我始祖以下十餘代名諱特爲載綠於譜冊之首以存愼重之義 而各派中祖以昭穆始計代數 생각해 보면 우리 김씨의 시초는 가락국으로부터 시작되어(肇) 지금까지 여러 천년에 이르렀으며 세대 또한 오래 되어 보첩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각파의 세계가 모두 함께 중간에서 끊어지고 그 계통이 어느 갈래인지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삼가 동사(東史=우리 나라 역사)에 기록된 것을 취하는 바이다. 우리 시조 이하 10여대의 이름의 휘자를 특별히 보책의 첫머리에 기록하여 싣는 것은 신중하게 모신다는 뜻이며 각파의 중조로 부터 소목을 시작하고 이로부터 대수를 계산한다.
一 湖南井邑地有一譜 自始祖以下六十餘代連繼 而此非印本公籍 又多可疑 無稽之語決非信筆不敢合錄 而年代久遠之後 或恐有眩眞之弊 故特書于此以徵後焉 호남의 정읍지방에서 족보 하나가 나왔으니 시조로부터 아래로 60여대를 연이었으나 이를 공식적인 족보에 인본(印本)하지 않았음은, 의심나는 것이 많고 상고할 수가 없는 말은 결코 믿고 쓸 것이 못되니 감히 합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대가 멀어지고 오래된 후에라도 혹시나 진실이 현혹되는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서 특별히 이렇게 기록하는 것이니 후일에 경계토록 하라.
3. 1799년 기미보
一 我金肇自駕洛흘今數千年而世代久遠譜牒舞徵世系中絶莫知其係於何葉故謹按東史所載 始祖以下十餘代名諱載綠於譜冊第一張以存愼重之義 오직 우리 김씨의 시초는 가락국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수천년에 이르렀으며 세대 또한 오래 되고 멀어서 보첩은 없어지고 세계의 기록들은 중간에 끊어져서 그 갈래가 어느 갈래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삼가 동사(東史=우리 나라 역사)를 살펴서 기록하여 실은 바이며 시조 이하 10여대의 명휘(생전과 사후 이름)를 보책의 첫장에 기록하여 실은 것은 신중하게 모신다는 뜻이다.
一.甲戌年間 湖南井邑地有一譜 自 始祖以下六十餘代連係 而此非印本 公籍又多可疑無稽之言 故甲戌譜猶不敢合錄 丙戌年間井邑人金德埰潛刊此譜 而剽竊傳會巳極荒誕序文未知誰作 以假稱以尤翁丈岩所撰尤位駭妄且閱數本互有同異決非信筆 以諸家私諜 或有妄自繼序者 故特書于此以杜後弊 갑술(영조30, 서기1754)년간에 호남 정읍지방에서 한 보책이 있으니 시조로부터 아래로 60여대의 계통이 연이어졌는데 이는 인본(印本)되지는 않았으나 의심나는 것이 많고 상고할 수가 없는 말은 결코 믿고 쓸 것이 못되니 공적인 갑술보에 감히 합록하지 않았다. 병술(영조42. 서기1766)년간에 정읍사람 김덕채가 이 족보를 표절하여 몰래 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극히 황탄한 서문을 짓고 모아서 전하였으며 가칭 우옹과 장암아 지은 바라함은 더욱이 해괴하고 허망되며 또한 몇 권책을 펴보니 서로 동이함에 있어서 결코 믿을 수 있는 기록이 아니므로 여러 가문의 가첩에서 혹시라도 이런 허망된 차례를 이어짐이 있을까 하여 특별히 여기에 기록하니 후일에 이런 폐단을 막도록 하였다.
4. 1802년 임술보
一 自鼻祖距仇衡凡十世自仇衡至長淸 盖六世以仇衡論之 至今擧成數千二百餘年 年代蒼茫世系難尋者理固 其然而今觀各派草單則或繼六七十代或至四五十世人皆聽氷世皆駭 似是井邑僞譜傳派 誤耳一依前後譜規各以中祖尊閣以爲愼重之義焉 -. 시조로부터 구형<왕>까지 10세, 구형<왕>으로부터 장청까지 대개 6세이며, 구형<왕>의 그것으로부터 헤아려 오늘에 이르기 까지 천 이백여년이 흘러 연대가 오래되고 아득하여 세계는 찾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하나 지금 보건데 각 파의 초단이 혹 6∼70대를 이었고 혹은 4∼50세에 이르고 있어, 사람들 모두 세대의 계통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氷世)을 듣고, 모두 놀라 유사함을 자세히 보니 이는 정읍의 위보가 전한 속임수요 잘못된 따름이다(것이다). 전후 보규에 의하여 각 중조로서 받듦에 있어 신중을 기하라.
一 湖南井邑有譜一本上自鼻祖下系六七十代僻土管見樂其誕自 年代之錯誤擧措之 越不足深誅後之君子庶可辨其眞 矣 -. 호남 정읍에 있는 보첩 한 책에 시조이하 6∼70여대를 어긋난 토관 같이 이어져 있어 보기에 좋을지 모르나, 그 허망한 거짓이 합쳐져 있고, 연대의 착오가 있으며, 이리 저리 모은 것이 뒤섞이어 깊이 보기에는 부족하니 후에 군자는 모두 그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라.
5. 1914년 갑인보
一 世系大統圖及分派圖若總編冠之編首自 始祖王 至侍郞公十六世以後代系遺缺各立中祖蓋舊譜例也 세대 계통의 대 통합도와 분파도는 총편의 가장 으뜸편인 수편<에 실은 것>과 같다. 시조왕으로 부터 시랑공에 이르기까지 16세 이후 세대는 계통은 잃어버리고 결함이 있어, 각 중조를 세웠으니 대개 구보의 예와 같다. 一 聯系譜自正德間始出而非印本也 古文無而今文有者何限互有同異眞 莫辨其在愼重之道不敢直系於上下系今姑 (=略)載亦所以備考焉 연계보첩은 정덕년간 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정식으로 출판되지는 아니하였다. 옛 문서는 없고 현재의 문서만 있는 것은 어쨌거나 서로 다른 점이 있고,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기 힘들어 신중하게 해야 하니 감히 상하 계통에 직계로 두지 아니하였다. 지금 조금 간략하게 기재한 것은 비고하기 위해서 이다.
6. 1965년 을사보(1954년 갑오보)
一 正德舊譜抄本則己未舊譜凡例曰甲戌年間 湖南井邑地有一譜自 始祖以下六十餘代連係此非印本公籍 又多可疑無稽之言矣故甲戌譜猶不敢合錄 丙戌年間井邑人金德埰潛刊此譜 而剽竊傳會巳極荒誕序文未知誰作 以假稱以尤翁丈岩所撰尤位駭妄且閱數本互有同異決非信筆 以諸家私諜 或有妄自繼序者 故特書于此以杜後弊也甲寅譜卽爲刊行故今此登刊以 後人博考改正焉 정덕구보 초본은, 즉 기미구보(1919)에서 말하기를 갑술년(1754)간에 호남의 정읍 땅에 하나의 보첩이 있으니, 시조이하 60여대를 연계하였으나, 이는 간행된 공식적인 책이 아니다. 또 의심스러운 점과 황당무계한 것이 많아, 갑술보는 오히려 감히 합록하지 않았다. 병술년(1766)간에 정읍사람 김덕채가 숨어서 간행한 이 보첩은, 전래된 것을 모아둔 것을 표절하여 지극히 황당무계하다. 서문도 누가 쓴 것인지 모르나, 가칭 우옹[1] 장암이 썼다고 하며, 이상스럽고 유별난 여러 선조를 놀랍도록 망령되게 썼다. 또 여러 권을 책을 열람해 보면 서로 같지 않은 점이 있으니, 결코 믿을 만한 글이 못된다. 여러 가정에서 개개인의 보첩에 간혹 망령되게 스스로 순서를 연계한 것들이 있어, 특히 이러한 사항을 글로 써 놓으니, 이후에 폐단을 막아야 할 것이다. 갑인보(1914)는 즉 간행되어 지금 이를 간행물로 등록하였으니 후세 사람을 기다려 넓게 상고하고, 바르게 고치기 바란다.
7. 1974년 갑인보(용산보)
一, 諸派之譜 因正德遺譜하야 興武王曾孫諱長淸下에 直書子雄元하야 濫稱駕洛王幾世孫하고 或踏襲其餘風하야 淆亂頗多하니 今依己未舊譜例而(金寧君諱牧卿은 在高麗忠惠王朝하고 侍中公諱琢은 恭愍王朝而按正德譜則金寧君은 自駕洛王五十一世요 侍中公은 五十七世니 是以爲難信者也라) 立中祖하야 隨其源流하야 整其昭穆하고 有其名而無實證하야 昭穆難 者는 只憑其本單하야 別立中祖하야 爲一派焉이라. 여러 파의 보첩들은 정덕보에 기인하여, 흥무왕 증손의 휘 장청 밑에, 곧바로 아들로서 웅원을 써 넣고, 함부로 칭하기를 가락왕의 몇 세손이라 하고, 혹은 그 풍속을 그대로 따라서 어지럽혀진 것이 아주 많으니, 지금 기미구보의 예에 따라서 (금녕군 휘목경은 고려 충혜왕 때 있었고, 시중공 휘탁은 공민왕 때 있었는데, 정덕보를 보면 금녕군은 가락왕으로 부터 51세요, 시중공은 57세이니, 이것은 믿기가 어렵다) 중조를 세우고, 그 원류를 쫓아서 그 소목을 정리하고, 이름은 있으나 실증할 수 없거나, 소목의 순서를 정하기 어려운 자는, 단지 본 단자에만 근거하여 별도로 중조(中祖)를 세워 하나의 파가 되게 하였다.
一, 正德譜는 正德年間編成之謂也니 舊譜凡例에 曰湖南井邑地에 有一譜하야 自始祖王以下로 至六十四世聯系爲譜하야 頗多無稽之言하고 實非公籍故로 甲戌譜時에 不取錄者是也라 丙戌年間에 井邑人金德埰 私自潛刊하야 妄稱宋尤菴先生撰序云하니 諸家譜-或多模之나 然이나 各有異同하고 不可信憑故로 今亦仍舊하야 附書於 上系之下하니 以備後日參考之資焉이라. 정덕보는 정덕연간에 편성되었다고 하니, 구보의 범례에 말하기를 호남의 정읍땅에 하나의 보첩이 있어, 시조왕으로부터 그 이하로 64세에 이르기 까지 연계하여 보첩을 만들어, 이해하지 못할 말이 많고 실제로 공인된 책이 아니므로 갑술보를 만들 때, 이를 취록하지 않았다. 병술년(1776)간에 정읍인 김덕채가 자신이 스스로 몰래 간행하여, 망령되게 칭하기를 송우암 선생(송시열)이 서문을 찬했다고 말하니, 여러 가문의 보첩에서 간혹 많이 모방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고 신빙하기에 불가하므로, 이번에도 역시 거듭하여 구보를 상계의 아래에 첨부하여 써넣으니, 후일에 참고를 위한 자료로서 준비하였다.
최근 대동세보인 2001년 신사보의 항렬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金寧君諱牧卿派(京派) (自金寧君二十世로起顯字) 20세顯 , 21세 培, 22세鍾 , 23세 泰洙, 24세榮 , 25세 謙燮, 26세在載 , 27세 鎭, 28세浩 , 29세 根, 30세性炳 , 31세 用坤, 32세錫鎬 , 33세 淳, 34세東 , 35세 煥烈, 36세重 , 37세 鎔善, 38세洛 , 39세 相, 40세炯炳 , 41세 基奎
따라서 [김해김씨 72세(71세손=71대손)]이라 함은 적절하지 않으며, [김해김씨 금녕군파 22세 종자 항렬로 안경공파]라 함이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http://kimheakim.com.n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