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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 뜻을 아는 것과 거기 작용하는 신성한 섭리
시험과 고난 등의 절박한 상황에서는
주님 뜻을 살필 겨를도 없이 오직
내 뜻, 내 요구 들어주시기만을 주께 간구하기 쉽다.
위급함을 틈타 그 상황을 과장하며 달려드는 악한 영들의 공격으로
마음이 사뭇 흔들리며 흥분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주님 뜻은 철벽과도 같은 것에 가로막히고
오직 그 상황을 피하고픈 생각으로 구원을 애타게 부르짖게 된다.
그러한 경우의 내 뜻은 크게 해가 될 수 있다.
거기 무엇으로도 떼어낼 수 없는 강한 집착이 일어나
내 뜻은 이미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 필요한 기도가
바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지만
위축된 마음으로 인해 망설일 틈도 없이 단번에 거부당해 버린다.
자신이 겪는 힘든 상황 앞에
그것을 허락하신 주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를 원하는 이유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불평하는 마음에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을 초래한 원인을 찾아 바로잡음으로
주님 뜻에 순응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때 그는 그 뜻을 알게 해달라고 주께 기도하다가
간혹 응답을 받았다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결과 역시
인간에게서 비롯된 주관적 경험에 속한 것이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을 도모하시는 주님 뜻에 비한다면
충분히 다르거나 틀릴 수 있다.
그래서 그 판단이 모호할 경우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라는
조건을 내 뜻 앞에 붙여 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또 내 뜻을 처음부터 주님 뜻에 일치하는 것으로
구하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 뜻은 이미 구하는 것에 드러나 있어 명확히 알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주님 뜻은 확인된 내 뜻에 일치하거나,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전연 상관없는 것으로 추측할 수만 있는 정도여서
그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주님의 뜻을 알고 그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과의 직접 교통이나 그분의 임재에 의한 신비적 체험 등을
수단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는 그런 방식의 기도 응답이
흔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꺼리 앞에
주님의 구체적이고 선명한 응답을 받기 위해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 등의 신비적 체험으로
인도하심의 확신을 얻고자 애쓰지만
그 성경 속 그러한 응답의 방식은
그 당시 사람들의 영적 상태에 맞춰진 기록들이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성경에 기록된 그 기적들에 담긴 말씀 본래의 순수한 빛,
곧 그 말씀의 내적 진리를
상응을 통해 인간의 자연적 이해성이 수용할 수 있는
지식 차원으로 낮추어 기억의 창고에 수집되도록 해주심과 동시에
주님은 그가 시각과 청각을 통해 외부에서 수집한 지식 위에
천국의 빛을 비춰주심으로
그의 영이 그 빛으로 깨우침을 얻게 하시는 방식으로
과거 기적의 효과를 대신하게 하셨다.
따라서 이제는 주님의 뜻을 알고 음성을 듣는 일은
신비스러운 체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의 내면을 밝히는 순수 진리의 깨달음을 통해
그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 깨달음의 빛은
저마다 이해하고 있는 성경 말씀이나
아니면 자신의 양심이 옳거나 선하다고 판단하는 진리를 토대로
그 위에 진리의 빛을 비추이기에
주님의 뜻을 알고 음성을 듣기 원하는 자는
그의 지성(intelligence)으로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참고 순정기독교 11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 유입을 받고
그리하여 자연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계시를 통해서다. 계시의 왕관은 말씀이다.
‘..계시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에 따른 인식이 불가능하다.
또한 주님에 대한 지식과 그에 따른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육체로 거하심"을 인식하는 것도
계시의 왕관인 말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다가가 유입을 받고
그리하여 자연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계시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천비 8780
사람이 내적으로 받는 계시(revelation)는
들리는 음성으로 주어지지 않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이해, 곧 내적 시각의 깨달음(조요 照耀, enlightenment)을
통해 주어진다.
계시(revelation)는 신성한 진리를 통한 신성의 유입이다.
‘.. 여기서의 계시는
내적인 의미에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계시,
즉 주님께서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을 때의
그 계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들리는 음성으로 주어지지 않고
사람이 내적으로 받는 계시를 의미한다.
이 계시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이해, 곧 내적 시각의
깨달음(조요 照耀, enlightenment)을 통해 주어진다.
그 깨달음은 그곳의 태양이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천국의 빛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빛은 마치 세상의 태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에 의해
눈의 외적 시각이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를 깨우친다.
이해가 그 신성한 빛에 의해 깨닫게 될 때
그것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지각하고,
스스로 그것을 내적으로 인정하며, 마치 그것을 보듯 한다.
이것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말씀을 읽을 때 받는 계시와 같은 것이다.
천비 5121
선과 선에서 온 진리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 사람들은
실제로 계시를 받을 수는 있지만
지각에서 비롯된 계시는 받을 수 없고
오직 그들 자신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통해 오는 계시, 즉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해 그들에게 오는 계시를 받을 수 있다.
(전자가 내적 계시라면 후자는 외적 계시다.)
‘지각(perception)에서 비롯된 계시가 있고
주님께서 천사에게 말씀하신 것으로부터 오는 계시가 있다.
선과 진리에 의해 통치되는 사람들, 특히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선에 의해 통치되는 사람들은
지각에서 비롯된 계시를 받는다.
그러나 선과 선에서 온 진리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 사람들은
실제로 계시를 받을 수는 있지만
지각에서 비롯된 계시는 받을 수 없고
오직 그들 자신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통해 오는 계시,
즉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을 통해 그들에게 오는 계시를 받을 수 있다.
이 계시는 외적 계시이지만
그러나 전자 즉 지각에서 비롯된 계시는 내적 계시이다.
천사들 특히 천적 천사들은 지각을 통해 계시를 받는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이나 고대 교회 사람들 중 얼마는
그런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계시를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선에 의한 통치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사람들이 천사와의 대화에서
지각과 관련 없는 계시를 받았고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도 계시를 받은 사람이 매우 많다.
유대교회의 예언자들의 계시는 대부분 이런 유형의 계시였다.
그들은 음성을 들었고 환상을 보았고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계시는 그 계시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지각이 없는
단순한 언어적, 시각적 계시였다.
왜냐하면 참된 지각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와서 지성에 영적인 영향을 주며
지성이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사물의 본질을 따라 생각하고
내적으로 인식하도록 인도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힘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게 우리 인간이다.
우리의 지성은 참된 지각이 자기 안에서 시작하여
자기 안에 존재하는 상호 연결된 관념에서 나온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사실 그 힘은
자연과 감각을 넘어서는 것들에 관하여,
즉 영적 세계 또는 천국에 속한 것들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사람 생각의 내면으로 흘러들어온 내적 처방(dictate)이다..’
천비 2535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계시에는
마음의 지각이나 생각에 흘러드는 유입과 비슷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 내면의 확실한 열림을 만든다.
‘.. 기도는 내적인 의미로 ‘계시되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기도는 기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그의 내적 시선(view, 바라봄)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계시에는
마음의 지각이나 생각에 흘러드는 유입과 비슷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 내면의 확실한 열림을 만든다.
기도가 사랑이나 신앙에서 비롯되고 그 목적이 영적인 것이라면
그 기도에는 계시와 같은 어떤 것이 있게 된다.
그때 기도하는 사람의 애정에는 계시와 같은 것이
소망과 위로, 또는 어떤 내적 기쁨의 형태로 뚜렷이 나타난다.’)
(FC Oetinger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달음(조요照耀, enlightenment)이 곧 오늘날의 표적이다.
‘.. 오늘날 주어지는 표적은 깨달음이 될 것이고,
그로인해 새 교회의 진리에 대한 시인과 수용이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깨달음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표적 그 이상의 것이다.
하지만 어떤 표적은 아마도 여전히 주어질 것이다..’
(..Among some it will also be an enlightenment that speaks,
and that is more than a sign.
But perhaps some sign will still be given.))
(천비 7012
표적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확증을 뜻한다.
‘.. 성언을 연구, 공부하는 자들의 깨달음은
삶의 상태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것으로 이적(signs)을 행하라”
이 말씀은 결과적으로
진리들에 대한 ‘깨달음’과 ‘확증’을 뜻한다.
이는 진리들에 대한 확증을 가리키는 이적의 뜻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진리들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확증은
사람이 진리들을 알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성언을 열심히 연구할 때 주님에게서 비롯된 깨우치심에 의해
진리들에 대한 확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외적인 것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내적인 것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읽을 때는
그들은 깨우침을 받아 계발되고
그들의 깨우침 안에서 진리들을 본다.
그리고 그 뒤 그들은 그런 상태에서 더욱 진리들을 확증한다.
말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그들 모두는 자신의 진리에 대한 애정만큼 깨우침을 갖는다.’)
(천국과 지옥에서
254
유입과 구술의 차이..
성경말씀을 받아 전한 선지자들에게
주께서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셨는지도 나는 알게 되었다.
주는 선지자들에게는 고대인들에게처럼
내면 안으로 유입하는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영들을 보내셨다.
주님은 그 영들을 당신의 모습으로 가득 채우심으로써
말씀을 불어넣으셨고,
그들은 선지자들에게 그 말씀을 그대로 불러주었다.
그것은 유입이 아니라 구술(口述, 받아쓰기)이었다.
그 말씀들은 직접 주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한 마디 한 마디가 신성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내적인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은 말씀을 천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사람은 자연적 의미로 이해한다.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천국과 세상을 결합시키시는 것이다.
또 나는 어떻게 영들이 주의 모습을 통해
주의 신성으로 가득 차게 되는가를 알게 되었다.
어떤 영이 주의 신성으로 가득 차면
그 영은 자기가 주님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말할 때는 신성이 말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현상은 그가 전할 말을 다 마칠 때까지 지속된다.
임무가 끝나면 그는 자기가 영임을 느끼고 인식하며,
자기가 한 말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전한 영들의 상태도 이와 같았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했으며
심지어 자기들을 가리켜 여호와라 하기도 했다.
이는 성경의 선지서와 역사서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말씀에 관하여 13
사람들은 영과 천사와 대화를 통해 직접적인 계시를 받으면
더욱 깨달음을 얻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은 내적 경로로 이루어지지만
직접 계시를 통한 깨달음은 외적 경로로 이루어진다.
‘.. 사람들은 영과 천사와 대화를 통해
직접적인 계시를 받으면 더욱 깨달음을 얻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은 내적 경로로 이루어지지만
직접 계시를 통한 깨달음은 외적 경로로 이루어진다.
내적 경로는 의지를 통해 지성으로(이해로) 가는 것이고,
외적 경로는 청각을 통해 지성으로 가는 것이다.
사람은 그의 의지가 선에 있는 한
말씀을 통해 주님에 의해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의지가 악에 있더라도
그는 청각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깨닫게 될 수 있다.
악에 지배되는 사람의 지성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으며,
기억 속에만 있고 그의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의 외부에 있고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적어도 죽음 이후에 조금씩 사라지거나 더 일찍 사라진다.
악에 지배되는 의지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질식시키거나,
그것을 위조하고 더럽히기 때문이다..’)
(계시록 해설 1177
성경 말씀에 주어진 것 외에 직접 계시는 없다.
주님은 오직 사람이 듣고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을 통해서만 가르치신다.
그의 삶에서 나오는 그의 의지의 사랑에 따라
그리고 그가 지식을 통해 얻는 그의 이해의 빛에 따라
말씀에 의해 가르치신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직접(immediately) 가르치지 아니하시고,
사람 안에 있는 청각과 시각에서 비롯된 것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가르치신다.
(주님은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이 듣고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을 통해서만 가르치신다.)
여기에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은
말씀에 주어진 것, 즉 선지자와 복음서 기자와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들어 있는 계시 외에는
직접 계시(immediate revelation)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의 사랑의 애정과 그의 이해의 결과인 생각에 따라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은 아주 적게 받지만
선한 삶을 사는 자들은 많이 받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님의 깨우치심을 통해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 천국을 통해 주님에 의한 깨우침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태양으로 나아가는 신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주님께서 교회의 사람을
그의 삶에서 나오는 그의 의지의 사랑에 따라,
그리고 그가 지식을 통해 얻는 그의 이해의 빛에 따라 말씀에 의해
간접적으로 가르치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신성한 유입의 질서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는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다.)
(주께서 직접 가르치지 않고
천국을 통하여 흘러드는 신성한 진리에 의해,
즉 인간이 시각과 청각을 수단으로 받아들인 기억의 지식 위에
신성한 진리에서 나오는 천국의 빛을 비춤으로
결국 사람의 생각을 통해 깨달음을 주시는 방법에 의해
간접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천비 4096
인간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을 가지지 못하고
외부 경로를 수단으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온 지식 속에서만
진리가 우리에게 보이게 된다.
‘.. 이 세상에 사는 오늘의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을 가지지 못하고
마치 구름 속 물방울에서 반사된 햇빛이 무지개를 만드는 것처럼
외부 경로를 수단으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온 지식 속에서만
진리가 우리에게 보이게 됨을 유의해야 한다..’)
(그 지식 위에 천국의 빛이 비춰져야
비로소 그 속에 진리가 보인다.)
(천비 9723
내적 시각, 즉 이해의 시각은
천국에서 온 빛을 사용하여 자기 아래에 있는 기억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자신의 사랑에 적합한 것을 골라서 끌어내어
자신의 기억, 즉 내부 기억에 저장한다.
기억의 지식들은
속사람의 시각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속사람은 겉 사람에게서 그 자신의 사랑에
상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 ‘감각적 경험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은
일종의 저장소로서 자연적인 것 안에 자리를 잡는데
이 저장소가 바로 기억이다.
그 기억 안의 기쁨, 즐거움, 욕망은
의지에 속하며 자연적인 선이라고 불리고
기억 안의 지식은
이해에 속하며 자연적인 진리라고 불린다..’(천비 4038)
‘.. 기억 속의 지식들은 듣고 보고 읽음으로써 흡수되어
외적 기억 즉 자연적 기억에 저장된다.
이 지식들은 내적 시각, 즉 이해의 시각에 도움이 되며
그 대상은 지식들 전체에 걸쳐서이고
이로부터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꺼낼 수 있다.
왜냐하면 내적 시각 즉 이해의 시각은
천국에서 온 빛을 사용하여
이 영역, 즉 자기 아래에 있는 이 기억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자신의 사랑에 적합한 것을 골라서 끌어내어
자신의 기억, 즉 내부 기억에 저장하기 때문이다.
이 내부 기억에서 속사람의 삶과 지성과 지혜가 나온다.
영적 지성과 지혜에 속하는 것들도,
즉 신앙과 사랑에 속한 것들도 마찬가지다.
기억의 지식,
즉 말씀이나 교회의 교리에서 나온 기억의 지식은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이라고 불리며
이러한 영적 지성과 지혜에 속한 것들을
속사람에게 심어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도움이 된다.
이러한 기억 속의 지식이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되면
속사람은 그것을 천국의 빛 안에서 보고 그 빛에서 자신의 사랑에
맞는 것들을 선택하고 끌어내어 내적 기억에 저장한다.
따라서 기억의 지식들은
속사람의 시각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속사람은 겉 사람에게서 그 자신의 사랑에
상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루스목사 요한복음 서문에서
천사들은 상응에 의해
인간의 기억이라는 저장소에서 발견하는 언어로
자신들의 생각에 옷을 입힘으로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
‘.. 천사들의 말은
자연계의 대기를 통해 전달될 수 없고
따라서 외적인 방법으로 해서 인간에게 올 수 없다.
천사들은 상응에 의한 내적인 방법으로 사람들과 말한다.
천사들은 상응에 의해
인간의 기억이라는 저장소에서 발견하는 언어로
자신들의 생각에 옷을 입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각 사람과 그들의 언어로 말한다..’)
(천비 5893
진리에 대한 애정을 통해 뿌리를 내린 신앙의 진리는
천사들이 일하는 평면(plane)이다.
천사들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유입되는 빛줄기처럼 보이는데
그 빛은 선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진리로 구성되어 있어
사람의 마음을 거짓 위로 올려 악으로부터 보호한다.
‘.. 진리에 대한 애정을 통해 뿌리를 내린 신앙의 진리는
천사들이 일하는 평면(plane)이다.
그러므로 이런 평면을 갖지 못한 자들은
천사들에게 인도될 수 없고
지옥의 인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 또한 천사들이 사람에게 존재하는 신앙의 진리 안으로 작용할 때,
천사들이 작용하는 진리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명확한 경우는 거의 없고
다만 그 진리와 상응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과
그에 따른 애정이 생겨난다는 점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천사들에 의한 작용이 그러한 이유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유입을 통해 이루어지며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유입되는 빛줄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빛은 선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진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의 특정한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그 진리와 그 진리에 속한 사랑을 보호한다.
이것이 천사들이 사람의 마음을
거짓 위로 올려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식이다.’
천비 4096
말씀 속 영적 진리에 대한 이해는
기억의 지식 안에서 기쁨을 지각하는 마음에게만 주어지고
사랑과 인애에 속한 선의 유입은
그의 지식 외에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에도 흘러들지 않는다.
‘..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진리에 대한 이해는
오직 가르침을 받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 기억의 지식 안에서
기쁨을 지각하는 마음에게만 주어질 수 있고
또한 사랑과 인애에 속한 선은
주님에게서 사람과 함께 하는 천사들을 통하여 흘러들지만
그의 지식 외에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에도 흘러들지 않는다.’)
- - - - -
그러나 중대한 문제꺼리 앞에서,
더구나 시험이나 고난과 같은 특별한 상황 속에서
양심을 통해, 또는 적절한 말씀을 적용하여 주님 뜻을 찾는 것은
실로 어렵기만 하다.
내면으로부터 오는 주님의 깨우침 역시
가시적인 빛 속에서 사물을 선명히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만큼 주님 뜻이 모호하다는 말이다.
무한한 지혜로 섭리하시는 주님 뜻은
다만 그 목적이 전체적으로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고백할 수 있을 뿐 정작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영혼 구원이라는 하나의 최종 목적을 가진 주님 뜻은
벌어진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영적 역량에 따라 준비된
중간 목적과 경로들을 그 안에 가지고 운용될 정도로 광범위 하여
그것이 몇몇으로 한정된 인간의 외골수 뜻에 일치하는지
감히 그 둘을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시험과 고난 중에 있는 자는
자신의 고통스런 시험이 도대체 언제나 끝나는지,
어느 정도까지 가야 시험의 목적이 달성되는지
주님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깜깜한 상황에서
일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님께 아뢸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 흥분이 차츰 가라앉으면
한편으로 그것이 유익한지를 나는 모르지만
내가 신뢰하는 주님은 아신다는 믿음으로 자기가 구하는 바를
들어주실 지의 결정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주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구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마음 속 이 든든한 신뢰와 믿음이야말로
주님 뜻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신의 뜻보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는 주된 이유가 된다.
지속되는 삶의 여러 어려움들 앞에
그때그때마다 거기 담긴 주님의 뜻을 확실히 보고 간다면
더욱 힘을 내어 주님과 동행하며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를 주께 기도해보지만
응답으로 주어지는 선명한 빛 같은 것은 없고
어두운 길을 그저 믿음으로 지탱하며 힘겹게 나아가야 하니
이런 신앙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럼에도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뜻을 확실히 보면서
그 길을 가기 원하는 것은
주님 홀로 은밀히 행하시는 신성한 섭리를
인간의 눈으로 하나하나 확실히 보고 확인하며
안전한 길만을 골라 걸음을 옮기려는 것과 같다.
저서 ‘하나님의 섭리’에서
인간은 신성한 섭리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그것을 분명히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즉 신성한 섭리에 의해 일하시는
주님 뜻과 그 진행과정이나 결과를 인간이 보는 것은
일이 이루어진 후에나 가능하거나
내적 시력이 갖추어진 영적 상태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신성한 섭리의 역사가 인간의 지각이나 감각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그것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고도 가르친다.
신성한 섭리의 역사는
인간이 그 계속적인 진행을 미리 확정적으로
보고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주께서 뜻하시는 바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하는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때로는 주께서 기도하는 자를 깨우치시려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약간의 빛을 비춰주기도 하시지만
그 빛은 인간이 전적으로 그것에만 의존할 정도로 선명하지는 않고
단지 자신의 지성을 적극 활용하여 합리적으로 분석, 판단한 결과
어쩌면 이것이 주님 뜻이 아닐까 하는 추측 정도만
가능케 할 수 있는 빛일 뿐이다.
신성한 섭리에 속한 주님의 역사를 확연히 보고 아는 것은
천사나 가능한 것임에도 기도하면 당연히
어떤 확실한 응답이 주어져 보게 되고
반대로 그러한 것을 보지 못하면 기도가 불충분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주님의 역사는 그렇게 획일적으로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님은 각자의 영적 상태에 따라 거기 알맞은 응답을 주시지만
구체적으로 선명한 응답을 보여주지는 않으신다.
따라서 자신이 받은 기도 응답으로
이것이 주님 뜻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실제로는 주님 뜻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 크게 당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님은 인간이 기도 응답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한 이성과 의지를 사용하여
주님 뜻의 모호한 부분을 다시 살피게 하시는 것이
보편적으로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기도응답으로 주님의 뜻을 아는 것과 관련하여
거기 역사하는 ‘신성한 섭리에 관한 글’ 중
일부를 요약해보자면..
<만일 인간이 주님의 신성한 섭리의 역사에 대해
그 진행 과정과 결과를 미리 알거나 구체적으로 명확히 본다면,
다시 말해 인간이 신성한 섭리의 역사를
확정적으로 미리 알거나 분명히 지각하고 느낀다면
우리가 의도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되어 이성과 의지가 마비되거나
또 그 질서 있는 진행 과정에 스스로 개입하여
그것을 왜곡하고 파괴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든지 자신을 하나님이 되게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신성한 섭리에 의한 역사가
어찌 전개될 것인지 미리 알게 되면 어차피 섭리대로 될 것이기에
그의 의지와 이성은 이미 확정되어버린 결과에 얽매어
자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성한 섭리에 속한 주님의 역사는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볼 수 없고 이루어진 후에나 볼 수 있으며
또 인간이 물체를 자연적 빛 속에서 보듯
그것을 아주 선명히 볼 수는 없고
다만 그의 내적 시력으로 볼 때 그것은 틀림없는 주님의 역사였다고
주관적인 생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도로만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이 그때 신성한 섭리에 속한 주님의 역사를
미리 그리고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면,
다시 말해 그 시험과 고난이 어떻게 진행되며 또 어떤 귀결로
끝나게 될 지를 생생하게 보고 알게 된다면
그의 이성과 의지는 활동을 멈추고
막연히 그 뜻에 인도받으려고만 하게 되거나
아니면 유전 악을 가지고 태어난 성격의 악함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분의 역사를 간섭, 방해하려 들 것이다.>
(아래 참고로 옮긴 하나님의 섭리 글 참조)
- - - - -
인간은 주님의 역사를 미리 자신의 눈으로 확실히 보고
감각으로 만지면 잘 따라가리라 여기지만
이는 영혼이 그렇게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고로 주님은 인간이 자연적 시각으로 보듯
주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명확히 보게 하지 않으시고
희미하게 겉의 윤곽 정도만 보게 하시며
대신 내적 시각으로 보게 하시는데
주님이 내면으로 깨우쳐주시는 빛을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큼만 볼 수 있고
그래도 흐릿할 경우 자신의 이성을 토대로 추측해볼 수 있을 뿐
그것을 확연히 보고 느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는 이성의 분석과 판단에 의해
이것은 틀림없는 주님의 역사라고 결론 내릴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관적 생각 속의 일이기에 틀릴 수 있다.
시험과 고난 등의 문제 꺼리 앞에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 응답을 구체적으로 확실한 빛 속에서 보기를 원할 때도
신성한 섭리에 의한 역사의 경우와 마찬가지인 것은
주님 뜻과 그 응답이 구체적이고 확정적인 것이 될수록
그들은 신성한 섭리에 속하게 되어
주님만이 은밀히 행하시는 신성한 섭리의 경우에서처럼
이미 확정된 결과로 인해, 다시 말해 이미 정해진
결과와 진행과정 등을 미리 보고 아는 것으로 인해
인간의 자유가 제한되기에 주님은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
물론 주님 뜻과 그 응답의 경우
단순히 그것을 외부에서 들어온 지식의 빛을 통해 아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의 합리성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받아들인 것이기에
인간의 자유가 그것으로 제한되지도 않고
또 일단 확정되었더라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주님 뜻과 그 응답을 보고 듣는 것이
기도하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응답이 오는 식의
단순한 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여러 사정들이 담겨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험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목적이
크게는 영혼 구원에 있지만 작게 더 세분해서 말하자면
그의 영적 성숙을 위해 어떤 특별한 훈련들을 수행하는 것,
즉 그 당시 그의 영적 상태에 필요한 선과 진리들을 얻기 위해
그가 습득해온 여러 유형의 악과 거짓들을 내다버리거나
또 그러한 목적을 단번에 이를 수 없으니
계속되는 여러 문제 꺼리들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반복함으로
조금씩 영적 힘을 길러나가게 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이처럼 시험과 고난은 그때그때마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목적들을 수행하기 위해 찾아오기 때문에
그 목적이 무엇인지, 주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힘들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알고 은밀히 수행하시는 그분의 뜻은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신성한 섭리에 속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미리 구체적으로 알려질 수 없고
다만 흐릿하게 그 윤곽정도만 보게 하시어 나머지는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찾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인간이 구하는 것 이상으로 공급해주시는 주께서
신앙의 여러 방면에 이러한 제한을 두시는 것도 유사한 이유에서인데
자신의 영적 상태보다 월등히 높은 천국의 빛을 보거나
진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선명히 보면 잘 따를 것 같은 생각에
자꾸 그 세계 더 깊은 곳을 탐색하기를 원하지만
그런 노력이 오히려 부작용만 심하게 만들기에
주님은 그를 위해 그의 영적 상태에 맞춰 빛을 조절해주시거나
어느 한계 이상으로 진입하는 것을 미리 경고해주신다.
또 만나를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고
또 거둔 것은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 세계 더 깊이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감당할만한 영적 힘을 먼저 키워야 할 것이다.
선이 준비되면 주님은 진리의 빛을 더 열어 보게 해주실 것이다.
신성한 섭리에 속한 아버지의 뜻을 미리 아는 것에 있어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의 경우는 달랐다.
주님은 이미 어려서부터 신성한 섭리에 속한 아버지의 뜻을
구체적으로 잘 알고 계시면서
삶 속에 그 뜻을 그대로 실행하며 사셨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의 삶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을 배워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 과정 중에 지옥의 세력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시험을 당하셨지만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분의 속이 신성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신성으로부터 오는 유입을 받는데 막힘이 없으셨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데
전혀 거침이 없으셨다.
수많은 시험과 고난을 통해 영화를 거의 이루신 만큼
주님은 이제 마지막 시험으로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고난의 잔을
마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을 아시고
그 전투를 치르기 위해 겟세마네에 이르셨다.
거기서 주님은 다만 모든 지옥의 공격을 받고 계신 상황에서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이 잠시 흔들리셨다.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하나? 마시지 말아야 하나?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나?
이와 같은 상황이 우리 인간의 삶에서도 가끔 등장한다.
그러나 이 경우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은
겉으로만 보면 흑과 백으로 뚜렷이 갈라져 있어
적어도 그것을 아는 일이 상대적으로 그리 모호하지는 않다.
마음을 심하게 압박하는 상황 앞에선 인간은
주님 뜻과 전혀 상반된 것을 내 뜻으로 구하기 쉽다.
그럴 때 그가 구하는 것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의 양심이나 합리성 등으로부터 은밀히 지적받게 되고
그때부터 주님 뜻과 내 뜻이 서로 격렬히 다투게 된다.
이런 경우의 주님 뜻은 내 뜻 반대편에 있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고
게다가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인해 선택의 방향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은밀한 섭리를 미리 확정적으로 보는 경우라고 보기 힘들다.
또 인간이 당하는 대부분의 시험과 고난의 성격은
흑과 백의 결정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해
대체로 거기 두어진 주님 뜻을 명확히 알기가 힘들다.
그러나 주님의 뜻과 응답으로 주어지는 계시가
인간이 확정적으로 알아서는 안 될
주님만의 은밀한 신성한 섭리에 속한 것이 아닐 경우,
다시 말해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라면
주님은 우리의 영적 시각으로
그것을 밝은 빛 가운데서 보게 하실 것이다.
이와 관련된 주제로 다음 글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진리의 입류와
그 빛으로 인한 인간의 깨달음에 대해 정리해보겠다.
(참고 / 천비
5264
섭리의 모든 행위는
그 안에 영원하고 무한한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신성하다.
하나님, 즉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섭리를 이룬다.
섭리의 모든 행위는
그 안에 영원하고 무한한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신성하다.
섭리의 진행에 있어서 그것이 영원한 이유는
어떤 시작이나 끝에 의해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며
또 그것이 무한한 이유는 어떤 특정 부분 안에서 전체를,
또 전체 안에서 모든 특정 부분을 동시에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섭리"라고 부르는데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그러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행하심은 "섭리" 이외의 다른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 있다.
3854
주님의 예견과 섭리는
인간과 관련된 가장 작은 개별적인 것들 중 가장 미세한 것,
즉 어떤 생각으로도 그 수억 중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미세한 것 안에 존재한다.
.. 일반적으로 예견(foresight, 예지)과 섭리(providence)에 관련하여
예견은 인간과 더 관련이 있고 섭리는 주님과 더 관련이 있다.
주님은 인류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악이 항상 증가하여 마침내 인간이 스스로
지옥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것을 영원부터 예견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옥에서 돌이켜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섭리로 인간을 항상 돌이키고 인도하신다.
주님께서는 또한 자유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선은
악과 유혹의 첫 징후에도 쫓겨나기 때문에
자유를 제외하고는 어떤 선도 인간에게 뿌리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견하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즉 자신의 자유로
가장 깊은 지옥으로 기울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셨고
이를 대비해 주님께서는 그가 자유로 천국에 이끌리기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 보다 온화한 지옥으로라도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예비하셨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유로 선을 향하도록 자신을 허용한다면
그는 천국으로 인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찰로부터 우리는 예견이 무엇이고, 섭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견된 일에 대해 적절한 대비가 마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인간의 가장 작은 개별적인(individual) 것은
주께서 예견하지 못하셨거나 보지 못하신다고 믿는 사람,
또는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는
주께서 예견하거나 인도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사람은
크게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주님의 예견과 섭리는
인간과 관련된 가장 작은 개별적인 것들 중 가장 미세한 것,
즉 어떤 생각으로도 그 수억 중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미세한 것 안에 존재한다.
이는 한 사람의 삶의 아주 작은 순간 하나하나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결과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삶의 매 순간은
뒤따르는 일들의 새로운 시작과 같으며
따라서 그의 이해와 의지 모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의 미래, 심지어 영원까지 어떻게 될지
영원으로부터 예견하셨기 때문에
가장 작은 개별적인 것들에까지 섭리가 존재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그를 다스리고 그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방향을 전환하게 하시며
이것은 끊임없이 그의 자유를
재형성(reshape)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8478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들에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러한 상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흐름 속에 있어
내일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염려하지는 않는다.
출 16: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이 말씀의 의미는 그들이 스스로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만나가 매일 아침 그들에게 주어졌고
남은 것에서 벌레가 번식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즉, 주님께서 사람들의 필요를 매일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이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 6:25-34
“..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어찌하여 너희는 옷을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염려는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이 구절과 그 뒤에 오는 구절은
내적 의미에서 내일에 대한 염려를 언급하는데
이 염려는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죄되기도 했다.
금지된 것은 그들이 아침까지
만나를 남기지 말라고 말한 것을 의미하며,
정죄된 것은 그들이 남긴 모든 것에
벌레가 번식하고 부패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를 문자적 의미 너머에서 보지 않는 사람은
내일에 대한 모든 염려를 버려야 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매일
하늘에서 필요한 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자의 의미보다 더 깊이 문제를 살펴보는 사람,
예를 들어 내적 의미에서 살펴보는 사람은
내일에 대한 염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음식과 의복, 그리고 미래를 위해
부(富)를 조달하는 식의 염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든 자신과 부양가족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질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을 염려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며
세상적이고 지상적인 것들만 생각하고 하늘의 것들은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다.
보편적으로 그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욕망은 불타오르고 점점 더 자라
결국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커진다.
그들은 원하는 대상을 얻지 못하면 슬퍼하고
그것을 잃으면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분노 때문에
위로를 받지 못하며
모든 신앙과 더불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저주한다.
이런 자들이 내일을 염려하는 자들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내일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염려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내일을
걱정은커녕 고민거리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Very different is the case with those who trust in the Divine.
These, notwithstanding they have care for the morrow,
still have it not, because they do not think of the morrow
with solicitude, still less with anxiety.)
그들은 원하는 것을 실현하든 실현하지 못하든
침착함을 유지하며 잃어버리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
그들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들은 부에 마음을 두지 않고
명예로운 지위에 오르더라도 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가난해지더라도 슬퍼하지 않고
그들의 처지가 비참하더라도 그들은 낙담하지 않는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들에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러한 상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하나님의 섭리는 보편적이라는 것,
즉 가장 사소한 일(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섭리의 흐름 속에 있는 자들은
수단이 어떠하든 끊임없이 더 행복한 것들을 향해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주님에게 돌리는 자들은 섭리의 흐름 속에 있으며,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는 자들은
섭리의 흐름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반대편에 있어
하나님에게서 섭리를 빼앗아 자기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든지 섭리의 흐름 속에 있는 한
그는 평화의 상태에 있다는 것과
또한 누구든지 신앙의 선으로 인해 평화의 상태에 있는 한
그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만이 주님의 신성한 섭리가 모든 것에,
실제로 모든 것의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는 것과
신성한 섭리는 영원한 것을 고려한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섭리에 대한 언급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통찰력에 돌리기 때문이고
그들이 통찰력에 돌리지 않는 것은
행운이나 우연에 돌리고 어떤 것은 운명에 돌리는데,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에게서 끌어내지 않고 자연에서 끌어낸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이나 자연에
돌리지 않는 사람들을 단순하다고 부른다.
이 모든 것에서 다시 한 번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특성과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참고 / 하나님의 섭리
1
신성한 섭리는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에 속한 통치 형태다.
175
신성한 섭리의 역사는 인간의 지각(perceptions)이나
감각(senses)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신성한 섭리의 법칙이다..
자연인은 아무것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에 돌린다.
아무것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사람은
신성한 섭리에도 아무 것도 돌리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과 신성한 섭리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이와는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생각한다.
비록 그는 신성한 섭리가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생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을 알고 인정한다..
1 만일 사람이 신성한 섭리의 역사를 분명히 지각하고 느끼게 되면
그는 이성 따라 자유로부터 행치 않을 것이요,
그 어떠한 것도 그에게는
그 자신으로부터 있는 듯 보이지 않을 것이며
그가 사건을 미리 알아도 이와 같이 될 것이다.
2 만일 사람이 신성한 섭리를 분명하게 본다면
그는 그 질서 있는 진행 과정에 스스로 개입하여
그것을 왜곡하고 파괴할 것이다.
3 만일 사람이 신성한 섭리를 분명히 본다면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든지 자신을 하나님이 되게 할 것이다.
4 사람에게는 신성한 섭리가
앞에서는 볼 수 없으나 뒤에서는 볼 수 있고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볼 수 없으나 영적인 상태에서는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176
만일 인간이 신성한 섭리의 역사를 분명히 지각하고 느낀다면
그는 자신의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것도 그에게 자신의 행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사건을 미리 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77
만일 사람이 신성한 섭리의 역사하심을
분명히 지각하고 느끼게 되면 이러한 것과
그리고 그 밖의 많은 해로운 결과가 잇따라 일어날 것이다.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사람이 악에서 물러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신다.
만일 이 끊임없는 섭리를 사람이 분명히 지각하고 느끼면서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그는 늘 신성한 섭리에 항거할 것이며
이 경우 그는 하나님과 겨루든지
아니면 신성한 섭리에 개입하게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만들 것이고
전자의 경우 그는 속박을 벗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신성한 섭리의 역사하심을
분명히 지각하고 느끼게 되면 이러한 것과
그리고 그 밖의 많은 해로운 결과가 잇따라 일어날 것이다..
178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사건을 미리 아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든 그것을 실현하기를 원하며
자신의 이성을 수단으로 거기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또한 사람이 이성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자신의 생각을 통해 결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신성한 예언(prediction)으로 인해
결과나 결말을 안다면 우리의 이성은 굴복할 것이고
사랑도 그에 따라 굴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과 이성은 함께 결과에서 멈추고
거기서 새로운 사랑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성의 본질적 즐거움은
사랑의 결과를 사건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미리 생각으로 보는 것,
곧 지금이 아닌 미래에 되어 질 것을 미리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주어지는 소망이라고 불리는 것의 근원으로
이 소망은 결과를 상상하거나 예상함에 따라
그의 이성 안에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이 기쁨은 결과적으로 충족되지만
나중에는 그것에 대한 생각과 함께 지워진다.
이것은 결과가 미리 알려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179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누구나 이성으로 미래사에 대하여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허락되어 있다.
즉 사람은 사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가 천국에 들어갈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갈지를
하나님에 의해 미리 알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말씀에 비추어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미리 알지는 못한다.
만일 그가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미리 알면
그의 내적 자아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그치고 다만 외적 자아로부터
그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을 생각할 것이다..
183
하나님의 섭리는 악을 한 순간에 없애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하고 점진적으로 그것을 제거해간다.
또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을 정도만큼
악에서 멀리 떠나게 하신다.
사람이 만일 신성한 섭리와 그 일하심을 분명히 보게 되면
그가 하나님을 부정하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경우
그는 그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하나님을 시인할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신성한 섭리는 결코 우리의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일치하여
움직이지 않고 늘 반대로 움직인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의 유전 악으로 인해
끊임없이 가장 깊은 지옥을 갈망하는 반면
주님은 당신의 섭리로 그를 끊임없이 거기서 이끌어내시며
처음에는 보다 덜 악한 지옥으로,
다음에는 지옥 밖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천국에 계시는
주님 자신에게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하시는 신성한 섭리는 쉴 줄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이 만일, 주께서 이렇게 이끌어내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보거나 느낀다면 그는 분노하며 하나님을 원수같이 여기고
타고난 성격의 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이끌어내시는 이 섭리를 사람이 모르도록
그를 자유롭게 하시고 이로써 그가 주인이 되어
그 자신을 이끌어나가는 줄로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유전 악 때문에
위대해지기를 원하고 또한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사랑이 억제되지 않는 한, 그는 더 크고 더 부유해지고
결국에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부유해지기를 원한다.
그는 그러한 경우에도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 보다 더 큰 능력을 갖고 천국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이 정욕은 유전 악에 주로 존재하며 개인의 삶과 성격에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악을 한 순간에 없애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한 순간에 그것을 없애버린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하고 점진적으로 그것을 제거해간다.
이것이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이성이 받아들인 생각을 따라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신 이유다.
또한 신성한 섭리는 합리적, 시민적, 도덕적인
각종 수단과 방편으로 그를 악으로부터 물러나게 하시고
이리하여 그가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을 정도만큼
악에서 멀리 떠나게 하신다.
악은 드러나고 시인하는 데 이르지 아니하면
어떠한 사람에게서도 제거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수술대에 올려놓고 째지 아니하면
아물 수 없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꼭 알아둘 것이 있다.
주는 결코 사람으로 하여금
명예를 구하지 말고 재물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성취나 이기적 욕망으로 명예나 재물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주님은 사람을 그런 것에서 떠나게 하신 뒤
그가 씀씀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시며
그 자신이 아니라 씀씀이를 위해서 출세를 바라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것은 먼저 부귀영화를 씀씀이에 속하게 하고 난 다음
그 씀씀이에 의해 부귀영화가 자신에게 속하게 하는 것이고
그 반대가 아닌 것이다.
187
사람은 신의 섭리를 앞에서 보지 않고 뒤에서 보며,
사람의 자연적 상태에서 보지 않고 영적 상태에서 보도록 허락되었다.
신성한 섭리를 앞에서 보지 않고 뒤에서 본다는 것은
신성한 섭리를 미리 보지 않고 발생한 다음에 본다는 뜻이고,
자연적 상태에서 보지 않고 영적 상태에서 본다는 것은
그것을 세상으로부터 보지 않고 천국으로부터 본다는 것을 뜻한다.
천국으로부터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신성한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
특히 개혁에 의해 영적으로 된 사람들은 모두
일련의 경이로운 사건들을 볼 때
실제로 내면의 시인(interior acknowledgment, deep recognition)으로부터
섭리를 보며 이를 고백한다.
이 사람들은 앞에서 곧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것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의지가 그 질서와 진행을 방해할까 두려워서이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의 흐름은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그것을 세상에서만 받는 사람, 특히 가상(假像)을 굳힘으로써
자연적이 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다르다.
이 사람들은 뒤에서도 또는 사건이 발생하고 난 다음에도
신성한 섭리를 전혀 못 보고
그러면서 앞에서 또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보려고 한다.
또 신성한 섭리는 수단에 의해 역사하고
수단은 사람이나 세상을 거쳐서 작용하기 때문에
그들은 신성한 섭리를 앞에서 보든지 뒤에서 보든지 그것을
인간 아니면 자연에 돌리며 따라서 그것을 부정하는 입장을 굳힌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들의 이해성이 위로는 닫혀 있고 아래로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곧 천국을 향해서는 닫혀 있고
세상을 향해서는 열려 있기 때문이고
또 신성한 섭리를 보되
세상으로는 말고 천국으로만 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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