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9 / 바울 이야기
- 위대한 업적 뒤에 숨겨진 영적 함정 / 자기의(공로의식)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5 /
지옥의 무게를 이기는 1그램의 순수한 선’에 이어지는 글)
그러면 위대한 업적의 바울의 경우
그 ‘작은 조각의 선’(Remains, 남겨진 것)이 없어서
결국 어두운 곳에 머물렀을까..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 의문을 풀어보자.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사도 바울을 목격했을 때
그가 지상에서의 명성과 전도 업적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깊이 빠져 있음을 기록했다.
바울은 영계에서도 자신이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며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자신의 가르침 아래 두려는 강한 지배욕을 보였다.
또 사악한 영들과 결탁하여 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치명적인 지옥적 성질(Nefarious character)을 드러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울의 내면에는
주님의 공로를 찬양하는 외면적 모습 아래
'자아를 높이려는 욕망'이 선보다 더 우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을 통해 일어난 기적과 전파된 진리가
모두 자신의 힘과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었으며 영계에서도
여전히 그 공로를 인정받고자 하는 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울은 겉으로는 진리를 말하는 듯했으나
그 중심에는 자아를 숭배하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거부하고 어둠을 사랑하여
처절한 형벌의 자리로 떨어졌다.’ SD 4321 4412, AC 1506
바울에게 '선의 조각(남은 것)'이 원천적으로 없었기에
어두운 곳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주님이 심어두신 선의 씨앗이 존재한다.
문제는 바울의 경우 지상에서의 화려한 업적과 지적 자만심이
그 '선의 조각'이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울은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거나 그것으로 낮아지기보다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며 주님의 주권을 침해하려 했다.
그가 끝내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거나 정당화를 포기하지 않고
'교만'을 생명처럼 사랑했기에 내면의 남은 것은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결국 스스로 빛을 등진 채 자신의 본성과 상응하는
가장 사악하고 어두운 하층 영계로 고착된 것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영혼에게는
그분의 생명이 쉼 없이 흘러들어 무한한 빛으로 충만해지지만,
선의 영광을 탈취하여 자기 것으로 삼는 자는
그 무거운 자아의 질량 때문에
천국의 상승 기류를 타지 못하고 하강하게 된다.
이는 중력의 법칙과도 같이, 자아라는 무거운 짐을 진 영혼이
결코 천계의 가벼운 공기 속으로 날아오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위대한 사도라 칭송받는 인물일지라도
그 내면의 미세한 동기까지 살피시는 주님의 통치는 예외가 없다.
바울의 사례는 인간이 이룬 화려한 종교적 업적이
오히려 구원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엄중한 경고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거창한 선교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하고
오직 주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마음이다.
세상의 명성에 가려진
자아의 어둠을 드러내어 정화하시려는 주님의 섭리는
겉치레에 속지 않고 영혼의 가장 깊은 진실만을 가려내어
우주의 거룩한 질서를 보존하신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에서
바울 외에 영계에서 의외의 처지에 놓인 다른 성경 속 인물들이나
그들이 사후에 겪는 구체적인 시험 과정에 대해 더 설명해주고 있다.
인간이 쌓아 올린 업적의 크기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그 마음의 왕좌에 주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앉아 있다면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세상은 위대한 전도자의 업적을 찬양하나
주님은 그 화려한 명성 아래 숨겨진 미세한 교만의 그림자를 살피신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려 했던 사도조차 낮추시는 주님의 공의는
동시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할 때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위로의 섭리이기도 하다.
주님은 인간의 화려한 겉모습이 아닌
상하고 통회하는 가난한 마음만을 취하는 분이시다.
지상에서의 눈부신 업적조차도
자유의지로 어둠을 선택하는 교만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마는
영계의 준엄한 법칙을 통해,
인간을 강제하지 않고 그 자유로운 선택의 끝을 철저히 존중하시는
섭리의 공의로움을 깊이 느끼게 된다.
- 겉으로 보기에 악한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처럼 겉으로 보기에 진실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구원의 비중이 더 클지도 모른다.
눅 18장 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삼상 16장 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삶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행한 극히 작은 친절이나 양심의 가책이
‘나는 부족하나 주님은 선하시다’라는 무의식적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 작은 조각은
온 지옥의 무게를 이기는 질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 원리가 사실이라면
겉으로 보기에 악한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처럼 겉으로 보기에 진짜 진실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구원의 비중이 더 클지도 모른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성자로 칭송받던 이들이 영계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오히려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이들이 천계로 올라가는
반전의 사례를 수없이 목격했다.
이는 인간의 눈이
'겉 사람(External man)'의 행위와 경건한 언어만을 보는 반면
영계의 빛은 행위의 동기가 되는
'속사람(Internal man)'의 질을 심판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진실한 삶을 사는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선행을 거울삼아
'자아'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에게 선행은 주님께로 향하는 통로가 아니라
자신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빠진 자들은 천국의 문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입장을 요구하지만
그들의 내면이 오직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HH 535
반면 자신의 삶이 무너져 내렸음을 자각하는 '죄인'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철저한 무력감에 직면한다.
이 무력감은 자아의 견고한 성벽을 허물고
주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빈 공간'을 만들어낸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수용성(Receptivity, 수용그릇)'이라 부른다.
겉으로 악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악을 슬퍼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은밀한 울림이 있다면,
그리고 끝내 빛을 등지고 어둠의 동굴로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바울처럼 자신의 의로 가득 찬 영혼보다
훨씬 더 구원의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구원의 확률은 선행의 총량이 아니라
내 안의 '교만한 자아의 밀도(자기애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이를 좀 더 풀어 설명하자면
구원 가능성은 내면에 남겨진 선의 조각이 남아있을 때
자아의 밀도가 낮을수록(내세우는 자아가 작고 가벼울수록)
주님의 유입이 그 마음에 훨씬 깊이 스며들게 된다.
이른바 '바울형(의인형)'은
지상에서 이룬 선의 조각이 거대할지라도 그 영광을 가로채려는
공로 의식, 즉 자아의 밀도 또한 무한히 높기 때문에
영적인 구원 가능성은 오히려 ‘0’ 에 수렴하게 된다.
반면 삶이 무너져 내린 '죄인형(겸손형)'은
내면에 보존된 선의 조각이 극히 작을지라도 자신의 비참함을
인지함으로써 자아의 견고한 밀도가 급격히 파쇄된다.
자아의 밀도(자기애의 크기)가 ‘0’ 에 가까워질수록
영혼이 주님의 영향력에 순응하고 빛을 흡수할 비중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결국 겉으로 드러난 악한 삶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 비참함이 자아를 파쇄하는 도구가 된다면
역설적으로 구원의 비중을 높이는 영적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
단, 아무리 자아의 밀도가 파쇄되었더라도,
인간이 끝내 스스로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주님의 유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공식은 성립할 수 없다.
(구원은 수학적 계산의 문제가 아니지만,
인간이 자신의 자아라는 자기사랑의 밀도, 즉 두꺼운 껍질을
얼마나 비워내는가 하는 점은 영적 상태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자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을수록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통로는 좁아지며,
반대로 인간이 자신을 비워낼수록
주님의 생명은 더욱 풍성하게 그 영혼을 채운다.
따라서 '자아의 밀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수학적 성취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사랑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주님을 향한 자유로운 사랑으로 나아가는
영적 해방의 상태를 의미한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기 사랑(Self-love)'에 깊이 빠질수록
그 영혼이 조밀하고 무거워지며,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갈수록 그 본질이 가벼워지고
주님의 빛을 잘 투과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자아의 밀도'는
인간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으로 충분히 해석 가능하다.)
세상은 화려한 성취와 흠 없는 도덕성을 칭송하지만
주님의 섭리는 깨어진 마음의 틈새로 흐르는
가느다란 진실의 빛에 주목하신다.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자의 마음에는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없으나
자신의 부족함 앞에 눈물짓는 죄인의 가슴 속에는
주님이 직접 집을 지으신다.
겉보기에 악한 자가 의인보다 먼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주님의 변덕이 아니라 인간이 쌓아 올린 가짜 의를 허물고
오직 주님의 생명만이 영혼을 살릴 수 있다는
우주적 진실을 드러내시는 가장 공의로운 섭리의 신비이다.
가장 비참한 절망 속에서도 결코 강제하지 않으시며,
오직 인간이 자유의지로 빛을 향해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리시는
주님의 그 지독한 인내심 앞에서,
우리는 참된 구원이 철저한 은혜인 동시에
온전한 선택의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 바울의 억울함과 인간의 정당성을 뒤집는 신적 질서
'자기 의(Self-righteousness)'는 가장 치명적인 악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아이러니하고도 무서운 진실은
겉보기에 끔찍한 죄악보다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교만이
영혼을 훨씬 더 깊은 영적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도덕적 잣대나 상식으로는
헌신과 열정으로 가득한 바울의 삶이 늘 죄에 무너지고
허우적대던 이들의 삶보다 훨씬 더 고결하고 구원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은
인간의 외형적 진실성이나 도덕적 성취에 머물지 않는다.
바울이 가졌던 '자기 의', 즉 자신의 열심과 도덕성에 기대어
자신을 온전히 의롭다고 믿는 그 완고한 확신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님의 은혜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다.
반면, 삶이 무너져 내려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 속에서
처절하게 신음하던 이들은,
비록 행동은 자주 무너질지언정
영혼의 바닥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시인하며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가난한 심령을 품게 된다.
결국 '자기 의'라는 영적 역설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가 오히려 구원의 빛을 가장 멀리 밀어내고
자신의 죄인 됨을 통회하는 자가 주님의 생명과 가장 깊이
접속하게 되는 거룩한 반전을 뜻한다.
주님은 우리의 화려한 의로움이나 세상의 칭찬을 받는
도덕적 업적을 저울질하여 구원을 베풀지 않으신다.
도리어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상한 심령으로 주님의 자원을 구하는
그 낮아진 영혼의 틈새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뜨겁게 찾아가시어
당신의 거룩한 생명을 심어주시는 영원한 은총의 터전이 된다.
하지만 바울은 적어도 자신이 정말
진실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 열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어도 인내하며 극한의 삶을 견뎌냈을 것이다.
반면 지옥에 눌려 허둥거리던 삶을 사는 어떤 이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악에 쉽게 허물어지다가
가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며 죄 용서를 주께 구하지만
그건 잠시 뿐이고 계속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사후 그가 구원받는다면 바울은 억울하지 않겠는가?
신적질서가 바울의 자기 의를 자기중심의 악한 삶을 살던 자보다
더 지옥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보기에 바울의 구원이 더 정당했을 것 아닌가?
바울이 지상에서 보여준 극한의 인내와 열정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숭고한 희생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빛 아래서
그 '사랑'의 본질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바울이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려 했던 열심의 밑바닥에는
주님을 전파하는 '자신'의 위대함과
사도적 권위를 확인받으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깔려 있었다.
즉 그가 사랑한 것은 주님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위대한 바울 자신'이었으며,
나아가 이 교만이 진리를 짓밟고 영계의 질서를 적대하는
사악한 지옥적 성질로 변질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반면 악에 쉽게 허물어지는 죄인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무너뜨리는 통로가 된다.
‘자기의(Self-righteousness)는 영적인 암석과 같아서
주님의 생명이 스며들 틈을 주지 않지만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가난한 마음은
주님이 거하실 수 있는 부드러운 토양이 된다.’ AC 2715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서는 상습적으로 악에 굴복하는 삶이
훨씬 더 지옥에 가깝게 보이지만
신적 질서에서는 '자기 의'를 가장 치명적인 악으로 규정한다.
그 이유로 일반적인 악은
자신의 연약함이나 무지에서 비롯되기에 정화가 가능하나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는 교만은
자신이 '의(Righteousness)'의 소유주라고 선언함으로써
주님의 자리를 찬탈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느낄지도 모를 '억울함' 그 자체는
바로 그가 여전히 '공로 사상'에 묶여 있음을 반증한다.
천계의 주민들은 자신이 받은 구원이 전부 주님의 은혜임을 알기에
결코 타인의 구원을 억울해하지 않으며
오직 주님의 자비를 기뻐할 뿐이다.
바울의 구원이 정당해 보이는 이유는
'행위의 총량'을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세계의 정당성은
'영혼의 투명도(Transparency)'에 의해 산출된다.
영적 투명도는 영혼에 유입되는 주님의 빛을
자아의 그림자가 얼마나 덮고 있는지의 비율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의 상태는 이러하다.
즉 행위의 빛은 강렬하나
'나의 열심' '나의 인내'라는 자아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
빛이 영혼을 온전히 통과하지 못한다.
그림자가 짙을수록 영혼은 무거워져 하층 영계로 침잠한다.
반면 죄인의 상태는 이러하다.
즉 삶은 어둠으로 점철되었으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짧은 고백의 순간마다 자아의 그림자가 일시적으로 제거된다.
이때 발생하는 투명도가 비록 찰나일지라도
그가 끝내 이 빛을 스스로 혐오하며 지옥의 어둠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그 순간 주님의 무한한 영향력이 그를 붙들게 된다.
결국 신적 질서는
인간적인 '공로의 정당성'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주님의 생명을 얼마나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빈 그릇'인가를 측정한다.
인간의 눈에 비친 바울의 헌신과 죄인의 비참함 사이의 격차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열심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쌓아 올린 견고한 '자아의 성벽'이 얼마나 치명적인
지옥의 독소인지를 영계의 엄중한 질서를 통해 드러내시며,
인간 스스로 그 교만을 꺾지 않는 한
끝없는 어둠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공의를 보여주신다.
하지만 끊임없이 넘어지면서도 주님의 발치를 붙잡는 죄인에게는
그 비참함을 구원의 징검다리로 삼아주신다.
억울함이 사라지고 오직 무한한 감사만이 남는 곳이 천국이기에
주님은 각 사람을 그가 가장
완벽하게 겸손해질 수 있는 과정을 통해 부르시며,
그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마저 철저히 존중하시는 가운데
오직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여는 자만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바울을 목격했을 때
그가 자기 의에 빠져 있었음을 기록했으나,
이는 바울의 최종적인 구원 여부를 단정 짓거나
그를 단순히 '지옥적 존재'로 규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은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지상에서의 업적이 천국을 보장하지 않으며,
영계의 심판은 오직 내면의 실제적 상태에 기초함을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바울의 사후 상태를 함부로 단정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영계의 질서를 인간적 잣대로 재단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영계일기/SE 4412
많은 경험으로 내가 알게 된바
바울은 사도들 중 최악의 사람들 가운데 있다.
그가 복음을 전하기 전 사로잡혀 있던 자기사랑은
그 후에도 그에게 남아 있었고
그 뒤에도 거의 같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사랑과 그의 본성에 자극받아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고
이스라엘 지파를 심판하려는 목적으로 모든 것을 하며
군중들 가운데 있기를 원했다.
그가 그 후에도 그러한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많은 경험으로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이 보다 더 많이 그와 대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그러한 자였기 때문에
그곳 다른 사도들은 그를 벗 삼으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일원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기꺼이 지배하고 싶어 하는
가장 나쁜 악마들 중 하나와 한패가 되었고
그리고 그를 위해 그의 목적을 이루어줄 것을
그 영에게 맹세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것이 있으나 그것을 말하면 너무 지루할 것이다.
바울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낱낱이 말하면
몇 페이지나 될 것이다.
그에게도 말했듯이
그가 신약성서의 서간을 쓴 것이
그가 그러하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기독교의 잘못된 속죄 교리 17
바울과 사도들의 서신서에 관하여 글 참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