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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자료모음방 스크랩 백범일지 판본에 대한 해제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49 07.03.05 17: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반적으로 역사적 문헌에 대한 원전비평(textual criticism)은 매우 중요한 독자의 연구 영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더욱이 20여 종 이상의 다양한 출간본을 지닌 『백범일지』의 경우 원전 비평의 필요성은 그만큼 절실하다. 그래야만 판을 거듭함에 따라 생기는 와전을 수정하고, 텍스트(text) 본래의 순수성(purity)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4년 6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가 소장한 『백범일지』 친필본이 영인되었고, 그외에도 국외의 등사본과 국내의 필사본이 남아 있어, 이러한 저본들을 활용하면 이미 출간된 다양한 교열본의 문헌적 친족관계와 내용의 차이를 검토할 수 있다.


출간본 『백범일지』의 경우 다양한 종류 때문인지 몰라도 서로 원본에 의거하였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원본 의거가 책의 권위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논의는 여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 먼저 원본에 대한 정의부터 간단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저명한 저서의 경우 일반적으로
① 원저자가 처음 집필하고,
② 이를 다른 사람들이 등사·필사하거나,
③ 공식적으로 출간되기도 하며,
④ 원저자 또한 첫 집필을 완료한 이후 이러저러한 수정과 보완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①과 ④를 원본이라 할 수 있다면 ②는 등사본·필사본, ③은 출간본이라 한다.

『백범일지』는 그 내용 구성이 상권과 하권 그리고 [나의 소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모든 내용을 충족시켜 주는 완벽한 의미의 원본은 없다. 그러나 원본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분명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백범의 영식(令息) 김신 장군이 비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94년 6월 집문당에서 영인한 바 있다.

이 책에는 우선 해방 이후 집필한 1942년 이후의 『백범일지』와 [나의 소원]이 없다. 또 『백범일지』 가운데 최초 집필 부분 이외에, 그후 수정하거나 추가한 부분이 있고, 더욱이 다른 사람이 필사한 부분도 섞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이것을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저본으로 『백범일지』 원본의 기본적인 체제와 내용을 검토할 수 있다. 『백범일지』 원본은 한문과 고어가 많은 국한문 혼용체의 세로쓰기로 되어 있으며, 상권이 하권의 3배 정도 분량이다. 상·하권 모두 원고지에 씌어 있지만, 용지와 필기구는 서로 다르다. 상권의 용지는 450자(30×15) 파란색 원고지로 귀두에 '원고용지 국무원'(原稿用紙 國務院)이라 씌어 있고, 필기구는 대부분 펜 또는 만년필이다. 하권은 상권과 달리 2,400자(24×100) 빨간색 원고지에 대부분 붓으로 조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1) 상권

상권은 머리말에 해당하는 [두 아들에게 주는 글](與仁信兩兒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신 소장본(영인본)의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유일하게 백범의 친필이 아니며, 사용된 용지 또한 본문의 원고지와는 다른 갱지라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은 집필 당시 백범의 나이인데, 등사본·필사본의 54세와는 달리 53세로 기록하고 있다. 백범은 1928년(53세) 3월경에 『백범일지』 상권의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54세) 5월 3일 종료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는 집필 종료 후(54세) 쓴 서문을 앞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집필 시작 시기의 나이(53세)로 수정한 것인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의 [두 아들에게 주는 글]은 백범의 친필이 아니며, 시기적으로도 다음에 살펴볼 '등사본'보다 이후의 것이다. ?

상권을 집필한 동기와 당시의 실정은 머리말인 [두 아들에게 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는 백범이 어머니와 두 아들을 고국으로 보내고,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피선되어 유명무실한 임시정부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범일지』를 집필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어린 자식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서(遺書)와 같은 것이었다.

상권의 본문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 일부(一. 祖先과 家庭, 二. 出生 及 幼年時代)는 본문 속에 일련번호로 목차를 정비하였으며, 붓으로 집필하였다. 반면 뒤의 대부분은 원고지 본란에 펜 또는 만년필로 기록하고 목차는 주로 원고지 상단의 여백에 일정한 표식(∞)과 더불어 병기하였다. 여기서 펜으로 기록한 뒷부분이 1928∼1929년 처음 집필 당시의 원본 그대로이며, 붓으로 정서한 앞부분은 책으로 출간하기 이전 어느 시점에서 시범적으로 다시 정비한 부분이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김신 소장본의 경우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지만,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머리말은 다른 사람이 필사한 것, 본문의 앞부분 일부는 백범이 다시 정비한 부분, 뒤의 대부분은 최초 집필 당시의 원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하권

하권 역시 머리말인 [서문](自引言)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권의 [서문]도 본문 앞에 있지만, 본문 이후에 집필한 것이다. 그것은 필기도구가 본문의 후반부와 일치하며, 필사본에 서문이 책의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 것 등으로도 방증할 수 있다.

하권의 집필 종료시기는, [서문]에 기록된 백범 나이 67세와 본문 내용의 끝부분이 대한민국 24년(1942) 2월인 점 등으로 살펴볼 때 1942년이다. 그런데 하권의 [서문]에는 1943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을 의미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시기가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이 점으로 보아 하권 역시 집필 종료 후 일정 시점이 지난 후 [서문]이 다시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상권과는 달리 하권 집필 당시는 임시정부의 사정이 많이 개선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정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또한 백범의 두 아들도 장성한 상태였다. 따라서 백범의 지위, 가정의 형편, 임시정부의 사정 등을 고려할 때, 하권의 집필 목적은 백범의 개인사보다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선전하고 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가 반영되어, 상권이 주로 백범의 성장과정과 다양한 경력을 소개하고 있다면, 하권은 임시정부와 그 저변의 일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하권의 본문에는 첫 목차(上海到着)를 원고지 여백에 병기한 것 이외에 어떠한 목차도 설정되어 있지 않다. 즉 백범은 상권을 집필하고 난 뒤 적절한 목차를 원고지 여백에 병기하였으나, 하권의 경우 그러한 여유마저 없었던 듯하다. 하권 집필 종료 당시는 태평양전쟁의 발발 등으로 백범이 매우 바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검토에서 알 수 있듯 하권의 [서문]은 재집필한 것이며, ?본문은 목차마저 설정되지 못한 일종의 수고(手稿)였다.


1) 등사본


백범은 『백범일지』 상권 집필을 끝내고 두 달 후인 1929년 7월 7일 그것을 등사(謄寫)하여 미주 지역 동지들에게 보냈는데, 이것은 현재 콜롬비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줄이 전혀 없는 백지에 등사되어 있으며, 등사한 사람은 백범의 측근 엄항섭이라고 한다.

"등사하였다"는 백범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백범일지』 상권 원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이것은 일단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등사본은 원본의 수고적 성격을 정비하거나 교열한 흔적이 적지 않다. 목차를 본문 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비하였고, 본문 또한 현대어로 교열한 흔적―예컨대 '부친'(父親)을 '아버님'으로, '시'(時)를 '때'로, '조선'(祖先)을 '조상'(祖上)으로 수정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원본의 수고적 성격을 정비한 이러한 교열은 대체로 합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등사본은 단순한 교열의 수준을 넘어서 필요에 따라 내용을 축약하거나 생략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내용의 번쇄함을 줄일 수 있어 효율적이기도 하지만, 몇 군데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예컨대 '삼각혼'(三角婚)은 곤궁한 세 집안이 가문의 존속을 위해 혼인동맹을 맺는 재미있는 풍속으로, 당시 백범 일가의 결혼 형편과 혼맥을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이러한 부분이 삭제된 점은 아쉬운 바가 없지 않다.

2) 필사본

이 책은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이석희(李奭熙)가 고서점에서 입수하여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해방 직후 백범 측근이 김신 소장본(영인본)을 필사한 것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용전](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用箋)에 세로쓰기로 매우 빽빽하게 필사하여 읽어내는 데 상당한 고충이 따르며, 현재 상권의 2∼6쪽, 22쪽, 96쪽과 하권의 32쪽, 39쪽이 결락되어 있다.

이 책의 필사시기를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책의 말미에 원본 두 쪽을 첨부하고 있는 종이가 '재판소'(裁判所) 용지라는 것이다. 1947년 12월 2일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 장덕수(張德秀)가 암살되자, 백범은 그 배후로 지목되어 결국 1948년 3월 12일 법정의 증언대에 서게 되었다. 필사본은 바로 장덕수 암살 사건의 재판 관계 자료로 준비된 것이었다.

이 필사본의 특징은, 우선 '1. 조선과 가정'(一. 祖先과 家庭) 이외에 어떠한 목차도 없다는 점이다. 김신 소장본에서 상권의 앞부분만 시범적으로 목차가 정비되어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필사본'은 원본의 원고지 여백에 표시되어 있는 목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원고지 안에 있는 본문만 황급히 필사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필사본에는 원본의 목차가 배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원고지 여백의 내용을 삽입한 것 등이 제외되어 문맥이 통하지 않는 곳도 적지 않다. 요컨대 필사본은 등사본과 비교하여 『백범일지』 상·하권을 모두 포괄하여 원본 결락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매우 황급하게 필사하여 권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제 원본이나 필사본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출간된 『백범일지』를 검토할 순서이다. 출간본의 경우 공통된 특징은 원본이나 필사본을 대폭 교열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학술적인 목적의 영인본(facsimile)이 아닌 대중용 교열본(critical text)에서는 구철자법이나 한문을 현대문으로 교열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특히 『백범일지』 원본에는 구철자법과 한자성어는 물론 철자법이나 한문이 틀린 것, 시간적인 선후관계가 뒤바뀐 것, 전후 맥락이 어지럽거나 잘못된 곳이 적지 않다. 교열의 일반원칙과 원본의 수고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교열은 불가피하며 바람직한 측면도 적지 않다. ?

현재 교열본으로 출간된 것은 20여 종 되지만 검토 대상이 되는 주요한 것은 최초의 출간본인 '국사원본'(1947), 이를 계승한 '교문사본'(1979), 새 원본을 발굴하여 교열하였다는 '서문당본'(1987) 등이다. 각각은 나름의 장점과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열이 '원본의 순수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1) 국사원본과 교문사본

『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최초로 출간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국사원본은 출간본의 시조(始祖)라는 의의와, 백범의 묵인 아래 출간되었다는 적지 않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

국사원본의 특징은 김신 소장의 원본에 없는 내용들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범일지』 하권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1942년 이후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활동(본서 하권 6장), 해방 이후 귀국 과정과 귀국 후 백범의 활동(본서 하권 7장), 그리고 마지막에 첨부한 [나의 소원]이란 백범의 정치논문 등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국사원본은 그간 원본에 준하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한 국사원본의 저본이 현재 남아 있다. 이것은 백범의 구술을 측근이 펜으로 받아 쓴 것인데, '계속'(繼續)이란 소제목으로 시작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용전]이라 표기된 용지에 세로쓰기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국사원본에서 원본에 준하는 내용은 [나의 소원] 하나뿐이다.

국사원본은 김지림과 김흥두 등이 편집 실무를 담당하였다고 하지만, 실무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는지 몰라도 국사원본의 경우, 문학적 측면의 교열은 교열본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 특히 원본의 미비한 목차 구성을 고려한다면, 국사원본은 뛰어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문장의 교열이 지나칠 정도로 매끈하여 백범 특유의 투박미와 긴 호흡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단점이다.

그런데 문학적 교열은 당연히 '원본 자체의 순수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국사원본은 적지 않은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백범의 스승 고능선의 학문적 계보를 언급하면서 류중교(柳重敎)를 조중교(趙重敎)로 오독한 것 등 인명·지명의 착오가 많고, 더욱이 내용을 반대로 기술한 것도 없지 않다.

?예컨대 백범이 1895년 갑오농민전쟁에서 동학 접주로서 해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재기를 모색하고 있을 때, 구월산 아래 사는 정덕현(鄭德鉉)과 우종서(禹鍾瑞)가 찾아와 5개항의 '비책'을 건의하고, 백범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중 '제1조'를 원본과 정반대로 기록하고 있다.

원본: 병졸을 대하여도 호상배(互相拜) 호상경어(互相敬語) 등을 폐지할 일.

국사원본: 병졸을 대하더라도 하대하지 아니하고 경어를 쓸 것.

백범의 동학군이 '농민적 평등주의' 때문에 군기가 문란해진 것을 보고, 정덕현이 수습책으로 상하의 엄격한 질서를 강조한 이 부분은 당시 황해도 동학 농민부대의 군율과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국사원본은 정반대로 교열하였다.

국사원본에서 가장 큰 문제는 원본을 대폭 생략한 것이다. 미리 상·하권의 체제를 예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범일지』 상권의 끝부분과 하권의 첫부분, 하권의 끝부분과 해방 이후 집필한 추가본의 첫부분이 많이 중복되며, 같은 내용이 흩어져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아 적절한 생략과 통폐합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국사원본의 생략은 출간본의 시조로서는 지나치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예컨대 1898년 3월 백범이 탈옥 후 삼남(三南)을 방랑하면서 남긴 다양한 견문록(見聞錄), 1911년 안명근 사건으로 투옥되어 심문받는 과정, 서대문형무소의 옥중생활에 관한 생생한 기록 등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소중한 내용들이다. 그외에도 원본에는 윤봉길 의사의 거사 직후 상해 민족운동권의 동향과 백범에 대한 비난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국사원본은 완전 삭제하고 있다. 국사원본은 원본의 적자(嫡子)이자 출간본의 시조이지만, 이러한 삭제로 인해서 원본에서 가장 멀어진 교열본이 되었다.

원본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백범일지』가 국사원본을 저본으로 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현재 유통되는 것으로 이러한 주류적 계보를 이어받은 대표적인 것이 교문사본(1979)이다. 교문사본은 국사원본을 다시 약간의 현대문으로 수정한 것이며, 변화라면 마지막에 [백범연보]를 추가한 정도이다. ?

사실 연보는 개인의 생애를 정리하는 데 초석과 같이 기초적인 것이다. [백범연보]에 관한 한 교문사본은 하나의 시조가 되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백범일지』의 내용에 의거하고 있다. 그런데 본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범일지』의 내용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다름 아닌 시기 문제이다. 따라서 이에 의거한 연보는 당연히 시기의 앞뒤가 뒤범벅되어 있어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도출해낼 수 없다. 『백범일지』 내용에 주로 의존하는 [백범연보]는 이후의 출간본들도 한결같이 따르는 특징으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백범의 인생은 다소의 뒤범벅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2) 서문당본

국사원본·교문사본이 원본을 대폭 축약하였다는 점과 비교하여, "새 원본을 발견하여 한 자 한 구도 소홀히 하지 않고 모두 옮겼다"는 서문당본(1989)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밝힐 것은 이 책의 저본은 선전 문구대로 '새 원본'은 물론 아니며, 교열자가 착각하고 있는 엄항섭의 등사본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의 저본은 장덕수 암살 사건 재판 자료로 급하게 필사한 필사본이다.

서문당본은 저본의 권위가 약하지만, 기존의 교열본과 비교하여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삭제된 부분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본인 필사본에서 누락된 부분이나 오류는 그대로 반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를 현대문으로 교열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착오가 있다.

먼저 당시 통용되던 재미있는 풍속과 표현, 예컨대 '종의 종' '해방노' '머드레 공대(恭待)' 등이 생략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또한 문맥의 해석에서 적중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으며, 특히 인명 등의 착오는 여럿이다. 예컨대 백범이 중국 동북지방(만주)의 정세를 논의하면서 거론한 '김일성 등 무장부대'에서 '김일성'(金一聲)을 '김일정'(金一靜)으로 오독한 것은 대표적이다. 정체불명의 인물 '김일정'이 등장함으로 인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해석해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당시 백범은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국내외 정치세력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국 관내(關內) 지방의 김원봉·민족혁명당 세력과 합작을 성사시키는 한편, 김일성의 만주 세력에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당본은 삭제된 부분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본이 원고지 본문만 주로 필사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의거한 서문당본 역시 원본의 원고지 여백이나 별지[載後面]로 추가한 부분에서 누락된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갑오농민전쟁 시기 동학군을 토벌한 안태훈의 한시, 청국 여행시 함흥지역의 특이한 풍물인 '솔대'와 남대천(南大川)에 관한 김삿갓의 한시 등은 논외로 치더라도, 서대문감옥의 옥중생활, 의병에 대한 백범의 논평 등은 중요한 것인데도 누락되어 있다.

서문당본에서 또 다른 문제는 목차이다. 원본의 목차를 누락시킨 필사본을 저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독자적으로 목차를 부여하였다. 독자적으로 목차를 부여하였다는 것 자체가 단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목차 구성은 원본을 참고하면서 보완하였던 국사원본·교문사본에 비하면, 백범 인생의 큰 굴곡이 보이지 않는, 요컨대 평면적이고 나열적인 것이 되었다.


이상의 원전 비평과 판본 검토를 마무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백범일지 원본은 본문 구성, 내용 중복, 목차 체계 등에서 수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원본 그대로의 영인본과 아울러 적절한 교열본이 필요하다.

2) 교열은 물론 원본의 순수성을 훼손하지 않은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만 원본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폭 생략하거나 정비할 수 있는 축약본이나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백범일지』 등 변형본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

3) 기존의 출간본 중 국사원본·교문사본에서 취할 장점은 목차 구성과 문장 정리 등이며, 서문당본에서 취할 장점은 원본의 내용을 많이 삭제하지 않은 점이다.

4) 해방 직후 추가한 하권의 뒷부분은 이제까지는 국사원본에만 의존하였으나, 현재는 그 저본인 추가본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나의 소원]의 원본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5) 백범일지는 미리 전체 체계를 구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권의 마지막과 하권의 앞부분, 하권의 뒷부분과 해방 직후 구술한 추가본의 앞부분 등이 많이 중복된다. 원본에 충실한 1차 교열본이 아닌 앞으로의 2차 교열본에서는 정연한 전개를 위해 다소 내용의 통폐합이 필요하다.

6) 백범 연보의 경우 『백범일지』의 본문 기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많은 방증자료와의 대비가 필요하다. 정확하고 정연한 연보가 마련되어야 보다 수준 높고 다양한 『백범일지』 교열과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1) 원본·영인본

원본: 『백범일지』, 소장가: 김신 장군.

영인본: 친필을 원색 영인한 『백범일지』, 집문당, 1994.

2) 등사본·필사본·추가본

등사본: 1929년 엄항섭이 등사한 『백범일지』 상, 소장처: 미국 콜롬비아대학 도서관.

필사본: 해방 이후 백범의 측근이 『백범일지』 상·하를 필사한 것, 소장가: 이석희(李奭熙).

추가본 : 해방 이후 백범이 구술한 하권 이후의 내용을 기록한 것.

3) 출간본

『백범일지』, 국사원, 1947.

『백범일지』, 교문사, 1979.

우현민 역, 『백범일지』, 서문당, 1989.

윤병석 직해, 『백범일지』, 집문당, 1995.

김학민·이병갑 주해, 『백범일지』, 학민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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