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갈항사지가 있는 곳을 금오산의 서쪽 끝이라고들 한다. 금오산을 하나의 독립된 산으로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백두산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산줄기 체계로는 갈항사지는 금오산이 시작되는 초입이 된다. 백두대간의 정맥에 자리한 대덕산에서 남으로 뻗어 나온 한 줄기가 수도산을 세우고, 수도산은 서남쪽으로 독용산, 형제봉, 가야산, 미숭산을 일으키면서 경상남북도를 갈라놓는다. 동쪽으로는 염속산, 비지산, 백양산으로 이어지면서 성주군과 김천시와 경계를 이루다 방울암산 어간에서 북으로 뻗으면서 일으켜 세운 것이 금오산이다. 산줄기의 흐름으로 보면 갈항사지는 금오산의 시작부분이 되는 것이다.
백두산으로부터 쉼없이 달려온 산줄기가 감천과 낙동강을 만나 우뚝 멈춰선 금오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그대로 응결된 곳이라 하여 예부터 민간의 추앙을 받아온 민족의 성산 이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이다. 금오산이 된 것은 아도화상이 이곳을 지날 적에 석양을 향해 나는 까마귀의 힘찬 날개가 황금처럼 빛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金烏란 태양 속에 산다는 발이 셋인 까마귀를 지칭하는 말로 태양을 상징한다. 그만큼 이곳은 양의 기운이 센 곳이란 뜻이 되겠다.
1000m가 되지 못하는 크지 않은 산이지만 옹골찬 바위와 기암괴석으로 곳곳에 비경을 만들어 내는 금오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산에서는 금오산 봉우리가 마치 붓 모양을 한 문필봉으로 보인다. 금오산 문필봉의 정기를 받아 ‘조선 인재의 절반은 경상도에 있고 경상도 인재의 절반은 선산(朝鮮人材半在嶺南 嶺南人材半在善山)에 있다’고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읊은 이 말이 지금도 유효한지 널리 인용되고 있다. 김천 쪽에서 보면 노적봉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천에서는 대대로 큰부자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인동 쪽에서는 마치 관을 쓴 것 같이 보여 귀봉이라 부르는데 높은 벼슬아치들이 대를 이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개령쪽에서 보면 마치 도둑이 무엇을 노리는 듯한 적봉의 형상으로 나타나 이곳에서는 큰 도적과 반란이 자주 일어난다고들 한다. 성주 쪽에서 보면 여인이 머리를 감고 단장하는 모습 같아 음봉이라 부른다. 그래서 성주에서는 미인과 걸출한 여장부가 많이 배출된다고 전해 온다.
고려시대에는 금오산이 남숭산으로 불렸다. 생김새가 중국의 숭산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숭산이 소림사가 있어 유명해졌듯이 해주의 북숭산과 이곳의 남숭산 역시 많은 불적이 남아 있다.
금오산은 산도 수려하지만 특히 단풍이 곱고 아름다워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한다.
갈항사(葛項寺)터
4번 국도 대구쪽 부상리에서 김천쪽으로 오르막길을 내려서면 아포로 이어지는 새길이 나온다. 산줄기를 잘라서 낸 길을 2km쯤 달리면 삼기마을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아포로 가는 좋은 길을 버리고 고속철을 바라보면서 꼬부랑길을 2km쯤 가면 밑둥에 오색천이 주렁주렁 달린 금줄을 두르고 있는 당산나무를 만나게 된다. 무언가 옛 얘기를 들려줄 것만 같은 당나무를 지나서면 이기낀 돌담이 눈에 익은 듯 정겨운 오봉리 갈항마을이 시작된다. 경사가 급해 고개를 바짝 쳐들고 바라보면 투구모양으로 생긴 대방구(큰바위)가 손을 뻗치면 닿을 듯 동네를 내려다 보고있다. 대방구에는 일제 때 박은 쇠말뚝이 아직도 꽂혀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금방 애국자가 되어 흥분을 참지 못한다. 개발,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팔이나 다리에 해당되는 큰맥도 서슴없이 잘라내는 우리들이 손등에 박힌 가시정도에 지나지 않는 쇠말뚝에 그렇게 과민반응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울분을 토로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동네 위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시멘트길이 다한 곳에 갈항사 옛 터가 있다.
ꡔ삼국유사ꡕ에는 갈경(葛頃)사로 되어 있으나 「갈항사 석탑기」를 통해서 볼 때 갈항사가 맞을 것 같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권5 의해편에서 갈항사는 승전스님이 당나라에서 귀국해서 지은 절로 소개하고 있다. 승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가서 의상 스님의 사제인 현수의 제자가 된다. 가르침을 받고 귀국할 때는 현수가 의상에게 전하는 글을 받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개령군 경계에 갈항사를 짓고 석촉루(돌해골)를 청중삼아 화엄경을 강설했는데, 전해오는 80여매의 석촉루가 자못 신령스럽다고 했다. 일설에는 몇 년 전에 사람형상을 한 몇 개의 돌덩이가 굴삭공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갈항사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14년 지금은 경복궁 뜰에 옮겨진 동서 두 탑중 동탑에 새겨진 명문이 소개되면서부터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는지 2년뒤인 1916년 2월 16일 탑은 반쯤 도괴 되고 주위에는 도굴꾼들이 미쳐 챙기지 못한 유물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도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총독부에서는 경복궁으로 옮겨 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옮겨 가던 날 영험이 일어났다. 탑 속에서 나온 사림합에 일본인 감독이 손을 댄 순간 그는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고 작업은 중단되었다 한다. 그 이튿날 마을사람들은 탑을 실은 마차를 따라 김천역까지 가서 눈물로 고별했는데 탑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옮겨갔다는 표석만 서 있다.
갈항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 건재했던 사찰도 보이나 지금은 너무 많이 개간되고 원형이 훼손되어서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남아있는 불상과 경복궁으로 옮겨진 3층탑(국보 99호)의 명문으로 그 역사의 대강은 추측해 볼 수 있다.
갈항사의 역사
탑에 새겨진 명문은 길지는 않지만 이 절의 내력과 신라의 정형탑이 어떤 경로로 지방으로 전파되는지를 가늠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명문은 “두 탑은 천보17년 무술년에 세웠다. 남매매 3인이 업으로써 이루었는데 남자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 매자는 조문황태후이고 매자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천보17년은 경덕왕 17년(758)으로 원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성되던 무렵으로 통일신라의 문화가 난숙미를 더하던 시기에 해당된다.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로 박씨인데 계조부인 혹은 지조부인이라 한다. 언적법사는 원성왕의 외삼촌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탑은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일가들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글씨는 탑이 건립되고 30~40년이 흐른 뒤 원성왕이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쓰여진 것이다. 이로 보면 갈항사는 승전이 창건할 당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고,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세력이 탑을 건립하면서 크게 중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성왕은 화엄교단을 통해서 불교를 장악해 나간 인물이다. 황룡사 승려 지해를 궁중으로 불러 50일간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고 전국을 관장하는 불교 행정사무를 황룡사 중심으로 펼쳐 나간 것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적으로는 불교계 장악을 위해 노력하면서 왕실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원찰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간 당시의 분위기에서 화엄사찰인 갈항사가 원성왕쪽과 관련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원성왕 외가의 원찰이 된 갈항사는 원성왕 즉위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성왕의 외숙이 머물렀다는 영묘사는 선덕여왕 때에 옥문지에서 겨울에 개구리가 울어 적병의 침입을 예고해준 절인데, 문무왕때는 설수진의 육진병법을 이 절앞에서 열병하는 등 군사적 기능이 지속된 절이다.
지난달에 답사한 무장사와 숙정왕후(원성왕의 비 김씨)의 외할아버지 파진찬 김원량이 중창했다는 곡사와 원성왕 자신의 창건한 봉은사와 갈항사는 선덕왕 사후 서열 2위인 김경신이 상재인 김주원을 제치고 원성왕으로 즉위하는데 깊이 관여했다는 것을 꿈의 해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원성왕이 왕이 된 것을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갔다’는 꿈으로 합리화시키고 있다. 꿈의 해몽에서도 처음에는 실직하고 칼을 쓰고 옥에 갇힐 것이라 하여 두문불출했는데, 다시 아찬 여삼이 와서 해몽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할 사람이 없음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12현금은 12손이 대를 이를 징조요, 천관정에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상서“라고 했다. 여기서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평탄치 않았음이 드러난다. 등장하는 여러 요소들은 원성왕의 지지세력들의 상징이라고 보면 되겠다. 여삼은 아찬이니 6두품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고 천관사 우물과 12현금(가야금)은 김유신가계와 가야계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성왕의 손자대인 흥덕왕 때 깁유신이 홍무대왕으로 추존되고 그 묘가 왕릉처럼 정비되는데서도 알 수 있다. 김주원을 제치고 왕위에 올라 정통성이 결여된 원성왕으로서는 무열왕계와 진골귀족과 김유신계의 지지와 불교계의 폭넓은 지원을 받아야만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 역할을 무장사와 갈항사, 곡사 같은 원성왕계의 원찰들이 성공적으로 추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오봉동 석조석가여래( 보물 제 245호)
옛날 탑이 서 있었다는 표지석에서 길 건너 서쪽에 맞배집이 있고 그 안에 보물 제 245호인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보호각 안의 불상은 오른팔이 떨어지고 하반신이 손상되었지만, 복스런 얼굴에 눈두덩은 몽고주름이 도톰하게 잡혀 은행알처럼 탐스럽다. 가늘게 내려 뜬 눈에는 예배자의 심상이 투영될 것만 같은 눈동자가 표시되어 있고, 오뚝한 코에 오므린 듯 작은 입엔 천진무구한 미소가 베어있다. 신체의 굴곡 역시 얼굴처럼 부드럽지만 가냘프지는 않다. 넓은 어깨에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는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단엽의 앙련을 새긴 상대석은 시원스럽지만 새로 만들어 넣은 중대석과 하대석은 조잡하기 짝이 없다. 탑이 조성된 758년 전후의 이상형을 구현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보호각 아래 감 밭에는 마치 첨성대를 땅에 심어놓은 듯한 신라시 우물이 있다. 날이 몹시 가물었던 20여년 전 여름날 관세음 보살이 현몽한 곳을 파서 찾아낸 영험스런 우물이다.
당시는 언제 두레박을 내려도 줄지 않는 양의 물이 있었다는데 가까이에 고속전철 북삼터널이 뚫리면서 물이 줄어들고,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샘 자체가 허물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