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태복음 8 : 23-27)
우리는 풍랑 속에서의 예수님의 태도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주무셨습니다.
본문 24절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그렇지 광풍이 불고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는데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은 예민하신 분이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군중들 속에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감지하셨던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광풍이 부는 중에도 계속 주무신 것은 제자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지 보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평상시는 잘 모릅니다. 어두울 때 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믿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하실 때 고난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믿음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는 모리아의 번제단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봅니다.
요셉에게 억울하게 차가운 감옥에 범사에 형통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모세에게 생사의 고비를 넘긴 나일강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하면서 생명을 건지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베드로에게 바다에서 순종을 배우고 두배가득채워주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요한에게 밧모섬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보게 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에게 겟세마네 동산 차가운 땅바닥에서 십자가를 지겠다고 기도하고 땀이 피방울같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62편 7절에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과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0편 4절에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고난속에서 내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 볼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우자 바다를 명하여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25절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곳 어디로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더 피할 길이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는 기회가 됩니다.
한나는 손꼽히는 기도의 여인입니다. 그런데 브닌나 없는 한나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브닌나가 한나를 만들었습니다. 브닌나 때문에 한나는 기도를 배웠고,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배웠습니다. 좋은 사람을 통해서는 위로 받고, 나쁜 사람을 통해서는 기도를 배웁니다.
배에 있는 구명조끼는 바다가 잔잔할 때 필요 없습니다. 눈길도 가지 않습니다. 평안할 때는 예수님은 큰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풍이 일어나면 그 때는 상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풍랑 때 구명조끼와 같은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부르짖으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일어나 바람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그와 맞서 싸우러 나간 소년 다윗은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3.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26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것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두려워 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실 때 사용하시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올리고 피스토이」라고 하는데 양이 적고 크기가 작고 무게가 가볍다는 뜻의 「올리고스」라는 말과 믿음 「피스디스」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이 말은 백부장의 믿음, 즉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는 말씀과 가나안 여인의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이방인의 믿음은 이토록 크고 놀라운데 제자인 너희들의 믿음은 고작 이 정도냐? 「올리고 피스토이」 이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서로 배타적이어서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빛이 비추이면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꺼지면 어둠이 찾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워하지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자 제자들은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라고 했습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라는 말은 제자들이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몰랐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수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마다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보호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두움 속에 있을 때 우리를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광풍을 만났을 때 제자들은 아무리 배가 요동을 해도 배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므로 자신들을 죽음에 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믿고 예수님께서 깨실 때까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정말 배가 뒤집힐 상황이었다면 예수님께서 일어나서 구원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의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오늘 본문에 메가톤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큰 놀이가 일어나, 메가톤급 광풍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으시사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메갈레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메가톤급 고요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메가톤급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메가톤 광풍을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메가톤 고요가 흘렀고 그 엄청난 사건을 보고 제자들은 메가톤 감격, 메가톤급 경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풍이 클수록 고요도 클 것입니다.
고난이 클수록 위로도 클 것입니다.
아픔이 클수록 더욱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말의 권세와 능력입니다.
광풍아, 잔잔하라
바람아, 잔잔하라
바람아, 잔잔하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치료하십니다. 너를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풍랑을 잔잔케 하십니다.
너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잔잔하게 하십니다.
잔잔하라
잔잔하라
잔잔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