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고 오늘 새벽에도 비가 잔뜩 내리더니 아침나절부터
개이기 시작하여 오후에는 파란 하늘이 선명하니 태양은 바로
이 때다 싶은지 장착한 오만 열기를 내 품지 못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잔뜩 퍼붓는 강렬한 빛살에 산책을 나가려는 마음 한 자락에
발 걸음은 주춤주춤 바지 가랭이 잡힌 샛서방처럼 엉거주춤이다
미적미적 한 낮의 더위를 피하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자리를
잡는 찰라를 놓치지 않고 헐렁한 반바지에 운동화를 챙겨신고
가끔 다니던 나즈막한 앞 산을 향하여 성큼성큼 내달렸더니 금새
등어리에 땀이 배이고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얼굴로 목으로
등어리로 줄줄 시원스럽게 흘러내리는데 그 동안 운동 한 번을
못한 보름간의 땀내가 늙은이 품새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지나 않을까
남사스럽게 나잇살이나 먹은 중늙은이 반바지 차림이라니 거기다가
후줄그레 적셔진 모습으로 그렇지 않냐 싶어 뛰룩뛰룩 두리번두리번
지나가는 사람을 피하고 지나치는 사람을 훌쩍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나만의 자격지심인지 옆 사람 지나칠 때 은근슬쩍 코를
딜이밀고 킁킁거렸더니 긴 장마 속에 썩은 낙엽내음이 싫지는 않다
숨이 목아지까지 차고올라 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발걸음 멈추자니
언덕받이 잔달뱅이 작달막한 깨뛔기 땅을 일구어 가지가지 길러놓은
다랑지 밭에 고추가지가 주렁주렁 울타리 삼아 심어놓은 파란 탱자나무
굵은 가시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밭고랑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잡초하나 없이 반질반질 이 장마철에 주인장의 노고가 엿보인다
참깨는 벌써 꽃을 달고 한들거리고 주변에 들깨는 뜯어다가 양념에
버무리면 향기좋은 반찬이 될 듯 싶은데 언감생심 눈요기로 만족해야
할 처지라니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을 나무라며 눈까지 홀겨본다
반질반질 부드럽게 잘 자란 부추며 검게 익은 복분자까지 유혹하는
여러가지의 충만을 내팽개치는 야멸찬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목적지
정상에 다달으니 한둘금 지나가는 바람에 시원한 바람도 욕심난지라
아무도 없다 싶어 가벼운 옷자락을 가슴팍까지 걷어 올려 훌렁 드러내서
바람을 쏘일까 하다가 대뜸 주책이라며 나무라고 ㅉㅉ 혀까지 끌끌찬다
일찍이 봄을 알린다며 엄동설한에 피었던 매실은 수확이 끝나고 벌써
끝물이라 몇 일전까지 달고 있던 노란 매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온통 낙엽이 지고 얼기설기 털갈이하는 닭처럼 듬성듬성 잎을 달고
펄렁거리고 산 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벗나무도 벌써 누런 이파리
뒤섞이고 푸른잎은 성글어졌으니 때가 아무렴 하지를 지났으니 벌써 음기는
시작되었을 것이리니 나머지 화끈한 열기로 맺힌 씨앗들을 영글게 할 차례인가
그러든 말든 동백나무 후박나무 새 잎은 기름 바른듯 반질반질 굵은 떡갈나무
커다란 잎이 싱그럽고 작달막한 상수리 밤송이 띄엄띄엄 앙증맞다
옛날 어느 덜떨어진 꼭 나 같은 어리숙한이 현인에게 질문하기를
해가 가장 가깝다는 하지 한 참 지나서야 삼복더위가 오는가요 하니
왈, 아궁이에 불을 땐다고 금새 아랫목이 뜨거워지던가
강냉이 삶은 가마솥에 물이 끓었다고 바로 강냉이가 다 익던가
밥이 다 된 것 같아도 뜸들이기를 놓치면 태우거나 설은 밥되고
사람도 마찬가지지 본업에 석삼년을 세 번은 해야 풋내가 가시고
일이 좀 완숙하다 싶으면 벌써 되익어서 허물어지기 쉽다 했으니
한참 싱그러운 혈기왕성한 여름 나절에 한물 간 늙은이의 푸념이겠지만
세상의 이치가 다 그렇고 인생도 참으로 그러한가 싶다
첫댓글 방금 솥에서
뜸 들이기를 시작합니다!
이런! 이렇게도 내 맘과 어쩜 똑 같다니 기가 막히는군요.
그닥 성치않은 몸이어도 걸어야 된다는 약발에,
이 불가마같은 날에 보행차 의지해 독감에 힘든 딸내미 며칠지나 보고오니 온몸이 그냥 익는구만요.
그래도 도시 아우성이 아닌 볼거리가 쏠쏠한 곳이니 나이드는 이들에겐 좋습니다.
이곳도 산책 하노라면 어찌나 줄 그은 듯 텃밭에 진심인지 잣대가 따로 없답니다.
그나저나 울집은 아무리 물 줘도 클까 말까 고민만 하는 초록이라서요.
활엽수의 매력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