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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 국민훈장, 무공훈장, 근정훈장, 보국훈장, 수교훈장, 산업훈장, 새마을훈장, 문화훈장, 체육훈장, 과학기술 훈장 등 총 12가지의 훈장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독립유공자에 수여되는 건국훈장과 표창의 등급은 수감기간과 활동기간을 감안해 결정하는데, 1등급(대한민국장),2등급(대통령장),3등급(독립장)은 8년 이상이고 4등급(애국장)은 4~5년,5등급(애족장)은1년이상으로 분류되었다. 그다음으로 건국포장은 10월~1년,대통령표창은 3~6월로 되어있다. 대한민국장에는 김구주석 안중근의사 윤봉길의사 김좌진장군등 30명, 대통령장에는 홍범도 주시경 신채호등 93명, 독립장에는 송진우 윤동주 유관순등 823명, 애국장에는 장준하 이육사등 4170명, 애족장에는 5379명이 서훈되었고, 건국포장은1,150명 대통령표창은2,682명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는 14,327명이라는 보훈처의 기록이다. 내 외조부님은 이중 5등급인 애족장(愛族章)에 추서되셨다. 애초1983년에는 대통령표창을 받으셨다가 1990년에 애족장을 추서받으신것... 출처: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외조부님의 유공자정보로 위는 보훈청의 것이고 아래는 관련까페에 소개된 정보이다. 외손인 나(權赫時)는 1970년대 초반 32개월이면 만기제대를 하던것을,김신조때문에 갑자기 확 늘어난 복무기간으로 35개월7일만에 전방 GOP부대에서 제대하고 아직 복학을 하지 못하고 있슬때로 기억하는데, 네째 외숙(金庸經 ,대전중.고등학교의 9년 선배로 대전고교37회선배이기도...)으로부터 전화로 제안을 받는다. 외조부님의 독립유공내역을 찿아보지 않겠느냐는... 술잔 기울이는 것 외에는 딱히 할일도 없던 나는 그리하기로한다. 당시로는 만만치 않은 액수였던 5,000원을 자료조사비로 받아들고는 시작을 한다. 주로 도서관의 자료들을 뒤져 이은상의 독립운동사(5~6권으로된 것으로 기억함)에서 외조부님의 독립운동 사실을 처음으로 문서로 확인하였다. 신이나기 시작했었나보다. 계속 작업을 하여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시게된 판결문을 찿으려하였지만 연세대 추헌수교수의 3·1운동사 자료집등에서 외조부님의 판결문은 제주도로 옮겨저 보관되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했다. 돈도 떨어지고 복학도하여야겠고... 하여 외숙께 보고를 드리고 물러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러자 외숙은 내 바로아래 동생( 故 權赫普, 대전고49회)에게 후속작업을 맡기고 지휘를하여 마침내 자신의 선친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하였던 것이다. 자손들에게 이런저런 혜택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있지만 외조부님의 출가한 따님인 내 어머니(長女 金愛經)와 그 자손인 우리는 해당이 되지 않았지만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는 깊은 자긍심을 간직하게 된 것이다. 이자리를 빌어 중고교 선배이기도한 외숙께 존경한다는 말씀 남긴다. "고맙습니다." 아래 3페이지로 된 문건은 외숙께서 정리를 하신 것이다. 가족들(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을 포함하여)을 위하여... 바로 위페이지의 글에서 나와 관련된 부분을 파란색 테두리로 표시해보았다. 아래는 제주도에 이관되어 보관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더이상의 추적을 마친 후 내 동생(권혁보,대흥국교16회?,대전중17회,대전고49회)이 찿아낸 것으로 생각되는 외조부님의 판결문이다. 아래에 외조부님과 자손들의 사진 몇컷을 소개한다. 외숙으로부터 받은 사진들과 내 어머님의 앨범에서 찿은 가족사진.... (내 어머님의 앨범에 꽤 여러 컷의 사진들이 있었는데 이번에 찿아보니 이 사진 달랑 한장이다.) 위 : 외조부 외조모님 아래 : 외조부님 가족사진으로, 위 글을 만드시고 유공자 인정을 받아내신 외숙은 아직 숨을 쉬시기 전... 가족사진 중 오른쪽 화살표로 가리킨 분이 내 어머니로 장녀이자 10남매의 셋째이다. 위 가족사진에 들지 못하였던 네째 외숙의 귀여웠던(? ㅋ) 모습 지금 팔순 노인이지만 인물은 아직도 좋으시다. 내 기억으로 외조부님께서는 4째 외숙께서 작성하신 위 문국공이야기에서처럼 어덕마을에서 오래 사셨다. 물론 4째외숙,5째외숙도 함께... 고등학교시절 우리는 대전시 용두동에있는 AID차관자금으로 지은 주택에서살았다. 외조부님댁과는 골목과도 같은 좁은 길로 2km 쯤(?)떨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4째외숙께서는 손재주도 좋아 평행봉도 아주 반듯하게 만들어놓고 운동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아버님이 조치원종합고교(옛 조치원상고)에서 근무하실 때 학교 바로옆에 있던 관사가 꽤 넓은집이었는데 그곳에서 실험장치를 만들어놓고 폐유로 실험을 하셨다. 이게 성공하면 우리형제들(당신의 조카들)모두에게 자전거 한대씩사주마고 하셨는데 성공을 했는지 어쩐지는 지금도 모르고있다. 가끔은 우리막내(홍일점 혜원)에게 새치머리를 뽑으라 시켜놓고는 흰머리카락 한개마다 얼마씩을 주기로하면서 잘못하여 검은 머리카락을 뽑으면 벌칙으로 희머리단가보다 높은 금액을 까기로해서 용돈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는... 하기사 내 알기로 그때 외숙으로서는 조카들 용돈 줄만큼의 여유는 없었슬 것으로 기억한다. ㅋ 외조부님댁 뒤로는 호남선 철로가 지나가는데 그 사이에는 옹기나 사기를 굽는 가마가 있어서 갈 때마다 신기하게 구경을 하였다. 깨어져 나뒹구는 사기파편들도 가지고 놀고... 철길 넘어 갑천으로 물놀이(미역)를 할 때 오가는 길에 준비해간 대못 몇개를 가져가 철로위에 올려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지나간 다음 달려가보면 몇개는 날아가 찿지못하지만 몇개는 찿아 숯돌에 뾰족하게 갈아서 닭의 꽁지깃 몇개를 구해(외조부님댁에서는 닭을 키우셨다) 고무줄로 감아 판자에 던지는(요즈음의 다트놀이?)놀이도 하였었다. 네째외숙도 고등학교 선배(40회)셨는데 어느날인가는 놀러 갔는데 옆 산으로 데리고가서 놀다가 개구리를 잡아서 땅에다가 패대기를 쳐 이 개구리가 빳빳하게 뻗으니 몸통을 발로 밟고 뒷다리 두개를 잡고 당기니 쏙 빠진다. 미리 계획을 한것인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어 불을 피우더니 뽑힌 다리를 불에 얹어 구워주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구리 뒷다리 구이 맛을 보았더란다. ㅎ 그리고 외조부님께서도 가끔은 우리집(그러니까 큰딸과 외손주들 집)에 오셨었다. 교육공무원이시던 아버님의 봉급으로 5남매를 먹이고 교육시키기에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슬 내 어머니는 중국요리(주로 짜장면이지만 아주 가끔은 탕수육도...)를 주문해 대접하시거나 도야지고기를 고추장으로 볶아 당신의 아버님에게 드렸었다. 우리는 한참 크는 나이였고 굶지는 않아도 마냥 풍족하게 먹지는 못하였던지라 할아버님 진지드시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흘금흘금 입맛을 다시던 생각에 쓴 웃음을 짓게된다. 어찌 그 무렵엔 먹고 돌아서면 이내 배가 고팠는지.... ㅋ 외조부님에 관련해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갑자기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의 갈피를 뒤적여본다. 이번에 보상금을 받지 못하는 손자녀에게까지 독립유공자 혜택을 주기로 하였다(생활지원금지급)는 소식으로 수속서류를 만드는 중 외조부님과의 가족관계를 증명하기위해 받은 증명서로 애국지사 김정철님과 부인 송씨의 장녀인 내 어머님(김 愛經)과 5남매 중 작고한지 비교적 오래인 내 형(赫之,대전고 46회,독일 괴팅겐대 박사,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 교수역임)과 동생(赫鵬,대전고52회,미국 뉴욕주립대 스토우니브룩대학원 박사학위, 미국 다우케미컬(DOW chemical) 근무후 귀국,대전 한남대학교 생명나노과학대학 화학과 교수역임)은 아예 빠져있고 얼마전 작고한 바로아래 동생(權赫普,서울대와 펜실베니어 주립대 박사,경남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과 교수역임)도 사망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홍일점이고 5남매중 막내인 여동생(權惠媛 ,대전여고,숙명여대,BASF Korea 근무, 현재는 미국거주)로 둘이는 말 그대로 외로운 남매다. 佳人(才人)薄命이란 말이 우리네 집안을 두고 이르는 말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직은 사회에 돌려줄 재능이 많은 형제들은 모두 짧은 생으로 마감을 하였는데... 변변치 못해 국가에서 주는 생활지원금을 받게되는 사람은 칠순을 넘기며 살고있으니... 올해 초 아직 눈이 녹지않는 2~3월에 찿아다녔던 대전보훈청 해서 기초연금 수급자격여부를 확인하고 지원금 지급대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아래공문을 받는다. 월468,000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월335,000원을 받게된다는 내용... 고맙기도하지만 창피는하다. 그러나 창피스러움보다는 훌륭한 외조부님의 자손임이 자랑스러우니 이것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으로 믿는다. 우리 親家는? 親祖父이신 우리 할아버님(權寧億)은 일정때 일인들의 등쌀에 중국으로 도망(?)가셔서 독일인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시고 돌아와 충남도립병원에서 안과과장을 하시다가 일본의 2차대전 패전으로 철수하자 원장으로 재직하시다가 정년하시고 낙향하여 영제의원이란 이름으로 개업을 하셨다.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어데서도 듣지 못하였지만 할아버님께서 중국에 계실 때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장군과 교분을 쌓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형제들이 어려서 여름과 겨울방학이면 할아버지댁으로 가서 며칠씩 놀다오곤 하였는데 이때 철기장군께서는 jeep에 말까지 싣고 오셔서 사냥을 하시다가 할어버님 댁에서 묵으시는 것을 보았었다. 이때 사냥하신 노루를 잡아 뒷다리를 떼어 한짝은 서울에서 내려왔던 우리 큰집으로, 다른 한짝은 대전에서 올라간 우리집에서 가져왔던 기억이 있는데, 어쨋거나 독립운동을 확실히 하신분과 교분을 가지셨으니 친일파는 아니셨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러고보니 어려서 철기장군의 자서전인 우둥불이란 책이 우리 집에 있었는데... 어데로갔지? 이때 시골의 조그만 의원이지만 우리형제들은 놀러가면 집에서보다는 여러가지로 풍족했다. 서울에서 온 사촌들과 대전에서 올라간 우리형제들은 공기밥을 누가 많이먹나 자랑삼아 먹어대고.... 여름철에는 물놀이를 하고오다가 과수원에서 참외 수박을 사먹도록 돈을 쥐어주시고 겨울철에는 우리 형제들 수대로 널판지 밑에 철사대어 올라타고 꼬챙이로 찍어가며 논에서 얼음을 지치던 썰매를 우리 손자들 수대로 만들어 주셔서 헛간에 두고 다녔다. 그리고 아침이면 동네 아이들이 살림집과 병원이 함께있는 큰 목조주택인 병원 앞으로 모여든다. 우리하고 놀자며... 우리는 각자 건빵을 한봉지씩 들고 나가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자연스럽게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었다. 참 철없는 우리였다. ㅎㅎㅎ |
첫댓글 쨍쨍한 2가문의 이야기가
부럽기도 하고 재미있게
읽었네요.🙋
한경친구의 이야기(쨍쨍한...)가 맞다면 그에 누가 된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네.
재미있게 읽어주었다니 고마워!
언제 대폿잔이라도 한번 기울이면 좋을텐데, 한번 올라가 볼꺼나?
@혁시와각시 두손들어환영하지
아마두발까지들어환영하는
친구도 많을껄. 담에창엽손잡구오셔.
@김한경 몸둘바를 모르겠네.
그런데 창엽이?
심창엽?
그러면 대중동창회?
@혁시와각시 그라지 청전회모임에 창엽.인기가 서울근교 트레킹에 열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