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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5월24일 성령 강림 대축일
[수도회] 함께 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2,1-11
† 제2독서 1코린 12,3ㄷ-7.12-13
† 복음 요한 20,19-23
오늘 전례
▦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시어 그들을 변화시키셨는데, 성령을 받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담대하게 증언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념합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성령을 가득 부어 주시어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내어 맡깁시다.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일곱 주간이 지났을 때, 함께 모여 있던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린다. 성령께서 그들이 여러 언어로 말하게
하시므로 모든 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로써 바벨탑으로
인해 생겨난 분열이 극복된다(제1독서).
★ 성령은 교회 안에서 일치의 원리가 되신다. 공동선을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시는 분도 같은 성령이시다. 그리고 모든
이가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룬다(제2독서).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대자연은
더욱 신비스럽습니다. 봄이 되면 겨우내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나무 끝에
새 잎과 꽃봉오리가 싹터 나오지만, 죽은 가지에는 새로운 생명이 싹틀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생물에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혼’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의 생명력이 되고 영혼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
계셔야 하는데 천주 성령께서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이천여 년
전 오늘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수도원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와 아홉 가지 열매 뽑기를 합니다. 수십 년째 해마다 뽑기를 하고
있는데, 제가 꼭 뽑고 싶은 열매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아서 그때마다 조금은
섭섭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제가 이미 그 열매를 지니고 있어서 더 내려
주시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령의 열매가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풍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설령 성령께서 그 열매를 저에게 주시지
않으시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주신다면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은 서로 다른 언어들을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서로 다름을 통해서 모두가 소통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벨탑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꺾으려 하셨을 때에도 그 방법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언어를 말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언어들”
을 사용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치의 성령이 함께하시는가 아닌가
여부에 따라 이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놓기도 하고 또 갈라놓기도
합니다.
같은 성령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들을 모두가 공동선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면, 또한 나에게 더 주신 선물을 그 선물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다면 그 ‘다름’은 마치 이가 꼭 맞는 톱니바퀴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줄 것입니다. 오늘도 또 뽑기를 하겠지요. 제가
갖고 싶은 그 열매를, 다른 사람들이라도 많이 받기를 바라면서 뽑기에
참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성령의 선물 -성령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24일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2,1-11 1코린12,3ㄷ-7.12-13 요한20,19-23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ㄷ-7.12-13
<또는 갈라 5,16ㄴ-25>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15,26-27; 16,12-15>
성령의 선물 -성령 예찬-
성령의 선물이 무궁하고 풍요롭습니다. 성령강림으로 마침내 파스카
신비는 완성되고 사순시기에 이은 부활시기도 끝납니다.
우리 수도형제들은 성령강림을 준비하며
일주간 내내 성령강림 찬미가로 저녁성무일도를 시작했습니다.
"창조자신 성령이여 우리 맘에 임하소서.
고귀하온 은총으로 모든 조물 돌보소서.
우리들의 위로자며 천주주신 선물이라
온갖 샘의 근원이며 타는 사랑 주시도다.“
찬미가1,2절에 이어지는 7절까지의 찬미가가 저절로 성령충만한 행복을
맛보게 했습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과 방금 미사 중 화답송
후렴은 또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알렐루야, 주의 얼이 우주에 충만했으니, 어서와 조배드리세“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참 좋으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주님 승천하신 활짝 열린 하늘길, 하늘문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성령 가득
선물을 내려주시어 온누리를 새롭게 하신 성령입니다.
성령 칠은인 지혜, 통달, 지식, 의견, 효경, 굳셈, 두려움에 이어 성령의
아홉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는
얼마나 풍성한지요.
복음 전 성령송가 부속가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했는지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선물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부요하고 행복하게 하는 성령의 선물인지요.
마치 성령칠은은 하늘과 땅을 잇는 무지개의 일곱가지 빛이 연상되어
성령의 무지개 은총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 전날인 어제도 참 기뻤습니다. 대축일을 앞두고
고백성사를 보러 오신 아랫집 수녀님의 성령칠은 뽑기 선물을 받았고
제비를 뽑은 결과 통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어 집무실을 방문한 분들에게도 제비 뽑기를 통해 성령의 선물을
드리니 기쁨으로 충만한 분위기였습니다. 수도공동체의 저녁 휴게시간도
성령칠은의 제비뽑기로 참 행복한 분위기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뽑은 성령의 선물도 통달의 은혜였습니다.
"통달(깨달음); 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은혜“
이미 통달의 은혜를 받았기에 매일 이렇게 강론을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감사한 마음 가득했습니다.
이어 휴게시간 계속된 수도형제들의 호를 정하는 것도 분위기를 기쁨으로
고조시켰습니다. 하늘과 산의 천산(天山)인 제 호에 이어 '천(天)'자
돌림의 천신(天神), 천불(天佛), 천마(天馬), 천진(天眞)이란 호가 몇몇
형제들에게 주어졌고 다른 수도형제들의 호도 지어줄 것을 주방수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지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으니 이 또한 성령강림
대축일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선물은 끝이 없지만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압축하여 나눕니다. 특기할 것은 성령의 은총이 모두 공동체와 관련된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용서와 사랑의 성령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 공동체에 주신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은 성령이었고
이어 용서의 은혜였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은혜가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하게 합니다.
용서의 사랑입니다. 용서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게 하는 용서입니다.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지옥입니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용서해야 생명 충만한 삶이요 바로 성령의 은혜가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성령을 선물하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끊임없이 용서하게 하십니다.
둘째, 평화와 기쁨의 성령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인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성령님께서 공동체에 주시는 눈물 나도록 고마운 평화의 선물입니다.
얼마나 평화에 굶주린 세상인지요. 또 기쁨에 갈급한 세상인지요.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지만 우리는 이 시간 성령을 충만히 받고
기뻐합니다. 이어 생각나는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하여 저는 미사 중 성체를 모실 때 '하느님의 어린양' 노래시
'평화를 주소서' 대신 '평화가 되게 하소서' 기도합니다.
셋째, 공존과 풍요의 성령입니다.
다름이 축복입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고유의 성령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 이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하여 공동체는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공존의 아름다움, 공존의 축복, 공존의 풍요로움 등 끝이 없습니다.
아, 성령의 은혜가 이렇게 공동체를 부자로 만들어 줍니다.
유토피아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배고픔도 목마름도 완전 해결되었습니다.
자랑할 것은 내가 아니라 성령입니다.
형제들의 성령의 은사에 질투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공동체에 주신 영적보화의 성령의 선물이니까요.
이래서 공동생활입니다.
공동생활을 통해 완전 활성화되는 성령의 은혜들입니다.
넷째, 소통과 일치의 성령입니다.
불통과 분열을 치유하여 소통과 일치를 이뤄주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사랑만이 답입니다.
오늘 1독서의 오순절날 사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었을 때 일어난 성령의
기적이 소통과 일치의 생생한 증거입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시 불통과 분열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이제 성령강림으로 완전히 치유되어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로 변모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합니다. 오늘날의 사회 현실을 요약하는 말마디가 불통과 분열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사명이 참으로 큽니다.
성령의 은혜만이 소통과 일치의 사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대축일후 자리잡은 내일의 석가탄일이 의미심장합니다.
소통과 일치의 성령이 열린 마음으로
석가탄일을 경축하게 하고 불교와의 대화를 격려하고 촉진 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주님 승천하신 하늘길은
성령칠은 가득 내리는 성령의 무지개길이 되었습니다.
성령칠은인 지혜, 통달, 지식, 의견, 효경, 굳셈, 두려움과 무지개 일곱
색깔인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가 일치하는 느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성령칠은에다 성령의 아홉
열매를 선사하시어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성령의 은혜를 간직하고,
이 영혼의 양식으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함께 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2015년 나해 5월24일 주일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Receive the holy Spirit."
함께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20,22)
성령을 주셨다. 성령의 파견으로 교회는 온갖 역경 속에서도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사도 2,14 이하).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과 영을
지닌 공동체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교회의 거룩함은 바로 만민이 회개하는데 있으며,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계약 앞으로 서게 하며 결단을 요구한다.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으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우리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그분 안에서의
참된 인생의 의미를 모른 채 살고 있지는 않는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얼을 지닌 삶을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직접
몸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셨던 그분의 얼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전 생애가 모두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몸짓이었다. 탄생이 그러했고, 갈릴래아 선교 활동 중에
행하셨던 병자들의 치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지극한 관심,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 라자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와
함께 머무심 등등 모두가 사랑이었다. 끝내 그분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맞으셨다. 하느님의 죽음, 그것은 사랑 외에 달리
설명될 수가 없다.예수님의 사랑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
(요한 15,13)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 20. 26절)하고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20,22). 그분은 생명과 사랑을
불어넣어주셨다. 그분은 생명을 건네주고 싶어 안달하는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막의 모래알이 물을 그리워하듯
그토록 타는 목마름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임마누엘의 간절함이다(마태 1,23; 28,20).
참된 사랑의 가장 중요하고도 명확한 표지는 사랑하는 존재와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사랑, 애절히 저려오는
그리움으로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인 표지이며 사랑 자체이시다. 우리는 이제 그분으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음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었다. 그분이
부활하시어 우리를 떠나가심으로서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었다. 이는
이제 사랑이 육체에 한정되지 않고, 온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령강림은 수수께끼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구체적인 사랑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는 거절할 수 없는 주님의 초대장이다.주님의 얼에
잠겨 살라는 말씀이며, 제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권고다. 나는 주님의 영을
갈망하며 그분의 영을 지니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는가? 사랑의 척도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함께 있기를 바라는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만나고, 나의 유익을 찾거나 심리적 만족감 때문에
특정한 부류의 사람만을 만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소외와 분열을 일으키고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고 얼이 빠진 채 살아가는 이들이다. 나도
주님의 얼인 사랑이 선물로 주어졌음에도 넋을 잃고 하늘만 쳐다보던
갈릴래아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불어
넣어주신 숨결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 나답게 제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자!
성령 안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여 불의에 저항하고, 용서와 화해를
증거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수도회] 2015.05.23.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소식이 들려 올 겁니다.
누가 어떻다 하더라 그게 사실일까?
설마 그럴려고... 나에 관한 일이 아니기에 정확한 팩트가 무언지
알 수가 없기에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점점 확대재생산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구경꾼도 되었다가 중개자도 되었다가
재판관이 되기도 하지요.
저는 SNS가 점점 소통이 어려운 이 시대를 위한 최고의 소통도구라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확대시키고 날라 사람을 무참히 매장시킬 수도 있는
무섭고 흉칙한 살인도구가 될 위험성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의 일에 너무 개입하지 맙시다.
남의 일에 밤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맙시다.
그게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거저 묵묵히 주님의 길을 따르면 될 뿐입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일이고 우리의 구원과 연관된 일이 아닐른지요?
모바일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블로그앱에서 보기
[출처] 2015.05.23.|작성자 알타반
[출처] http://blog.naver.com/osspaolo/220357913383
알타반의 말씀사랑
- 오상선 바오로 작은 형제회 신부 -
◈ [서울] 성령 강림 대축일
2015년 나해 5월24일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ㄷ-7.12-13
<또는 갈라 5,16ㄴ-25>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15,26-27; 16,12-15>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제자들이 모여 기도했을 때, 성령이
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이 모인 이곳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들은 안정된 노후를 위해서, 갑작스러운 사고를 대비해서,
병원비 절감을 위해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각종 보험에 가입합니다.
보험에도 종료가 많습니다. 화재가 났을 때를 위한 화재보험, 재난과
사고를 대비한 생명보험,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교육보험, 건강을 위한
의료보험, 안정된 노후를 위한 연금, 자동차 운행을 위한 자동차 보험,
주택 마련을 위한 주택청약, 요즘 선전을 많이 하는 상조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저도 자동차 보험에 가입했고, 의료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으며,
동창신부가 책임을 맡고 있는 평화상조에도 가입했습니다. 보험의 정신은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후를 위해서, 갑작스러운 사고를
대비해서 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성령은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었습니다. 성령은 박해와 고통을 극복하는
굳셈을 주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임을 알 수 있도록 믿음을 주었습니다. 성령은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령은 세상의 어떤 보험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보험은 가입을 하고 보험료를 납부해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주님을 믿고 따르며 마음을 열면 하느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시는 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에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온유, 절제, 진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 성령의 은사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무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다.
성령이 계시면 부활하신 하느님 여기 계시고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고
교회는 성삼위와의 통교를 의미하고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이 되며
선교는 성령강림의 축제가 된다.
전례와 그리고 미사는 하느님왕국에 미리 참여함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성령으로 하느님으로 가득 차리라! 아멘.”
성령강림의 커다란 의미는 ‘하나 됨’이라 생각합니다. 분열과 불신의 벽을
허무는 것, 신분과 지역의 벽을 허무는 것,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 바로
이것이 성령 강림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언어로 사도들의
이야기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습니다.
지구촌에는 아직도 많은 분쟁이 있고, 그런 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삶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왜
죽어야하는지도 모른 체 허망하게 죽어갑니다. 여기에는 증오와 미움,
분노와 편견 그리고 욕심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며,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는 나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
관계가 분노와 미움, 욕심과 질투입니까? 아니면 평화와 기쁨, 용서와
사랑입니까?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제자들의 그 믿음이 오늘까지
2015년 나해 5월24일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ㄷ-7.12-13
<또는 갈라 5,16ㄴ-25>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15,26-27; 16,12-15>
제자들의 그 믿음이 오늘까지
상상의 세계 동화속의 이야기들은 황당한 내용으로 잘 꾸려갑니다.
많은 말들을 하지만 예수님처럼 신기한 말씀을 하신 분은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약발을 내는 신기한 에너지 같은 성령이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예수님 말씀은 새롭고 신기한 내용들이 많은데도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제자들의 그 믿음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톨릭교회가 놀랍지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인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2015년 나해 5월24일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ㄷ-7.12-13
<또는 갈라 5,16ㄴ-25>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15,26-27; 16,12-15>
어떤 형제님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가정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내조 잘하는 아내,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형제님께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계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이 형제님의 아내와 우연히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가정에 대한 만족도가 큰 형제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이 자매님 역시 만족도가 무척 클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뜻밖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남편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고,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제 마음에 들지 않죠.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왜 이렇게 말썽을 부리는지 정말로 힘들어요.”
형제님은 가정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컸지만, 자매님은 정반대로
만족도가 너무나도 낮았습니다. 같이 사는 부부 사이에 느끼는 감정이
왜 이렇게 다를까요? 그리고 이 가정은 과연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부부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야 하는데, 이 부부는 서로 다른 부분을
바라보며 따로 걷고 있는 모습입니다. 정말로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주님과 우리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크신 분들이 있으시죠. 그런데 자기 멋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면서 자기 좋은 것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남의 일이라 생각하면서,
‘나만 잘 되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으로 만족도 높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삶이 과연 참 행복의 삶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삶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이런 삶에 절대로 만족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당신께 맞추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을
성령을 통해서 주시지요. 지혜의 영, 용기의 영, 그리고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영입니다.
그 성령을 주신 날을 기념하는 오늘입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들은 과연
주님의 만족도를 높이는 역할에 충실한 지를 다시금 묵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주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즉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향해 주님께 맞추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 행복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 나가는 것(박해수).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올라가야 편히 내려올 수 있는 길을
만납니다.
오그 만디노가 제안하는 자신감의 습관
(웨이슈잉, ‘하버드 새벽4시반’ 중에서)
성공학의 대가 오그 만디노(Og Mandino)는 자신감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공하기 위해 갖추야 할 덕목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만디노는 이렇게
제안한다.
1. 용기: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가져라. 스스로 출신이나 부모, 국적 등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우리 운명은 우리 손으로 선택할 수 있다. 성공을 원한다면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2. 긍정: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긍정해야 한다. “신발 한 켤레를
더 갖지 못해 짜증이 난다면 이는 두 다리를 갖지 못한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가진 두 다리의 귀중함을
발견하면 더 큰 긍정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3. 장점 발견: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시켜서 목표에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추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듯이 늘 실패만 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당장 가진 것이 부족하고, 재능이 없다고 생각될지라도 자신이 가진
장점을 찾아내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면 자신감과 성공이
찾아올 수 있다.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서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계신데,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자신의 만족도와 주님의 만족도를
일치시켜서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도시.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불꽃 모양의 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24일 성령 강림 대축일
< 성령을 받아라 >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ㄷ-7.12-13
<또는 갈라 5,16ㄴ-25>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15,26-27; 16,12-15>
< 불꽃 모양의 혀>
‘생활성서’사의 ‘이 시대 성자에게 행복을 묻다’라는 책에 2007년 94세의
일기로 선종하신 ‘아베 피에르’ 신부님의 일대기가 소개되었는데 참으로
감동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로 거의 매년 선정되어온 분입니다.
그분은 1917년 리용의 상류층 가톨릭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사업가로서도 성공했지만 또한 걸인들에게 면도와 이발을 해 주고
아침식사와 빨래 등을 도와주는 봉사에 열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면도를 해 주다 실수를 하였고 아이들 앞에서 심한 말을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 준 말은 피에르 신부의 기억에 평생
남았습니다.
“얘들아, 불쌍한 사람들을 보살필 자격을 갖춘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았지?”
오직 사랑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살게 된 데에는 부모님의 이런 사랑이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년시절 피에르는 힘든 사춘기를 겪었습니다. 자신의 신앙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휩싸였고 한동안은 범신론에 빠져
자살충동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태리 아씨시에 성지순례 갔던
날, 즉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그는
성령의 불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는 수첩에 바로 이렇게 썼습니다.
“아! 나의 소원은 사랑이라는 말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땅 전체가 고백하는
어느 종 울리는 아침에 죽는 것.”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은 ‘불’의 모양으로 내려옵니다. 불은
어떤 때 사용되는 것일까요? 당연히 태우는 용도로 쓰입니다. 불을 받아
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느님의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 850명을 대항해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일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준비해 놓은 소를 제단에서 불살라버리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세례 때 성령의 불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 제대 위에서
당신을 불사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제물을 통해 죄가 용서받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 아버지와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불로 살라져 세상을 위한 또 다른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은 순교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피 흘리고 부서져 봉헌되고 먹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도 이제는 자신이 아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게
됩니다. 아니 죽게 됩니다.
1931년 열아홉 살이 된 청년 피에르(본래 이름은 ‘앙리’)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중 가장 엄격하다는 카푸친회에 들어가 맨발로 다니며 옷을 입은
채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고 매일 자정에 일어나 새벽 2시까지 기도하는
생활을 8년에 걸쳐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런 고생스런 수련 생활로도
만족할 수 없어 ‘타인에 대한 봉사’에 대한 열망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로마의 허락을 받고 1942년에 그르노블의 작은 성당의 보좌신부가
됩니다. 당시 2차 세계 대전 중이었고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역시
유태인 체포령이 발동 중이었습니다. 피에르 신부는 유다인들의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와 스페인 등지로 그들을 피신시키는
비밀 안내원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게슈타포가 그 주동자를 찾게 되자 앙리
신부는 이제 피에르 신부라고 불리기 시작하여 그때부터 그의 이름이
아베 피에르(베드로 신부님)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는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스페인에서 경찰에 붙잡혀 독일군에게 넘겨지기
직전에 간신히 프랑스 정부에 의해 구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가 해방되었습니다. 용감한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유명해진 피에르 신부를 정치 쪽에서 손짓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나는 신부이지 정치인이 아닙니다.”라고 거부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더 돕기 위한 마음으로 관할구역 대주교에게 허락을 받고
국회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이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과
비슷하다고 여겨 그들을 위한 유스호스텔을 손수 만들 계획을 세우고
손수 작업에 들어갑니다. 지금 엠마우스는 행려자들을 돌보는 공동체로
프랑스에만 100개가 넘고, 35개국 400여 개의 큰 공동체가 되었고 큰
곳에는 수천 명씩 살고 있습니다. 처음 가난한 이들을 데려와 살 때 돈을
마련하기 위해 피에르 신부는 쓰레기통을 뒤져 박스 등을 주워 파는
넝마장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54년 영하 20도의 매우 추운 겨울 퇴거명령서 한 장을 손에
꼭 쥔 할머니가 얼어 죽었고 폐차 속에서 생활하던 젊은 노동자 가족의
아기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피에르 신부는 라디오 방송국으로 달려가
신문기자 친구의 도움을 받아 5분 동안 이런 연설을 합니다.
“친구들이여, 도와주십시오. 새벽 3시에 세바스토플 뷔레바드의 인도에서
한 여인이 얼어 죽었습니다. 손에는 전 날 발급되어 그녀를 노숙인으로
만든 퇴거 명령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매일 밤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헐벗은 채 굶주리며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이 끔직한 일에 맞서기엔
숙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프랑스의 도시에, 파리의 곳곳
어두운 골목 등불 아래마다 우애 지원 센터의 이름으로 플랭카드를
걸어두어야 합니다. ‘여기에 침대와 담요 그리고 스프가 있습니다. 누구든
필요하면 먹고 쓰세요’하고요. 오늘 밤에 아스팔트 위나 처마 밑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찰리 채플린이 내 놓은 2백만 프랑을 비롯하여 5백만 프랑의 성금이
모아졌고 엠마우스 본부에는 격려 전화와 편지가 쇄도하였으며 몇 주에
걸쳐 프랑스 전역에서 자원봉사자 신청이 줄을 잇게 된 사건입니다.
피에르 신부는 그 이후에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거리를 뒤지고 다녔고, 밤에는 노숙자들이 술과 칼부림 등이
일어나지 않게 지켜야 했으며, 주일에는 미사를 8대나 할 정도로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나 인종차별, 모든 형태의
억압과 모순을 발견할 때이면 그 대상이 교회일지라도 통렬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불 때문입니다. 불이 붙으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이 붙이면 편할 수 없고, 불이 붙으면 부자일 수 없고, 불이 붙이면
배부르고 따뜻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을 통한 자신을
불사름을 통해 이웃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며 이웃들을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만들어줍니다. 바벨탑에서 경험했던 바로 그 분열.
그 분열이 인간의 교만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벌이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를 흩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서양의 ‘언어(language)’는
‘혀(lingua)’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혀는 곧 언어이고 언어는 곧
일치와 소통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께서 내려올 때 그 성령의
불이 ‘혀’의 모양이었다는 말은 성령께서 일치와 소통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불’로 그 사람을 태움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성령의 불로써 태워 하느님과 인간의, 또 인간과
인간의 소통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불혀’란 바로 우리 자신을 성령의 불로
태우지 않으면 하느님과도 이웃과도 온전한 소통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지금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이 소진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힘이 아닌 성령의 불 때문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억지로 하는 봉사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태양은
자신이 좋아서 스스로 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령강림은 우리 본성이 훨훨 타서 세상의 빛이 되는 삶으로
만들어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게 우리를 통해 세상을
밝혀주는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제가 평화방송에서 급하게 강의요청을 받아 강의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약 한달 정도는 묵상 글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약속대로 오셨습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24일 주일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20,19-23)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ㄷ-7.12-13
<또는 갈라 5,16ㄴ-25>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또는 15,26-27; 16,12-15>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은 하느님의 얼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성령세미나를 참여해 보면, 성령의 역사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보통 5일째 되는 날 ‘성령 안수식’이 있습니다. 이 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놀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자매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았는지 자기 안에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발 한번 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다고 기쁨을 회복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웃을 수밖에 없게 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그 와중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희 빛났습니다.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장거리 운전에 강의를 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였는데도
지치지 않고 일주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은 또한 어둠을 비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죄를 알게 해 주고, 고해성사에로
인도하여 자비를 입게 합니다. 마음을 비추어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씀에 맛들이게 해주십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숨, 입김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입김은 곧 바람(히브리어 ‘루아흐’)입니다. 이 바람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성령, 우리 생명의 의미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령 안에 우주는 온통 잠을 깨고
왕국을 낳는 산고로 신음하고 있다.
성령이 계시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여기 계시고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고
교회는 성삼위와의 통교를 의미하고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이 되며
선교는 성령 강림의 축제가,
전례는 기념이자 왕국에 미리 참여함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리라.
- 이냐시오 드 라타뀨이에 대주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곤드레 만드레 취한 한 남자가 성당 안으로 들어서더니 곧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신부님께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 말이 없어서 헛기침을
하며 신부가 안에 있다는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께서 고해실의 작은 가림 막을 ‘똑,똑,똑’ 세 번
쳤습니다. 그러자 그 쪽에서 말했습니다. “노크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쪽에도 휴지는 없어요!” @@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 술 취한 사람과 성령에 취한 사람이 비슷하답니다.
말수가 는다. 노래를 한다. 권한다. 운다. 용감해 진다. 지배당한다.
중독된다. 안주가 필요하다(말씀).냄새를 풍긴다.(성령을 받은 사람은
향기를 풍기죠)@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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