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戶梁侯廷勳去思碑
위치 ; 동명리 명월진 남문 북쪽(한림읍 동명리 2097번지→현위치)
유형 ; 비석(선정비)
시대 ; 조선
만호는 조선후기 무관직(종4품) 벼슬이다. 이곳에 적혀 있는 만호는 명월진수군만호로서 지금의 해군부대장 격이나 실제로는 명월진의 행정책임자였다. 다른 진에는 조방장을 두었는데 명월진에는 직급이 높은 만호를 두었다. 명월 지역이 군사적으로 요충지대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명월진에는 영조 40년(1764)부터 고종 32년(1895)까지 112인의 만호가 재임했다. 비석과 좌대가 있었으나 1970년대 마을 안길 확장 사업을 하면서 좌대가 허물어지고 비석도 여러 개가 없어졌다.(명월학구 향토지 23쪽, 북제주군 비석총람 95쪽)
이렇게 비석들이 분실․파손되기도 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는 관리가 힘들며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려는 선인들의 뜻을 이어받기 어려우므로, 일괄적으로 관리도 하고 역사 교육의 터전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북제주군은 1999년 4월 28일 커다란 만호비 표석을 세우고 흩어져 있던 만호비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다.
동명리 가명물 동쪽 양만생씨 집 옆 밭 안 잡초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앞면에는 “萬戶梁侯廷勳去思碑”라는 비명과 ‘恕祿(?)施仁 召杜奚異’라는 작은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咸豊元(八?)年十二月 日’이라는 연대 표시가 되어 있다. ‘咸豊’은 청나라 연호로서 함풍원년이면 서기1851년이다.
양정훈은 1806년 출생하여 경사무과(京師武科)에 급제하고 유향좌수(留鄕座首)와 수군만호(水軍萬戶)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하였으며 1865년 사망하였다. 그는 철종2년(1851) 3월 13일에 부임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폄하(貶下, 치적이 나쁜 관원을 벼슬을 떨어뜨려 물리침)되었다.
비석은 그가 이임한 후에 세운 것인지 재임중에 세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재임 중에 세운 것일 가능성이 더 많다.
별명이 양호랑이로서 눈빛이 워낙 무서워서 눈을 뜨고 똑바로 쳐다보면 닭들이 놀래 자빠졌다고 하며, 온몸에 털이 많았었다고 한다. 한림 앞바다에 이양선이 나타난 때가 있었는데 양정훈이 가슴을 풀어헤치고 눈을 크게 부릅뜨니 이양인들이 겁에 질려 달아났다고 하며, 이런 일로 해서 만호 벼슬을 얻게 되었다고 전해온다.(이양선은 알고 보니 조난선이었단다.)
《작성 2010.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