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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묵상글 ( 사순 제 3주일. - <목마른 사람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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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마른 사람아>
그대
살아있어
목마른 것이니
사람아
목마름을
부끄러워하지 말게나
다만
그대의
타는 목마름
한 사발
시원한 물로
결코 삭일 수 없나니
그대
온 몸에
서서히 스미어
늘
푸르게
되살아나게 하는
핏맛 밴
뜨거운 물로
목마름을 푸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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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백 사람의 사랑을 합쳐도
오늘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목말라 죽겠다고,
그러니 물을 달라고 모세에게 또다시 들이댑니다.
들이대는 것만 놓고 생각하면 참 못된 족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바꿔 생각하면 목마른 것을 모세에게 호소하고
물을 달라고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이 나올 수 없는 사막에서 자기 힘으로 우물을 파고 물을 구하려 하지 않고,
또는 다른 누구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 않고 모세에게 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막은 물이 없는 곳이고,
사막에서는 목이 마르기 마련인데 우리 인생이 바로 사막의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런 줄 알고 그래서 목마를 때 모세에게 물을 청하면 다행인데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은 목말라 하지 않고 예수님께 물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하여 모세의 백성들은 영적 양반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도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거나
목마른데도 참거나 고상한 척하지 말고 모세의 백성처럼 들이대는 것이 낫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은 우리 인간은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주님께 물을 달라고 청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신다는 것,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는 다른 누가 아닌 주님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물을 달라는 백성 앞에서 모세에게 바위를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바위입니까? 그 바위가 암반수이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물이 나올 수 없는 바위에서도 물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함이지요.
탈출기가 이것을 가르친다면 복음은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탈출기가 물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란 것을 가르친다면
복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물은 야곱의 우물물과 다름을 가르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물을 마셨기에 다섯 남자로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섯 남자의 사랑을 합쳐도 하느님 사랑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백 남자의 사랑을 합쳐도 하느님 사랑보다 못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갈증은 인간의 사랑으로 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실 이 세상에서 연명케 하는 사랑이지
저세상까지 살 수 있게 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만이 저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순 제3주일에 이런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저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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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물이 상징하는 것은 제 2독서에 성령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물을 통해서 영혼의 정화와 성령의 작용과 활동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구약성서에서 물은 구세사적 관점에서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현세적 응보수단으로서의 물의 역할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에 충실한가 아닌가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물을 주기도, 거부하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물이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이며 표시입니다(창세 27,28; 시편 133,3).
둘째로 처벌의 도구를 나타내는 데 이는 하느님께서 홍수, 폭우, 파도 등을 통해서 불의한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셋째는 정화의 수단입니다. 물을 생명을 유지하는 힘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깨끗이 씻고 불결함을 제거해 주는 능력도 갖고 있습니다. 육신의 청결을 위해 사용되던 이 물은 흔히 도덕적 결백성으로 상징합니다. 몸을 깨끗이 씻는 여러 가지 정화 예식은 내적으로 마음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또 누구든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을 가까이 하려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예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물은 사막을 과수원으로, 불충한 백성을 진실한 이스라엘로 변화시킬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하느님의 영을 상징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예언자들에 약속된 생명을 물을 인간들에게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물은 창조주 하느님의 생명을 주는 힘인 성령 바로 그 자체입니다(요한 7,39.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통한 정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정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사용한 물(요한 2,6)을 ,영을 의미하기도 하고 정화하는 말씀을 상징하기도 하는(요한 15,3) 술로 변화시킴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정화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카르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영혼의 목마름 속에 어둠 속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애욕의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이 남자 저 남자 품에 안겨보았지만 타는 목마름을 해갈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무엇을 목말라하는지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자 예수님은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며 여인의 아픈 곳을 건드리십니다. 남편이 없다는 여인의 말에 예수님은 여인의 어두운 과거를 들추어 내십니다. 여인은 이제까지 정식으로 혼인도 하지 않고 다섯 남자와 살았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닙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을 여인은 예언자로 인정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곧 성령 말고는 어느 누구도 여인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자기 과거를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는데,그가 그리스도인지도 모르니 같이 가서 확인하자고 부추깁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들과 함께 묵으시기를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부정을 탈까봐 가까이하지 않는 사마리아 동네에 들어가서 이틀 동안 묵으며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분을 구세주로 믿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은 영혼의 생명수인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안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참되고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적 존재를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은 영혼의 생명수인 성령입니다. 바로 이 성령은 아무리 죄 많은 이들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죄에 갇혀 좌절하지 않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바라보며 충만한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방과 성찬용 잔
이 지극히 거룩한 곳이 끊임없는 신성모독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1897년에 가톨릭계 신문 “부르쉘의 애국자(Le Pa triote de Bruxelles)"는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순례자나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떠한 미사도 집전하지 못하고 또 미사참례도 못하게 되어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든다. 그 곳은 옛날에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봉행하셨던 그토록 거룩한 곳이 아닌가!
오직 단 한번 19세기에 그 성찬식이 열렀던 방에서 거룩한 미사 성제가 봉헌되었다. 더우기 그것도 개종한 유태인 신부 라티스보네(Ratisbonne)에 의해 집전되었다. 터키에 있는 한부인이 이러한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그를 위해 8,000 마르크의 돈을 보내 왔다. 그러나 미사가 시작된 지 30분 후에는 이미 터키의 파수병들이 들이닥쳐서 춧불을 끄고 참례자들을 쫓아내 버렸다.
구세주께서 포도주를 당신의 고귀한 피로 변하게 하셨을 때 그분의 고귀하고 성스러운 손에 들렸던 성찬용 잔은 성 베드로와 그의 제자인 성 마르코에 의해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로 옮겨졌다.
성찬식이 열린 방이 있던 그 집은 성 마르코 가족의 소유가 되었다. 그 성찬용 잔은 성 식스토 2세 시대까지 로마의 교황청 미사 때 교황에 의해 사용되었다. 교회의 보물을 탐냈던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 동안에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부제였던 성 라우렌시오는, 모든 귀중한 물건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이 쓰신 신성불가침의 술잔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이 순교하기 사흘 전에 친구를 통해서 그 잔을 한 통의 편지를 동봉하여 자신이 태어났던 스페인의 후에스카에 사는 친척에게 보냈다. 그 곳에서 성찬용 잔은 713년까지 보관되었고 그 후 여러 도시와 수도원에서 그 잔을 보관했다. 대략 1424년 이후로 오늘날까지 그 성찬용 잔은 스페인의 도시 발렌치아의 대성당에 성스럽게 모셔져 있다.
이 성작은 직경이 9cm 이고 높이가 17cm 이다. 이것은 혹적색의 커다란 마노조각으로 만들어졌다. 타원형의 다리부분은 가로 16cm, 세로 14cm이다. 매듭진 다리기둥과 손잡이,그리고 다리의 피복장식은 금으로 조각되었다. 수세기가 경과하는 동안에 이 고귀한 성유물의 다리는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었다.(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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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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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장면을 들었습니다.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결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빈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한 사마리아 여인과 자신을 내어주고 내어주어도 결코 다할 수없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퍼주는 샘솟는 물을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렇게도 목말랐던 이 여인은 이제 마침내 일곱 번째 남자, 완전한 남자, 완전한 사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목마른 두 영혼의 만남, 이 아름다운 만남은 곧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사랑과 생명에 대한 목마름으로, 영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여기 ‘양주 올리베타노 수도원’이라는 우물에 물을 기르러 와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주시는 “샘솟는 물”(요한 4,10)을 마시겠다고 이 ‘거룩한 미사’에 함께 모였습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만남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 바로 “샘솟는 물”(요한 4,10)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라고 청하면서, 바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때는 십자가에서처럼 우물가에서도 “정오 무렵이었습니다.”(요한 4,6). 우리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요한 4,23). 바로 이때가 서로 상종하지도 않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때요, 십자가에서 성전 휘장을 찢으신 때요(마태 27,51), 당신의 말씀과 몸을 쪼개어 오시는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네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요한 4,10)
이 질문은 목말라하고 있는 우리가 ‘진정 참된 목마름이 무엇인지’, ‘대체 무엇에 목말라해야 하는지’, ‘그것을 채워줄 자가 누구인지’를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결국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주제’는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이지에 대한 것이요, ‘둘째 주제’는 그 선물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것입니다.
‘첫쩨 주제’인 ‘하느님의 선물’은 바로 <짧은 복음>에서는 “샘솟는 물”(요한 4,1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인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라고 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아닌 것에는 그 어떤 것에도 더 이상 목마르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만을 만나게 되는 일을 말해주며,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자기를 내어주지 않고는 못 베기는 예수님의 목마름이 솟아오름이요, 그 물이 그 사람 안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이웃에게 번져감이요,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시킴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 물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그 물이요(요한 19,34),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요, 영이며 진리요, 곧 구원입니다. 바로 이 물이 <제1독서>에서 예표된 호렙의 바위에서 터져 나온 그 물입니다(출애 17,6).
그래서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로마 5,5) ...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로마 5,8)
오늘 <복음>의 ‘둘째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입니다. 곧 참된 예배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실 분, 메시아인 그리스도라는 계시입니다(요한 4,25). 참된 예배는 장소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드리는가? 그리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지금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요한 4,23)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영이요 진리이신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미사가 십자가에 제헌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로마 5,1-2)
이제,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 장면을 보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은 신앙고백으로 마무리 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이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6,39)라고 고백했듯이,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분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요한 4,42)
이처럼 만나는 이를 믿는 일, 그리고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만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우물에서의 만남이요, 또한 십자가에서의 만남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서의 만남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만남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부분인 ‘짧은 복음’만을 살펴보았습니다. ‘긴 복음’에서는 제자들과의 대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는 ‘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제자들과의 대화인 ‘긴 복음’에서는 ‘빵’(양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는 “내 양식은 나르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 중에 당신 자신을 “샘솟는 물”(요한 4,10)로 주심에 감사드리며, 그 은총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내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이 이루어지는 일, 그래서 하느님 아닌 그 어떤 것에는 목마르지 않는 일, 동시에 모든 일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일, 그리고 하느님이 내 안에서 샘솟게 하는 그 물을 이웃에게 퍼주는 일, 그리하여 이웃들과 함께 “이분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요한 4,42)라고 고백하고, 영과 진리로 아빠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일을 몸소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주님!
빈 물동이의 목마름으로 우물에 긷게 하소서.
당신을 만남이 믿는 일, 사랑을 고백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십자가의 우물에서 샘솟는 물을 마시게 하소서.
몸을 쪼개는 일, 장벽이 무너지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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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명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생명을 줍니다. 활력을 줍니다. 특별히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생명의 물’과 차별 없는 사랑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필요한 은총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 번째 주제입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으로 살려면 말씀이 필요합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썩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습니다. 물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합니다. 정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영혼의 거울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더러움을 비추어주고 깨끗하게 하도록 일깨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한 말씀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혼을 맑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목말라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4,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단순히 마시는 물이 아니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고 행동하게 될 때 그 안에 구원의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신앙인이 영적 양식인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듣지 않으면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4,34). 결국, 단 하루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않으면 진리 안에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양식은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하루라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화답송을 기억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묵시록 22장 17절에 보면“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물을 거저 받아라.’그야말로 ‘공짜로 받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준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담을 그릇은 내가 준비해야 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으니 문제입니다.
묵시록 3장 20절에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분께 매달리기도 전에 먼저 나를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 일에 바쁘면, 내 안이 시끄러우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그분뿐이심을 알고, 다가갈 때에만 비로소 그분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지 않는 데 억지로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데 너무도 귀한 말씀이라고 책장 안에 고이 모셔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금박을 입히고 가죽으로 포장하여 지퍼를 채운 채…. 어떤 사람은 어떤 말씀이 있나 들춰보기는 하는데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사실 실천함으로써 풍요롭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행하게 될 때 은총이 됩니다.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대로 실행함으로써 축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병원에 봉성체를 다녀오면서 환자분에게 “성경을 읽으십시오.”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눈이 잘 안 보여서 읽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읽는 법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성경을 탁자에 갖다 놓고 간호하시는 분이나 누가 병문안을 오거든 꼭 성경을 몇 구절 읽어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 읽는 사람도 혹 신자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접하는 기회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군불 때고… 일석삼조입니다.”
어느 집에 환자방문을 갔더니 개신교 신자가 요양보호사로 와 계신 데 시간이 남으니까 환자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계시다라고요. 참으로 기뻤습니다.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는 그분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묵주기도를 바치나? 생각해 봤습니다. 활기 있는, 생명 있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주제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는 물을 달라는 예수님께 “선생님은 유다 사람이면서 사마리아 사람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유다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앙숙관계, 상종하지 않던 때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에 관해 예수님의 얘기를 듣고는, 인간적인 마음에“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4,15).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이틀이나 머물렀습니다. 상종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함께 지냈다는 것은 벽을 넘은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옳지 않은 사람도, 의견이나 성격이 다른 경우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참되게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
우리도 벽을 넘어야 합니다.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멀리했던 사람들, 상처받았다고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나만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편견과 오해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구원에 집중했듯이 오늘 우리의 영혼 구원에도 집중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등진 사람은 많았지만, 예수님께서 등을 돌리시고 포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절망하는 여인을 찾아 나서서, 그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위로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목이 타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아 욕구불만과 정서불안, 정신적인 아픔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성사로 다가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양식을 주십시오.”하고 간절히 청하면서 그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결국에는 깨달음과 더불어 더 큰 은혜를 입게 됩니다.
특별히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미사성제를 통하여, 성체조배나 일상기도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양소입니다. 매일 섭취해야 하는 양식입니다. 구원의 생명수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가운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 하리라.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알맞은 축복, 은총을 더해 주십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41,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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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 신문 홍보를 하면서 ‘교회신문’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서부지역에 있던 ‘가톨릭신문’이 철수하였습니다. 그동안 가톨릭신문을 구독하던 독자들은 3년 동안 교회신문을 구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서부지역에 신문홍보를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었고, 구독신청을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홍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교우들에게도 적극 권면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신문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LA에 머무는 동안 연도와 연미사를 봉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면서 깊은 상심에 빠져있는 교우가 있었습니다. 제게 연도와 미사를 부탁하였고, 저는 기꺼이 고인을 위한 연도와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서 동부에서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고인을 기억하고, 유족을 위로하려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입니다. 한국의 감독은 ‘히딩크’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평가전에서 5:0으로 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히딩크 감독의 별명은 ‘오대영’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감독들은 한국 선수들이 체력은 강하지만 기술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고 하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한 체력을 요구하였습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16강을 넘어 8강까지 올라갔을 때입니다. 모두가 만족하고 있을 때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I am still hungry!” 나는 여전히 목마르다고 하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목마름을 채워주듯이 한국 선수들은 4강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독일에게 아깝게 1:0으로 패배해서 결승까지는 가지 못하였지만,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끌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고, 2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의 순위가 올라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우리들의 신앙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태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사제들의 식어버린 열정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강론을 준비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대신에 개인적인 취미활동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제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해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하는 좌절감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자신의 책임을 교회와 제도의 탓으로 회피하는 무능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미 지나간 팬데믹을 핑계 삼아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신자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좌절하는 신자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주교님께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저를 미주가톨릭평화신문으로 보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신문구독자를 늘리는 것입니다. 직원들과 함께 교회의 소식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사를 재정적으로 안정되게 운영하는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팬데믹 때문에 신문홍보를 제대로 못하였지만 이제는 열심히 신문홍보를 다녀야 합니다. 신문사 운영을 위해서 광고를 유치고, 좋은 필진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동북부 엠이의 일을 맡겨 주셨고,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맡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맡겨 주셨으니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며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작은 씨앗 안에 숨어 있는 열매와 곡식을 보기 때문에 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고, 이 세상의 것들을 넘어서는 참된 진리를 위해서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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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나라에서는 못생긴 사람을 오징어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고, 또 호박이나 메주에 빗대어서 말합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까 싶어서 찾아보니, 일본에서는 배꽃처럼 못생겼다고 말하고, 불가리아에서는 샐러드처럼 못생겼다고 말하더군요. 나라마다 못 생김의 기준으로 삼는 사물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물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 같습니다. 자기 세계에서는 전혀 못생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고 또 최고로 멋진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잘 생기고, 못 생기고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구분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요즘에 거북목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모니터를 많이 보면서 거북목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 계속 나가다가는 거북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표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계속 진화되는데, 진화의 방향이 거북목으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백 년 후, 거북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상이고, 거북목 없는 사람이 비정상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미의 기준이 이제껏 계속 바뀌었던 것을 생각하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지금의 판단이 결코 옳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미의 기준도 바뀌는 것처럼, 지금 맞다는 것도 어느 순간 당연히 틀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온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목이 마르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온 세상 구원에 목이 마르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이 이방인 취급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에 목마르셨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현실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동문서답하는 형식으로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하십니다. 그 결과 진정한 예배에 대한 말을 나눌 때는 처음 생수에 관한 대화하는 다르게 일 보 전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이제 고을에 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직접 증언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벌건 대낮에 우물가를 찾았던 여인인데 말이지요.
주님의 뜻에 우리 모두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운다면 주님 뜻이 세상에 펼쳐지지 않습니다. 우리 구원에 목이 마르시는 주님의 갈증을 풀어 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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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알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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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을 가리는 장막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마을이 서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돌아가려면 다리가 필요합니다. 민족과 믿음을 가로막고 있는 강과 벽을 넘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다리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인간을 영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다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물 옆에서 한 여자를 만나셨습니다. 여자는 경멸의 눈빛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피곤하고 목이 마른 그저 보잘것없는 유대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물을 가지고 있기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길을 두레박과 가족도 있고 가르디움산 위에 견고하게 세운 성전도 있었기에 교만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그 허상들이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아끼는 우물은 영혼을 키우는 생명수가 아니라 더럽혀진 우물일뿐이고 세상의 가족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가족이 될 수 없으며 주님이 계시지 않는 벽돌로만 지은 성전은 위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한 순간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깨달은 순간 믿음과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근원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입니다. 지금 나엑게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는 것들이 어쩌면 나를 가두는 감옥인지도 모릅니다. 나를 보호해주는 집과 재산, 욕망은 장막이 되어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우물에 있던 그녀가 믿고 의지했던 삶을 찢고 조각내었습니다. 믿음의 샘물에서만이 하늘나라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자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길을 밝혀주는 등불입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몸을 묶고, 눈을 가린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독수리 날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날지 못하는 닭입니다. 아직도 다리 저편을 건너지 못하고 이쪽에 머물러 있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자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우리는 아직도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아직도 속세의 꿈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재산과 욕망은 믿음으로 가는 강물을 가로막는 무덤입니다. 위선과 환상, 형식적인 믿음, 불효는 여전히 우리의 내면을 볼 수 없게 덮고 있어 주님을 만날 수 없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거둬내야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려야 가볍게 주님이 계신 곳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흑과 백을 구분하는 칼날이 되어 죄와 속세의 편안한 삶과 위선적인 믿음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소서.
주님의 말씀이 저를 가두고 있는 무덤을 무너뜨려 믿음의 강물이 흘러 내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도록 하여 주소서. 그리고 진정한 행복을 위해 사랑이 피어나게 하여 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마리아 여인이 믿음을 깨우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2. 세상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삶은 바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갈망하고 있는 영적인 삶은 무엇입니까?
3. 은혜의 강이며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말씀의 나눔
1. 물질적 부족함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의 은총으로 영혼의 부족함을 알게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영적인 삶에 어떤 의미입니까? 참회와 묵상을 통해 주님께 기도해보십시오. 주님께서 영적인 삶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여 주실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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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
-세상의 구원자 주님과의 만남-
저는 늘 오후 8:30분전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12시30분쯤 일어나 준비한후 “살기위해” 그날 강론을 씁니다. 강론 쓰기전 즉시 확인해 보는 밤사이 받은 메시지입니다. 메시지 셋이었고 마음에 담았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하닮의 신부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시고 거대한 산이지요.”
15년 이상 한결같이 ‘예수성심자매회’를 섬겨온 사랑스런 자매입니다. “산처럼!” “하루하루”는 제 삶의 모토입니다. 하루하루 흡사 첩첩산중의 산을 넘듯이 살아온 나날이었고,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이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날마다의 강론쓰기입니다.
“평안한 밤 되옵소서. 주님 안에서.”
25년 이상 참으로 한결같이 수도원과 저를 섬겨오다 얼마전부터 과로로 입원 치료중인, 제가 늘 고마워하는 자매입니다. 저는 수도사제로 서품후 한결같이 미사와 강론에 집중했고 2004년6월 부터는 매월 강론집을 이 자매님이 제 부탁에 호응하여 편집 제본해 주었습니다. 2022년 12월까지니 무려 만 18년 이상, 한달도 빠짐없이 매월 강론집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2023년 1월부터는 잠시 보류할지 생각중입니다. 자매님이 입원중임으로 제가 편집 정리한후 출타해야 하는데 여의치 않습니다. 참고로 2004년6월 강론집의 제목은 “광야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건강하게 충실하던 자매님이 뜻밖에 입원으로 잠시 좌절됐으니 전혀 예상 못한 일입니다. 주님 쾌유의 축복을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건강입니다. 아프지 마소서.”
간절한 글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랫동안 병고로 하루하루 힘겹게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孤軍奮鬪의 삶을 살고 있는, 저를 한결같이 따르는 타 수도회의 후배 수도사제입니다. 넋두리처럼 시작된 강론입니다. 요즘도 한결같이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으로 써드리는 1테살5,16-18절 말씀의 명약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는 갈망을 지니고 기쁨을, 기도를, 감사를 의식적으로 “선택-훈련-습관화”함이 제일입니다. 이래야 영혼도 튼튼해지고 주님을 만나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 요한복음 4장이 길지만 내용이 참 풍부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의 우리 신자들 모두를 상징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 갈증을 짐작할 수 있는 다음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내적갈등과 내적갈증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갑니다. 이리저리 내적분열로 내적갈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처없이 표류하며 살아가는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상징하는 바, 바로 내적분열과 내적갈망, 내적갈증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정말 생명수에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의 광야에서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며 대들던 믿음 박약한 사람들 또한 우리들 모습입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
물은 생명입니다. 생명수 물이 상징하는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즉시 하느님의 인도하에 호렙의 바위를 쳤고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비로소 해갈하니 말그대로 광야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광야 인생 여정중 목마르게 주님을 찾던 사마리아 여자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진짜 생명수가 샘솟는 생명의 샘, 호렙의 바위샘 주님을 만납니다.
정말 오매불망 목말라 간절히 찾던 생명의 샘 주님을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바로 우리 역시 야곱의 우물가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주님과의 만남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다음 사마리아 여자에게 주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눈이 열려 예언자임을 알아보자 즉시 주님으로부터 예배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니 우리에게도 참 유익합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사마리아 여자는 물론 우리 영혼도 주님의 생명수로 완전히 해갈되는 기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지상천국입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누구인지 묻자 주님의 즉답이 참 통쾌하고 큰 위로가 됩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이 바로 내가 바로 그 사람이신 하느님이자 예수님이신 그분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자 덕분에 영원한 생명과 참된 예배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이어 제자들 덕분에 주님으로부터 두가지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양식과 선교사명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씨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도 함께 기뻐하고 있다.”
영안이 활짝 열린 주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시며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는 말씀을 주십니다. 참으로 주님과 일치의 삶을 지향하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양식은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선교사명임을 깨닫습니다. 수확할 밭의 일꾼을 보내주십사 청하기에 앞서 내가 일꾼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니 깨달음의 절정입니다. 유다인, 예언자, 선생님, 스승님, 그리스도, 메시아에서 마침내 세상의 구원자로 활짝 계시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임을 알게 되었소.”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만남이 해피엔드로 끝나니 참 행복한 사마리아 여자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세상의 구원자 예수님께 대해 명쾌하게 요약해 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1-2.5)
세상의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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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2. 사순 제 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수님이 여인에게 많은 말을 하시는데 그 중에서 여인이 깜짝 놀란 부분은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이 부분의 말을 듣고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예언자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여인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옛 날 이스라엘 민족들은 결혼할 여성을 사고팔았습니다. 즉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낼 때 신랑 될 사람에게 돈이나 가축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도 아마 이렇게 팔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팔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인이 남자를 사랑하던 그렇지 않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은 그렇게 다섯 남자와 살았습니다. 사랑 없이 물건 취급 받으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잠시 사마리아 여인의 심정을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나는 한 여인입니다. 아니 남자들의 물건입니다. 나는 쓰이고 나서 실증나면 버려졌습니다. 남자에게 상처 입은 가슴은 이제 사막처럼 갈라져 있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나를 사람들은 죄인취급 했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지요? 사람들이 나를 죄인이라고 여기고 세상이 나를 버렸다면 나도 세상을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섞여 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난 정오에 그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물을 기르러 나간 것도 사람들을 피해서입니다.
이런 사마리아의 여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을로 달려갑니다. 사람들이 죄인으로 여기던 그 여인이 사람들 사이로 뛰어가 말합니다. '저분은 내가 겪은 일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인의 어두웠던 과거가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은 더욱 찬란히 빛납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시고 어두움으로 인해서 빛이 더욱 빛나게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 당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십니다.
이 모든 사건은 한마디의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갈증을 느낄 때도 또 세상의 어둠에 눌려 죽음과도 같은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또한 사막과 같은 적막하고 외로운 고통도 느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다오. 나에게 너의 사랑을 좀 다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목소리에 응답할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삶의 희망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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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작은 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언제 배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부터 불러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작은 별’이라는 노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늦은 밤 산책하다가 무심코 하늘을 봤습니다. 그리고는 새삼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별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수많은 별과 함께 이 우주의 한 별입니다.’
하늘에서 이렇게 제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고 늘 하느님 보시기에 빛나는 사람이라고요.
지금 이 작은 글을 보고 계신다면 자신에게 말해주세요.
‘너는 소중한 사람이고 하느님 보기에 빛나는 사람이야.’라고….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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