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기본: 가정 성화
창세 2,18-24; 히브 2,9-11; 마르 10,2-16 / 연중 제27주일; 2024.10.6
- 말씀의 흐름
순교자 성월이었던 9월에 이어서 10월은 전교의 달이며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부부의 혼인에 대한 말씀과 어린이를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교의 기본이 가정 성화임을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세상을 조성하시고 사람을 지어내신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협력하여 가정을 이루고 세상을 당신 뜻대로 다스리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 하고 물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가정을 꾸려가자면 세상의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면서 겪어야 할 어려움이 많은데 이에 관한 지혜를 묻는 게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느냐고 물었으니, 참으로 고약한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남녀의 결합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니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고 타이르셨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신자들의 혼인을 성사로 거행할 때 늘 봉독하는 말씀이 이 복음입니다. 교리 용어로 말하면 ‘불가해소성’이요 세상 사람들의 말로는 ‘이혼 불가’ 교리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혼인에 관한 또 다른 말씀이 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며 일으키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혼인 잔치에서 떨어진 포도주를 물로 채우신 이야기이지만,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난처해질 뻔한 혼주를 도와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서 혼인하던 젊은 부부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신 이야기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혼인 성사 예식은 다음과 같은 부부의 언약으로 성립됩니다. 주례 사제는 이렇게 세 번 묻습니다.
- “신랑과 신부는 어떠한 강박도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혼인하려고 합니까?”
- “두 분은 혼인 생활을 하면서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까?”
- “두 분은 하느님께서 주실 자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기르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사제는 정혼자들의 합의를 구합니다. “두 분은 이제 거룩한 혼인 계약을 맺으려는 것이니 서로 오른손을 잡고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두 분의 뜻을 밝히십시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오른손을 잡고 차례로 이렇게 언약합니다. “나는 당신을 아내로/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의 이 언약의 말이 일생 동안 이루어지려면, 본인들의 노력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세상살이의 험난한 역경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자녀들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기르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부부가 서로 살아온 성장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도 그렇고 세속적인 자녀 교육 가치관이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한 대로,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이 여기서 일어나야 합니다. 부부가 혼인 서약을 할 때 봉헌한 언약의 말이 실제 현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그것도 일생 동안 일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부의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일관성 있게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부가 행복한 혼인 생활을 하려면 일생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혼인 성사를 통해 가정에서 일어나야 하는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부로 맺어주셨다는 믿음과 세상살이에서 겪어야 하는 고난을 이겨내려는 용기, 즉 오늘 제1,2 독서의 초점이 이것입니다.
2. 나자렛 성가정
성인품에 오르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가정 생활을 하셨는지에 대해 이렇게 강론하신 바가 있습니다. 모든 가정의 기준이 되는 나자렛 성가정은 첫째 침묵과 기도의 학교였으며, 둘째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정 교육의 산실이었고, 셋째 세상을 살아나가는 지혜를 배우고 노동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수련의 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평온한 환경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선, 성령의 잉태로 인한 신비스런 출생의 사연 때문에 나자렛 성가정은 마을에서 심한 따돌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미혼모의 혐의를 뒤집어 써야 했던 마리아, 사생아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던 예수님, 남의 아이를 키운다는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던 요셉 등 성가정의 가족 모두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오해와 편견과 따돌림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고, 그래서인지 공생활 동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따스했고, 그들에게 차별적인 언사를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시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공생활 동안 베푸신 거의 모든 기적들이 다 이런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사람이 그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성가정에서 성장하시는 동안에 뼈저리게 체험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나자렛 성가정에서 침묵과 기도의 학교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요셉과 정혼한 직후에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으로 잉태하게 된 아기에 대해서 침묵했습니다. 정혼자에게도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겼습니다. 그리고 이 느닷없이 나타난 일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느라고 곰곰이 생각하고 또 기도했을 따름입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요셉도 그러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런 부부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느님의 뜻을 일러 주었다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준 이러한 침묵에 대해, “침묵은 영혼이 살아 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입니다. 이를 중대시하는 마음이 소란스러움으로 포위당해 있는 우리들 안에서 재생되었으면 합니다.” 하고 강론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보여준 이 나자렛의 침묵이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영감과 훌륭한 가르침을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부모들에게도 마음의 준비와 영적인 묵상, 그리고 내적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 홀로 은밀히 보시는 기도의 필요성과 가치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둘째, 나자렛 성가정의 가정교육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만남 중에서 유독 생명에 봉사하는 유일한 만남이 혼인이고, 혼인한 부부들이 자녀를 낳음으로써 이루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자녀의 탄생과 양육 과정에서 겪는 하느님의 손길에 대해서 부모들은 나자렛의 부모가 보여준 이 위대한 침묵을 본받아 자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적인 묵상을 나누며 그리고 각자 내적 생활로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각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의 존재는 그 부부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개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과 공동체에 깃든 하느님의 개입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문맹은 많은 가정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면,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기른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녀를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1요한 2,4), 그분의 계명을 실천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자기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에게 깃들여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아보고자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 대화에서 알아들은 대로 자녀를 존엄한 존재로 기른다면, 그 가정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될 것입니다.(1요한 2,5)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하느님의 빛 속에 머무르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만일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자녀를 대한다면, 그 가정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1요한 2,11)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영적 감수성을 자녀들에게 키워주어야 합니다. 이 감수성이 세상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스런 이들과 공감하는 훌륭한 능력의 바탕이 됩니다. 만일 이 공감 능력이 결여되면 세상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 나자렛 성가정은 세상의 지혜를 배우고 세상에 기여하는 노동을 익히는 수련의 장이었습니다. 요셉은 시골 목수였고, 소년 예수님께서는 양아버지 요셉으로부터 목수 노동을 익혔습니다. 목수는 나무라는 재료만 다루는 목공 기술자가 아닙니다. 주택을 짓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작업은 물론, 집안에 필요한 모든 집기를 만들고 다듬어 주거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종합 기술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더욱 더 그러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어렸을 적에 양아버지 요셉과 함께 겪은 수많은 세상 체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양을 몰고 다니면 길러 보기도 했고, 물고기를 잡아 보기도 했으며, 여러 곳을 다니며 세상 물정과 국제 정세에 대해 배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아버지 요셉은 목수 일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는 물론 세상의 지혜에 대해 전해 주는 교사였고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통해 동시대인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해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3. 교회의 가르침
이제 가톨릭 신자 여러분이 어떻게 가정을 성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가정은 인간 공동체입니다. 작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던 그 세상을 가정에서 창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마음만 먹으면 됩니다. 또 가정은 자녀 양육의 학교입니다. 갓 태어난 자녀는 백지 상태에서 부모의 돌봄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물려 받은 지식과 지혜, 가치관과 믿음이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가정은 사회의 기본 세포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할 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여러분이 결정하는 데에 따라서 장차 미래의 세상이 달라집니다. 자녀에게 하느님께서 어떠한 자질과 적성을 주셨는지를 잘 관찰해서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가정은 교회의 기초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이 체험하고 느낀 하느님의 사랑과 이끄심을 자녀들도 체험하고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여러분 가정의 자녀들의 신앙 상태가 곧 미래의 교회 모습입니다.
4. 교우촌의 전통
윤의병 신부님께서 쓰신 실화소설 ‘은화’를 아십니까? 여기에 보면, 박해시대 당시 전국에 흩어져 살던 교우촌의 신자들이 어떻게 가족 기도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평일이면 아침 저녁으로 가족이 모여 기도하고, 주일이면 공소에 모여 예절을 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전통이 우리 신앙 선조들이 하느님께 드리던 제사였으며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요 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도와주시는 덕분에 "나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보증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전교의 달에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 각자의 가정을 성화시키는 노력으로 선교의 기본을 갖추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