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 이유는 강치(바다사자)로 대표되는 어업권에 대한 욕심과
러일 전쟁에 따른 해상 요충지 확보라는 두가지로 요약 될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무선전신 발명이라는 세계사적인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인터넷을 검색하여 낙산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잘 알려진대로 일본인 수산업자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郞)는 대한제국에 독도에 대한
어업독점권을 청원할 목적으로 1904년 일본정부 국장급 관리들을 접촉하게 된다.
나카이는 독도가 대한제국에 속하는 섬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일본정부를 통해 대한제국에
교섭을 의도 했던 것이다. 이후의 전개 과정을 신용하 교수는 독도 문제 100문 100답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Q 67
그러면 나카이가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지하고 독도의 어업 독점권을 신청하려던 계획을 일본정부는 어떻게 바꾸었는가?
A
나카이는 한국정부에 독도의 어업독점권을 신청하기 위해 먼저 어업 관장 부처인 농상무성 수산국장을 방문하여 교섭했다. 농상무성 수산국장은 해군성 수로국장과 연락해본 뒤 독도가 한국영토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하면서 나카이를 해군성 수로국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일본 해군성 수로국장(해군 제독) 간부(肝付)는 독도가 ‘무주지(無主地)’라고 단정하면서, 독도의 어업 독점권을 얻으려면 한국정부에 ‘대하원(貸下願)’을 신청할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독도(리앙코島)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하라고 독려했다.
1904년 9월29일 나카이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서 자기에게 대부해 달라는 ‘리앙코島(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일본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 세 대신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이때도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무부처인 내무성과 농상무성뿐만 아니라 외무성에도 이 청원서를 제출하여 한국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일본 내무성은 나카이의 청원서를 받고 처음에는 이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러일전쟁이 전개되는 이 시국에 한국영토로 생각되는 불모의 암초를 갖는 것이 일본의 동태를 주목하는 여러 외국에게 일본이 한국 병탄의 야심을 품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있는 등 이익이 적은 반면, 한국이 항의라도 하면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으리라는 것 때문이었다. 내무성은 따라서 나카이의 ‘독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각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내무성과는 달리 독도의 ‘영토편입’을 적극 지지했다. 외무성 정무국장은 나카이에게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여 무선전신 또는 해저전신을 설치하면 적의 군함을 감시하는 데 매우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러일전쟁이 일어난 이 시국이야말로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하는 일이 긴급히 요구된다고 추동했다. 외무성 정무국장은 나카이에게 내무성이 우려하는 외교상 문제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확언하면서, 속히 청원서를 외무성에 회부하라고 적극 독려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카이가 청원서를 제출한 뒤 4개월여 동안에 일본정부 내부에서 독도 침탈 문제를 놓고 이론(異論)이 전개되나, 결국 일본 내무성도 독도를 침탈하는 데 가담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과정에 대해서는 나카이 자신이 쓴 ‘사업경영개요’에 잘 기록되어 있다. “
(이상 신용하 독도문제 100문100답중 67)
러일전쟁에 있어서 일본은 러시아 발틱 함대를 감시하여 기습하는 것을 전략으로 하고
1904. 6월1일 울진군 죽변만에 해군의 망루를 설치하는 것을 비롯하여 울릉도등
남해 ,동해안에 20개소의 해군 망루를 설치하는 한편 전 함대에 무선 통신시설을
갖추고 러시아 함대를 기습할 준비를 하게 된다.망루의 설치는 당시 막 상용화된
무선전신이 없었다면 건설의 필요성이 별로 없는 시설이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해군은 발틱 함대가 통과 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독도에 망루를 설치 하기
위해 독도 현지 조사를 1904 9월에 실시하였으며 1905년 7월에 독도 망루 공사를
개시하게 된다. 1905년 9월에 러일 전쟁이 종전됨에 따라 그해 10월에 망루를 철거 하게 되며,
망루터는 지금도 독도에 있다고 한다.
한편 무선전신은 이태리 과학자 마르코니에 의해 1896년 발명 되었으며
1901년 대서양 양안간에 통신을 성공한 것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전 및 상용화가
된다. 독도라는 동해의 절해 고도에 무선 통신 기술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함대와
교신할 방법이 당시에는 없어서 , 독도는 해상 전략적인 가치가 없는
섬이었을 것이고 , 일본은 굳이 망루를 설치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할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무선전신이라는 세계사적인 기술이 불과 3-4년만 늦게 발명 되었더라면, 오늘날의
독도 문제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쓸데 없는 공상을 해본다. 하기야 러일 전쟁이 없었더라도
일본이 독도를 그냥 놔 두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낙산)
첫댓글 일본이 19세기말 20세기초에 걸쳐 오키나와 병합및 센카쿠 열도 병합 뿐 아니라 미나미토리,오키노토리,이시가키, 오가사와라 제도에 말뚝을 막아 자국령으로 삼아서
드넓은 해양 주권을 확보한 것을 보면, 그들의 선견지명이 부럽기도 하다. 이모든것이 란학을 통해 서양문물을 접하고, 또한 개항이후에 적극적인
서구문물을 공부한 덕. 아뭏던 왜넘들이 부럽기도 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지요~~~
우리도 서구문명을 뒤늦게 나마 공부하여
이를 내면화 한데 어느정도 성공하고 있지요. 일본이 옆에 있어 주어 우리를 분발하게 하였고.
싸우면서, 갈등하면서 한편 손을 잡아야 하는것이 어쩔수 없는 이웃간의 숙명이지요.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과 포루투갈 터키와 그리이스. 조선과 명나라
핀란드와 러시아, 러시아와 폴랜드, 우리가 이웃간의 질서를 어떻게 정립하느냐. 늘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는 국민들의 능력이 지혜가 중요하겠지요... 준비된 지도자가
우리는 간절하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