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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시감상 제1권에서
그리운 연어
박이화
고백컨대
내 한 번의 절정을 위해
밤새도록
지느러미 휘도록 헤엄쳐 오던
그리하여
온 밤의 어둠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비릿해질 때까지
마침내 내 몸이
수초처럼 흐느적거릴 때까지
기꺼이
射精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주던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
그가 바로 지난 날 내 생에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이지요
----박이화, 「그리운 연어」({그리운 연어}, 애지 2006년) 전문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남성을 ‘진정한 인간’으로 찬양하고 여성을 ‘덜 된 인간’으로 폄하해온 바가 있었다. 남자는 ‘주존재’요, 여자는 ‘부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주의에 서서히, 균열의 조짐이 보였던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가 태동하고부터였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발달과 산업기술의 혁명은 자본주의를 태동시켰고, 자본주의 사회는 그 궁극적인 목표(부유한 사회, 또는 최고 이윤의 법칙)을 위해서 산업전사로서의 교육받은 대중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문맹의 퇴치를 최우선적인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교육받은 대다수의 민중들은 ‘만인평등’을 주창하게 되었다. 페미니즘, 즉, 여성해방운동은 여성들의 정치적, 사회적, 법률적 권리를 주창하는 운동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근본적인 원동력은 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모든 여성들을 교육시키고 참정권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바로 이것이 남성중심주의의 조종弔鐘이 되었던 것이며, 여성해방운동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오늘날 여성해방론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으로 무장을 하고 남성보다도 더 남성적인 여성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여성들에게는 남성이란 암암리에 억압의 손길을 뻗쳐오는 괴물이요, 다른 한편, 남근이란 괴물과도 같은 거대한 ‘음경몽둥이’에 지나지 않는다. 남성이란 오직 타도의 대상이며, 더 이상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성과 남성’으로 급속하게 역전되어가고 있으며, 앞으로, 가까운 장래에는 ‘남성해방운동’이 그처럼 힘차게 태동을 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박이화 시인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고,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바가 있다. 박이화 시인의 첫 시집, {그리운 연어}는 ‘한국 연애시의 진수’이며, 이 땅의 여성해방론자들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이 세상의 모든 남성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노래한 아름다운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의 시세계는 춘화적이면서도 고전적이고, 고전적이면서도 춘화적이다. 그의 시들은 육욕(춘화적 사랑)과 순수한 사랑(고전적 사랑)을 상호 넘나들면서도 그처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해가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나는 일찍이 {행복의 깊이} 제3권, 제5장 [연애에 대하여]에서 “연애는 서로간에 이성을 그리워하는 데서 그 최초의 싹이 움트고,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려는 생리적인 움직임을 말한다. 따라서 연애는 우리 인간들의 지상최대의 목적이 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의 기초가 된다”라고 역설한 적도 있고, 또한, 그 글에서, “성적 합일은 가장 행복한 형태이며, 우리 인간들의 삶을 꽃 피우는 행위이다. 모든 성교는 반드시 달콤하고 짜릿하고 황홀해야 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에로스의 향연은 최상급의 삶의 절정이어야 하며, 수많은 이성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동물적이어야 하고, 마약이나 알콜의 세계에서처럼 무아지경 속의 황홀함을 연출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역설한 적도 있다. 사랑은 춘화적일 때도 있고, 고전적일 때도 있다. 남녀간의 사랑은 종족의 명령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2세를 생산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일이다.
박이화 시인의 대표작, [그리운 연어]는 그가 온몸으로 쓴 연애시이면서도, 그러나 춘화적이기보다는 고전적인 ‘한국 연애시의 진수’라고 생각된다. [그리운 연어]는 ‘그리운 연어만’의 ‘수많은 절정’을 위해서 그토록 멀고 험한 물길을 헤엄쳐 온 것이 아니라, “고백컨대/ 내 한 번의 절정을 위해/ 밤새도록/ 지느러미 휘도록 헤엄쳐 오던” ‘그리운 연어’이었던 것이다. “고백컨대/ 내 한 번의 절정을 위해/ 밤새도록/ 지느러미 휘도록 헤엄쳐 오던” ‘그리운 연어’에 의해서, “온 밤의 어둠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비릿해”지고, “마침내 내 몸이/ 수초처럼 흐느적” 거리게 된다. “온밤의 어둠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비릿해질 때까지”라는 시구에는 수컷의 사정射精과 암컷의 분비물과, 그리고 한증탕 속의 두 남녀처럼,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또한, “마침내 내 몸이/ 수초처럼 흐느적거릴 때까지”라는 시구에는 그 성교의 절정 끝에서 온몸이 축 늘어지고 혼곤해진 상태를 뜻한다. 이처럼, 박이화 시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남녀간의 연애의 목적과 그 성교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고, 또, 그것을 실천해온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연어는 ‘연어목 연어과’의 ‘회귀성’ 어류라고 한다. 연어의 수정된 알은 섭씨 8--10도에서 약 60일이 지나면 부화되고 이듬해 봄이 오면 바다로 내려가 생활을 하게 된다. 보통 3--5년이 지나면 짝짓기가 가능하며, 이때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모천회귀를 하게 된다. 산란기가 되면 암컷과 수컷은 모두 혼인색을 띠며, 이때부터는 먹이를 먹지 않는 특징이 있다. 암컷은 2--3회에 걸쳐서 700--7000개의 알을 낳으며, 동시에 수컷이 수정을 하게 된다. 짝짓기를 마친 암컷과 수컷은 또다른 상대를 만나 짝을 짓기도 하며, 그 짝짓기가 완전히 끝나면 그 아름다운 생애를 마치게 된다. 연어의 모천회귀는 한 편의 아름다운 연애시이면서도 종족의 명령에 따른 어떤 것이라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연어의 순수성과 회귀성, 그리고 그 희생정신은 모든 생명체들의 귀감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박이화 시인이 연어의 모천회귀가 종족의 명령에 따른 2세의 생산과 자기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연어의 산란과정만이 아닌, 연어의 모천회귀과정 전체를 성애의 과정으로 묘사한 것은 참으로 탁월하고 놀라운 통찰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연어의 몸통 전체가 거대한 생식기가 되고, 시인의 온몸은 바다와 강이 되며, 그리고 또한, 바닷물과 강물은 내 생애의 절정에서 내가 내뿜어내는 분비물이 된다. 이때에 “기꺼이// 射精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주던//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이라는 시구는 단 한 번의 ‘나’의 ‘절정’을 위해 그토록 멀고 험한 물길을 헤엄쳐 오던 당신에 대한 최상급의 찬사가 되고, 또한 그 시구는 공명共鳴하는 울림통처럼 수많은 의미들을 확산시키게 된다. “기꺼이// 射精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주던//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의 일차적 의미는 남성이 여성을 배려해주는 성행위에 맞닿아 있지만, 그러나 그 이차적 의미는 타자를 위한 희생과 봉사라는 도덕적 선에 맞닿아 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차적 의미는 그토록 아름답고도 황홀한 성교에 의한 종의 생산이라는 종족의 명령에 맞닿아 있다고도 할 수가 있다. 모든 성교는 종족의 명령인 것이다. 기꺼이 사정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주던 그대, 그토록 어렵고 힘든 물길을 헤엄쳐 왔으면서도 자기 자신보다는 사랑하는 연인을 보다 더 배려해주었던 그대, 또, 그리고, 그 도덕적 선의 상징으로 자기 자신의 2세를 생산하고, 더욱 더 종의 아름다움과 건강을 담보해냈던 그대----. 박이화 시인의 [그리운 연어]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남성들은 사랑의 대상일 뿐이지, 타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타도의 대상은 적대감의 소산이지만, 사랑의 대상은 상호 존중과 상호 배려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박이화 시인의 [그리운 연어]는 자기 자신의 욕망의 총족보다는 상대방의 절정(오르가즘)을 더욱 더 배려해주는 ‘타자의 현상학’에 맞닿아 있으며, 따라서 그 타자는 동일자로 환원되거나 귀속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향유하게 된다.
박이화 시인은 ‘그리운 연어’를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이라고 말하고, “그가 바로 지난 날 내 생에/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입니다”라고 말한다. 왜, 그리운 연어는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이 되었던 것일까? 또, 왜, 그리운 연어는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가 되었던 것일까? 또, 그리고, 왜, 슬픔은 너무나도 쓰라리고 아픈 상처가 아니라, ‘그토록 찬란한 슬픔’이 되고 있었던 것일까? 첫 번째로는 그토록 어렵고 힘든 물길을 헤엄쳐 왔으면서도 자기 자신보다는 사랑하는 연인을 보다 더 배려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며, 두 번째로는 그 도덕적 선의 상징으로서 그토록 장엄한 생애를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의 설명은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에 맞닿아 있고, 두 번째의 설명은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이때의 ‘슬픔’은 국어사전적 의미에서의 ‘원통하고 서럽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거꾸로 ‘희망’이나 ‘아름다움’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찬란함’과 ‘슬픔’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형용모순이며, 그 찬란함이 슬픔을 수식한다는 것은 반어反語가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운 연어]가 산란한 것은 우리들의 미래의 희망과 종의 아름다움이지, 슬픔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은 그토록 찬란한 희망과 아름다움을 산란하고 떠나간 당신이면서도, 그러나 내 가슴 속에는 내 술픔의 원인이 되어주고 있는 당신이기도 한 것이다.
기꺼이
射精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주던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
그가 바로 지난 날 내 생에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이지요
박이화 시인의 [그리운 연어]는 ‘한국 연애시의 진수’이면서도, 그러나 영원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을 ‘불후의 고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연어의 모천회귀과정을 온몸의 사랑으로 묘사하고, 그리고 그 온몸의 사랑을 황홀한 절정의 그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더럽거나 추해보이지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더욱 더 아름답고 고귀해보이며, 우리들 모두가 그 온몸의 사랑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이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이었겠는가! 그 사랑의 강도强度는 수천 년을 찍어누르고, 그 천하의 절경 속에다가 불후의 고전, [그리운 연어]의 문자를 새겨넣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연어’의 순수성과 회귀성, 그리고 그 희생정신----. 이 ‘그리운 연어’는 박이화 시인의 영원한 연인이자 그 이상적인 전범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운 연어’는 박이화 시인을 인도해주는 별이며,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오, 그리운 연어여! 오오, 그리운 연어여!
첫댓글 촌부를 애지문학회로 이끈 별과 같은 시를 다시 읋조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