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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을 통한 위로
출 6: 1-9
사람이 악에 바치거나 극한 어려움을 당하거나 아니면 거치는 것 없이 너무 잘나가다보면 극단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말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430년 동안 종살이를 시켰습니다.
애굽의 온갖 잡일은 그들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 이라는 권력 앞에 꼼짝 못하고 노역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바로의 명령이 곧 법이고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게 430년 동안 권력을 휘두른 바로에게 무서운 것이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때가 됐기에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내 보낼 것을 알리라고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로에게 가서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바로는 화가 나서 극단적인 말을 합니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
그뿐입니까? 화가 난 바로는 밥 먹고 할 일이 없으니 엉뚱한 생각을 한다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처럼 가장 힘든 일인 벽돌 굽는 일을 시키되 이제는 벽돌 재료가운데 하나인 볏짚을 주지 말고 그들 스스로 구해다가 벽돌을 구우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혹독한 노역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대한 불만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잘된다더니 이 꼴이 뭐냐며 모세를 불신하고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5장은 실망장입니다. 5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백성들의 원망과 불신으로 몹시 힘들어하던 모세가 하나님께 엎드려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이후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욱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지 아니하시나이까”(출5:22-23).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라는 대로 했더니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오는 이유가 뭐냐며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힘들기 때문이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기 때문이고, 받은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5장은 이렇게 모세의 탄원의 기도로 끝이 나지만, 6장은 기도응답을 통해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하실 때가 언제인가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도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세 가지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래, 기다려,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가 언제입니까? 어려움을 당하는 절정에 응답하십니다. 그때는 기도가 간절할 때입니다. 자신의 의는 절대 무시하고 아! 정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만 해결 되겠구나 고백할 정도의 상황이 돼서야 응답하십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5절).
신음 소리는 언제 냅니까? 가장 힘들 때, 내 힘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내는 것이 신음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순간 응답하십니다.
한번 기도하는 것으로 내가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을 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신음소리를 듣고 응답하실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계속적인 기도를 강조하시기 위해 마태복음 7장(7-12절)에서 삼단 계를 통한 기도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입으로 구하는 기도(구하라). 기도와 더불어 행동하는 기도(찾으라). 끊임없이 문이 열리고 기도 응답받을 때까지 계속 하는 기도(두드리라)입니다.
둘째. 기도 응답의 방법
1)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모세가 이렇게 다급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 단의 응급조치라도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 라”(1절상).
어떤 일을 볼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쫒아 내리라“(1절하).
바로가 그들을 보내는 차원을 넘어 그들이 안 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내리는 벌이 너무 끔찍하고 무서워서 그들을 쫒아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도록 만들어 줄 테니 두고 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기도응답의 첫 번째 단계는 말씀을 통해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더불어 병행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은 물론이고 기도해야 하는 일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도 안 되며 언제나 병행되어져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도 경건의 조건을 말씀 하실 때 이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
2)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며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2-3절).
‘나는 여호와니라’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을 소개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함께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로 네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위로하십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신음소리를 낼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너를 찾아오는 네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네 신음소리가 왜 나왔는지 알기에 그 부분에 대해 응답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들이 해결해야할 문제는 세 가지입니다.
⓵“내가 애굽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를 빼내며”(6절).
우리들 각자에게는 무겁게 눌려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무거운 짐은 우리 각자가 눌려있는 갖가지 문제들을 말합니다. 그 무거운 짐이 물질 문제일수도 있고, 질병 문제일수도 있고, 사업상의 문제, 가족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눌려있는 그 무거운 짐 속에서 우리를 빼내신다고 하시며 위로하십니다.
⓶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7절).
너와 나는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 말속에는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 속에 부요한 것이 다 들어있고, 모든 필요가 그 말씀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얼마나 짜릿한 순간입니까? 그 누구도 맛보지 못한 은혜가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⓷ “약속했던 땅을 기업으로 주리라”(8절).
하나님은 주신다고 약속하시면 반드시 주십니다. 의심 없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만이 응답을 통해 위로받는 다는 교훈입니다.
모든 사람이 위로받기 원하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누구에게나 무조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모든 자의 기도를 긍정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만이 응답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면 더 확신이 갑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의 마음이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9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마음 문이 닫혀있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마음 문이 닫혀 있으면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마음 문이 닫혀 있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마음 문이 닫혀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삶에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응답을 통해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신음소리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응답하시며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의 큰 위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출 6: 1-9
♥첫째: 우리 하나님은 언약하신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기업을 주시는 분이시다.
<시20:4-5> “하나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며 우리가 너의 승리를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노라”
새해를 맞이하신 성도 여러분! 바로 이 말씀처럼 금년 새해가 여러분과 저에게 기도가 응답되고 개가를 높이 부를 수 있는 한해가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마다, 여러분의 사업장마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편 21:2>에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이 소중한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구하는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는 역사가 있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언약하신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4절>에 “가나안 땅을 주기로 언약하였더니,”라고 하였고, <본문 5절>에 “이제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400년 전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400년 동안 네 자손들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 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런데 말씀대로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가서 400년을 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애굽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바로가 등장하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시 것이 있었기 때문에, 400년이 되면 내가 너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고 언약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 가운데 특별히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기억하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고 계시다가 틀림없이 그 약속을 지키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하신 약속도 반드시 기억하고 계셨다가 틀림없이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그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아마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를 기억해준다고 해도 그것은 예삿일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기억하고 우리를 생각해 주시는 이가 어떤 방백이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이신 사랑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감격이 더 큰 것입니다.
<이사야 40:28-31>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는 기억하시고 언제는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는 힘있게 일하시고 언제는 피곤해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든지 기억하시고 우리 하나님은 항상 기억하십니다. 작년에도 기억하시고 금년에도 기억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의 능력, 그의 관심, 그의 사랑에 있어서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의 언약은 너무너무 신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 자체가 보증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을 무려 5번이나 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가장 믿을만한 보증으로 삼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식언치 않으십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실로 하나님의 언약을 보증할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왜냐하면, 자존하시고 모든 존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보다 더 능력 있고 신실한 존재는 이 천지 간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변하고 없어지지만 전능하시며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증하시는 그의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단 한 점, 단 한 획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 집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만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의지함으로 반드시 승리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본문 5절>에 “내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전에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해서 “선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요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롬5:6-7),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사야 43:1>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과거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들을 구속하셨던 하나님께서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6:9>에 하나님께서 과거 아브라함의 육신이 자손들을 구속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구속하실 때에 애굽 사람들에게 큰 재앙을 내려가면서 그들을 거기서 빼내고 그들을 건져 내셨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큰 재앙을 내렸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임하는 모든 재앙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결코 우연한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세상에 임하는 모든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임하는 재앙 중에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연이나 천재지변이나 인재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받을 유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이고(롬8:17),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2>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홍수 가운데 보호하십니다. 우리를 불 가운데서 보호하십니다. 우리를 지진 가운데서 보호하십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보호하시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보호하십니다. 수많은 질병의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말할 수 없는 환난 가운데서 보호하십니다.
<여호수아 1:9>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기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8절>에 “그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이게 주어 너희의 기업으로 삼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던 자유를 주셨고 또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실 때에 어떻게 인도해 주셨습니까? 앞장 서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앞서 나갔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21-22>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말할 수 없이 더운 곳입니다. 그리고 밤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어 건조한 땅입니다. 물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식료품을 구할 데도 없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적의 양식인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그것도 40년이나 그렇게 하셨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훈련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산다”고 하는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미생물 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균”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쁜 균이고, 하나는 좋은 균이고, 하나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회주의적 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좋은 균도 극소수이고, 나쁜 균도 극소수라고 합니다. 대신에 기회주의적 균은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회주의적 균이 좋은 균과 나쁜 균 틈에서 세력을 살피다가 강한 쪽으로 붙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가 있고, 불의가 있습니다.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습니다. 흥하는 쪽이 있고, 망하는 쪽이 있습니다. 구원의 길이 있고, 지옥의 길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있고 마귀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느냐, 어느 편에 붙느냐에 따라 살거나 죽거나, 흥하거나 망하거나, 구원을 받거나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광야 40년 훈련이 끝난 다음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바 기업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들이 그 땅의 주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옴으로 자유인이 되게 하신 것도 감사한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미 자유도 주시고 기업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최고의 기업은 천국입니다(계21:1-22:5).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리는 복은 장차 하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기업을 주십니다. 자식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생업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조국도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흥왕케 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생업의 기업, 가문의 기업, 건가의 기업, 영적 기업을 주시고 언제나 함께 하실 때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출 6: 1-9
이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온 생애를 불살랐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일본이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요. 내가 왜 일본으로 하여금 내 조국에 손톱을 박게 하였으며,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도록 내버려 두었소? 그러므로 망국(亡國)의 책임자는 곧 나 자신이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민족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로 돌리려 하니, 왜 남만 책망하시오? 우리 나라가 독립이 못되는 것이 '아! 다 나 때문이로구나!' 하고 가슴 두드리며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라고만 하시오? 진정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들 깨닫지 못하시오?”
그러면서 청년학생들에게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
또 안창호 선생님은 나라사랑과 나라의 진정한 독립을 위하여 흥사단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밥을 먹어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밥을 먹으며, 잠을 자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잔다.” 그는 자나깨나 나라를 사랑하며 나라를 걱정하시던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옥중 심문 때 일제 관헌에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한 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의 독립이 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비록 안창호 선생님은 이 나라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그의 간절한 소원대로 이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지의 역사는 처참했습니다. 당시 우리 젊은이들은 중국으로, 러시아로, 동남아로 전쟁터에 끌려갔습니다. 젊은여자들은 군대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감이 되었습니다. 이 땅은 35년동안 철저하게 유린을 당했습니다. 말을 빼앗겼습니다. 천황숭배를 강요당했습니다. 모든 곡식은 공출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숟가락 젓가락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교회는 불태워졌고, 신앙인들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1919년 4월 화성에 있는 제암리 교회에서는 23명의 교인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놓았습니다.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23명이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을 가옥 30여채를 불질렀습니다. 당시 기록에의하면 사람의 살이 타는 냄세가 10Km 밖에까지 진동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 민족의 선구자들은 중국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요 해방이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함석헌 옹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도 모른 것은 아무도 꾸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꾸미지 않고 온 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직접 백성에게 준 해방이다. 아무도 여기 공로를 주장할 중간적인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그 까닭의 하나는 진정한 백성의 해방이 되기 위하여서다. 그담 또 하나는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하여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온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민족이 이런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알았다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역사로 보지 못하고 단순히 운명 혹은 숙명으로 돌려온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역사의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역사의식이란 하나님을 역사의 주권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표를 가지시고 이 역사를 이끌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은 도덕 의식도 약할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이 없으며, 또한 역사의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게 마련입니다. 역사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진정한 역사의식이 생기고, 그 속에서 도덕적인 교훈과 역사의 방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해방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광복절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전쟁과 여러 차례의 혁명을 거듭하면서 고난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 모든 역사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우리로하여금 이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보도록 촉구하는 각성제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뼈아픈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며, 이 민족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향한다면 더 놀라운 역사를 이룩해 나가는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애굽의 압제아래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430년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모세를 부르십니다. 바로 왕 앞에 나아가 이 민족을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갈수 있도록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강퍅해진 바로는 오히려 더 억압하고 착취를 합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괜히 종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해서 미움을 받게되고, 죽을 고생만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하니하시나이다.”(출5:22-23)
모세가 하나님께 푸념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구원의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로라.” 여호와는 자존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400여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약속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억압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의 학대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인줄 너희가 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친백성으로 삼으시고, 모든 무거운 짐에서 자유케하셔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내가 듣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과 아픔을 주실까요? 왜 우리의 삶 속에는 고통과 실패와 눈물의 아픔이 항상 존재할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아픔과 고통의 눈물을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는 편안한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하나가 길에서 뛰어 놀다가 넘어져서 무릎에서 피가 납니다. 약을 발라 주는 엄마에게 아이가 울면서 말합니다. "엄마! 온 세상이 스폰지로 되어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넘어져도 안 다칠 것 아네요?" 그때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이 스폰지로 되어있으면 저 꽃과 나무들은 어디서 자랄 수 있겠니? 농부는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우리 자동차는 어디로 다니면 좋을까? "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행복과 기쁨의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실패의 늪에 빠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철부지 아이처럼 실패 없는, 고난 없는 세상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쿠션 좋은 스폰지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때로 이런저런 고난과 실패들이 우리의 인생 속으로 파고 들어와 상처를 입히고 삶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난과 실패를 부정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고난과 실패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고난과 실패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고, 자신을 재발견케 하여 재도약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의 사람들은 고난과 실패를 통해서 낙담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인생 앞에 열려져 있던 하나의 문이 닫혀질 때 하나님은 또 다른 인생의 문을 우리를 향하여 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생의 고난과 실패는 정지와 멈춤의 신호가 아니라 방향 전환의 신호일 뿐입니다.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도전하라는 싸인입니다.
"도스토예스프스키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간질병과 사형수의 고통이었습니다. 생텍쥐페리를 위대하게 만든 것도 그를 일생 동안 대기 발령자로 살아가게 한 평가 절하의 고통이었습니다.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든 것도 끊임없는 여인들과의 실연과 청신경 마비라는 음악가 최대의 고통이었습니다. 링컨을 위대한 미국의 최고 대통령이 되게 한 것은 끊임없는 질병과 낙선이라는 불행의 그림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찌르는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고통은 불행이나 불운이 결코 아닙니다. 고통이란 도리어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번제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지나치게 행복하다면 그것은 곧 불행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지나치게 불행하다면 그것은 곧 행복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시험을 통해서 자아를 불사를 용광로 속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 용광로 속에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롭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두운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랑과 관심으로 주목하시고 다가오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슬픔도 아십니다. 우리가 당한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근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녀의 아픔을 방관하시거나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식아 아플 때 부모가 더 잠못이루고 아픈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엘리 위젤은 그의 책 “흑야(Night)”에서 죽음의 수용소 아우쉬비츠의 일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린 소년이 사소한 수용소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모든 수용자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몸이 밧줄에 매달렸을 때 위젤은 누군가가 묻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런데 그때 위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어디에 계시냐고? 그는 바로 여기에, 지금 이 교수대에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계신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분은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고통당하고 계신다는 영감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나의 등뒤에서'라는 복음성가를 지은 최용덕 집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참 좋은 신앙인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생활의 실패로 인하여 영적인 침체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침체가 점점 깊어지더니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 9월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그날도 고민과 좌절가운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부림치다가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애타게 기도하다가 젖은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 때 최용덕 집사님은 자기의 등뒤에서 안타까이 자기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을 환상가운데 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성이 들리는데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었느니라. 네가 나를 등지고 도망가는 그 때에도 나는 너에게서 한번도 눈길을 뗀 적이 없었느니라. 네가 실패하여 울고 있을 때에도 나는 네가 다시 승리하고 일어서리라 기대하고 언제나 잔잔한 미소로 너를 바라보고 있었노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아! 그랬군요 하나님! 그랬군요 하나님! 흐르는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아 내리며 집사님은 가사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고, 피아노를 두드리며 곡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나의 등뒤에서'라는 복음성가입니다.
1.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2.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OO야 일어나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시 고난가운데서 실패하여 좌절하신 분이 계십니까? 고난과 실패는 결코 인생의 낭비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실패는 새로운 출발이 될 뿐입니다. 실패는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닙니다. 방향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실패는 무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능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실패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향한 더 좋은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에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것처럼 이 민족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60년전 해방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아직도 눈물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돌릴 최고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한쪽문이 닫히면 다른 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든 아픔과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나가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시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주만 바라 볼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