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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삼다
창 24:61-67
61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62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 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창 24:61-67 / [다시 집으로] 리브가와 그의 유모는 여행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낙타에 올라타 아브라함의 종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났다. 62) 이때 이삭은 `나를 보살펴 주시는 살아 계신 분의 우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브엘라해로이로 와서 살고 있었다. 그곳은 가나안의 남부 지역이었다. 63) 날이 저물 즈음에 이삭은 들녘에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낙타 떼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았다. 64) 리브가는 이삭을 보고는 낙타에서 내려 65)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었다. `저렇게 들녘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우리 쪽으로 오는 사람이 누군지요?' `예, 우리 주인 어른의 아들입니다' 하고 종이 대답하였다. 리브가는 그 말을 듣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웠다. 66)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에게 일이 이러이러하였다고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67) 이삭은 리브가를 데리고 어머니 사라가 살던 천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었다. 어머니 사라가 세상을 뜬 뒤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하던 이삭은 리브가를 사랑하며 그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아브라함의 종들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온 리브가가 자신의 남편이 될 이삭을 처음으로 대면합니다.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다(61-63) 아브라함의 신실한 종인 엘리에셀은 부모, 형제들의 축복을 받으며 가나안으로 가겠다는 리브가의 결정에 따라 신부 리브가를 신랑 이삭에게로 인도해 갑니다. 이런 리브가의 모습은 마지못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마음으로 나타난 행동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자,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며,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다고 했습니다. 브엘라해로이의 뜻은 나를 아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우물이란 뜻이며,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던 곳으로 가데스와 베렛 사이의 술 길가 샘물을 가리킵니다(16:7-14). 그리고 이삭이 묵상했다는 것은 생각하다, 슬픔에 젖어있다, 기도하다 등의 복합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리브가를 맞아들인 이삭(64-65) 이삭을 발견한 리브가는 약대에서 내려 너울로 자기의 얼굴을 가렸는데 이는 상대방에 대한 겸양의 표시입니다. 여자가 낙타를 타고 가는 경우 남자를 만났을 때 재빨리 내려 상대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예법입니다. 면박은 보통의 수건이나 베일보다는 훨씬 큰 너울을 가리키는데, 리브가가 이러한 너울로 자신을 가린 것은 결혼하기 전의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되던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66-67) 당시 족장이나 부유층의 사람들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장막을 갖고 있어 가족의 신분에 따라 적당한 장막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리브가를 사라의 장막으로 인도하였다는 것은 이제 리브가가 실질적인 새 안주인으로서 아브라함 집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존귀한 위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의 사랑하는 모습은 일부다처제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에 세상 풍속을 좇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일부일처제를 따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또한 이삭이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는 노년에 자신을 낳고 기뻐하며 각별히 자신을 사랑해 준 어머니의 정을 잊지 못하다가 리브가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적용: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거룩한 결합을 상징한 징표가 되는 것처럼(엡 5:31-33),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결혼관은 어떻습니까?
교회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누릴 수 있을까? 따뜻한 사랑과 깊은 나눔인가? 이러한 것은 교회가 줄 수 있는 긍정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이 같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 나라를 맛본 자로서 필연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고 위로 합니다. 그래서 그 싸움의 가치를 알기에 오늘도 세상에 지지 않고 이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드린 후 월요일에 세상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어떠합니까? 교회를 통해 받은 위로로 말미암아 더욱 힘을 다해 싸우려는 새로운 의욕으로 가득 차 길 바랍니다.
< 설 교 >
리브가의 통찰력
창세기 24:64-67
오늘 본문에서는 리브가가 시집을 갑니다. 평상복에 액세서리 하나 걸치지 않아도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기품 있던 리브가가 시집을 가기 위해 성장까지 했으니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커피는 진해야 하고 여자는 아름다워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힘입니다.
리브가는 약대를 타고 2천리 넘는 길을 지나 황혼 무렵에 아브라함의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남자가 리브가가 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바로 리브가의 신랑감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은 엘리에셀의 약대가 오는 것을 보고 엘리에셀이 데려 오는 아가씨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물설고 낯선 땅에 온 리브가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리브가는 통찰력이 있어 그를 보는 순간 ‘아! 저분이 내 신랑감이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64절에 보면 급히 약대에서 내려 엘리에셀에게 확인을 합니다.
“들에서 배회하다가 여기로 오고 계시는 저 분은 누구신가요?”
“예, 저분은 내 주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도련님입니다.”
리브가는 급히 유모의 도움을 받아 너울로 얼굴과 온몸을 다 가립니다. 이삭의 눈에 너울 쓴 리브가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아무리 미인이라도 낮에 보면 여드름이나 기미가 보이고 때로는 눈곱도 보입니다. 밝은 대낮에는 모든 약점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는 여드름도 상처도 잘 보이지 않아 다 미남 미녀로 보입니다. 그래서 딸을 선보이러 갈 때는 어두운 장소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귀족들이 식사를 하는 최고급 식당의 조명이 어두운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더구나 너울을 쓰면 보일 듯하면서 잘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을 듯하면서도 보입니다. 그래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니 대낮에 그냥 보아도 아름다운 리브가가 황혼 무렵에 너울까지 썼으니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겠습니까?
이삭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엘리에셀에게 다 듣고 나서 ‘아하! 하나님께서 저 아가씨를 내 아내로 정하셨구나.’라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리브가에게 다가가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며 인사를 나눈 뒤, 손을 잡고 리브가를 장막으로 데리고 가 아내로 삼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이 되었지만 그때까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울며 지냈는데 이제 리브가의 위로를 받으며 이삭은 그 이름대로 웃으며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나이 40에 결혼하여 180에 죽을 때까지 다른 여자에게 곁눈질 하지 않고 리브가만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여기에 아브라함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데리고 오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살아 있었다면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갔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해석입니다. 저는 서른네 권의 성경을 읽고 주석도 보며 말씀을 준비하는데 그 책들을 종합해 보면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몇 세에 낳았습니까? 100세입니다. 지금 이삭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40세입니다. 그러니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는 140세입니다. 그 후에 다시 장가를 가서 또 자녀를 낳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학자는 성경에 아브라함이 나타나지 않으니 죽었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신학자가 실수했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니 비난할 필요는 없고 바로 잡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큰 교훈은 통찰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통찰력이 탁월했습니다. 그러니 낯설고 물 선 곳에 와서, 어둠이 내리는 빈들에 한 남자가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저 사람이 내 신랑감이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자기 친정 나홀의 성에서 엘리에셀을 보는 순간에도 ‘아! 이분은 사기꾼이 아니고 귀한 분이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통찰력이 있으면 사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구나. 네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오! 주여 나를 어떻게 아시나이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으셔도 아십니다. 삭개오가 숨어 있는 것도 아셨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우리도 사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말합니다.
“아나니아, 이것이 땅 판 값 전부인가?”
“예, 베드로 사도님. 이것이 다입니다.”
“네 속에 어찌 사단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려 하느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때 아나니아가 고꾸라져 죽습니다. 그리고 3시간 뒤,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삽비라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니 교회로 왔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제 남편이 이곳에 오지 않았나요?”
“삽비라, 너의 남편이 바친 이것이 땅을 판 값 전부인가?”
“예, 이것이 다입니다. 사도님.”
“네가 어찌 남편과 작당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려 하느냐? 이제 네 남편을 장사지내고 오는 청년들이 교회 문 앞에 이르렀는데, 그들이 너도 장사지내게 되리라.”
베드로가 이 말을 마치자 삽비라도 고꾸라져 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 교회에 헌금을 한다고 자랑한 뒤 일부만 갖고 나와 바친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통찰력이 있어 알았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는 이 사건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강도질하는 사람도 살고 도둑질하는 사람도 살아가는데……. 남의 것을 훔친 것도 아니고, 헌금하겠다 약속하고 일부를 감춘 정도인데 그렇게 죽이기까지 하시다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사야 55장 8절 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교회 재정을 맡게 되면 교회 돈을 훔치는 도둑이 됩니다. 그러다 자기도 망하고 교회에 상처를 줍니다. 가룟 유다 같은 교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일찍 데려가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이었지만 통찰력이 있어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느헤미야도 평범한 사람이지만 예루살렘 성을 52일 만에 세우는 기적적인 일을 했습니다. 그때 산발랏,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군사를 모아 공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을 알고 백성들 중 절반에게는 창검을 들고 밤낮으로 성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재건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도 허리에 칼을 차고 손에 무기를 들고 일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밤낮으로 철통같은 수비를 해서 공격할 틈을 보이지 않으니 그들은 작전을 바꾸어 회담을 요청합니다. 느헤미야를 회담장으로 유인해서 죽일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통찰력이 있어 ‘회담장에서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라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네 번이나 초청장을 보내도 “내가 이 큰 역사를 두고 갈 수 없노라.” 하며 가지 않자 다섯 번째에는 산발랏이 친서를 보내어 만나자고 했지만 그 때도 느헤미야는 가지 않습니다. 통찰력이 있으면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스마야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느헤미야, 그들이 당신을 죽이러 옵니다. 어서 성전에 숨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분별력이 있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압니다. 스미야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거짓으로 예언을 한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주의 종들도 분별해야 된다.”
아무리 신령한 주의 종의 말이라도 분별해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한 병원 원장 집사님에게 어떤 주의 종이 와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병원 문을 닫고 신학교에 가서 주의 종이 되시오.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계속 의사 일을 하다가는 결국 망하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원장님이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목사님, 기도하는 목사님이 제게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분별하기로는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53세인 그분이 지금 신학교에 가면 60세가 되어야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몇 년이나 사역을 하겠습니까? 안수를 받자마자 은퇴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 잘 되고 있는 병원을 접고 신학교에 가는 것보다는 병원 경영을 잘 해서 그 돈으로 헌금하고 교회를 짓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께 그런 말에 현혹되지 말고 부지런히 병원 경영을 잘 하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지금까지 병원 경영을 잘 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느헤미야는 스마야가 산발랏에게 돈을 받아먹고 거짓 예언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외소에 숨지 않아 52일 만에 성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 우리 교회에 항존 직분자를 세울 때의 일입니다. 제가 한 사람을 항존 직분자로 세우기로 마음을 정하고 공동 의회에 추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가 교회에서 자기 패거리를 만들고 교회를 시험할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제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항존 직분자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제 선배 목사님 한 분은 큰 교회를 짓느라 힘든 중에 한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답니다.
“목사님, 교회 짓느라 힘드시죠? 제가 부모님께 유산을 많이 받았는데, 값진 일에 쓸 데가 없을까 하고 찾다가 목사님 교회에 바치기로 했어요. 어서 ○○로 나오세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교회를 짓다보면 그런 일이 가끔 생깁니다.
얼마 전 서울 근교의 한 교회에서 교회를 짓는데 재정 문제로 힘들었답니다. 온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던 중 그 교회에 나온 지 3년밖에 안 된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답니다.
“목사님, 제게 돈이 좀 있는데 자식들에게 남겨주어 봤자 서로 싸움이나 할 것 같아 기도하다 결정했습니다. 아버지 집을 짓는데 바치기로 했습니다.”라며 300억을 헌금했다고 합니다. 또 한 교회에서는 어떤 분이 130억을 바쳐서 교회를 지었답니다.
그런 일이 가끔 있으니 그 목사님도 기대감을 갖고 그 자리에 가셨답니다. 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앉아서 기도하는 중 하나님께서 목사님께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그 부인이 목사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온 무서운 여자라는 것을 깨닫고 바로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지금 그 목사님께서 목회를 잘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통찰력이 있는 경영주는 회사를 말아먹을 사원은 쓰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통찰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사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사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통찰력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오늘 본문 64절에 보면, 리브가는 이삭을 보는 순간 ‘저분이 내 남편감이구나.’라고 느끼고 바로 낙타에서 내립니다. 자신이 평생 섬길 남편감을 만났을 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리브가가 약대에서 내린 것은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의 풍습이니 별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여자가 낙타를 타고 가다가 남자를 보면 내리는 것이 풍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입니다. 약대를 타고 가다 만나게 되는 남자가 하나 둘이겠습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때마다 계속 약대에서 내렸다가 올라탔다가 반복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약대를 타고 가다 남자를 만나면 내리는 그 관습은 존경하는 남자나 아는 남자를 만났을 때 행하는 예절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향 길을 갈 때 길가에 사람이 보일 때마다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합니까? 집안의 어르신들이나 마을 아저씨들을 만나면 차를 세우고 내려서 인사를 합니다. 이것이 예의입니다. 어르신이 지나가시는데 창문만 내린 채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하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로는 예의가 아닙니다. 차에서 내려 두 발을 모으고 인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상대를 높이는 표시입니다.
통찰력이 있는 리브가는 자기 신랑감을 만나게 되자 약대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어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왜입니까? ‘나는 저분을 섬겨야 한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 합시다.
“통찰력이 있으면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안다.”
통찰력이 있으면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리브가가 약대에서 내리지 않고 이삭을 맞이했다면 이삭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이삭이오? 나는 리브가라고 해요. 우리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으니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우리 잘해 봐요.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요. 우리가 부부가 되었다고 해서 내가 당신의 분신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지요. 우리 서로 협력해서 잘 살아봐요.”
그랬다면 이삭이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리브가가 이삭을 보자마자 낙타에 내려 백합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니 이삭이 리브가를 귀히 여겨 죽을 때까지 140년 동안 리브가만 사랑한 것입니다.
저는 길을 가다가 요즘 젊은 부부들이 “너 ○○했어?” “그래, 했다.”라고 쉽게 대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참 상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부부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남편을 예수님처럼 높이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그랬어?” 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놓으신다고 우리도 말을 놓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김관수야.” 하신다고 김관수 장로님이 기분이 상해 “예수.”라고 하겠습니까?
에베소서 5장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설교를 듣고 여성 운동하는 분들이 저를 공격하실지 모르겠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렇게 한다고 여자의 지위가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귀해집니다.
베드로전서 3장 5절에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단장한다’는 말이 영어 성경에 “to make themselves beautifu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자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남편에게 “설거지했어? 이건 다 했어?” 라고 하는 것은 못난 여자, 천한 여자가 되는 길입니다. 남편에게 다소곳할 때 아름다운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통찰력 없는 사원이 사장을 멸시하고 자기를 세웁니다. 그런 사원을 누가 계속 데리고 있겠습니까? 기회만 있으면 내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장을 높이고 겸손한 회사원이라면 기술과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품어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또 통찰력이 있는 경영주는 사원들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원들이 회사에서 이렇게 수고하는데…….’라며 그 사원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깁니다.
통찰력 있는 목사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많은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셨는데…….’라며 섬기는 종이 됩니다. 그러나 통찰력 없는 목사는 거드름을 피우고 교만하다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33절에, 따라 합시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다.”
겸손한 길을 가는 사람은 점점 더 존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난 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동댕이치십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십니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그리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후회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한 목사님이 귀한 성도님들이 모여 있는 좋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귀한 성도 중 한 분이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분에게 “집사님, 만일 하나님께서 집사님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신다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분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목사님, 이혼한 제 남편이 다시 돌아와 함께 사는 거예요.”라고 하더랍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고 하는 후회는 뼈아픈 후회이고, 결혼하고 하는 후회는 배부른 후회입니다. 이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혼을 해도 후회하고 이혼하지 않아도 후회하지만, 이혼하고 하는 후회는 뼈아픈 후회이고 이혼하지 않고 하는 후회는 편안한 후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의 대답을 들은 목사님께서 “집사님, 그러면 하나님께 구하세요.”라고 하셨답니다. 그분이 목사님 말씀대로 열심히 기도를 했답니다. 얼마 후 그 기도대로 남편이 돌아와 두 분이 다시 함께 살게 되었는데, 부인이 남편을 잘 섬겨 아주 행복한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통찰력이 있으면 상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낮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찰력이 있으면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리브가는 그 남자가 이삭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너울로 자신을 가립니다. 그냥 나가도 이삭이 한눈에 반할 미인이지만 리브가는 미래를 위해 너울로 가려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추고 신비로움을 유지합니다. 물론 첫날밤이 지난 다음에는 너울을 쓰고 살지 않았겠지만 너울을 쓰는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100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다 드러내는 사람에게는 쉽게 싫증이 납니다. 적당히 자신을 감출 때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자신을 너무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행복한 부부 생활이나 아버지 어머니 학교, 성경 공부를 따로 하지 않습니다. 제 설교 안에 직장인 학교,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듯이 제 설교에 생활 지침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에는 행복한 부부 생활 공부를 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부부는 절대로 같이 목욕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이 목욕을 하면 서로 간에 신비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내가 남편에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보! 때 좀 밀어주세요.”라며 등을 대는 것이랍니다. 만일 남편이 때를 밀어주는데 국수 가락이 뽑혀 나오듯 때가 밀려나오면 남편이 회사에서 조용한 시간에 아내를 생각할 때 어떤 모습이 떠오르겠습니까?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라 빨리 집에 가고 싶어져야 하는데 아내의 때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에 대한 매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코를 풀어야 할 때도 남편 앞에서 풀지 말고 밖에 나가서 푸는 것이 지혜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집에 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지만 최선을 다해 신선함을 유지해야 됩니다. 통찰력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통찰력이 있는 학생은 선생님이 가르칠 때 한 눈 팔지 않습니다. 미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보면 대학에서 수석하는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첫째는 수업 시간에 제일 앞자리에 앉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생님의 기침 소리도 놓치지 않고 다 쓴다는 것입니다. 그냥 웃자고 한 말도 다 기록하는 것입니다. 보통 아이들은 요점만 쓰니 세월이 지나면 그 노트를 보아도 무언지 알 수 없지만,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 웃자고 하는 말까지 다 기록한 학생은 나중에 거기에 자신의 이론을 조금만 더하면 명강의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석 하는 아이들은 자기의 노트를 보면 ‘아, 이것은 시험에 나오겠구나. 이것은 나오지 않겠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찰력이 없는 학생은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것만 달달 외우고 나올 것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통찰력을 얻기 바랍니다.
통찰력이 있으면 이처럼 미래를 준비합니다.
저도 은퇴할 날이 다가옵니다. 제 꿈은 제가 은퇴할 때 우리 교우들이 “목사님, 안 돼요. 총회 법을 바꿔서라도 목사님께서 은퇴하지 않아야 돼요.”라며 제 바짓가랑이를 잡을 만큼 아쉬워하는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저를 가다듬습니다. 항상 미래를 준비합니다.
5년 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5년 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의 사람으로 서 있겠습니까? 그리고 5년 뒤, 혹은 10년 뒤를 위해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꿈과 노력은 같이 가야 됩니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5년, 10년 뒤를 봅니다. 그래서 열심히 실력을 쌓으며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고 베일을 쓰듯이 가릴 것은 가립니다. 통찰력 있는 경영주는 자기 사원들은 물론 부인에게도 자신을 다 열지 않습니다. 성경은 품에 있는 여자에게도 말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통찰력이 있는 사원은 경영주에게 마음을 다 열지 않고 조심하며 미래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성공합니다.
교인이었던 슈나이더는 로키산맥 아래에서 채소 가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로키산맥을 여행하고 오는 여행객들이 가방이 터져 어려움 당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새 가방을 가지고 올라가도 로키산맥을 내려올 때는 가방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아무리 오래 사용해도 터지지 않는 가방을 만들 수는 없을까? 내가 그런 가방을 만들어 보자. 아무리 오래 여행을 해도 터지지 않는 견고한 가방을 만들어 봉사하자. 하나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견고한 가방을 만들어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힘이 센 삼손의 이름을 따서 그 가방의 이름을 ‘샘소나이트’라고 지었습니다. 샘소나이트 가방은 최고의 가방입니다. 그래서 그도 거부가 되었고, 그의 기도대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우리 교민인 찰스 조는 열세 살에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열네 살에 아버지가 음주운행 차에 부딪쳐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 여동생과 함께 단 둘만 남았습니다. 그는 절망했지만 기도하다가 ‘아버지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라는 것을 깨닫고 힘을 얻어 어려움을 헤쳐 나갔습니다.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의 여동생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결국 그 여동생은 재벌이 되었고 그는 뉴저지의 유명한 검사가 되었습니다. 통찰력이 있으면 어디에서도 일어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납니다. 언제 어디에 던져두어도 성공합니다.
그러면 이 통찰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25장 21, 22, 23절에 보면, 리브가의 뱃속에서 쌍둥이가 싸웁니다. 리브가는 이런 일이 있을 때도 사람에게 가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갑니다.
“하나님, 태중에서 아이들이 싸워요. 이 일을 어떡해요? 하나님!”
“리브가야, 네 태중에 두 민족이 있다. 그 중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
리브가는 야곱이 복 받았다는 것을 알고 야곱을 점찍어 키웁니다. 그것은 리브가의 통찰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통찰력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고 에서는 밀려나게 됩니다.
리브가에게 계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계십니다.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 친구처럼 우리 안에 계십니다.
어젯밤에도 설교 준비를 마치고 나니 밤 11시가 다 되었습니다. 피곤한 중에 기도를 하는데 어느 곳에 가야 한다는 감동이 왔습니다. ‘하나님, 저 잠이 부족해서 안 돼요.’라고 기도를 해도 계속 가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 그곳에 갔더니 제가 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야 할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니 아는 것입니다.
성찬이가 기어 다닐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 아내는 빨래를 하고 저는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 마음이 불안해져서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급히 “여보! 여보! 성찬이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아내가 “금방 여기 있었는데, 어디 갔지요?”라며 계속 빨래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보니, 아내가 빨래하기 위해 물을 받아놓은 그 물탱크에 성찬이가 거꾸로 처박혀 거품을 뿜으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제 아내는 그것도 모르고 빨래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주여!” 하며 성찬이를 끌어 올려 물을 토하게 해서 성찬이가 살았습니다.
성찬이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저에게 통찰력을 주셔서 그곳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아내도 믿을 수 없고 우리가 믿을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우리가 사사건건 성령님께 의지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통찰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하여 가슴 칠 일도 없고 낭패를 당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에게도 실수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는 투자하는 것마다 성공했습니다. 기도하면서 투자를 하니 실수가 없고 다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찰력을 받아 여러분의 미래가 화려하게 피어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