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12월만 되면 설레이게 하던 장면들이 있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곳곳에 보이는 반짝반짝 트리. 성탄절 이브 발표회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다 깜빡 졸았던 기억. 겨우 깨서 목이 잠긴 목소리로 독창을 해서 부모님이 아쉬워했더랬지. 더 커서도 성탄발표회를 준비하러 토요일마다 성가대 연습을 하러 갔고 끝난 뒤 먹은 달달이 간식이 그리 맛날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발표회가 끝나면 꼭 근처 군부대도 방문해 재탕을 했는데 쏠티와 함께 뮤지컬 호응이 꽤 좋았고 군장병 오빠?들에게 편지도 받았었다.
그렇게 이브 행사가 끝나면 아빠 전도회 회원 중 누구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 갔던 것 같다. 어느 날은 어른들끼리 거실에서 다과를 나누실 때 어린이들은 방에서 '나홀로 집에'를 같이 보았다. 아니,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나? 그 때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갑자기 헷갈리는 것이 당황스럽지만, 맥컬리 컬킨이나, 마리아나 내게는 성탄와 연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점에서는 동일하니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그런 향수를 좇아서였을까, 이번 연말에는 둘째도 좀 컸겠다 가족끼리 공연 한 편을 같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뒤적이다 예약하게 된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이 공연은 전국적으로 하는데 서울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국립 발레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유니버셜발레단이 맡아 한다. 아무래도 장소가 집에서 가깝고 익숙한 곳인 세종문화회관 것을 큰 맘 먹고 예약했던 차. 예매를 할 때는 그 날이 언제 오나 시간이 한참 남은 것만 같았는데 벌써 12월 말 그 날이 되었다. 요즘 날이 추워 머리끝 귀마개부터 발끝 부츠까지 단단히 무장을 하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로비와 각 층마다 기다리는 관람객들로 가득이다. 키오스크에서 카톡으로 발송된 QR코드를 찍으면 바로 발권이 되기에 다행히 줄은 금방 줄어들어 여유있게 우리 자리로 갈 수 있었다. A 석 3층 F열. 3층이긴 하지만 나름 꽤 돈을 들여, 그것도 예약을 서둘러서 셋째줄인데 서은이는 왜 1층이 아니냐고 불만이다. 서은아, 이 높이가 무대 전체가 보여서 딱 좋아. 달래고 앞을 보는데 너무 먼 감도 없고 나름 마음에 드는 자리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된다. 미리 동영상으로 찾아 보고 음악도 들어서인지 아이들은 바로 공연에 빠져들었고 인터미션 후 2부까지 벌써 끝난 건가 의아할만큼 시간은 순삭으로 지나갔다. 서은이는 프릿츠와 친구들이 호두까기 인형을 들고 기뻐하는 클라라를 방해하는 장면,늑대와 어린양들이 나와 춤추는 장면과 커튼콜 때 We wish your merry christmas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부분이 재미있었다 한다. 어린양들은 정말 귀여워서 가은이 안듯 꼭 안아주고 싶었다. 가은이도 프릿츠가 등장할 때 자기도 좋았다며 맞장구를 치는데 이유가 신선하다. 이 때 오케스트라 연주소리가 따따다다다! 컸는데 마침 코가 막혀 휴지를 꺼내든 참이었기에 마음놓고 시원~하게 코를 풀 수 있었다는 거다.
나는 눈꽃 요정들의 군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24명의 무용수가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마치 눈이 나리듯 사뿐거리는데 그리 우아할 수가 없다. 사람이 팔다리를 쭉 뻗어 할 수 있는 동작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때 깔린 여성합창의 선율도 진심 천사들의 합창이지 않은가. 차이코프스키가 이 곡을 쓸 때만 해도 발레공연 속에 여성합창을 넣는것은 획기적인 시도였다고 들었다. 사탕요정의 춤에 연주되는 첼레스타라는 악기도 파리에서 발견한 뒤 다른 작곡가들이 미리 알지 못하도록 잘 숨겨두었다 공연 때 짠하고 공개했다는데 영롱한 천상의 소리가 곡의 분위기를 잘 살려준다.
이 외에도 실제 장난감의 소리를 삽입하기도 하는 등 이런 창조적이고 감각적인 시도들이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는 것 같다. 대사가 없어도 음악이 어디선가 들어본듯 익숙한 데다, 의상과 안무가 장면마다의 테마를 너무 잘 드러내어 처음 발레를 접하는 이들도 만족할 만 했다. (남편은 이 날 공연 예매를 잘 했다고 치하하더니 집에 와서는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BGM으로 깔고 이게 여운이 오래 가네~ 한지 며칠 째이다.)
공연이 끝나니 벌써 9시 30분. 온기가 흐르는 공연장을 박차고 차갑고 어두운 한겨울밤으로 겨우 나섰는데 고개를 들고는 그 반전에 깜짝 놀랐다. 광화문 광장에 마침 빛이 가득인 거다. 내년이 토끼해라고 은은히 빛나는 커다란 토끼가 복주머니를 들고 세종대왕 뒤에 자리잡았다. 그 뒤로는 멀리서도 위엄을 자랑하는 광화문이 보인다. 토끼와 광화문 사이에는 가지각색의 종이사람등이 늘어서 있다. 맞은편 KT 광화문지사 건물의 벽에는 미디어파사드로 펭귄이 왔다갔다 하고, 여러 가닥의 빔이 밤하늘을 가른다.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설겆이를 하면 뭔가 의욕이 생기면서 시동이 걸리는 느낌. 늘어지게 있다가 창문을 열어 젖히면 집안 공기 뿐 아니라 나까지도 환기가 되어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 말이다. 이 날의 공연과 광화문 광장은 내게 설겆이같은, 맑은 바깥 공기였다.
예년보다 훨씬 움츠러들게 만드는 지독한 추위는 1월에도 계속될 것 같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식은 밝지 않고 변화에의 기대감도 덜하다. 그래서 HAPPY는 둘째 치고 NEW YEAR이 오는지도 크게 실감 않고 지내온 것 같다. 그런데 오늘에야 연말 느낌이 난다.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 어둠 속에 빛이 공존하는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가벼운 흥분이 인다.
우리 아이들이 커서 종종 뒤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어떤 장면이 생각날까? 안나 파블로바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보고 발레리나가 되길 꿈꿨다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말이다. 오늘 호두까기 인형에서 생생하게 접하는 음악과 발레의 아름다움, 가족과 함께 누리는 행복과 설레임의 공기를 잘 기억하면 좋겠다. 굳히기를 하려면 내년에도 또 보러 와야 하나?^^ 아무리 우리를 얼리는 추운 겨울 속에서도 따뜻한 성탄과 연말에의 온기를 지니고 있기를. 그래서 새 해를 거뜬히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