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90
10월26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9OFs1-zdGIU
(박희전 루케치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몸집을 줄이십시오!>
어르신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저리 큰 질병과 노화, 임종의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그냥 데려가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작게 아주 작게 만드십니다. 알량한 자존심이며, 마지막 남아있는 수치심까지 다 제거하신 후, 마치 갓난아기처럼 만드신 후에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제 생각은 구원에 이르는 문이 좁아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될 수 있으면 작게 만드신 후 데려가시는가? 하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는 수많은 문이 오라고 손짓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멸망에 이르는 죽음의 문들이 보이는 특징은 화려함이요, 휘황찬란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나게 그럴듯해 보이고, 있어 보입니다. 요란스럽고 재미있어 보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다 보면, 이미 깊은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가 되돌아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늘 깨어 기도하면서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어떤 문이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인가? 어떤 문이 우리를 심연을 알 수 없는 깊은 죽음의 수렁 속으로 빠트리는 문인가?
좁은 문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넓은 문 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세상의 것들은 그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지 모릅니다.
‘좁은 문’, 참으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인내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포기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대가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아직 어려서, 아직 젊어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 번번이 실패하지만, 기를 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모두 가뿐히 좁은 문을 통과하리라 믿습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몸집을 줄이십시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
<(1)‘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사람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결혼을 앞둔 처녀들에게 행하는 한 가지 행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많은 처녀가 옥수수밭에 한 고랑씩 맡아 그 고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 한 개씩을 따는 일인데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를 딴 처녀가 그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한번 지나친 것은 다시 돌아볼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옥수수 하나만을 따와야 합니다.
한 번 땄으면 도중에 좋은 것이 있다 해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딸 수도 없습니다. 기이한 일은 제일 좋은 옥수수를 따러 들어간 처녀들은 한결같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못나고 형편없는 옥수수를 들고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뒤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백화점에서 옷 하나를 고를 때도 백화점 내의 대부분 옷가게를 한 번은 훑어보고 보아두었던 것을 다시 찾아갑니다. 이런 능력이 있어야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다 훑어보신 다음에 괜찮게 보신 사람들을 뽑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주장이 칼뱅의 예정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천당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을 뽑아놓고 지옥 갈 사람들은 잘 자라도 죽이고 천당 갈 사람들은 못 자라도 결국엔 살린다는 주장입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앞뒤 안 가리시고 시간 속에 한정되어 미리 인간의 운명을 정하셔야 하는 약한 존재이실까요?
오늘 독서에 예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예정설은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그 은총을 내려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미리 뽑으셨다는 말을 ‘칭의’라 하고, 그래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의화’,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영광을 ‘성화’라 말합니다.
이는 가톨릭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가톨릭교리는 의화가 칭의보다 앞선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며 위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예정설은 하느님을 정의롭지 못한 분으로 만드는 잘못된 가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짓도록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유다를 뽑아 지옥에 보내셨으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악해도 천국으로 보내시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지옥에 가게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의 본성을 예정설로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주신다는 순서를 합리화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는 예정설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심이란 하느님께서 시간과 상관없이 한 번 훑어볼 능력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세상 시작 전부터 아셨습니다. 미리 아시기 때문에 구원될 이들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도록 불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사제로 살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도록 미리 결정하시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것을 아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구원을 위해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리 뽑힌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어떤 면을 보고 미리 뽑으시고 은총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말합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이웃사랑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입니다.
돈에 대한 욕구, 성욕이나 식욕에 대한 욕구, 높아짐이나 명예에 대한 욕구를 거스르는 삶이 좁은 문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마치 강 위에 떠 있는 배처럼 그 물살을 거스르지 않으면 저절로 흘러서 지옥의 폭포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거스를 줄 아는 사람을 미리 보시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미리 뽑으신 이들을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미리 결정하셔서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젓고 싶어 하는 사람을 미리 아셔서 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지가 먼저냐, 인간의 의지가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예정설은 하느님의 의지대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이고,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시고 주님께서 결정해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은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뽑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뽑히지 않아서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뽑히지 않은 것입니다.
나 자신을 거스르려는 의지, 그 의지로 하루하루 자신의 욕망과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이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반면 자아와 타협하라든지, 자아를 찾고 실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미리 뽑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도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내 자와의 욕구에 거슬러 좁은 문인 십자가의 영광으로 향할 때 주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인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
<(2)좁은 문은 하느님과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십자가 고통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을 선택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 본문의 흐름으로 보면 좁은 문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안식일을 설명하시며 ‘열여덟 해 동안 허리를 펴지 못했던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저는 열여덟이 세속-육신-마귀의 합쳐진 숫자라 해석했습니다. 세속-육신-마귀가 인간을 땅을 보는 짐승처럼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말씀과 은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녀의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시고 안수로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다음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며 ‘겨자씨와 누룩’으로 표현하십니다. 겨자씨는 말씀과 같고 누룩은 은총과 같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어집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은총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나면 새가 날아와 쉬게 할 휴식처를 제공합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리와 은총은 그 사람 안에서 자신을 죽이고 이웃을 위해 살게 만들어 짐승의 삶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에서 ‘좁은 문’은 ‘겨자씨와 누룩’ 때문에 당해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룩으로 자기 자신이 죽는 것도 고통이요, 이웃을 위해 겨자나무가 자라나게 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폴 브랜드는 선교사이고 의사입니다. 루이지애나주에서 의사로 일할 때 한 엄마가 딸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의 발엔 붕대가 감겨있었습니다. 폴은 아이가 아프지 않게 붕대를 하나하나 풀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남의 일인 양 진료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폴이 붕대를 다 풀었을 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발바닥에 종양이 생겨 발이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어느 날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는 비닐 위에 빨간색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낙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가까이 와서 보니 아이는 자기 손가락의 피로 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을 보니 치아에도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가락을 물어뜯은 것입니다. 아이의 한 손가락은 그렇게 이미 짧아져 있었습니다. 발에 난 상처는 못이 박힌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썩은 것입니다.
남편은 이런 ‘괴물’을 어떻게 키우느냐며 집을 나갔습니다. 결국, 그 아이는 얼마 뒤 양발과 손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것입니다.
상처가 났는데 아프지 않으면 자신의 몸이 망가집니다. 성장할 수 없습니다. 나병균이 손과 발, 눈 등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병균은 그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눈이 이물질이 들어가면 고통을 느껴 깜빡이거나 이물질을 빼내야 하는데 눈이 곪고 썩어들어가도 감각이 없으니 눈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기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발에 뼈가 드러나도 그 뼈로 걷고, 불에 데면서도 손으로 뜨거운 것을 짚습니다. 처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특권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고통이 없는 이 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상에서 체험될 수 있는 가장 큰 지옥의 고통이 됩니다.
폴 박사가 해외에서 나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심하게 지쳐있는 데다 몸에 열이 난 상태로 강연까지 소화해야 했습니다. 간신히 기차를 타고 강연장까지 가서 연설하고 집에 누웠을 때는 발에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늘로 발을 찔러보았더니 아무 감각이 없었습니다. 더 깊이 찔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폴 박사는 절망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환자를 치료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감각이 있어야 치료해 줄 수 있고 눈이 보여야 하는데 나병에 걸렸다면 이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뿐입니다.
다음날 다시 바늘로 찔렀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따끔했습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로 기차를 타고 왔는데 한 다리가 눌려서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마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폴 박사는 고통이란 것이 그렇게 큰 은총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조: 『고통이라는 선물』,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 두란노서원]
다미안 신부님도 나병 환자들만 모아놓은 섬에 들어가 그들이 하느님 자녀임을 알려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삶을 사는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그저 하나의 동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도 나병이 걸리고 자신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신부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만약 다미안 신부님이 본래 나병 환자였다면 그저 환자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감사하게도’ 나병에 걸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은총과 진리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만 보이게 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이웃을 위해 고통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왜 아파야 해요?”라고 묻는다면 사랑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 나를 봉헌하는 것도 고통이어야 하고 또 이웃에게 내 피를 흘려주는 것도 고통이어야 합니다. 고통이 없으면 누룩도 밀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할 수 없고 겨자씨도 나무로 자라지 못합니다.
따라서 고통의 신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사랑이 가능함을 믿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그 은총의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조금 더 받으려고 노력합시다. 딸아이가 나병에 걸린 것을 보고 도망치는 아버지처럼 되지 맙시다.
좁은 문, 십자가의 길, 이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 이웃을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좁은 문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매일 산보를 다니면서 가끔 제게 길을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계속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길을 걷는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또 다른 길을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서는 묻는 사람의 의도를 넘어서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묻는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의 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현명한 답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은 어쩌면 어떤 사람처럼 숫자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마치 행복도 숫자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집, 좋은 차, 비싼 보석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많은 돈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숫자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셨고, 재물을 창고에 쌓으려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행복할 것 같습니다.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도 비즈니스석을 탈 수 있습니다. 전망이 좋은 집을 살 수 있습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갈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결코 하늘에 닿을 수 없는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과 욕망의 탑입니다. 먼저 가고 있는 사람은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따라오고 있는 사람은 내치려고 합니다. 사랑받고 사랑해야 할 존재인 사람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냉혹한 전쟁터에 내몰립니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분노와 원망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좁은 문일까요?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현문우답이 아니라 현문현답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프란치스코 성인은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줌으로써 받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좁은 문은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참된 행복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또 그분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22-30: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명으로 가는 문은 왜 좁다고 하시는가? 그리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바르고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흠 없는 도덕성을 갖추어,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사람에 해당할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셨다. 그 길을 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4절)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적으로 적다 많다가 아니라 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를 말씀하신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세례를 받고 성당에 와서 미사 봉헌을 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 삶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셨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부름을 받은 자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27절) 하신 이유는 “불의를 일삼았었다.”라는 데 있다고 하신다. 그들은 이를 갈며 비통해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일삼게 되면 그 하느님 백성의 자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올바로 실천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들만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문을 닫은 집주인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말을 두 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일이야 당연하겠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문밖에 선 이들은 집주인과 꽤 친분이 있어 보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식사도 함께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가르침도 즐겨 듣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곧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 앞에서 오히려 단호하게 거부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우리는 성찬 전례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말씀 전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듣습니다. 미사는 우리의 구원 여정에 주어진 최상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미사 참례가 자동으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또 그분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과 그저 피상적인 관계에 머무를 뿐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문이 넓은 문이라면 참 좋겠으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리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애쓰며 노력하라고 주문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친분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결국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문밖에 서서 ‘울며 억울해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강하게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 들읍시다. 문 안팎의 온도 차가 매우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
[제주교구 고병수 요한 신부님]
비록 세상에서 꼴찌일지라도 신앙에선 첫째가 되어야 하겠다. 3년째 교구청에 근무하고 있다. 새벽 6시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9시에 출근하여 점심식사 시간을 빼고 줄곧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본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간다. 유일한 낙은 본당 신부 때와는 달리 주일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괜한 걱정이 생겨나고 있다. 마냥 이렇게 살아도 될까, 세상의 직업인처럼 말이다.
그래도 본당에 있을 때는 영적으로 해이해질 때면 간절히 기도하는 신자나 혹은 한두 시간씩 성체조배를 정성껏 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곤 했다. 또 인간적인 실수를 할 때면 충고를 해주는 신자가 있어 일상을 되돌아보고 쇄신할 기회를 얻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회가 없다. 그래서일까, 한편으로는 참 잘사는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적으로 꼴찌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만큼 이루면서 잘 사는가?’ 하는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 다가와 그분과 얼마만큼 하나 되어 살아가는가?’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세상에선 첫째이면서 신앙에서 꼴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비록 세상에서 꼴찌일지라도 신앙에선 첫째가 되어야 하겠다.
깨끗한 물도 한군데 고여 있으면 썩듯이 현세의 삶에 안주하며 살기보다는 주님의 일상을 돌이켜보면서 매순간 그분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진정한 첫째로 거듭날 것이 분명할 터이다.
=====================
[전주교구 오성기 요한크리스토머 신부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2-30)
프랑스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의 일생 중에 깊은 절망적 상태에 빠질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리는 시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항상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바로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과연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역경과 만납니다. 그 역경을 우리는 ‘苦悲(고비)’라고 부릅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되겠는데…” 하고들 말합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삶의 고비’를 넘기면서 성장합니다. 고비가 닥칠 때마다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 가노라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고생을 겪지 않고 삶의 지혜를 배우고, 깨닫고, 용기를 내고,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물어봅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 안 되겠지요?”(루카13,23)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들이 적거나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에로 나아갈 결단을 촉구하시며 특별히 의미심장한 몇 가지 상징적 개념들로써 그 결단의 절박성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그 문이 ‘닫히게 될 시간’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짊어져야 할 과제의 어려움과 절박성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선을 행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 앞에서 특권을 누릴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그렇듯 위대한 선물, 하느님의 나라, 행복, 구원, 생명을 앞에 두고 시간을 허비할 수 있으며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이글거리는 태양 밑에서 곡식이 알알이 익어가고, 불 속에서 쇠가 강하게 연마되고, 인간은 삶의 고비에서 성숙해집니다. 생명과 도움의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굳건히 믿으며, 구원을 향하여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갑시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카 13,24)
=====================
[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좁은 문>
"꼴찌로서 자신의 모습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오늘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구원은 문을 통과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계속 이렇게 이어집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지금 주님으로부터 내쫓기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길거리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이런 면에서 이들과 아주 비슷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압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입니다.
꼴찌의 위치에서 자신을 처신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를 향한 주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에 의지하면서 있는 힘을 다 할 뿐입니다. 그러한 나를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거두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꼴찌로서 자신의 모습을 잘 맏아들일 수 있는 오늘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단 하나의 길>
루카 13,22-30 (구원과 멸망)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길>
주님께서
나를
알아보시게 하는
단 하나의 길은
내가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오늘 어떤 사람이 주님께 구원받을 사람에 관해서 묻습니다. 많은지, 적은지.
이에 주님께서는 좁은 문 얘기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문이 좁다는 말씀인데 왜 좁습니까? 주님께서 문을 좁게 만드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까?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이, 구원받는 것은 받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고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는 공평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우리 문제입니다.
줘도 받아들여야지 받는 것이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주셔도 받지 못하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데 왜 받지 않습니까? 그 이치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무엇이건 우리는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구원이라면 그 문이 좁지 않을 텐데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 문이 좁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세상 살 때 주님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였다고 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이 세상 끝 날에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내치십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먹기도 마시기도 한 사람이 우리가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영락없이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매주 또는 매일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의를 저지른다면 그것이 다 헛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먹고 마신 것이 영적인 힘이 되고, 그 힘으로 주님께 들은 말씀 곧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오히려 불의를 저질렀다면 아무리 천주교 신자라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을 끝으로 주님께서 하십니다. 첫째 곧 주님을 알고 지내던 사람이 꼴찌 되고, 꼴찌 곧 주님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이 첫째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주님을 알고 지내도 소용없고 주님 말씀대로 사랑해야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좁은 문은,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서 힘써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는 유명한 매장 패션밸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백화점이나 마찬가지인데 규모는 훨씬 큽니다. 한국은 땅이 귀한 까닭에 위로 치솟지만, 미국은 땅이 넓은 탓인지 바닥에 넓게 펼쳐놓았습니다.
지진을 대비한 안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층빌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매장이 넓습니다. 동행한 분이 명품 코너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는데 아주 비싸다고 하시며 한번 구경하시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석인데 어디서 보석을 찾습니까?” 했더니 “신부님은 왕자 병”이랍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납니다. 귀한 보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귀한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석을 아름답게 빛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보석을 잘 가꾸어야지 남이 만들어 놓은 보석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라’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사력을 다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애써 노력하듯이 우리도 구원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 날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루카 13,28) 지금 노력하지 않고 훗날 우정과 연줄에 매달려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형제들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루카 8,21 참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요한사도는“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24,13)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영적인 갈망으로 힘쓰고 있는 하나하나의 수고와 땀을 헤아리십니다. 문은 좁지만 들어가면 있을 곳이 많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 14,2)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음악을 잘 듣지 않지만 그래도 음악을 듣는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차 안입니다. 차 안 라디오를 이용해서 음악을 듣는데, 주로 클래식을 듣습니다. 조용한 클래식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운전하는 데 더 집중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차 시동을 켜자 클래식 음악이 아닌 최신 가요가 나오는 것입니다. 클래식 전문 방송이기에 당연히 클래식이 나와야 하는데, 최신 가요가 나오니 ‘방송국에서 음악을 잘못 틀었나?’ 싶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방송국에서 잘못 틀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에 다른 신부에게 차 운전대를 맡긴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 방송 주파수를 바꾼 것 같습니다. 클래식 방송을 들으려면 클래식 방송이 나오는 곳으로 주파수를 맞춰야 합니다. 주파수도 맞추지 않으면서 클래식 방송이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주파수를 맞춰야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으면서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은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삶, 평화와 기쁨의 삶을 살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야말로 주님께 주파수를 맞춰서 매 순간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참 기쁨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께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좁은 문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입니다. 단순히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루카 13,25.27)라면서 내치실 것입니다.
유다인은 스스로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들 외에 구원받을 사람은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역전되어 구원받을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과 세속 중심이기에 사랑 중심인 주님의 뜻과 반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반대를 받아 힘든 상황에 부닥쳐지게 됩니다. 그래도 이 좁은 문을 향해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이 문 안에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정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행복은 관계에 있다-
어제 교황님 홈페이지의 첫 기사가 흥미롭고 부러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임마누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화기애애한 우호적인 대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2018년, 2021년, 2022년 무려 세 차례에 걸친 만남이었고, 이번 대화와 토론의 내용들은 피난민과 이주민, 기후위기, 중동문제 등 이었으며, 만남 후엔, 간단한 선물 교환도 있었습니다. 정말 지성인다운 만남과 대화요 이와 비교할 때 작금의 대화가 협치가 사라진 우리의 어지러운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나이와 관계없이 자주 만남을 통해 우정을 깊이 하는 두 분 지도자의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관계를 떠나서 혼자서는 못 삽니다. 행복은 관계에 있습니다. 어제는 예수성심자매회 모임이 있었고 만추의 아름다운 계절에 10명이 참석하여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 중 화답송 후렴은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이었고, 저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화답송 후렴을 ‘행복하여라, 주님을 한결같이 믿는 모든 사람!’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한결같은 믿음의 행복한 자매님들입니다.”
격려했습니다. 요즘 저의 관심사는 “한결같은” 삶입니다. 한결같이, 하루하루 일상생활의 여정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 후, 참 많이 사용했던 주제가 “여정”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날 인생 여정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 인생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어는 시점에 있는지, 또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의 계절에 와 있는지 점검해보자 합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이요 언젠가는 끝날 인생여정입니다. 이렇게 내 현재의 시점時點을 확인할 때 환상에서 벗어나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뚜렷이 부각되는 바, “관계의 깊이”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관계의 깊이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이며,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두 관계는 함께 갑니다. 수도원을 찾는 분들에게 가끔 주고받는 문답이 있고, 자주 강론에 인용하며 성찰하곤 합니다.
-“여기 수도원이 참 아름다운 천국입니다.”
참 많은 분이 찾는 수도원이요,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한결같습니다.
“환경이 아름다워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함께 살아도 주님과 무관無關한 남남의 관계, 너와 나의 무관한 관계라면, 고립단절의 혼자만의 삶이라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끊임없이 물어야 할 바, 신뢰와 사랑의 상호 앎의 관계입니다.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상호 우정관계가, 너와 나와 형제로서의 신뢰와 사랑의 상호 우정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주님과 우정의 여정-행복은 관계에 있다-”로 정했습니다. 이런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지 않겠느냐는 어느 사람의 물음에 주님은 뜬금없이 동문서답식 답을 줍니다만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좁은 문”이며 하루하루 온힘을 다해 통과해야할 각자 고유의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바로 관계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의 통과에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우정을 한결같이 깊이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화답송 중 다음 시편이 잘 드러냅니다.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주시네.”
바로 이런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닮아갈 때 우리 또한 참되고 진실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들은 이런 주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했음을 봅니다. 구원의 좁은 문은 이미 닫혔고 사람들은 밖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대로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수없이 문을 두드립니다만 이들에게 들려오는 답은 하나입니다.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환상을 깨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삶의 여정이 주님과 무관한 나 혼자만의 일방적 짝사랑 관계였던 것입니다. 평생을 주님과 함께 살았는데 주님은 “나를 모른다” 하니 주님의 말씀을 경청敬聽하지 않고 자기 식대로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다시 이들은 주님과의 친분관계를 나열합니다만 주님의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생각 없이, 자기 욕심대로 주님과는 무관한 일방적 이기적 혼자만의 정의롭지 못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 그리고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 등 세상 곳곳에서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깊은 관계 중에 좁은 문들을 잘 통과하며 살았던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의 잔칫상에 자리 잡는 데 이들은 탈락입니다.
우리는 참 복되고 고맙게도 이 거룩한 미사축제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을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주님과 깊은 만남의 일치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알고, 또 주님이 나를 안다면, 이런 상호간의 신뢰와 사랑의 앎보다 더 행복에 결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알뿐 아니라, 주님께서도 나를 사랑하시고 알아주시는데 세상 무엇이 부럽겠는지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정신 번쩍 나게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과거의 삶이 아니라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남은 동안 끝까지 첫째로 사는 것입니다. 과거 아무리 첫째로 살았다 해도 지금 앞으로 꼴찌의 삶을 살면 무엇 합니까? 좁은 문 통과는 끝나지 않았고, 영적전쟁도 죽어야 끝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신뢰와 사랑의 여정 중에 영적 첫째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입니다. 이래야 마지막 좁은 문인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선종의 죽음이 아니라 평상시 일상의 삶, 모두가 죽음 준비인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제1독서 에페소서는 어제 부부관계에 말했고, 오늘은 당시 가족 내에서 자녀와 부모의 관계,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든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앞서 주님과의 관계 중에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종들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주인을 섬기라 하시고 주인도 종을 이와 같이 대해 주라하십니다. 즉 그리스도를 섬기듯 종도 기쁘게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 말씀을 통해 주님 앞에는 모두가 귀한 존재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종들의 주님이시며 주인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또 그분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주님께는 주인과 종의 구별은 있어도 차별은 없는 모두가 귀한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존재론적 평등의 관계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한결같이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임을 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는 물론 형제들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 해 주십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13,30)
<첫째가 되자!>
오늘 복음(루카13,22-30)은 '구원과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13,24)
세례성사를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구원의 문이 좁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구원받기가 힘들고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받은 세례와 오늘 내가 받아모신 성체와, 그리고 오늘 내가 바친 기도가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례가 삶이 되지 않으면, 성체가 삶이 되지 않으면, 기도가 삶이 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잡을 것이다."(루카13,29)
세례를 받지 않고, 성체를 받아모시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삶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오히려 믿는 이들의 모습보다 더 나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주변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런 사람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루카13,27)
믿는 이들은 '심판의 때'를 향해 나아갑니다. 마지막 때에 맞이하게 되는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습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믿는 것과 삶이 분리된 위선자의 모습이 아니라, 겸손하게 더 작은 자의 모습으로 세례와 성체와 기도의 본질을 삶으로 살아낸 모습입니다.
오늘도 첫째가 되려고 노력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nw88z45O4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다."(루카 13, 30)
우리자신의
삶을 바로보는
시간입니다.
주님께로
너무 멀어진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다시 직시하게
만드십니다.
말씀과
실천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첫째와 꼴찌의
방향은 사뭇
다릅니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마음을 매순간
일으키는 것이
첫째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자세를
다시 한번
되살펴보게 됩니다.
용기와 결단이
마음을 다시
살리는 믿음의
실천이 됩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을 무너뜨리는
꼴찌로 전락하게
만듭니다.
우리자신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실천과
거리가 먼
악습을 멈추는
것입니다.
생활은 비좁고
불편해도
마음이 행복했던
그 첫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첫마음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 있음에도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어리석은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기르는
마음의 새날입니다.
+++++++++++++++++++
(2)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 30)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내리막과 오르막의
힘겨운 길입니다.
한순간에
미끄러져내리는
수 많은 첫째들을
만납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꼴찌가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지는 해처럼
삶은 참으로
짧습니다.
그 어떤 자리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붙잡아야 할 것은
자리가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처음과 끝
첫째와 꼴찌
모두 주님을
향해야합니다.
부패한 첫째가
아니라 회개하는
꼴찌이길
바라십니다.
첫째와 꼴찌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마지막과
마무리가
아름다운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첫댓글 매일 올려주시는 복음말씀 살이되고
피가 되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