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이태전에 올렸던 '가죽 잠바'를 리메이커한 것이다.
가죽잠바
엄동설한도 아닌 오뉴월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웬 가죽잠바 타령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잠바는 본래 영어 jumper에서 유래한 말로, 품이 넉넉하고 활동성이 좋은 서양식 웃옷을 가리킨다.
잠바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6·25전쟁 직후 유엔군 부대에서 민간으로 흘러나온 군용 점퍼인 유엔잠바, 야전에서
병사들이 입는 방풍·방수용 야전잠바, 허리 둘레의 끈을 졸라매 입도록 만든 옹치잠바, 그리고 파이러트들이 즐겨
입던 파이러트 잠바 등이 있었다.
내가 해군에 있을 때는 겨울철 출동을 나가면 장교들에게 방한용 잠바가 지급되었다. 깃에는 탈부착이 가능한 두툼한
털가리개가 달려 있었다. 당시 육군에서는 이 털가리개가 장성급 장교들에게만 지급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갈 때마다 부산역 TMO를 자주 이용했다. 그곳 해군 담당자가 한때 내 부하였기 때문이었다.
TMO 안에는 VIP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고급 인테리어는 물론 푹신한 소파와 카펫, TV가 갖춰져 있었고 차와
커피도 제공되었다.
VIP실은 말 그대로 장성들을 예우하기 위한 공간이다. 스타가 없을 때는 늘 비어 있었는데, 가끔 대령들이 빈틈을 이용
해 잠시 쉬어 가기도 했다. 나는 당시 중위에 불과했지만 담당자의 직전 상관이라는 이유로 예우를 받아 당당히 VIP실
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방한잠바의 깃을 바짝 세워 뒷목만 보이게 한 채 소파에 앉아 있곤 했다. 그러면 잠시 쉬었다 가려던
육군 대령이 문을 열었다가 장성이 쉬고 있는 줄 알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문을 살며시 닫고 돌아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계급장이 아니라 잠바의 털깃이 만들어 낸 작은 해프닝이었다.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휴스턴 애스트로스 경기에서는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젠슨 황이 늘 입던 검은 가죽잠바를 벗고 애슬레틱스 유니폼을
입은 채 시구를 한 것이다.
그는 1993년 게임용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기반으로 엔비디아를 공동 창업해 오늘날 인공지능(AI) 시대를 이끄는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면 검은 터틀넥과 리바이스 청바지가 생각나듯, 젠슨 황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검은 가죽잠바다.
창업 초기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용산전자상가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당시 용산은 아시아 최대의 전자제품 메카이자
세계 IT 마니아들의 성지였다. 나 역시 그보다 몇 해 앞선 1988년, 용산전자상가에서 생애 첫 286 PC를 구입했던 기억
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 컴퓨터는 미래를 향한 꿈이었고, 용산은 그 꿈을 파는 시장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또 하나의 놀라운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젠슨 황이 실제 입고 사인까지 한 검은 가죽재킷
한 벌이 미국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96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4억 3천만 원에 낙찰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판매가격이
1만 달러 정도였으니 100배가 넘는 값이다. 45명의 수집가가 65차례나 응찰을 벌인 끝에 낙찰되었다고 하니, 사람들은
더 이상 가죽 한 벌을 산 것이 아니라 AI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의 한 장면을 산 셈이다.
생각해 보면 옷은 그저 몸을 가리는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옷은 입은 사람과 함께 시대를 입는다. 나에게는 해군
시절의 방한잠바가 젊은 날의 추억을 품고 있고, 스티브 잡스의 검은 터틀넥은 혁신을 떠올리게 하며, 젠슨 황의 가죽잠바
는 AI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불과 반세기 전 내 방한잠바는 추위를 막기 위해 지급받은 군수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한 벌의 가죽잠바는
14억 원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잠바는 그대로인데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결국 사람들은 옷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세상을 바꾼 사람을 기억한다. 그래서 가죽잠바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한 시대의 상징이 되었고, 나에게는 젊은 날의 군복 위 방한잠바와 함께 세월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