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 샤바 알 샤바 19xx년도... "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어린 시절 심심치 않게 불렀던 이 노래, 무슨 생각으로 불렀던 것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유년시절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동화책에서 TV 만화를 통해서 수없이 신데렐라를 만나왔다. 어디 이뿐인가 커서는 어떠한가. 신데렐라 이야기의 구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드라마 또한 수없이 만나왔다.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했던 <귀여운 여인>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으며, 심지어 <신데렐라>는 제목의 드라마도 있었다.
Cinderella, 1899 >>>
Oil on canvas
Valentine Cameron Prinsep
Manchester City Art Galleries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이 기원을 따져 올라가면 꽤 복잡한데, 왜냐하면 신데렐라 이야기는 여타 전래 동화처럼 구전되어 온 이야기로서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유럽에만 5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물론 유럽에만 존재하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나라에 <콩쥐팥쥐>가 있듯 동양에서도 보편적인 전래 동화 중에 하나이다. 현재 신데렐라의 유사 이야기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의 <섭한(葉限) 이야기> 다. 이는 << 유양잡조(酉陽雜俎) >> 나오는 이야기로 이야기의 때를 전한 시대라고 밝혀두고 있으며 마을의 중인이 채록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적어도 서기 900년 이상 올라간다는 얘기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이 이야기는 그 시점에서 채록되었지만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져 구전되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서양은... 17세기 프랑스의 문예 비평가인 샤를로 페로(Charles Perrault, 1627 - 1703)가 1697년도에 수많은 구전 동화를 채록, 개작한 책인 <<거위 아주머니 이야기(Contes de ma mere l’oye) >>에 < 샹드리용(Cendrillon) >수록된 것이 있다. 이 책은 1729년에 영문판이 나오는데( << Tales of Mother >> ) 여기에 < 신데렐라(Cinderella) >라는 이름이 나온다. 페로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것은 다른 이야기들과 달리 ‘유리구두’가 등장하는 것이다. 유럽어권의 다른 이야기들 같은 경우 금구두, 은구두, 반지 등이 일반적인 소재였다.
이 신데렐라라는 이름은 ‘재투성이’라는 뜻이다. 지금이야 기름이다, 가스다 하여 좋은 연료가 있지만 어디 옛날에는 오직 나무다. 그러니 집안의 난방을 하고 요리를 하다보면 재투성이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신데렐라는 구박받으며 일만 한다는 의미심장한 뜻이란 것이다.
<<< Cinderella, 1863
Watercolour, 67 x 31.5 cm
Sir Edward Burne-Jones
Museum of Fine Arts, Boston, USA
구전문학이라는 것이 저자가 없다 보니 개작자나 채록자의 사회관, 가치관에 의해 변형이 일어난다. 물론 이러한 개인의 성향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페로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 동화작가 그림형제의 작품과 비교하여 어린 아이들에게 그림형제가 쓴 <신데렐라>를 읽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좀 웃기는 얘기다. 현대 사회는 과거의 흔적을 보호하는데 광적일 정도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작에 대해 손을 대는 것을 꺼려한다. 왜냐면 원작에 손을 대는 것은 성공하면 본전이고 실패하면 욕 먹으니까.
이와 같은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은 << 신데렐라 콤플렉스 >>를 쓴 미국 칼럼리스트인 콜레트 다울링의 영향이 크다.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가지고 무슨 콤플렉스는 심리학계에서 한때 유행이었다. 우리가 흔히 즐겨 쓰는 피터팬 증후군, 웬디 콤플렉스라는 용어들처럼 말이다. 이는 딱딱한 학술용어가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장점을 가지지만 비유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유쾌한씨 개인적으로 신데렐라 콤플렉스도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콜레트 다울링은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일어나는 것은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갈 것과 가정 속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규정짓는 교육의 중첩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신데렐라처럼 여성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손길을 기다리는 잠재적인 의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의견은 미국에서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유쾌한씨가 그녀의 저서에 대해 잠시 언급했지만 그녀의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얘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란 주로 억압된 태도와 불안이 뒤엉켜 여성들이 그들의 의욕과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일종의 미개발 상태로 묶어두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오늘날 여성들은 신데렐라처럼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줄 외부로부터의 구원의 손길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콜레트 다울링의 << 신데렐라 콤플렉스 >> 중에서
유쾌한씨는 위의 콜레트 다울링의 견해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대한 왜곡이라고 생각한다. 신데렐라 이야기에 대해 한번 잘 생각해 보자. 신데렐라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 설화에를 둘러 보면 아버지란 존재는 매우 미약하다. 그토록 구박을 받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적어도 서기 1000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미약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렇게 볼 때 신데렐라 이야기는 모계 중심 사회에서, 아니면 부권과 모권이 어느 정도 견줄만한 상황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계모와 그의 딸들은 매우 적극적이라는 사실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서양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성경으로 이어지는 여신의 지위 변화를 보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더욱더 접근할 수 있다.
Cinderella, 1913 >>>
Oil on panel
Maxfield Parrish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용어는 매우 공격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 우리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현대 사회에서 부정하고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가치관을 공격하는데, 여성을 일깨우는데 사용될 수 있다. 이제까지 그래왔지만...
복권의 유행은 대박의 꿈에 있다. 이는 사람들의 신분상승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신데렐라의 꿈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이들의 마음이다. 요즘 유쾌한씨는 첫 여성 총리가 될뻔 했던 장상씨의 총리부결을 보면서 여성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처음 미술칼럼을 쓰면서 4번째 칼럼을 쓰기 까지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쓴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곡하기 보다는 바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민감하면서도 무거운 얘기를 한듯 해서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 1832-1883)의 삽화를 구해봤습니다. 도레는 프랑스 스트라스부스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판화, 소묘에 재주가 있었구 특히 책의 삽화, 풍자화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아래의 그림들은 페로의 책을 재출판 하면서 실게된 도레의 삽화들입니다. 오랜만에 동화의 나라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