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 여행4 - 시크와 알 카즈네를 지나 페트라로 들어가 옛 유적을 보다!
4월 12일 요르단의 페트라 입구 비지터 센터에서 출발해 계곡 800m 와 바위 협곡인 시크
1,2km 를 합쳐 2km 를 30분 가량 걸어서 알 카즈네 Al Khazaneh 신전에 도착하니
밝은 장밋 빛 바위 조각을 6개의 코린트식 석주가 받치고 있는 “트레저리” 가 볼만합니다.
신전 건물의 1층에는 죽음의 여신 "야마조니언" 이 낯선 방문객을 노려보는데, 2층
꼭대기의 독수리와 1층 난간의 사자는 소위 하늘과 땅을 대표하며.... 지붕
쪽의 항아리가 돋보이는 나바테아 왕 아테라스 3세의 무덤이자 신전이라고 합니다.
시크 1.2km 가 끝나는 지점에 바위 암벽을 파서 만든 아리따운 알 카즈네를 구경하고는
500m 를 돌아 들어 가노라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넓은 분지가 나옵니다.
여기 거대한 절벽에는 바위를 깍고 다듬어서 알 카즈네 같은 유적을
만들다가 그만 둔 흔적이 여럿 보이니.......
우리는 이른바 2천년전의 나바테아인의 도시 페트라 에 온 것입니다!
이 협곡에 자리한 도시 페트라 는 저 처럼 붉은 사암을 깍아서 만든 도시라
자연히 붉은 장미의 도시 Red Rose City 라는 별칭으로 불리는가 봅니다.
성서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장자이자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에돔 왕국의 수도( 셀라 ) 라고 합니다!
500여년의 세월이 흐른후 BC 13세기에 모세가 애굽의 유대인을 이끌고
이집트 군대의 주둔지인 지중해안을 피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모세 일행이 에돔 왕국 을 통과해 지나갈 수 있도록 요청하나
거절당하자...... 멀리 사막쪽으로 우회를 하게 됩니다.
그 때 40년 방랑생활 중에 머문 곳 가운데 하나가 이 계곡이라.... 와디 무사
Wadi Musa ( 모세의 계곡 ) 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하네요!
그럼 당시에는 이 계곡은 비어 있었다는 뜻이니...... 그 당시에
에돔 왕국의 주요 거주지는 다른 지역이었다는 뜻일까요?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나기 전에 페르시아 제국에 왕위 계승 전쟁 이 일어나자
소아시아의 통치자였던 동생이 군대를 몰고.... 동쪽으로 수도인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는 데 이때 "만명의 그리스인이 용병" 으로 참전합니다.
하지만 유프라테스강 전쟁에서 고용주인 동생(왕자)이 전사하자 그리스인들은 후퇴하는 데,
소아시아 해안도로는 페르시아 군대가 성에서 지키니 내륙 산악지대로 우회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터키 내륙 산악지대의 그 수많은 부족 국가중에서는 자국의 군사력이 약한 것을
잘 알면서도 어느 부족도 영토 통과를 허락하지 않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지요!
모세의 탈애굽시 에돔왕국의 자국 영토 통과 거부 역시 국제관례에 크게 벗어나지
않음에도 후일 다윗왕은 요압을 보내서 에돔 왕국을 멸망시켰던 것이라.....
스위스의 베른 지방에 살던 켈트족 헬베티인들은 게르만족의 침입에 밀려 부족회의 끝에 서쪽 끝 대서양
에 면한 브르타뉴 지방으로 이동 하기로 결정하고는, 12개 도시와 400개 촌락 에서 모인 총인원
37 만명, 그 중에서 전사만 9만 2천 에달하는 대 무리가 2개월치 식량만 휴대한채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 스위스 베른에 있는 헬베티아인의 광장 ***
수백년을 살아온 터전인 고향땅에 대한 미련을 끊기 위해 대담한 결정을 했으니.... 바로
도시와 부락을 모두 불태웠던 것이라! BC 58년 4월에 제네바에 집결한
헬베티족은 갈리아 땅에 사는 하이두이족 등 여러강력한 부족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대서양 브레타뉴에 이르는 서쪽으로 난 직진 코스를 포기하고 론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우회
길을 택하는데 그럴려면 이미 오래전에 로마화 된 갈리아(프랑스) 남부 속주 “갈리아
트란살피나” 를 통과해야 하는데, 속주 총독으로 내정된 시저(카이사르) 는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카이사르는 이태리 땅에 있었는데, 5개 군단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달랑 1개군단 ( 제10군단
으로 병력수 6천명 ) 만 거느리고 급히 알프스를 넘는데, 이런 전광석화 같은 행동에
당황한 헬베티족은 하이두이족에 부탁하여 세콰니족 영토를 무사히 지나도록 설득에 간신히 성공합니다.
( 임진왜란 때 戰死易 假道難 이 생각난다! ) 30여만명이 지나가다 보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발생한
사소한 충돌이 마침내 전투로 돌변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 화 (禍) 가 미치자 하이두이족은 동맹
관계인 로마에 원군 을 청하니 시저는 프로빈키아 속주에서 3개군단을 이끌고 진격해 후미에 일격을 가합니다.
군량이 떨어진 헬베티인들이 항복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37 만명의 무리중 70% 가 죽고 불과 11 만명
으로 줄어들었지만 갈리아 동부 황폐화 되었으니, 자국 영토 통과를 허락한 세콰니족과 하이두이족이
입은 피해를 생각한다면.... 이처럼 다른 부족이나 군대의 자국영토 통과는 절대로 허용할수 없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다윗 군대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쳤던 에돔왕국의 왕자 하닷이 절치부심 끝에
솔로몬왕 사후에 돌아와 암몬, 모압과 연합까지 했으나 유대에 패배 하였으며.....
후일 아람왕이 아시리아와 연합해 유대를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유린하자
에돔 도 한때 피폐해진 예루살렘을 넘보며 자치를 누렸으나.....
이후 아시리아 와 바빌론이 침입하여 차례 차례 그 속국이 되어 갑니다.
이어 BC 586년 바빌론에 의해 유대가 멸망 당하는 것을 고소해 했으나 에돔 자신도 과중한 조공에
허리가 휘어 쇠잔하다가 동쪽 사막을 건너온 아랍의 나바테아인 의 침입 으로 무너
졌으니! 일부 생존자가유대로 도망쳐서 헤브론 남부에 소국을 세웠으나 오래 지속하지는 못합니다!
여기 옛 유적지인 페트라 는 “붉은 바위 사막” 이란 뜻으로 바로 나바테아인들이
계곡 깊숙한 곳에 붉은 사암인 바위 암벽을 파서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후일 나바테아 왕국의 페트라는 대상로에 위치하여 번영을 누리게 되었고, 그 언어는
예수님이 평소에 사용한 시리아와 가나안의 국제어 인 “아람어” 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기 106년에 시리아 동쪽 사막에서 오아시스 여제국 팔미라가 강성해지자 전략적인
이유로 페트라 지방의 확보가 시급해진..... 트라야누스 황제의 로마군이 침략해 옵니다!
외부에서 시크의 홈을 따라 공급되는 수도관이 끊김으로써 함락된 후에 7세기에는 지진으로
파괴되고, 무역 신항로가 발견되면서 대상이 줄어드니 페트라는 점차 잊혀졌다고 하네요!
이후 1,200여년 세월 모래흙에 파묻혀 그 존재조차 잊혀져버린 도시 페트라는
1812년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 되었으며.....
페트라 안의 와디무사 (모세 계곡) 에는 출애굽 당시에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을 터뜨린 이른바 “모세의 샘” 이 있다는 데....
오른쪽으로 보이는 저 절벽의 동굴은 왕가의 무덤 이라고 하는데,
바위의 색깔이 붉고 흰 것이..... 참으로 변화무쌍하네요!
바위 벽에 깍아서 새긴 것들은 조그만 신전일까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넓은 광장이
네크로 폴리스인 모양인데..... 스보니어 가게에서 베드윈이 토산품 을 팔고 있습니다!
여기 광장에는 스보니어 가게 맞은편으로 그러니까 왼쪽에는 역시 바위를
깍아 만든 5천명 수용 규모의 로마 시대의 노천 극장이 보이는데......
사암의 미세한 모래가루가 잡음을 흡수하고 극장이 완벽한 구조를 지녀서 음향이 완벽
하게 전달된다니 2천년 전에 바위를 파서 만든 사람들의 기술과 지혜가 돋보이네요!
여긴 관광객을 태우는 말이며 낙타 그리고 나귀등을 몰고
다니는 베드윈족 사람들이 엄청 많이 보이는 데......
광장과 바위 벽들을 둘러보고는 다시 왼쪽 언덕을 오르노라니 베드윈 한
가족이 천막을 치고 거주하는 데.... 그 살림이 무척이나 궁핍해 보입니다.
하여 선배님이 아이에게 초콜릿을 주는 데..... 아이는 이런 일에는 이제는 익숙해진 것일까요?
첫댓글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행동은 네 습관이된다 .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
오늘 하루를 만끽하며 살아야 한다.
건강과 행운이 있는 행복한 시간 되세요.
🌝🌝🌝🌝🌝
아무리 생각해도 저 협곡은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