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37,21ㄴ-28
요한 11,45-56
성주간을 앞두고 주님 수난에 함께할 준비의 필요성을 오늘 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솔로몬 사후 분열된 왕국의 재통일에 대한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다윗을 유일한 목자와 제후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예언과 함께 이 재통일된 왕국의 평화로움이라는
영원한 계약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과 거처를 그 백성 가운데 두시어 그제야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는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의회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최고 의회는 세속 권력과 많은 재물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과 하나 됨을 거부합니다.
특히 카야파 대사제는 기회주의적 발언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말썽을 일으키는 자를 제거하려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민족에게 이익을 가져온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에제키엘의 예언이 대사제와 최고 의회가 원하지 않는 하나 됨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목자와 제후로서 민족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죽음은 널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하나로 모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주간을 준비하며 다음과 같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카야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가, 아니면 예수님과 하나 됨을 진정으로 바라는가?’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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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덕 베드로 신부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37,21ㄴ-28
요한 11,45-56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찬미예수님.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참으로 무서운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예전에는 학생들에게 강한 매를 드셨던 선생님이셨습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자주 도망다니던 친구들도 그 선생님께서 감독하신다고 한다면
두말없이 학교에 남아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저는 야간자율학습 감독 선생님이 착하고, 좋은 평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맑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학교 정문을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친구들은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빼먹고 도망간 저와 친구들 주위에 모여들면서 말했습니다.
“너 이제 큰 일 났다. 어제 감독 선생님이 바뀌었지. 그리고 출석체크했어”라고.
친구들과 저는 허탈한 웃음과 더불어 뒤늦게 찾아드는 불안감에 초조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교무실로 불려갈까하는 생각들, 어떤 고초를 당할까 하는 생각들...
매번 수업시간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교실 문이 열리면, 알 수 없이 긴장하던 그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 안도의 한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셨듯, 주님의 때는 뜻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그 순간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긴장이 풀어지려는 순간, 담임 선생님께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해맑은 미소로, 어제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도망쳤던 저와 친구들을 불러내었고,
저희 모두는 두려운 마음으로 교무실로 끌려갔습니다.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 선생님의 표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끝자락에 나오는 말씀
“그제야 민족들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제야 우리들은 그 분이 무서운 선생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 징벌의 날...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과연 그 분을 우리는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는 과연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실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 분은 이 곳에 나타나실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모두가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분명한 것은,
바로 예수님 수난이 두렵고 망설임으로민 다가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매를 맞고, 집으로 돌아갈 때 친구들과 히히덕 거렸던
편안함과 같이 모든 죄의 속박을, 그리고 두려움을 털어낼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순을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주님의 수난이 두렵고 망설여 지신다면 마음으로 주님께 청하시길 희망합니다.
“사랑이신 주님, 나약한 저의 마음을 바로 잡아주시길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 수난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소서”라고.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하고. 아멘
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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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진 요셉 신부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요한 11,45-56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타인에게 희생하며 사는 삶
오늘 복음은 어디에서 포인트를 잡아야할 지 힘들었습니다.
몇 번을 읽어보다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
’라고 한 대사제 카야파의 말에서 눈길이 멈췄는데,
이 말은 결국 예수님께서 모두를 위해 죽게 되신다는 예언이 된 셈이었습니다.
4년 전 아무 것도 모른채-눈에 뭔가가 씌였던게 틀림 없습니다-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정말 심심하고,
내가 여기 왜 왔나하는 탄식만 자아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차츰 적응하고 일본어로 대화가 될 이루어질 즈음에 일본어 미사도 하게 되었는데,
매일하는 아침 6시 반 정도의 미사에 인근 유치원 수녀님을 제외하고
고작 2,3명 어떤 날은 한명 뿐인 미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인원수가 적은데 해서 뭐하나? 시간대를 옮기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계속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이 계속 미사를 했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건강이 안 좋아져 귀국하게 될 때 즈음에는
‘미사에 참례하는 인원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사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
에 도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가지고 성모여고로 발령을 받은 후 처음 했던 것이
토요일 오후 5시에 드렸던 고3미사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과 핑계로 주일미사를 거르는 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주말을 포기하고 토요일에 학교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교목신부는 학교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이기에 평일에 출퇴근을 반복하다
주말에 쉴 수 있는, 여느 본당신부들과는 다른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는 일터였습니다.
그러기에 토요일 늦게까지 학교에 있는 다는 것은 희생을 치러야하는 것이었지만
나 하나 희생해서 저 학생들이 미사를 드린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는 생각에
크게 어려워하지 않고 이 일을 수능 끝날 때까지 계속 할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첫날에는 10명이라는 인원수에 만족해하며 미사를 봉헌했지만
수능 전 주 미사에는 고3 전체 신자수의 거의 반이나 되는 48명이 함께 할 수가 있었고,
이런 미사의 은총과 나의 희생으로 거의 모든 학생들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것이 바로 마지막 나눌 저의 착각,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 모두 구원받았듯이, 나의 희생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물론 아직 한참이나 모자라고 뒤쳐졌지만
그래서 많은 부분에 있어서 많은 희생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시간에 있어서만큼은 희생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저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아, 그런데 계속 저의 착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어째 저의 착각이 아니라 저의 자랑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떠신지요?
제가 제 자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저의 착각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데....
헷갈리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도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타인에게 희생하며 사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산교구 장용진 요셉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