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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滿洲)의 향수(鄕愁) 내가 만주에서 개장수 할 때에~ 만주웨스턴 영화 "놈놈놈" 에서는 이상한 놈 송강호가 만주개장수 캐릭터로 나온다. 어릴 때 동네 아저씨들이 농담인지 진담일지 모 를 "내가 만주에서 개장수 할 때에~" 라는 우스갯소리에는 나도 젊을 때에는 잘나갔다는 의미와 젊을 때 고생 무척 했고 이것저것 안 해본 것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만주는 청나라 황실의 근거지였기에 한족에 의한 지배가 제한되어 있었으나 청조 말에는 중국 내륙의 하북이나 산동으로부터 많은 이민이 유입되어 급속한 한화(漢化)와 개척이 진행되었다. 만주국은 1932년(大同원년)에서 1945년(康德12년)까지 만주에 존 재했으며 수도는 신징(新京)-지금의 창춘(長春)이었다. 건국이념으 로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만주인, 몽고인에 의한 오족협화(五 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제시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제국주 의 관동군의 영향력에 하에 있는 괴뢰국가였다. "일본제국과는 불 가분의 관계에 있는 독립국가"라는 주장이 당시의 대부분 국제연 맹가맹국으로부터 받아들여 지지 않고 중화민국의 주권을 인정하 자 1933년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만주국은 건국 직전인 1931년 2.2억 엔이던 공업생산이 1943년에 는 39.3억 엔으로 급증했다. 일본의 중화학과 군수공업에 대한 집 중적인 투자와 5년 단위의 계획경제가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주의 경기 활황덕분에 일본은 1930년대 세계경제 대공 황의 어두운 그림자에서도 한 발 비켜나 있었다. 식민지의 청년들 은 조국 독립의 희망 대신 일확천금이나 출세의 꿈을 안고 만주로 떠났다. 만주국과 관련된 인맥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 다. 특히 2키3스케라 불리는 군, 관, 재계의 일본인 5인의 실력자는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었다. 그중 만주국 총무처 차장을 지낸 기시노부스케(岸信介)는 한일국교정상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 고 그 공로로 대한민국의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받았다.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입안한 바 있는 그는 미군정의 일본 부흥계 획의 일환으로 불기소 처분되어 전범에서 소생하여 일본 총리를 지냈다. 그는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꾸고 우경화로 치닫 고 있는 아베의 외할아버지이다. 만주 군인맥으로는 박정희, 백선 엽, 이한림, 정일권, 김창룡 등이 있고 5·16 주도세력은 대부분이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 졸업 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군정에 의해 조선경비대에 중용되고 남로당 관련 숙군 의 회오리를 벗어나 쿠데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실시한 중화 학공업 중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만주모델에 뿌리를 두고 있었 다. 만주국의 관리 양성을 위한 대동학원과 건국대학 출신으로는 최규하 전 대통령과 강영훈 전 총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만주에 향수를 느끼는 인맥들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끌다시피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시대정신이 필요한 때다.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사람은 만주인맥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닌 만주에서 개장수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거나 자금 을 대주었던 이름 모를 분들이 아닐까? 글 배충진 |
Rastafair - Friendships (Remix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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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
다녀가신 고운 걸음,
감사합니다~
추석 명절 잘 보내고
계신지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뜻깊은 연휴 여유롭게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
6.25 때..
맥아더 장군이 만주를
원자탄으로 쳐버려서
찾아왔어야 했는데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그때..
여론이 길림성 만주에다가
핵을 터뜨려야 한다고가
우세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