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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⑪] 철종 무절제의 비극, 술과 여색의 해악이 자식에까지 미치다 *글 정지천 <조선일보> 2014년 5월 29일
정지천 ~ 1985년에 동국대학교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부속한방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거쳐 한방내과 전문의가 되었다.1991년 동 대학원에서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1년부터 동국대 한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 동국한방병원 병원장과 강남한방병원 병원장, 동국대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대한한방내과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으로 진료하고 있다. 연구 논문으로 ‘二精丸이 노화과정에 미치는 영향’, ‘고지방 식이 흰쥐의 비만에 미치는 三精丸의 영향’, ‘二至丸의 고혈당 조절 작용 및 기전에 관한 연구’ 등 당뇨병, 노인병, 남성병, 항노화 등에 관한 150여편을 국내 외에 발표하였다. 저서로는 ‘명의가 가르쳐주는 약이 되는 생명의 음식(2013, 중앙생활사)’, ‘명문가의 장수비결(2011, 토트)’, ‘식의들이 알려주는 생명의 음식 120 (2008, 중앙생활사), ‘마늘 하루 다섯 톨의 자신감 (2007, 웅진윙스)’, ‘조선시대 왕들은 어떻게 병을 고쳤을까 (2007, 중앙생활사)’, ‘어혈과 사혈요법 (2002, 가림출판사)’, ‘우리집 음식 동의보감 (2001, 중앙생활사)’, ‘신장이 강해야 성인병을 예방한다 (2000, 도서출판 청송)’ 등이 있다.
강화도령으로 불린 철종은 비명에 간 사도세자와 후궁과의 사이에 태어난 왕자, 즉 정조대왕의 서출 아우였던 은언군의 손자입니다. 그러니 왕손으로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했었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던 상황인지라 왕의 가까운 친척으로 똑똑한 사람은 누구나 역모로 몰려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도 왕족의 유배지였던 강화도에 유배되었기에 가족 모두 강화도에서 살아야만 했고, 큰형인 회평군은 사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철종은 19세에 용상에 올랐습니다.
▲철종의 어진. 6.25당시 훼손된 부분이 1987년 복원됐다(오른쪽). <사진: 문화재청>
왕이 되기 전까지는 매우 힘들게 살았던 강화도령 철종은 19세가 되도록 군의 칭호도 받지 못했고 장가도 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천애고아로 살았습니다. 나무를 해서 팔거나 남의 집 일을 도와 겨우 먹고사는 처지였던 겁니다. 그래서 별명이 ‘강화도령’이었고, 그냥 ‘원범’이라고 불리던 떠꺼머리 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헌종 임금이 갑자기 죽자 안동 김씨 측에서 내세우는 바람에 졸지에 왕이 되었던 것이죠. 권력을 자기네 마음대로 주무르고자 무식한 왕족을 왕으로 옹립한 것입니다. 그러나 철종은 불과 33세에 요절하고 말았는데, 어떻게 해서 한창이었던 나이에 그 좋은 자리를 마감했어야만 했을까요? 건강하던 분이 최고의 주거 환경에서 최고의 음식과 온갖 귀한 보약을 드시고도 겨우 14년 만에 세상을 떠난 이유를 분석해보겠습니다.
철종이 요절한 까닭은? ①첫째, 강화도에서 편하게 멋대로 살아가다가 온갖 법도가 엄격하고 까다로운 궁중에서 지내다보니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왕은 국정의 전반에 걸쳐 중요 사항에 최종 결제를 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관장해야 했기에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할 일을 ‘만기(萬機)’라고 했는데, 만 가지나 된다고 풀이할 수 있죠. 실제로 왕은 빡빡한 스케줄에 따라 매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왕의 하루 일과는 해뜨기 전인 새벽 5시 전후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왕대비전이나 대비전에 문안 인사들 드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침에는 ‘조강(朝講)’이라고 하여 신하들과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유학 경전이나 중국 또는 우리나라의 역사책 등을 교재로 하여 그 해석에 대하여 신하들과 열띤 토론을 벌인 것으로 ‘경연(經筵)’이라고 하였죠. 학문 토론장이었고, 때로는 정치 토론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침 경연이 끝나면 아침식사를 하고, 이어서 ‘조참(朝參: 대조회)’과 ‘상참(常參: 약식 조회)’ 그리고 ‘윤대(輪對)’가 있었습니다. 조참과 상참은 정기 조회로서 대신들의 알현을 받았고, 윤대는 각 부서별로 돌아가며 왕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것이죠.
점심 식사 뒤에는 낮 공부시간, ‘주강(晝講)’이 있었죠. 그리고 지방관으로 내려가는 관리나 지방에서 중앙으로 복귀하는 관리들을 만나 여러 가지 당부를 전하고 지방의 민심을 들었습니다. 오후 서너시 경이 되면 대궐을 지키는 야간 호위대장과 숙직 관료들을 만나 명단을 점검하고 암구호를 정해줘야 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다시 ‘석강(夕講)’에 들어가 공부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는 낮 동안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밀린 업무를 봐야 했죠. 그러다가 11시 경에 왕대비전이나 대비전에 저녁 문안을 드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했습니다. 그야말로 숨가쁘게 하루를 보낸 겁니다. 그러니 잠자리에 들기 전 두세 시간 정도가 자신만의 한가로운 시간이었죠. 그렇지만 제례를 비롯한 비공식 행사에도 참여해야 했고, 상소문이나 탄원서를 읽고 검토해야 했으니 한가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경연을 빼먹는 경우도 많았고 조회를 자주 하지 않기도 했고, 승지에게 많은 일을 시키기도 했었죠.
강화도에서 자유롭게 살던 철종이 만기를 처리하려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옛날에 돈이 많은 상민이 양반이 되고 싶어 많은 돈을 주고 양반을 샀는데, 막상 양반 노릇을 해 보니 너무 힘들어 도저히 못하겠기에 그만둬버린 경우도 있다지 않습니까? 철종이 받은 스트레스는 그보다 훨씬 더했을 것이고, 게다가 임금 자리는 그만둘 수도 없었으니 더 힘들었다고 봐야겠죠.
②둘째,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할 수 없었던 데서 오는 스트레스입니다. 철종은 졸지에 왕이 되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3년 거쳐 친정을 했지만 제대로 글 공부를 한 적이 없으니 정사를 보기 어려웠죠. 게다가 정치의 실권이 안동김씨 측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이 훤’처럼 똑똑한 왕이 합리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관리들의 부패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경우에도 신하들은 “아니옵니다, 통축하시옵소서”하며 단체로 반대하고 나섰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철종은 민생을 돌보는데 남다른 애정과 성의를 나타냈습니다. 가뭄이나 수재를 당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내려 보내고 자금을 대출해 주는가 하면 탐관오리를 징벌하라고 엄명을 내리기도 하였으며 민란 수습에 진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동김씨들의 세도정치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여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겁니다.
▲영화 '강화도령'의 한 장면
③셋째, 마음 붙일 곳 없는 궁중에서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강화도에 살 때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왕이 되고 나서도 그 여인 생각이 간절했다고 합니다. 생소한 궁중생활에 적응하기 힘든 만큼 자유롭게 지냈던 강화도 시절에 대한 향수에다 연인에 대한 상사병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슬쩍 대비마마께 연인을 궁으로 데려오면 안 되겠느냐고 해 보았지만 궁중의 법도가 상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싸늘한 답변이었습니다. 이 스토리를 작고한 신상옥 감독이 60년대에 신영균, 최은희 주연의 영화로 만들었는데, 제목이 ‘철종과 복녀’입니다. 철종에게 왕비도 생겼지만, 왕비는 법도에 충실했던 냉철한 여인이었고 안동 김씨로서 왕의 편이 될 수 없었죠. 오죽했으면 철종은 궁궐에서 강화도 쪽의 하늘을 쳐다보며 ‘북쪽에서 온 말은 북쪽 바람을 향해 서고, 남쪽에서 온 새는 남쪽가지에 둥지를 튼다’는 말을 입속에서 속삭이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곤 했다고 합니다.
▲영화 <철종과 복녀> 포스터
넷째, 결국 철종은 밤낮으로 술과 후궁들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안동 김씨 일족에서도 철종이 주색에 탐닉하고 자기네들이 정치를 오로지하기를 바랐던 겁니다. 결국 과도한 음주와 성생활로 인해 폐결핵에 걸렸고, 그래도 절제하지 않고 주색을 계속했기에 죽음을 재촉한 것이죠. 잦은 성생활로 인해 정액을 도가 넘치게 내보내면 ‘방로상(房勞傷)’이 오게 됩니다.
방로상은 신장의 정기가 부족해져 성교하지 않고도 정액을 저절로 흘리게 되고 밤에 잘 때 식은 땀을 흘리며 목이 마르고 허리가 아픈 등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심해지면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맑지 않으며 귀에서 소리가 나고 가슴이 뛰며 뼛속까지 열이 달아오르고 몸이 마르는 음허화동(陰虛火動) 상태가 되는데, 폐결핵도 여기에 속합니다. 또 일을 하면 견디기 힘들며 성생활을 하면 땀을 크게 흘리고 다리가 약해서 오래 걷기 힘든 증상이 나타나는데, 철종은 말년에 그런 상태였습니다. 내분비 기능이 실조되고 면역기능이 떨어져 각종 병증이 출현하고 조로(早老) 현상이 가속화되는 상태이죠. 그러니 수명에도 영향을 줄 정도이죠. 요즘은 성생활이 과도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한데, 역시 성생활도 적당해야 좋습니다.
철종의 후사는? 철종은 왕비를 비롯하여 7명의 후궁들로부터 왕자 5명과 옹주 한 명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왕자들의 명이 유난히 짧아서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고, 겨우 딸 하나만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그나마 남은 딸도 어려서부터 몹시 허약했는데, 그 딸이 바로 ‘영혜옹주’입니다. 영혜옹주는 14살에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는 ‘금릉위 박영효’에게 시집을 갔지만 시름시름 않다가 불과 석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철종 시절에 궁중에는 왕이 허약해서 후사를 얻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주색이 과도하면 튼튼한 아기를 얻을 수 없는 겁니다. 철종이 '강화도령'이라 불린 숨은 뜻 이승숙 기자 <오마이뉴스> 2014년 3월 10일
▲영화 '강화도령'의 한 장면
우리 조상님들은 어른이 되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아명(兒名)으로 불리지만, 어른이 되면 자(字)나 호(號)로 서로 불렀다. 일반 백성들 역시 이름을 소중히 여겨 어른들끼리는 서로 부르는 호칭이 따로 있었다. 양반들처럼 자를 짓거나 호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각자 불리는 이름이 있었으니 택호(宅號)가 바로 그것이다.
택호란 이름 대신에 집주인의 벼슬 이름이나 고향 지명 따위를 붙여서 그 사람의 집을 부르는 말이다. 농촌의 경우에는 선대 때부터 오래 한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근방의 사람들은 얼마큼씩은 서로 알고 지냈다. 그런 경우에는 보통 그 집 가장의 처가동네를 따서 택호를 지었다. 예를 들어 필자의 친정아버지는 '이살 양반' 또는 '이살 아제'로 통했다. 아버지의 아내인 우리 친정어머니 고향이 경북 청도군의 '이살'이란 동네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렇게 불리웠다. 또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어머니는 '이살띠기(댁)'였고 또 '이살 아지매'이기도 했다.
택호로 다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예전 사람들에게는 이름 이외에도 따로 부르는 택호가 있었다. 택호만 들어도 그 집이 어떤 집인지 또는 어느 가문과 통혼(通婚)을 맺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예전 분들은 각자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가와 처가 또는 시댁과 친정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니 처신을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나들길 14코스는 강화읍 용흥궁에서 철종의 외갓집이 있는 선원면까지 가는 길입니다. ⓒ 김성환
예전 사람들에게 호(號)가 있었다면 요즘 사람들에게는 '닉네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인터넷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할 때 본명보다는 가명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지은 이름을 '닉네임'이라고 한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닉네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호처럼 쓰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신경을 쓰서 별칭을 만드는데 그것은 닉네임이 보이지 않는 사이버 세계에서 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강화도령'이라고 자신의 별칭을 지은 사람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알 수가 있으니 그것은 강화도령이 강화도에서 살다가 임금이 된 철종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닉네임이 강화도령인 그 사람 역시 강화도가 고향이고 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경상도 처자와 연을 맺은 '강화도령'은 어느 해에 돌잡이 아들을 데리고 처가로 인사를 갔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외손자를 보자 장모님이 단걸음에 뛰어나와 아기를 덥석 안으며 하시는 말씀이 "아이고, 우리 강화도령 오셨는가"였다. 강화도 사위와 외손자에게 이보다 더 단순명쾌한 인사말이 있을까.
'강화도령'은 조선시대 25대 왕인 철종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 스물일곱 분의 임금님 중에서 철종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왕이 또 있을까. 왕족이지만,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희박하던 사람이 왕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철종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시중에는 온당치 않은 말들도 떠돌아다니고 있다. 예를 들면 철종이 일자무식이었다거나 나무를 해서 먹고 살았다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철종 어진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철종은 순조 재위 31년인 183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왕손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으니 공부에 매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 소양을 갖추는 교육은 받았다. 왕이 된 후에 사가(私家)에 있을 때의 교육 정도를 묻는 질문에 '소학'까지 배웠다고 철종은 말한다. 그럼에도 마치 철종이 일자무식인 것처럼 시중에는 알려져 있다.
또 강화도에서 태어난 것처럼 오해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철종이 강화에서 산 기간은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는다. 14살에 강화로 와서 19살에 왕이 되어 도성으로 돌아갔으니 철종의 강화도살이는 5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가 살았던 집을 '생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생가란 태어나서 자란 곳을 뜻하는 말일 것이니 철종이 살았던 '용흥궁'은 생가가 아니다. 그곳은 그의 아버지가 유배를 와서 살았던 집이었으며 아버지와 큰 형님이 역모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하고 난 뒤 철종, 곧 원범과 그의 작은 형이 와서 살았던 곳일 뿐이다.
강화도령은 뒷배경이 없었다 사람들은 '강화도령'이란 별칭으로 철종을 불렀다. 곧 '강화도 총각'이니 이 얼마나 친근한 표현인가. 철종은 태생부터 우리네와 다른 별천지의 사람이 아니라 강화도에 살던 보통 총각이었으니 마치 이웃사람이라도 되는 듯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 그가 왕이 되었으니 사람들은 일종의 친근한 마음에 또 경이감까지 담아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강화도령'은 또 다른 의미로도 쓰였을 것 같다. 권력을 잡고 있던 세도가들은 한갓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가 자신들의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철종의 출생 배경을 낮춰 '강화도령'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는 숙이기가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꼽고 더럽지만 어쩔 수 없이 숙여 들어가야 할 때 우리는 속으로 상대를 비꼬면서 자신을 합리화 한다. 철종 시대의 세도가들 역시 비슷했을 것 같다. 물론 절대왕정 시대이니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비아냥대면서 '강화도령'이라고 낮춰 부르지는 않았을까.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곳에 지은 집인 '용흥궁'입니다. ⓒ 이승숙
그러나 백성들은 달랐을 것이다. 태생부터 좋은 가문에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사람들은 평민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구중궁궐에 사는 임금님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철종은 달랐다. 그는 14살부터 19살까지 강화도에서 살면서 백성의 삶을 체험했다. 보통의 평민들처럼 땔나무를 하러 산에도 가고 또 어쩌면 농사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백성들은 철종을 자기들과 동일시해서 '강화도령'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지 않았을까.
철종의 어릴 때 이름은 '원범'이었다. 원범은 열아홉 살이 되도록 장가도 못 갔다. 조혼의 풍습이 있던 조선시대에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못 갔다는 것은 그에게 심각한 결격사유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없는 집에, 그것도 역모로 몰려 죽은 집에 딸을 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원범은 혼기가 차도록 장가를 못 갔을 것이다.
왕으로 등극을 하지 않았더라면 철종은 보통 평민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농사는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워야 일머리도 알고 몸에도 익는 법인데 철종은 14 살이 되도록 한양에서 살았으니 언제 농사를 배웠겠는가. 땔나무 역시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무 한 짐인들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원범이었으니 강화에서의 삶이 무척 힘겨웠을 것 같다.
▲1906년에 찍은 강화읍의 강화성공회성당 근처 모습입니다. 성당 인근에 용흥궁이 있는데 사진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실제로 '철종실록'에는 동네의 무뢰배가 술에 취해 원범에게 말을 함부로 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원범에게 힘이 있었다면 어찌 함부로 할 수 있었겠는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왕손에게 동네 사람이 그렇게 불손한 언행을 했다는 것은 당시 원범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하고 딱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 어찌 강화를 잊겠는가 원범은 뒤를 봐줄 배경이 없었다. 그는 소위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었다. 조선시대는 한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들끼리 학맥을 이어가면서 세력을 넓히는 시대였는데 원범은 그런 학맥 역시 없었다. 또 혼인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결속하던 시대였는데 원범의 집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인 전계군은 강화도에 유배 왔다가 그곳의 처녀와 결혼을 했다. 더구나 원범의 외삼촌은 대를 이을 손을 남기지 못해서 원범에게는 외사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변변하게 내세울 외가 쪽 사람도 없었다. 그는 단단하게 구축이 되어 있는 기성 정치권에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맨 몸으로 부딪히며 견디어 나간 사람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강화도령'이라는 말 속에는 기득권 세력들의 비아냥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성들은 철종에게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아실 임금님이니 분명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철종이 왕이 되고 나서 4년 후에 지은 철종의 외갓집입니다. ⓒ 이승숙
철종은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비록 제 뜻을 다 펼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한 부분이 철종실록에는 담겨 있다. 또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살았던 강화도에 대한 특별한 마음 역시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부모님을 다 잃고 사고무친한 자신을 거두어준 강화였기 때문이었을까. 철종은 강화도 주민들만을 위한 특혜를 베푼다.
"내가 강화부에 어찌 특혜를 입히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과 곡식과 묵은 세금 빚 가운데 징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없애 주고,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는 방법을 강화유수로 하여금 조정과 상의하여 그 장점을 따라 조치하도록 하라." < 철종실록 >
또 철종 4년에는 강화도의 유생들만이 응시할 수 있는 특별과거를 시행하도록 하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조선은 이미 속으로 곪을 대로 곪아 있었고 더구나 철종은 힘이 없는 왕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용흥궁의 봄 꽃샘추위가 찾아왔던 삼월의 어느 날, 용흥궁으로 들어서는 좁은 골목에는 따스하게 양광(陽光)이 비추었다. 용흥궁의 마당에도 햇살은 빼꼼히 얼굴을 들이민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 그런지 햇살은 방 안으로는 들어가지를 못하고 마당에서만 서성이고 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훈훈한 기운이 도는데 용흥궁은 사람이 살지 않아서 그런지 휑뎅그렁하다. 마루에도 찬 기운이 돌아서 선뜻 올라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보존되고 있는 옛 집들을 가보면 훈기가 돌지 않아 마치 박제를 해놓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용흥궁 역시 그러했다.
▲'강화나들길 카페'의 수요도보팀이 '임금님의 첫사랑길'을 걸으며 용흥궁에 왔습니다. ⓒ 김선희
그래도 지은 지 약 150년이 된 용흥궁이 옛 모습을 그나마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몇십 년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덕분이었다. 50여 년 전만 해도 용흥궁에는 대여섯 가구의 사람들이 복닥대며 살았다고 한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어릴 때 용흥궁이 집인 친구네 집에 놀러도 다녔는데, 안채며 바깥채 그리고 행랑채 등 각 건물마다 따로 살림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그랬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물도 당시에는 물이 풍부해서 대여섯 가구의 사람들이 다 그 물을 먹었다고 그이는 말했다.
생전에 강화를 위해 특별한 마음을 낸 것처럼 사후에도 이렇게 강화 사람들에게 곁을 주었던 철종이었다. 그는 비록 초가에서 옹색하게 살았지만 왕이 된 덕분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강화에 남겼다. 초가삼간 집이었다면 어찌 대여섯 가구씩이나 그 집에 깃들어 살 수 있었겠는가. 비록 역사책에는 무능한 왕으로 그려져 있지만 강화도 사람들에게 그는 특별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햇살이 머무르는 용흥궁의 담장 아래에는 복수초가 막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복수초의 노란 꽃잎이 대견하게 보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용흥궁에도 봄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용이 되어 떠난 원범(철종)이 잠시 놀러오기라도 한 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