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말씀
예수님께서는 정오 무렵에 야곱의 우물가에 있다가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는 것을 보고,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하고 청하셨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응답은 지역을 차별하는 언사였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그 옛날 광야에서 목마름에 시달린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조로 모세에게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 17,3)
목마름에 감정이 섞였습니다. 그러나 목마름을 해소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기에 상처 입은 자신에게 보호막을 치느라 상대방을 쏘아붙일 필요도 없고, 전부터 있었던 지난 일을 호박넝쿨 캐듯 줄줄이 끌어당길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방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응답하거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갈망을 토로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갈망을 바라보게 이끄셨습니다.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스며들어 있는 편견은 예수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때 해소됩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청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 주실 수 있는 분은 당신뿐입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15).(성서와 함께)
묵상해봅시다
우리는 무엇에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재물입니까? 건강과 장수입니까? 우리의 목마름은 생명의 샘물이신 주님을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것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채워도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끊임없이 목이 마를 뿐입니다. 오로지 주님과 이루는 깊은 만남만이 우리의 이 갈망을 채워 줄 수 있습니다.(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15)
알아봅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떼어 먹여주는 강론
회당 예배에서 유래하지만 메시아 사건을 선포하는 강론
강론은 말씀전례의 원초적 구성 요소에 속한다. 왜냐하면 강론은 교회가 유다교의 안식일 회당 예식에서 구약성경과 함께 받아들인 말씀전례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론은 ‘그리스도교 이전 요소’의 하나이다.
안식일 회당 예식은 율법과 예언서를 읽고 참석자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도(루카 4,16-21), 바오로 사도도(사도 13,15 이하) 회당에서 성경을 풀이하였다.
그러나 강론 내용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나,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사도 13,32-33)처럼 구약의 예언 말씀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건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메시아적 내용이다(암브로스 베르훌 저, 김복희 역, “전례신학”, 173쪽 참조).
목격 증인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들려주던 초기 교회의 강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4-25 참조)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초대교회는 주일마다 빵을 떼어 나누는 예식을 거행하였으며, 80-9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디다케”(14,1)는 이를 증언하고 있다.
155년경 유스티노 성인은 이교도 황제 안토니우스에게 쓴 “호교론”(Ⅰ,67)에서 주일 성찬례를 설명하면서,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 도시나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한곳에 모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기록과 예언자들의 글을 읽습니다. 독서가 끝나면,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그 훌륭한 일들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라며 강론을 증언하고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37-1346항 참조).
주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성찬례를 거행하던 초기 교회 공동체는 성찬례의 구약성경 봉독 다음의 설명(강론)을 사도들에게 청하였다. 이들의 요청에 사도들은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줄곧 주님과 함께 지내며(사도 1,21-22 참조)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것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학계에서 ‘Q자료’, ‘로기온’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사도들의 목격증언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 뒤 사도들이 연로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자 다음 세대를 위하여 기록하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흐름은 신약성경, 특히 복음이 공동체 예배의 강론이라는 삶의 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추론하게 한다.
강론의 쇠퇴와 복구
초대교회 시대부터 교부들이 한 수많은 강론이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요한 크리소스토모, 아우구스티노, 레오 대교황,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이름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중세부터 탁발수도회의 교의적이고 윤리적인 설교가 유행하면서, 강론은 지방말에 따른 독서와 복음의 반복, 설명, 공지사항, 기도와 노래 등으로 채워진다.
내용의 변질과 함께, 복음 선포 뒤 회중석 중간의 높은 강론대로 이동하거나, 강론 전에 제의를 벗고 강론 뒤에 제의를 다시 입거나, 강론 전후에 십자성호를 긋는 등의 행동이 나타났으며, 강론이 점차 미사와 분리되고 마침내 미사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일으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4년 ‘전례헌장’을 통하여 시대의 변천으로 없어졌던 강론을 다시 복구하며 “전례주년의 흐름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들을 해설하는 강론은 전례 자체의 한 부분으로서 크게 권장된다.”(52항)고 가르친다.
‘전례헌장’ 7항의 초안에는 강론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표현하였다가 오해를 피하려고 바꾸었지만(이홍기, “미사전례”, 175쪽 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의 강론은 하느님 말씀 선포의 연장’이라하며 그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밝힌다(1154항).
영원한 말씀에 비추어 공동체의 구체적 오늘을 바라보는 강론
강론의 중요성에 대하여 베아 추기경이 1956년 국제 사목전례회의에서 말한 것은 의미가 깊다.
“우리가 믿는 것처럼, 거룩한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의 빵이 신비롭게 결합하는 것은, 집전하는 사제가 그 두 기능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성사의 직무자인만큼 말씀의 직무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빵이 살 중의 살이 되고 영 중의 영이 되듯이,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살 중의 살이 되고 영 중의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전례운동과 성서운동이 만나고 혼합됩니다.
미사를 거룩하게 드리고 거룩한 빵을 쪼개는 사제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쪼개어주는 데 실패한다면 그는 반쪽만 사제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강론을 복구한 것은 성경 봉독에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구체적 상황에서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이다. 독서자나 부제가 봉독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말씀의 식탁에 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말씀도 쪼개져서 살아있는 공동체의 지금 여기, 오늘, 현재라는 구체적 현장에 알맞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집전 사제의 임무이다. 집전 사제는 거룩한 빵을 축성하여 영성체로 나누어주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봉독한 다음 강론으로 나누어주어야 한다(“전례신학”, 175쪽 참조).
결국 강론은 성경의 메시지를 현실화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의 삶의 오늘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현존과 그 활동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강론은 거행되는 신비를 이해하도록 이끌고 사명으로 초대하는 것이어야 하기에 강론의 임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베네딕토 16세, “주님의 말씀”, 59항 참조).
사제는 의무로 규정되어 있는 주일과 의무축일의 강론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66항 참조). 아울러 신자들과 함께 드리는 평일 미사에서도 신자들이 그날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날의 열매 맺기를 할 수 있도록 짧은 묵상을 제시한다면 신자들의 영신생활은 깊어질 것이며 크게 칭송받을 것이다.
사목자들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분배하면서 또한 그날의 말씀도 강론으로 풀이하여 풍요로운 전례 공동체로 키워가면 좋겠다.(장신호 대구대교구 신부,[경향잡지, 2011년 1월호])
손석준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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