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Ⅺ. 안락사와 죽음의 유형
1. 안락사의 개념과 죽음의 유형
안락사(euthanasia)란 그리스어 “eu”(편안하게, 행복하게)와 “thanatos”(죽음)란 말의 합성어다. 어원에 따르면 그것은 “편안하고 행복한 죽음, 또는 아름다운 죽음”을 의미한다. 이 어원적 정의는 물론 안락사의 의의를 합목적적으로 표명한 목적론적 규정이다. 이 정의 속에는 안락사의 전형과 이상이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에게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현상이고, 죽음에 직면하여 인간은 누구나 안락한 죽음을 원한다. 그런데 누구나 안락한 죽음을 원한다는 대전제로부터 우리는 역설적으로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런 것이란 점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이 죽음이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이해되는 한에서 인간이 안락한 죽음을 원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인 것이다.
인간이 안락한 죽음을 원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이성적 존재”라는 사실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한다는 의지적 표현은 오직 이성적 판단능력을 지닌 존재에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존재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표현 속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이런 자기 결정권 속에는 “자살”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자살은 무의미한 삶을 종식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되었고, 당시의 주류사상이었던 스토아학파는 자살을 찬미하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삶 그 자체를 고통스런 것으로 간주해 온 불교도 참기 어려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서 자살을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자살을 비롯한 인위적 생명단축은 생명의 존엄에 위배되는 윤리적으로 악한 행위로서 배격된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따르면 생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로서 생명 그 자체를 좌우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결코 주어져 있지 않다. 생명에 관한 한 인간은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에 대한 염원이 소멸해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인간의 염원은 다른 측면에서 나타났다. 즉 그것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편안하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끔 애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위로와 기도는 죽어 가는 사람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고,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신의 축복 속에서 평화롭게 죽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적 배려를 의료적 상황에 활용하여 안락사를 죽어 가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게 하기 위해 생명단축의 위험이 없는 “도움 행위”(Hilfe im Sterben)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런 도움 행위를 임상의사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임상의사의 임무는 본래 죽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유지와 연장, 건강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가 환자에게 정신적 위안과 평화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락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문제된다. 삶을 지속시키려는 임상의사의 노력에 반(反)해 환자 자신이 진정으로 죽음을 원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인간은 왜 죽으려고 하는가?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삶에의 의지”로 설명한다. 이에 따른다면 죽음이란 삶에의 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인간의 죽음은 자살로 나타난다. 인간은 왜 자살하는가? 뒤르켐(E. Durkeim)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자살의 이유를 아노미(Anomie), 즉 삶의 의미상실에서 찾는다. 이로써 뒤르켐은 죽음의 사회적 이유를 밝혔는데, 바꾸어 말하면 현대사회에서 삶 그 자체는 하나의 의미추구 행위이고, 죽음은 삶의 의미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사회를 조직하는 힘이다. 그런 만큼 의미의 상실은 개인의 사회적 삶을 와해시켜 급기야 개인에게는 (생물학적) 죽음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회적 메커니즘은 현대사회가 철저하게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위기사회” 또는 “관리사회”임을 뜻한다. 관리의 본질은 “계산”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삶은 철저하게 계산되며, 죽음도 또한 그 연장선에서 관리된다. 안락사의 문제를 이런 관리사회의 관점에서 파악한 사람은 宮川俊行이다. 이에 따르면 안락사란 합리주의적인 “죽음의 관리” 행위인 셈이다.
이런 의미를 지닌 안락사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불치의 참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환자를 빨리 죽게 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행위”로서 처음에는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와 윤리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윤리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생명연명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는 점차로 일반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반적인 용어로서 안락사란 말은 환자의 임종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어 왔다. 본래 가치 중립적 명사(名詞)인 안락사란 말이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생명의 강제적 말살행위, 즉 심각한 정신장애자 또는 신체장애자의 인위적 치사행위”로 인해 부정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안락사란 말이 극도의 불신감과 혐오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불신감과 혐오감을 불식하지 못한 채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의료기술의 진보에 의해 정상적인 의식을 갖지 못하고 식물상태에 빠져 살아가는 시체와 다름없는 삶을 연명해 가는 사람의 경우다. 이런 경우에 즈음하여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는 생명연명을 거부를 우리는 이른바 “안락사”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당연히 위의 나치 경우와 구별된다. 즉 안락사는 불치의 병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을 호소하는 “살아있는 시체”와 다름없는 사람에게 생존의 시기를 단축시키는 것이고, 나치의 경우는 사회적 부담 때문에 무의미한 삶으로 간주되는 장애자를 참살(慘殺, murder)하는 것이다.
안락사와 이런 참살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그 구별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근대의 합리주의 정신”이다. 근대 합리주의는 보편타당한 원인에 따라 그 결과를 판단한다. 이런 합리주의 정신을 안락사에 적용한다면, 안락사는 먼저 그렇게 죽음을 요구하게 되는 이유를 밝혀야만 한다. 물론 안락사를 요구하는 개별적인 내용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무관한 안락사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공통된 존재구조와 논리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합리주의적 발상법에 따르면 안락사란 이제 환자의 생명을 죽음의 방향에서 의식하고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적 행위라고 정의된다. 여기서 안락사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합리주의 사상, 즉 첫째로 삶은 생존에 의미 있는 것에 따라 긍정되고, 생존에 무의미한 것에 따라 부정된다는 사변적 합리주의 사상과 둘째로 무의미한 삶은 죽어도 좋다는 실천적 합리주의 사상에 의해 지지 받게 된다.
이처럼 합리주의 사상에 의해 조형되는 안락사에는 우선 유의미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유의미한 것은 무엇이며,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성”에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본래 이성적 존재이고, 그런 까닭에 끊임없이 의미를 구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유의미하게 하려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이다. 이런 유의미성의 관점에서 인간생명에 관한 질적 판단은 사변이성의 평가에 그치지만, 그것이 인간의 실천적 행위와 결부됨으로써 이로부터 자기의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 윤리적 판단의 문제도 생겨난다. 안락사와 관련한 윤리적 물음은 생존의 무의미성에 관한 판단이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런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데, 무엇을 무의미하다고 보는가에 따라 안락사의 유형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존엄사(euthanasia with dignity)
존엄사는 인간의 생명을 정신활동에 있다고 보고, 정신활동이 정지된 비이성적이고 비인격적인 생명의 존재양식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태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식물인간상태(PVS, persistent vegetable state)와 같은 경우에는 정신활동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생존에의 의미도 없다. 이런 경우에 인격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 “존엄사”의 논리이다.
② 자비사(beneficient euthanasia)
자비사는 참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에 시달릴 때, 이런 삶을 무의미하다고 보는 태도이다. 이른바 말기환자의 삶은 고통을 이겨내는 일이 하루의 일과이다. 이런 상태에서 삶을 영위해 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에 삶의 단축이 오히려 자비로운 행위라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이를 또한 다른 이름으로 “반고통사”(antidythanasia)라고도 부른다.
③ 포기사(resigned euthanasia) 또는 도태사(selective euthanasia)
이것은 삶의 무의미성을 사회적 관점에서 찾는 태도이다. 즉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의 삶이 사회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때,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생명의 주체를 배제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 것이 되는데, 이를 “포기사” 또는 “도태사”라 부른다.
이상의 안락사 유형에서 ①과 ②는 개인적 삶과 관련된 죽음이고, ③은 사회적 삶과 관련된 죽음이다. 사회적 삶은 다시금 공동체적 삶과 이익사회적 삶으로 구분된다. 즉 포기사가 공동체적 삶에서 무익한 것으로 판정받은 죽음이라면, 도태사는 이익사회적 삶에서 무익한 것으로 판정받은 죽음이다. 이들에 관해 상론해 보자.
2. 존엄사
존엄사란 비인격적 생존을 거부하고, 환자의 인격 존엄을 강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특수한 성격을 지닌 존재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다. 아나크레온텐(Anakreonteen)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고 한다. 즉 “자연은 소에게는 뿔을, 말에게는 말굽을, 토끼에게는 민첩함을, 그러나 사람에게는 사고(思考)를 주었노라.” 그래서 플라톤(Platon)은 “이성적인 것”(logistikon, 논리적인 것)을 우리 영혼의 최고 부분으로 보았고,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이성을 통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로부터 자연 속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인간의 존재가 존엄하다는 생각이 생겨난 것이다.
인간을 존엄하게 해 주는 것의 토대는 가치이다. 자연 속에서 생명은 다른 존재자(무생물)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지닌다. 그러나 단순히 생명을 지녔다고 하여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통해 정신적․인격적 삶이 실현됨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고 존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낙태논쟁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낙태찬성론자들은 배아나 태아가 정신과 인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낙태찬성의 정당성을 논증하는가 하면, 낙태반대론자들은 배아나 태아가 미래에 정신과 인격을 지닐 가능성을 갖추고 있고, 이런 가능성에 비춰볼 때 낙태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낙태논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정신성과 인격성을 갖추지 못한 생물학적 육체 그 자체가 어떤 가치도, 존엄성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신성이나 인격성을 갖추지 못하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인간관에서 볼 때 현대사회에서 의료기술의 발달은 비인격적 삶을 크게 증가시키고 있다. 이른바 무의미한 생명연장과 생명소생술이 그것이다. “예술(ars)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고대 그리스 히포크라테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의료기술은 인간생명의 존중과 유지를 언제나 정언명법으로 삼아왔다. 특히 근대국가는 생명연장을 사회복지정책의 하나로서 제도화해 왔다. 그러나 이런 사회복지제도의 하나로서 생명연장은 동시에 역설적으로 비인격적 삶의 증가와 강제를 초래했다. 예를 들어 지속적인 식물인간상태의 환자가 그것이다. 식물인간 상태란 대뇌의 기능을 상실한 채 뇌간 척수계(brain stem-spinal system)의 기능만 남아서 반사운동과 조절작용만 보이는 이른바 식물적 삶만 나타내는 중증의식장애자이다. 이런 중증장애는 주로 머리 외상, 뇌혈관성 장애, 뇌종양, 척추손상, 일산화탄소 중독 등과 같은 사고나 질환으로 인해 혼수상태(comma)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환자를 회복시킬 수 있는 의료기술은 현재 없다. 또한 이런 중증의식장애환자는 의식을 회복한다 하더라도 심각한 후유증을 겪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에도 정신적․인격적 삶 없이 무의미한 생명연장을 계속해야만 하는가?
또한 자연적으로는 이미 죽은 목숨인데, 현대의학에서 인위적으로 삶을 연장시키고 있는 경우를 본다. 이른바 인공심폐기나 생명소생술이 그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합병원에서는 ICU(집중치료실)을 운영하고 있고,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는 경우라면 곧장 ICU로 보내져 의식불명인 채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환자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나 결정이 매우 어렵게 되는데, 그렇다고 하여 현대의학의 힘으로 무익한 삶을 지속하고 죽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인가?
그밖에도 우리는 사회복지제도의 덕택으로 강요되는 비인격적인 삶의 경우로 불치의 치매노인이나 루게릭 병에 걸린 환자 등 많은 사례들을 들 수 있다. 이런 사정에 즈음하여 비인격적 삶으로서 생존을 무의미한 것으로 판단하고 “인간으로서 죽음”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존엄사이다. 존엄사는 근본적으로 “이렇게까지 하여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삶의 의미를 판단하는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관건이 아닐 수 없는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성”, “자유의지”, “인격”, “의식” 등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런 존엄성의 상실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 살아갈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에 존엄사는 임종(dying)에 즈음하여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고 품위 있게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지 않고 무익한 삶을 지속해 가게 하는 것은 인간 신체에 대한 극도의 모독인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본래 인격과 결부되고 정신활동을 담지하는 신체일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가 이런 의미를 담지하지 못할 때 그것은 동물의 살(肉, flesh)과 다를 바 없다. 아니 동물의 살은 어떤 의미에서 수단적 가치라도 지니지만, 의미가 배제된 인간의 살은 한갓 물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식 없이 삶을 지속해 가는 것은 단순히 인간신체를 가지고 노는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체를 방치하게 됨으로써 그 자체로서 이미 신체에 대한 학대이고, 이것은 곧 “존엄성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개인의 신체는 각자의 신분확인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고, 이런 신분확인을 통해 개인의 신체는 인격성으로 고양된다. 다시 말하면 신체는 각자의 인격이 사는 집이지만, 식물인간상태의 환자 또는 치매노인, 심각한 정신지체자는 이미 인격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격성을 결여했다고 하여 그 생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격성이 결여된 생명을 보살피는 이타적 본성을 지닌 사람을 본다. 그러나 식물인간상태의 환자나 그밖에 심각한 정신장애자의 돌봄을 순전히 인간의 이타적 본성에만 호소해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격존엄의 핵심은 자유로운 “자기 결정”에 있다. 이런 자유는 자신의 신체적 삶을 결정하는데도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결정은 “삶에의 권리”이다. 삶에의 권리란 자신의 신체적 삶에 관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각자 이런 삶에의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의료혜택을 받는다. 자유롭게 의료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 여기에는 또한 당연히 특수한 치료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특수한 치료행위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환자의 죽음을 초래하는 치명적인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 치료중단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 행위를 방조하는 셈이 된다. 문명사회에서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살은 자유로운 자기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병적인 심리상태에서 일어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은 이런 병적인 심리상태가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을 가로막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살을 방조하는 것은 위법성을 조각하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무조건 생명을 연장하고 죽음을 저지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한 “살아있는 시체”의 출현이 그것이다. 아무런 정신적 능력도 없이 무의미한 생물학적 수명만을 연장해 가는 삶을 우리는 무한정 허용해야 하는가?
생명 그 자체가 어떤 외적 억압이나 강제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당연히 안 된다. 그렇다면 거꾸로 외적 힘에 의해 생명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연장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점을 자유주의자들은 권리론과 인격존엄의 원칙에 따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정신적 능력을 상실한 환자의 “품위 있는 죽음”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누구나 죽지 않으면 안 되고, 이런 인간의 본성적 가시성을 무시하고 죽음을 일방적으로 저지하려는 것은 개인의 권리에 위배되며, 인격의 존엄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존엄사의 문제는 결국 “품위 있는 죽음”이 무엇인가의 해명을 요구한다. 품위 있는 죽음의 기준으로서 위에서 우리는 개인의 권리와 인격의 독자성을 들었지만, 이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인간의 생명이 신성불가침이란 점을 들어 인간의 자의적인 접근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품위 있는 죽음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죽음에 관한 본질적인 정의의 문제로 환원되고 만다.
3. 자비사
자비사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고통뿐인 무의미한 삶”을 종식시키려는 의료적 처치를 말한다. 무의미한 삶을 종식시킨다는 점에서 자비사는 존엄사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이런 무의미한 삶을 초래하는 원인이 정신적 능력의 상실이 아니라 고통―즉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 점에서 존엄사와 구별된다. 자비란 환자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환자들이 느끼는 고통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즉 “동통, 호흡곤란, 가려움, 격렬하면서도 짧은 발작성 아픔, 지속적이면서 시름시름 심신을 소모시키는 것, 뜨끔한 것, 쑤시는 것, 칼로 도려내듯이 아픈 것, 찌르듯이 아픈 것, 난치병 특유의 고통”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의 말기에는 자신의 수액조차 들이마실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고통을 자연주의자들은 “악”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 악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육체적 고통은 오히려 생명유지를 위한 불가결한 기능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고통은 병적이고 이상(異常)상태에 빠진 신체가 나타내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따라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신체 내에서 비정상적인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는 징후이며,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신체적 이상을 느끼면 우리는 병원에 간다. 질병을 치료하는 임상의사들도 또한 신체적 이상을 호소하는 환자의 통증을 토대로 고통의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자연적) 악으로 간주되어 온 것이고, 동시에 고통의 제거는 선으로 간주되어 온 것이다.
악의 제거와 선의 증진은 우리 삶이 향하는 동일방향에 있다. 이 점에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삶에 집착하는 육체적 의지의 표현일 수 있고, 삶을 긍정하는 강력한 징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 보다 고양된 삶을 위해 인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학습을 게을리 하는 학생에 대한 교사의 체벌, 강인한 신체단련을 위한 혹독한 군사훈련,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사회적 악에 항거하는 시민운동가 또는 혁명가, 그리고 자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종교적 고행(苦行) 등이 그것이다. 따지고 보면 불교에서 인생 그 자체를 고통이라고 부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삶을 이해한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고통은 그 자체 선이 될 수 없고, 궁극적으로 지양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 분명하다. 같은 맥락에서 불교의 근본교리도 또한 근본적으로 이런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이로써 새로운 삶에의 길을 제시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해결책은 강인한 정신을 통해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려는 것으로 현실적인 의료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육체적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인 역할은 오늘날 전문적인 수련을 쌓은 전문의사들에게 맡겨야 한다.
현대의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제거 및 완화를 비롯하여 질병의 치료, 건강 회복 등 생명유지의 의무를 띠고 있다. 그 중에서도 통증의 제거 또는 완화는 의사의 1차적인 과제로 취급되고 있는데, 이로써 현대의학은 질병치료의 메커니즘을 정립한다. 이와 같이 통증의 원인을 찾아 제거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는 법을 일컬어 “대증요법”(對症療法)이라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현대의학은 통증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하지만, 통증의 원인을 찾지 못하거나 또는 현대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흔히들 “난치병” 또는 “불치병”이라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각종 암을 들 수 있다. 이런 난치병이나 불치병은 통증으로 인해 환자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경우에 환자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게 되고, 의사는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응급조치로서 진통제 또는 심하면 마약성분을 처방하게 된다. 오늘날 신체 내에서 고통을 일으키는 물질과 그 자극이 통증으로서 감각되는 신경메커니즘이 발견됨으로써 난치병이나 불치병 환자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진통제의 사용과 진통효과에 관해서는 의료계 내부에서도 여전히 논란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고통의 의미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데, 고통의 의미에 대한 고찰로부터 우리는 자비사의 개념에 접근해 갈 것이다. 즉 고통이란 어떤 의미에서 신체 내부에서 생겨나는 부조화의 경험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생물학적 의미를 음미해 보자. 이에 따르면 부조화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진화해 온 생명체의 세계에 발생학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며, 이런 부조화를 우리는 고통으로 느낀다. 고통을 우리는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지만,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고통의 완전한 제거는 우리가 인위적으로 자연에 개입하여 자연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으로 이런 행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멸을 불러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통으로 느끼는 부조화의 적응을 통해 생명은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과정에 위배되는 인위적 과정은 진화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생명체의 종적 붕괴를 의미할 따름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고통의 역할도 자연의 진화과정과 일치하는 바, 자비사는 진화 방향에 역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고통이 있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고통의 의미는 각자에게 다르다. 즉 고통에는 개인차가 있고, 감수성과 인내심의 차이도 있다. 뿐만 아니라 문화와 문명의 차이도 있다. 고통의 강도는 순전히 주관적이며, 그런 만큼 고통의 크기도 개인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크기의 상대성은 바로 참기 어려운 고통을 호소하는 난치병과 불치병 환자의 진통제 투여에 대한 객관적 기준의 수립을 방해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의학의 이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임상의사가 환자의 통증호소를 기초로 질병을 판단하며 치료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통의 해소가 곧 치료의 본성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난치병이나 불치병 환자에게 진통제의 투여는 진료행위로 보아야 하고, 전적으로 임상의사의 자율에 맡겨져야 한다. 다만 문제되는 것은 난치병과 불치병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로부터 우리는 난치병과 불치병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극한상황을 설정해 볼 수 있다.
① 달리 고통의 경멸(輕滅)이나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최후의 수단으로 약물치료나 외과요법을 통해 근본적으로 진통과 고통제거를 행하려고 한다면, 이에 의해 지성이 상실되거나 무의식화되거나 심리적 인격이 붕괴․소멸하여 결국 비인격적인 생명화되고 만다. 즉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제거가 현상계에서 정신적 생명의 유지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이다.
② 고통제거의 수단으로서 죽을지도 모르며, 죽음이라는 생명 그 자체의 부정 속에서 비로소 고통이 제거되는 경우이다. 즉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제거가 생물학적 생명의 유지와 양립할 수 없는 경우이다. 옛날부터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극한적인 두 상황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게 한다. 인간다운 삶의 상실은 위의 “존엄사”에서 보듯이 스스로 죽음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존엄사와 달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합리적으로 진정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을 증명해야만 하는 난점이 있다. 고통의 합리적 진정이란 영구적으로 의식을 상실한다든지 심리적 인격을 붕괴시켜 버린다든지 하는 행위처럼 생명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고 고통을 진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합리적 진정 가능성의 부재는 생물학적 생명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고통을 진정시킬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고통의 합리적 진정이 불가능하다면, 그의 삶은 차리리 죽음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죽음을 우리는 “자비사”라 부르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죽음이야말로 고통스런 삶에서 구제해 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비사야말로 말 그대로 안락사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실제로 19세기말 이후 서구에서 논의되어 온 고전적 의미의 안락사라는 말도 엄밀한 의미에서 자비사에 한정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자비사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구 불치병에 걸린 환자, 즉 영구적으로 합리적인 진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참을 수 없는 신체적 고통에 빠진 중증환자를 이 고통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인위적인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며, 그 행위가 이 생명주체의 죽음과 의도적이고 허용적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합리적인 진정이 가능한 경우에는 안락사의 요청은 자비사가 아니다.
4. 포기사 또는 도태사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이 사회의 성원으로 태어나 사회의 성원으로 살다 사회의 성원으로서 죽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사회적인 까닭은 오직 공동체의 유대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적 행위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을 넘어서 나오는 것이며, 사회규범은 생명에 대한 자연적 위협을 막아주는 일종의 보호막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 내부에서 인간관계는 ―자연 속에서 약육강식의 지배체제와는 다른― 지배복종의 권력관계로 환원되고, 권력은 다시금 계급적 서열을 낳는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명제는 계급적 서열에 따른 존재관계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열은 여러 방면―예를 들어 건강, 사회생활, 경제, 능력 등―에서 일어나지만, 근본적으로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환원된다. 인간사회 내부에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지배-복종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이로써 강자와 약자의 구별은 곧 사회에서 인간생존의 상황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인간사회에서 지배-복종의 관계는 내부적인 개인간의 친밀도에 의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개인 대 개인의 친밀도가 약할 때 지배-복종의 관계는 “계약”관계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사회 내부에서 친밀한 연대(連帶)가 생겨날 때, 약자는 강자에 의해 보호받고 도움 받고 지지 받는다. 전자의 사회유형을 우리는 “이익사회”(Gesellschaft)라 부르고, 후자의 유형을 “공동체”(Gemeinschaft)라 부른다. 이익사회에서 개인은 생산과 분배의 대상이지만, 공동체에서는 보살핌의 대상이다. 가족공동체가 이런 공동체의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가족공동체 속에서 태어나 성장과 함께 점차로 이익사회의 성원으로 편입되는 두 세계의 시민이다. 두 세계 속에서 우리는 타자와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간다.
이와 같이 사회는 인간에게 삶의 터전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관계에서 가족공동체 내에서 성원간의 약자에 대한 배려는 가족이 존속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난치병이나 불치병에 걸린 중증환자나 치매노인 같이 스스로 생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경우에는 생명 자체가 공동체 성원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에 과도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과중한 부담이 되는 환자의 죽음을 요청하는 것을 “포기사”라 한다. 공동체가 일종의 생명공동체라면, 이익사회는 경제적 생산의 주체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호 부조한다. 그 형식이 다름 아닌 “분업과 협동”인데, 분업과 협동의 메커니즘은 사회적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약자를 공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사회적 이익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킬 때, 이것을 “도태사”라 한다. 포기사가 가족공동체와 같이 친밀한 연대자와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환자(약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임에 비해, 도태사는 공적인 사회와 부담을 지우는 환자(약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즉 포기사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데 반해, 도태사는 이익사회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가. 포기사
연대적인 공동체 내부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는 공동체의 의무이다. 그러나 포기사는 약자가 공동체의 영위에 심각한 장애가 되는 극한상황에서 일어난다. 일반상황이라면 약자를 죽음에 유기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이런 극한상황에서 포기사는 하나의 “예외”가 아니라 “원칙”으로서 윤리적으로 마땅히 행해야 할 정당한 행위인 것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인간다운 삶이란 서로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영위해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한편이 다른 한편에 일방적이고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특수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때 어느 누구도 개인의 삶에 대한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삶에 심각한 부담이나 위협을 주는 자―그와 어떤 관계에 있든지 간에―를 포기할 수 있다. 아니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존엄과 삶에의 권리는 무제약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사회적 측면을 고려한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장기간에 걸쳐 연대자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는 환자의 생존은 무의미한 것이며, 따라서 치사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아직 죽음에 임박한 것이 아닌 상태에서 간호와 도움을 준다면 생명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지만, 장애 자체를 치료하거나 구제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경우가 그것(예를 들어 치매노인, 루게릭병 환자, 식물인간상태의 환자 등)이다. 이런 경우에 환자는 식사와 배설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연대자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환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연대자는 환자의 무의미한 삶에 종속된 자신의 삶에 회의하지 않을 수 없고, 마침내 자신에게 과중한 부담만 지우는 환자의 죽음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연대자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것이 있을까? 가능한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① 환자와의 연대를 거부하고(친권포기) 환자를 사회복지시설에 맡기는 것이다. 복지시설에 맡겨지면 죽을 때까지 생명을 유지해 갈 수는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외적 사정에 의해 생존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므로 연대자의 친권포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명백한 포기사이다.
② 환자에 대한 어떤 간호나 보살핌 없이 환자의 삶을 죽음에 방치함으로써 말 그대로 죽음이 일어나기만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③ 극단적인 경우로 환자의 연대하여 함께 동반 자살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의탁할 곳이 마땅찮은 노부부의 경우에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다.
여기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①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복지시설을 확충하는데는 막대한 국가 예산이 소요된다 점에서 쉬운 문제해결방법은 아니다. 이와 같이 국가가 현실적으로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없기 때문에 ②와 ③의 경우가 발생한다. 결국 포기사란 환자를 간호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가족이나 친권자가 자신의 임무를 포기함으로써 일어나는 죽음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환자의 죽음이 친권자의 임무 포기로 인해 일어났다는 점이 아니라 환자의 무의미한 삶의 연장이 연대자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즉 포기사는 윤리적 책임을 공동체가 지게 되는 사회적 죽음의 한 양태이다.
나. 도태사
도태사란 사회의 존립과 번영에 유해할 뿐인 무익한 생존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형성한 사회 중에서 가장 큰 것이 근대국가이다. 국가는 가족과 다르고 시민사회와도 다르면서 일종의 운명공동체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를테면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국민전체가 고통을 받게 되지만, 동시에 국가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국민의 안위(安危)와 행복을 지켜준다. 그러나 이런 국가라 할지라도 국가공동체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생명에 대해서는 일단 생존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관계하게 된다. 이런 무의미한 생명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국가가 개인의 생명에 개입하여 죽음을 유도하게 되는데, 이를 “도태사”라 한다.
이에 따르면 개인이 지닌 생명의 가치와 무가치는 근본적으로 국가공동체의 존립과 번영에 기여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이 점에서 도태사는 궁극적으로 공리주의 윤리설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하겠다. 공리주의는 선악을 행위의 “유용성”(utility)에 따라 판단한다. 이와 같이 국가공동체의 존립과 번영을 위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개인 생명의 무의미성과 무가치성이 결정되는 도태사의 유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① 국가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극한상황에 처하게 될 때 국가의 합리주의적 존속본능에 근거하여 행해지는 도태사―예를 들어 전쟁이나 기근에 직면하여 노인을 제도적으로 유기하는 것―가 그것이다.
② 범인류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른바 “가족계획” 사업이 그것이다.
③ 인류 또는 국가공동체의 우생학적 관점에서 나온 도태사의 요구로서 극단적인 예로써 독일 나치의 유대인 정책을 들 수 있다.
이상의 세 유형에 관해 살펴보자.
① 국가적 위기극복과 번영을 위한 도태사
적어도 전근대적 국가에서 전쟁이나 기근으로 말미암아 국가공동체 자체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는 물리적 상황은 도태사를 요구할 수 있는 필연적 근거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종의 “자연도태”인 것이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근대국가는 이런 재난에 대비한 복지정책을 항상 수립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근대국가에서 문제되는 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어나는 도태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안녕과 쾌락을 증진시키기 위한 물질적 진보와 생활향상에의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음에 반해, 동시에 효용가치가 낮고 부담이 되는 존재에 대해서는 혐오하기 마련이다. 이런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국가는 복지정책을 펼치지만, 문제는 언제나 불충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이로써 복지정책의 사각지대에 있는 소외계층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예를 들어 미혼모의 신생아 유기, 시설에 버려지는 무의탁 노인 등이 그것이다.
② 지구상의 인구폭발 방지와 도태사
현대의학의 발달은 신생아의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추었지만, 그 결과로써 지구상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다. 인구증가는 식량 부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1차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식량 증산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한정된 생산물의 분배에도 큰 문제가 있다. 이에 우리는 저개발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의 출산제한과 불임수술을 통해 지구상의 인구를 줄이는 방법을 현실적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지만, 이 방법은 미래의 인구보다 현존하는 사람에 대한 우선권을 승인하는 것으로써 “낙태”를 정당화하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③ 우생학적 관심에 의한 도태사
자연상태라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명은 결국 자연도태되고 만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열등유전자를 지닌 생명도 태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것은 현대의학이 거둔 성과 중의 하나이지만, 일련의 우생학자들은 열등한 유전자를 지닌 생명의 자기 증식이 몰고 올 인류적 재앙을 우려한다. 즉 이들 열등한 유전자의 자기 증식은 인류의 유전적 발전을 저해할 것이며, 미래의 삶에 대한 사회적 부담을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재앙으로 몰고 갈 것이란 판단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생학자들은 ―거꾸로― 발전한 과학기술이 적자생존을 위한 자연도태에 간섭하여 보다 뛰어난 인류의 출현을 역설하는데, 이른바 신인류(新人類)의 출현은 ―그것이 자민족우월주의와 결부될 때―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의 정책에서 보듯이 “인종청소”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밖에 우생학은 판도라의 상자로 비유되어 온 유전자의 인위적 조작을 합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스스로 미래 인류의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5. 안락사의 의의와 평가
안락사란 현대사회에서 합리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는 죽음의 유형을 말한다. 여기서 관리의 핵심은 “무의미한 연명”과 “사회적 부담”이다. 이 두 기준에서 안락사의 유형은 존엄사, 자비사, 포기사, 도태사로 구분된다. 존엄사란 식물인간상태와 같은 무의미한 삶의 연명을 인위적으로 종식시킬 때를 말하며, 자비사란 말기환자의 경우처럼 현대의술로서 제어할 수 없는 육체적 통증을 해소할 목적으로 환자의 삶을 인위적으로 종식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포기사는 환자의 무의미한 삶이 공동체의 연대자에게 부담이 될 때, 그리고 도태사는 이익사회의 성원 전체, 즉 국가적 차원에서 부담이 될 때 환자를 죽음에 방치하거나 환자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 총체적으로 볼 때 이런 유형의 죽음에 대한 갈등은 최대국가의 복지정책 입안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런 유형의 죽음이 허용될 수 있는가, 아니 허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허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느 시점인가? 먼저 존엄사의 경우는 “생명의 질”과 관련이 있다. 생명의 질이 인격을 결정한다. 그런 만큼 정상적인 경우라면 인격의 훼손이 심각한 삶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죽음을 결정하는 궁극적 원리로서 인격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다음으로 자비사는 “고통”과 관련이 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죽음에의 요구를 심정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인류의 진화와 역사에서 고통의 의미가 중요하게 역할해 왔고, 또한 죽음만이 통증해소의 최선책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끝으로 포기사와 도태사는 두 종류의 “사회적 부담”과 관련이 있고, 그 판단은 공리주의적 원리에 따른다. 공리주의는 항상 전체(사회)를 위해 부분(개인)을 희생하라는 “이타성”에 호소한다. 이타성이 사회성의 존립기반임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공리주의가 사회적 선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근거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최대국가”에서 정책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약자를 보호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맞춰져 있다.
이렇듯 안락사 판단의 기준이 되는 두 원리, 즉 “무의미한 생명연명”과 “사회적 부담”을 모든 경우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각자 소망과 가치관이 다르며, 사회적 상황도 다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의 요구는 언제나 환자 개인의 특수한 조건에 근거한다. 이런 경우라면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안락사 찬성론자들의 요구가 개인의 인격과 자율적 판단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환자 개인이 요구하는 죽음에의 요구가 아무리 강렬하고 절박한 것이라 할지라도 생명 그 자체는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개인의 욕구나 성향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그 논거로서 반대론자들은 태어날 때 의지적 요구로 자신의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듯이, 죽음도 또한 자의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든다.
그런데 반대론자들은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즉 반대론자들의 주장이 생명의 신성불가침을 들어 안락사 허용을 거부하지만, 찬성론자들은 안락사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상황이 결코 자연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연명술”과 같은 인위적으로 주어진 의료상황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역설한다. 다시 말하면 현대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자연상태라면 벌써 죽었을 이른바 “살아있는 시체”에 대한 편안한 죽음에의 요구가 다름 아닌 안락사에의 요구이다.
어떤 경우이건 인간생명의 신성불가침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정언명법”이다. 안락사 찬성론자라 하여 이런 정언명법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은 안락사를 요구하는 절박한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확한 분석, 그리고 현명한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 속에서 찬성론자들은 “인간다운 삶”의 추구라는 소망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런 안락사 찬성론자들의 주장을 우리는 신중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수용적 태도가 곧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전칭긍정판단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의 문제는 결코 허용과 불허용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현상으로서 죽음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의 “과정”(process)이다. 이 자연 과정에 개입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이런 경우라면 인위적인 생명단축은 그 자체로 악인 것이다. 이에 반해 임상적 현상으로서 죽음은 행위가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event)이다. 이로써 우리는 죽음의 처리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는데, 이런 경우라면 더 이상 불필요한 과잉진료를 거부함으로써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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